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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Scarlatti, The Keyboard Sonatas (Selected)/Andr찼s Schiff


 

András Schiff - Scarlatti, The Keyboard Sonatas (Selected)

 

 

:00 K.175 A minor - 3:47 K.513 C major - 9:33 K.402 E minor - 20:23

K.403 E major - 25:05 K.144 G major - 29:18 K.115 C minor - 36:23 - K.116 C minor - 39:58

K.474 E flat major - 45:39 K.475 E flat major - 50:02 K.449 G major - 53:02

K.450 G minor - 56:23 K.544 B flat major - 1:00:35 K.545 B flat major - 1:03;26

K.516 D minor - 1:09:49 K.517 D minor

 

 

 

여러분이 애호가이든 전문가이든 이 곡에서 어떤 심오한 가르침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쳄발로의 장엄함에 친숙해지기 위한 예술을 기대해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출판하게 된 것은 이익을 위한 것도 야심을 위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순종하는 마음에서일 뿐입니다.

 

이 곡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 것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다른 주문에 대한 것보다 쉽고 보다 변화에 찬 상냥한 양식으로 귀하를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건대 비판적이기보다 인간적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즐거움은 배가 될 것입니다.

손의 위치에 관해서는 D는 오른손을, M은 왼손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시길 바라면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쳄발로를 위한 연습곡> 서문

 

 

 

스카를라티 (Domenico Scarlatti)

 

 

바흐와 헨델과 같은 해에 위대한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아들로 태어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1728년 페르디난도 6세(1746년 왕이 됨)와 결혼을 한 포르투갈의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를 따라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최후의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소프라노와 현악기를 위한 <살바 레지나> 외에는 오로지 쳄발로 곡밖에는 작곡하지 않았다.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의 주도로 더욱 호사스럽게 된 궁정음악 활동 가운데, 스카를라티의 작업은 1752년부터 1757년 사이 여왕을 위한 마지막 쳄발로 소나타를 작곡할 때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대단히 작은 규모의 음악 작품만을 작곡했지만 그 안에는 실로 엄청난 규모의 내용과 혁신적인 형식, 스페인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담겨 있다.

 

 

 

 

555곡에 이르는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단악장으로 구성된 555곡의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들은 스페인의 도시와 궁정, 농촌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다채로운 감정과 삶의 모습을 담은 곡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곡가의 자필 악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작곡가 생전에 출판된 것은 그 수가 대단히 적다.

스카를라티의 생각을 전달해줄 수 있는 자필 기록 또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1738년 런던에서 출판된 그의 최초의 쳄발로를 위한 연습곡집 판본의 서문을 통해 이들 작품이 어떠한 의도로 작곡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30곡으로 구성된 이 연습곡집이 출판된 이후 19세기에는 클레멘티와 체르니에 의해 300곡 남짓 알려지게 되었고, 1906년이 되어서야 겨우 알레산드로 롱고에 의해 544곡을 담은 최초의 전집(L번호)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작곡 시기를 고려하지 않은 번호인 탓에 랄프 커크패트릭(K번호)이 1953년에 연대기 순으로 다시 정리했고, 1970년대 케네스 길버트에 의해 보강되었다. ◀독창적인 건반 소나타를 확립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들은 건반악기 음악 스타일의 변화 과정에 있어서 쇼팽이나 리스트의 연주회용 연습곡의 선구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존재하던 바로크 스타일들의 연장선상에서 이들 소나타는 화려한 효과를 위한 비르투오소적인 테크닉에서 새로운 깊이를 찾아냈다. 예를 들어 스카를라티만의 독창적인 연주 방법들로는, 빈번한 양손 교차와 빠른 3도와 6도 진행, 대범한 옥타브 도약, 손가락 번호를 바꾸어가며 동일 음표를 반복적으로 누르는 것, 반대되는 선율의 변화를 통한 불협화음, 건반 전체를 빠르게 아르페지오로 연주하는 것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와 동시대 작곡가인 바흐나 대위법 스타일을 고수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스카를라티는 고도로 장식된 단선율 스타일을 일반적으로 사용했다는 것 또한 그의 음악의 특징이다.

