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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More Cup Of Coffee
Your breath is sweet
Your eyes are like two jewels in the sky
Your back is straight
Your hair is smooth
On the pillow where you lie
But I don't sense affection
No gratitude or love
Your loyalty is not to me
But to the stars above
당신 숨결은 달콤해
당신 두 눈은 하늘에서 빛나는 두 개의 보석 같아
당신 등은 쭉 뻗었고, 당신 머리 결은 부드러워
당신 누워 있는 베개 위에서
하지만 애정은 느낄 순 없어
감사하는 마음도 사랑도
당신이 따르는 건 내가 아니라
저 하늘의 별들이지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To the valley below
길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커피 한 잔만 더
저 아래 골짜기로 가기 전에
Your daddy he's an outlaw
And a wanderer by trade
He'll teach you how to pick and choose
And how to throw the blade
He oversees his kingdom
So no stranger does intrude
His voice it trembles as he calls out
For another plate of food
당신 아버지는 무법자에다
아주 타고난 방랑자지
당신에게 제대로 고르는 법과
칼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겠지
그는 자기 왕국을 철저히 감시해
어느 이방인도 들어오지 못하지
음식 한 그릇 더 달라고 외칠 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지
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To the valley below
길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커피 한 잔만 더
저 아래 골짜기로 가기 전에
Your sister sees the future
Like your mama and yourself
You've never learned to read or write
There's no books upon your shelf
Your voice is like a meadowlark
But your heart is like an ocean
Mysterious and dark
당신 엄마와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여동생도 미래를 바라보지
당신은 읽고 쓰는 걸 전혀 못 배웠고
당신 책꽂이엔 책도 한 권 없지
그리고 당신은 끝없이 쾌락을 추구하지
당신 목소리는 종달새 같지만
당신 마음은 대양처럼
미스테리하고 어둡지
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To the valley below
길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커피 한 잔만 더
저 아래 골짜기로 가기 전에
Live in Madison Square Garden NY, 1971
Bob Dylan, Joan Baez
Bob Dylan & Joan Baez
Blowing in the Wind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they call him a ma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balls fly
before they a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봐야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백사장에 편히 쉴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before it is washed to the sea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and pretend that he just doesn't see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산이 씻겨서 바다로 내려갈까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네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before he can see the sky
How many years(or ears) must one man have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l he knows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얼마나 많이 올려다보아야
진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겪어야(많은 귀가 있어야)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얼핏 그의 위상은 ‘실적주의’로 따질 때 매우 허약해 보인다. 엘비스, 비틀스, 롤링 스톤즈는 그 화려한 전설에 걸맞게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냈다.
넘버 원 히트곡만 치더라도 엘비스는 18곡(통산 2위), 비틀스는 20곡(1위), 스톤즈는 8곡(11위)이나 된다.
하지만 딜런은 그 흔한 차트 1위곡 하나가 없다.
‘Like a rolling stone’과 ‘Rainy day woman #12 & 35’ 등 두 곡이 2위에 오른 것이 고작이다. 차트 톱 10을 기록한 곡을 다 합쳐봐야 4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대중성이란 어휘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적이란 말과는 아예 인연이 없다.
이렇듯 실적이 미미한 데도 록의 역사는 마치 신주 모시듯 그를 전설적 존재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는 차트 정복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비록 그 가지는 다를지언정 ‘록의 스타일 확립’ 이라는 몸체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비틀스는 록의 예술적 지반을 확대했고, 스톤즈는 록에 헌신하며 형식미를 완성했고, 엘비스는 록의 정체성을
부여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딜런도 몸체에 자리한다. 깃털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타(他) 3인의 몸체가 외양이라면 그는 ‘내면’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노랫말이요, 메시지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음악은 사운드와 형식만으로 이미 메시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로큰롤이 폭발하여 확산되던 시점인 1950년대, 즉 엘비스가 활약하던 당시에 로큰롤은 메시지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비틀스가 미국을 급습해 록의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던 때록은 의미있는 가사와 격리된 상태였다.
그래서 의식계층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 때 밥 딜런이 있었다. 비틀스는 누구보다 먼저 딜런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의 포크 사운드와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수용한다. 1965년말 <Rubber Soul> 앨범의 수록곡인 ‘In my life’, ‘Girl’, ‘Norwegian wood’ 등에서 ‘톤 다운’ 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잠복시킨 것은 전적으로
딜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밥 딜런은 실로 대중 음악의 지성사(知性史)를 이룬다.