특히 1750년대에 작곡된 많은 그의 소나타들(특히 K.387)은 위대한 비르투오소적인 효과를 위한 화려한 도약과 빈번한 양손 교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스카를라티 음악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많은 소나타들은 크게 부드러운 숨결과 무곡적인 리듬을 담은 작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작품마다 리듬도 훌륭하고 멜로디도 다양하여 언제 어떤 악기(8피트 스톱을 장착한 1단 쳄발로를 위해 작곡한 만큼)로 연주하든, 아름다움과 우아함, 스페인의 정열, 더 나아가 건반악기를 위한 미래지향적 음악 어법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작품들이다. 특히 스카를라티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플라멩코 같은 이베리아 반도의 독특한 민요에 열중했는데, 어떤 작품들은 마치 기타로 플라멩코를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강렬하기에 단순히

쳄발로를 위한 음악이 아닌 것 같은 인상도 준다.

스카를라티 이후 이러한 스페인의 정취를 고급스러운 음악어법으로 담아낸 작곡가를 만나려면 알베니스나 그라나도스, 라벨이 나타날 때까지 실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더군다나 아치아카투라(acciaccatura, 빠른 앞꾸밈음) 사용은 빈 고전주의 시대의 피아노 명인들을 앞선 선구자적인 테크닉이었으며, 불협화음의 사용은 후일 브람스나 슈만을 예고하는 듯하다. 스카를라티는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스페인의 모든 것을 담았던, 스페인인보다 더 스페인적인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거장들의 스카를라티 연주

쳄발로 혹은 포르테피아노를 위해 작곡된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들은 쇼팽이나 브람스, 버르토크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으며 대중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작품들이 오랜 동안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기의 한계로 인해 오랜 동안 연주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반다 란도프스카가 현대 하프시코드(쳄발로)를 연주하며 스카를라티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지만 악기의 작은 음량과 옛 악기 그대로 복원되지 못했던 현대 하프시코드의 특성상 연주 장소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등장하면서 스카를라티 소나타들은 피아노로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하프시코드의 기법과 특성을 고스란히 피아노로 옮겨 와 그 어떤 작품들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효과를 낼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아르투르 미켈란젤리나 에밀 길렐스를 비롯한 피아노 비르투오소들이 즐겨 연주하며 피아노로 연주하는 스카를라티 소나타가 대세를 이루었다. ▶피아노의 전신 악기인 쳄발로. 쳄발로(Cembalo)는 독일어이며, 프랑스어로는 클라브생(clavecin), 영어로는 하프시코드(harpsichord)라고 한다.

1980년대 이후 악기의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고 고악기의 리코딩 기술이 확립되면서 쳄발로로 연주한 스카를라티가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스콧 로스가 34장의 CD에 담아낸 555곡 전곡 리코딩은 역사적인 가치를 갖는 중요한 업적으로 남게 되었고, 랄프 커크패트릭과 트레버 피노크, 안드레아스 슈타이어, 피에르 앙타이, 콜린 틸니 등 많은 연주자들이 쳄발로로 연주한 매력적인 스카를라티를 선보였다.

많은 고악기 연주자들의 노력으로 쳄발로로 연주한 스카를라티에서는 당시의 연주 스타일을 고려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게 되었다.

 

 

 

K.64 D minor, Allegro

밝고 흥겨운 가보트 선율이 오른손을 통해 흘러나오며 박자감이 분명한 화성적 반주가 왼손에 의해 뒷받침된다. 부분 부분 등장하는 트릴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K.72 C major, Allegro

조르지오 파스텔리에 의하면 K.70부터 k.72까지의 세 작품은 스카를라티가 베네치아에 있을 당시(1705~1709) 혹은 로마에 체류할 당시(1709~1719)에 작곡된 것이며, 특히 K.72는 스카를라티가 쳄발로를 위해 작곡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K.29 D major, Presto

커크패트릭이 정리한 K번호에서 1번부터 30번까지는 스카를라티가 ‘쳄발로를 위한 연습곡집(Essercizi per gravicembalo)’라는 타이틀로 직접 출판한 것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판본이다.

이 가운데 29번은 연주시간이 6분 이상 걸리는 대작으로, 다양한 터치와 숨 가쁜 손가락 번호를 구사해야 하는 오른손의 기나긴 아르페지오와 연습곡적인 음계가 인상적이다.

K.3 A minor, Presto

작으면서도 외형적으로 모순된 듯한 음악적 모습들이 강제적으로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일목요연한 방식으로 병렬시키고 통합하는 스카를라티의 능력이 발휘된 몇 안 되는 소나타 가운데 한 곡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상력 풍부한 동기들을 종합해내는 유사한 과정들을 반복적으로 구사한다는 점에서 베토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환상곡 Op.77’과 이 작품의 유사성을 찾기도 한다.

K.481 F minor, Andante cantabile

처음 등장하는 아름답고도 애상적인 멜로디는 쇼팽의 녹턴을 연상시킬 정도로 현대적이다. K.481부터 K.483까지의 3부작은 대부분 2성을 위해 작곡된 것이지만 K.481만큼은 몇몇 화성이 더 첨가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짧게 첫 주제가 변형되어 여러 차례 등장하는 모습은 다른 소나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K.380 E major, Andante comodo

호로비츠의 연주를 통해 유명해진 작품으로 스카를라티 소나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소나타이다. 감각적인 동시에 생동감 있는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다.

K.87 B minor

호모포닉적인 스카를라티 소나타들 가운데 드물게 폴리포니적인 기법이 사용된 작품으로, 하나의 선율을 중심으로 각 성부가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스카를라티의 폴리포니적 작곡 테크닉이 일품이다.

 

 

 

Domenico Scarlatti , 1685 -1757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1685년 이태리,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명의 남매 중 6번 째 였으며 , 그의 동생  Pietro Filippo Scarlatti 또한 음악가였다.

 

그의 첫 음악교육은 작곡가이자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  Alessandro Scarlatti에게 배웠던 것으로 보이며, 초기 그의

 스승가운데 다른 작곡가들은 Gaetano Greco, Francesco Gasparini,  Bernardo Pasquini와 같은 이 들로서

그의 음악 스타일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701년 그는 나폴리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겸 작곡가가되엇으며, 1704년  Carlo Francesco Pollarolo의

오페라  Irene 을 개정하여 나폴리에서 공연할 수 잇도록 하엿다.

곧 이어 그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베니스로 보내졌으나, 4년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709년 로마로갓으며 망명중인 폴란드의 여왕 Marie Casimire의 음악감독겸 작곡가가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Thomas Roseingrave 를 만났는데,  Thomas Roseingrave 는 훗날 런던에서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열정적으로 소개했던 장본인이 되엇다.

 

스카를라티는 이미 탁월한  합시코드 연주자가되어 잇엇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로마의 Ottoboni 추기경의 궁정에서 잇었던 George FridericHandel 과의 연주 경합에서

 합시코드 연주는 스카를라티가, 오르간 연주에 잇어서는  핸델이 우위에 잇다는 평을 받았다.

 

로마에서 스카를라티는 Casimira 여왕의 사설 극장을 위해 몇몇 오페라를 작곡햇다.

1713년 그는 이미 교황청과 관계를 확고히 하고 잇엇으며, 1715-1719년까지  St Peter의 합창 장이 되었으며,

 당시 씌여진 현존하는 작품가운데 스타바트 마테르만이 그의 만년 합시코드 소나타들에서 나타나는 그의 재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잇다.