타임(Time)지의 제이 칵스는 1989년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과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어느 것이 미국인들의 삶에 보다 자극을 주었는가? 존 업다이크 쪽에 표를 던진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그러나 때론 메시지의 파악이 어려운 ‘난해한 현대시’ 와 같다.
밑줄 긋고 열심히 분석해도 도대체 명쾌하지가 않다.
1960년대 중반 <Another side of Bob Dylan>, <Bring it all black home>, <Highway 61 revisited>가 연속
발표되었을 때, 미국 각 대학의 영문과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
개설이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팝팬들에게 딜런이 상대적으로 소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도 이 정도인데 영어의 벽에
막혀 있는 우리가 어찌 그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때문인지 음반마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초기곡으로 알려진 것은 그나마 메시지가 확연한 ‘Blowin’ in the wind’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곡 태풍으로 반전(反戰) 노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외 우리 팝 인구에 회자된 노래로 ‘One more cup of coffee’나 ‘Knockin’ on heaven’s door’가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는 ‘One more cup of coffee’가 통한 것은 단지 낭만적 제목과 함께 친숙한 선율 때문이었을 뿐, 딜런의 음악 세계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은 전혀 아니었다.
‘Knockin’ on heaven’s door’ 인기의 영예도 실은 건스 앤 로지스가 더 누렸다. 극 소수의 곡을 제외하고 밥 딜런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다.
비틀스, 스톤즈, 엘비스에 비한다면 엄청난 ‘부당 대우’였다.
언어 장벽과 무관한 음악 스타일 측면에서도 우리의 ‘홀대’ 는 마찬가지였다.
멜로디가 그럴싸한 곡이 있더라도 풍기는 내음이 지극히 ‘미국적’ 이었기에 우리의 청취 감성은 딜런을 꺼리곤 했다.
그의 음악 세계라 할 포크, 컨트리, 블루스는 미국 전통과 긴밀한 함수 관계를 지닌다.
선율과 사운드의 영국적인 맛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의 음악에 잠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이에 우린 어느덧 딜런과 크게 멀어져버렸다.
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 딜런에서 막힌다.
신세대 가운데 더러는 우리의 팝 수용 문화에서 딜런 공백이 가져온 취약성을 맹렬히 질타하기도 한다.
우리 기준에서의 ‘팝 음악 여과’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의역은 정확한 직역이 기초돼야 올바르다. 미국의 해석을 전제한 뒤라야 우리식 필터링의 의의가 배가된다.
그 직역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이 미국의 현대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몸체가 곧 시대와 세대의 흐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딜런의 음악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있게 한 배경, 또한 그것을 주도해간 그의 자세는 ‘음악외적 환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포크 록(Folk-Rock)이다.
그가 1960년대 초반 저항적인 모던 포크로 베이비 붐 세대를 견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기타만으로 연주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것의 포획력은 비틀스가 사정권에 들어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베이비 붐 세대를 발현시켰다면 그는 그들의 의식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딜런은 케네디의 피살에 자극받으면서 스스로 ‘위기감’ 을 불어넣는다.
이미 비틀스가 세대의 청취 볼륨을 증폭시킨 마당에 포크의 음량 가지고 과연 세대를 관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그들(비틀스)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스가 전부였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포크 록이었다.
포크의 순정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질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알 쿠퍼(Al Kooper), 마이크 블룸필드(Mike Boomfield)가 참여한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와 함께 전기 기타 연주를 했을 때 관중들은 “이건 포크 공연이야 나가!”라고
야유하며 돌과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무대에서 내쫓긴 그는 통기타를 들고 되돌아왔지만 의미심장한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부르며 포크 관객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껄끄러운 통과의례를 거친 뒤 밥 딜런의 포크 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빅히트와 함께 만개했다.
이젠 막을 자도 없어졌다. 포크 록은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레논과 밥 딜런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 그룹 버즈(Byrds)는 ‘Mr. Tambourine man’으로 인기 가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 곡은 딜런의 작품이었다.
버즈 뿐만 아니라 당시 포크 록계열 뮤지션치고 딜런의 곡을 손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단숨에 포크 록은 1960년대 록의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후반을 강타한 싸이키델릭 록(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도 실상 포크 록에 영향받은
흐름이었다. 그럼 어째서 포크 록은 196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식을 대변할 수 있었을까?
비틀스가 딜런에게 배우고, 딜런이 비틀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크와 록의 결합’ 은 시대성 견인을 가능케 한 절묘한
무브먼트였다.