 

 




 

 

1719년 바티칸 궁정의 음악감독직을 물러났으며 훗날 런던으로가서 King's Theatre에서 그의 작품인 오페라

 Narciso 를 지휘하였다.

Msgr Vicente Bicchi 와 마음이 맞아 1719년 리스본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포르투갈의 공주  Maria Magdalena

Barbara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1727년 그의 나이 28세에 리스본을 떠나 로마에 갓으며 그곳에서 Maria Caterina Gentili와 1728년 결혼하였다,

 

1729년 세비야 로 옮겨 4년동안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플라멩고와 매우 친숙해졌다.

1733년 마드리드로 가서 공주  Maria Barbara의 뮤직 마스터가 되엇으며 , 그녀는 곧 스페인 궁정에서 결혼을 하엿고 스페인의 여왕이되엇다.

 

마리아 바르바라는 그의 후견인으로 계속 남아 잇엇으며 스카를라티의 합시코드 작품의 대다수는 그녀를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스카를라티는 스페인에 25년간 머물럿으며 그곳에서 5명의 아이를 두엇다...1742년 그의 아내의 죽음 이후 스페인

 여성 Anastasia Maxarti Ximenes와 재혼하였다

그가 마드리드에 체류하는 동안 500여곡의 키보드 작품을 작곡했으며 이 작품들은 그의 작품가운데 오늘날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들이다.

 

스카를라티는 같은 나폴리 출신으로 마드리드에서 궁정의 후원을 받고 잇던 카스트라토 가수 파리넬리와 친구가

 되엇다.

음악학자인 Ralph Kirkpatrick 은, 파리넬리의 편지는 스카를라티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했으며,그러한 편지들은  번역되어 우리에게 소개되어 잇다.

 

스카를라티는  그의 나이 71세에 마드리드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의 Calle Leganitos 의 주거지는  역사적인 유적으로 디자인 되엇으며 그의 후손은 마드리드에서 살고 잇다.

 

그의 작품중 매우 일부가 그가 사는 동안 출판되었다..스카를라티는 1738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집 가운데 하나인 30개의 쳄발로 연습곡  30 Essercizi ("Exercises")이 출판되는 것을 감독한 것으로 보인다..이 작품은 유럽전역에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으며, 18세기의 저명한 음악 저술가인  Dr. Charles Burney로부터 대단한 옹호를 받았다..

 

"이곡 들은 궁정의 우아함을 전하는 것에서 야성적인 것과 달콤한 도시풍에서 거칠고 격렬한 것 까지 다양하다.

즐거움 뒤에는 비극의 기초가 깔려있어서 더욱 강렬한 느낌이다.

명상과 우수의 순간들은 오페라적인 외향적 정렬의 파도에 압도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삶의 일부를 살앗던 스페인에서의 삶을 매우 특별하게 표현하였다.

 

소나타로 창조해낸 스카를라티의 소우주에는 어김없이 스페인사람의 삶과 민속음악과 춤이잇다.

어떤 스페인 작곡가도, 심지어는 마누엘 드 파야 조차도 외국인었던 스카를라티만큼 스페인의 본질을 완벽하게

표현해내지 못햇다

 

스카를라티는 캐스터네츠 소리, 기타의 소박한 연주 , 잔잔하게 치는 북의 울림, 집시의 비탄에 찬 쓰라린 울음,시골

악단의 왁자지껄한 즐거움, 특히 스페인 춤의 강인한 긴장을 포착했다.

랄프 커크패트릭,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중에서  계속해서 소나타만을 작곡했던 말년의 5년동안 그의 전체 삶을 보상

 받앗고 ,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살았으며, 알찬 결실을 맺었다.

 

죽기전 스카를라티는 자신의 전반기에 열정으로 매달렸던 성악음악으로 돌아와 소프라노와 현악기를 위한 살베레지나를 작곡햇는데 이 작품의 그의 성앙곡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중 하나며 보존될 가치가 잇는 작품가운데 하나이다.

 

초기 그의 성악 작품군이 그의 아버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서 작곡된 것이라면,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가 이탈리아를 떠나 스페인에서 생활하는 동안 작곡된그의 소나타와 성악작품은 오롯하게 그의 독특한 자기세계를 담아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많은 소나타들은 그가 사는 동안 출판되지 못했으며, 약 2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 불규칙적으로 소개되고 잇다.

스카를라티는 어쨋거나, Chopin, Brahms, Bartok, Heinrich Schenker and Vladimir Horowitz와 같은 매력적이며 주목할만한 숭배자를 갖게되엇다.

 

특히 러시아 악파의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그의 소나타들은 각별히 옹호 찬양되고 잇다..스카를라티의 555개의

 소나타들은 단악장으로 되어 잇으며,  대부분 binary form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이 합시코드를 위한 작품들이다,

오르간을 위한 4 작품, 그리고 스카를라티가 제시한 몇몇 악기를 위한 작품이 잇다.

 

근대적인 pianoforte 연주 기법은 이러한 그의 작품들에 상당부분 영향을 받고 잇는 것이다.

아울러 이베리안 민속음악의 영향을 받아 스카를라티는  Phrygian 선법을 사용하는 경향이 잇으며 다른 조성적인 변화에 있어서는 다소간 유럽의  alien 선법을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몇몇 스카를라티의 장식과 불협화음은 기타에서의 그것과 유사하다.

 


 

 

후기 바로크 이태리의 건반음악 작곡가로 흔히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경향을 갖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이태리인이었지만 그의 중후기 삶 전체를 스페인에서 보냄으로써 스페인적인 정서를 스페인 작곡가보다 더 잘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고 잇다는 평가를 받고 잇다.

 

그의 작품의 본령이 비록 키보드를 위한 작품군이라 할지라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앗으며 자신의 음악적인 기반을 형성하는 음악으로서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준 한 부분 역시 성악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전 삶을 통해 초기와 중기의 그의 아버지로 부터 받았던 음악적 영향이 그의 작품을 통해 흔히 드러나고 있으며, 그가 스페인으로 떠나가 전이었던 로마에서 체류한 10년동안의 기간은 종교음악과 밀접할 수 밖에 없던 환경이

 제공되엇던 것이다. 

 

스카를라티는 그의 나이 24세에, 1709년 로마로 갓으며 망명중인 폴란드의 여왕 Marie Casimire의 음악감독겸 작곡가가 되었다.

1719년 바티칸 궁정의 음악감독직을 물러날 때까지 로마에 적어도 10년정도의 기간동안 머물럿으며 로마에 머무르는 이 십년동안의 기간의 후반 쯤에는 바티칸궁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잇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1715-1719 까지는 성 베드로 교회의 합창장으로 봉직했으며 ,이기간동안 작곡된 그의 성악 작품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중의 한곡이 바로 본 음반의 맨 마지막에 수록된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21-30)이다.

 

본 음반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 역시 그가 로마에 머무르던 약 10년 동안에 쓰여진 작곡가로서 그의 초기 작품군으로 내놓을 수 잇는 작품으로 그의 아바지엿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음악적 영향이 다분히 엿보이는 작품들이다.

 

아울러 아래 수록된 마드리드 미사Messe De Madrid 는 , 비록 그의 삶의 말기인 1754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출판되었지만 역시 그의 로마 체류 기간인 1709-1719년 사이에 작곡된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시기 이후 그의 작품은 주로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로 선회하고 특히 스페인에 체류하는 동안의 그의 소나타들은

흔히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음악의 본령으로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것으로

독특한 자기세계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Domenico Scarlatti , 1685 -1757,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종교 작품을 수록한 두장의 음반 |

작성자 레인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