록은 생태적으로 거리의 청춘에 의해 확립된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따라서 하이 클래스나 인텔리겐차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또한 포크는 저항성을 견지하는 민중 음악이지만 음악의 주체나 주소비자층은 학생과 지식인 세력이다.
성질상 엇비슷하면서도 걸어온 길이나 ‘계급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밥 딜런이 포크 오리지널로부터 급격히 퇴각하여 록으로 전향한 것은 단지 추세의 편승이 아닌 완전함을 향한 ‘하층문화의 긴급 수혈’로 보인다.
이를테면 ‘위’의 고매한 문제의식과 ‘아래’의 근원적 반항을 한고리로 엮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항 영역의 지반 확대와
수요자의 확충을 기할 가능성은 올라가게 된다. 지식인만이 아닌 1960년대 젊은이들의 ‘계층포괄적 무브먼트’ 는 포크 록과 이 점에 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960년대 중후반을 물들인 ‘히피보헤미안’ 물결도 딜런과 떼어낼 수 없는 흐름. 1960년대 록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다. ‘Like a rolling stone’은 포크 지식인의 소리라기보다 보헤미안적 정서의 노출로 파악해야 한다. 당
시 딜런은 가치의 상대성을 신뢰하고 제도에 흡수되기룰 거부하는 이른바 비트(Beat)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진보적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교류하며 ‘개인 혁명’에 골똘해 있을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비트는 이후 히피의 융기에 주요 인자가 되는데, 1960년대 중반 딜런의 음악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이 ‘히피 보헤미안 정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록 세계로 옮아가고 방랑적 지향을 설파한 것은 기존과 기성의 틀 깨기에 목말라 있던 베이비 붐 세대들에게 영도자가 제공한 ‘산교육’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밥 딜런은 그에게 등을 돌린 포크 근본주의자들의 수보다 휠씬 더 많은 록팬을 거뜬히 확보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딜런의 창작성이 이 때만큼 가공의 위력을 떨친 적도 없다.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 앨범은 포크의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록과의 결합으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포획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남을 위해’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이 가져온 산물이기도 했다.
그가 포크의 프로테스트로부터 이탈한 것은 바로 ‘자유’와 등식화되는 ‘예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저항성
대신 예술성을 얻었다. 개인적 경사도 겹쳤다.
사적으로 사라 로운즈와의 결혼은 그의 창작력 한층 북돋아주었으며 그 충만한 행복감은 그대로 <Blonde on Blonde> 앨범에 나타났다. 이 앨범의 탁월한 질감은 상당부분 사라와의 결혼이 낳은 것이라는 게 평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나중 사라와의 파경 또한 그에게 또 하나의 명반 <Blood on The Tracks>를 안겨준다.
히피의 낭만적인 집단주의와곧바로 이어진 이피(Yippie)의 전투성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뉴욕의 외곽 빅 핑크
(Big Pink) 지하실에서 한가로이 더 밴드(The Band)의 멤버들과 세션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가 가져온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을 택한 것은 분명했다.
세상이 소란함으로 가득할 때 그는 정반대로 정적을 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물꼬를 터준 미국 사회의 격랑이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세대의 공동체 지향은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비춰졌을 테고 오히려 그는 그럴수록 자신에게 돌아와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저(心底)가 <John wesley Harding>과 <Nashiville Skyline>의 골간에 자리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뜻밖에’ 재래식 컨트리 음악을 선보였다. 두 앨범은 모두 내쉬빌에서 녹음되었고 <Nashiville
Skyline>의 경우 딜런은 컨트리 음악의 거성 자니 캐시(Johnny Cash)와 듀오로 ‘Girl from the north country’에서 다정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톱 10 히트곡 ‘Lay lady lay’가 나왔다. 이 곡을 비롯해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딜런의 보컬은 예의 날카로움이 거세된 채 한결 부드러워졌고 가사도 접근이 비교적 용이해지는 등 멜로딕한 무드가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세상은 소용돌이에서 호수의 조용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딜런이 씨앗을 뿌린
‘컨트리 록’ 은 1970년대 내내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맹위를 떨쳤다. 딜런은 언제나 흐름의 주역이었다.
나중 음반화된 더 밴드와의 세션 앨범 <Basement Tapes>가 록 역사에서 ‘특혜’를 받는 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 그는 ‘대중적’ 관점에서 뿌리에 대한 천착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에 그는 ‘좋은 사람만 따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많이 따를수록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가 1970년 <Self Portrait> 앨범에서 ‘Moon river’를 포함한 팝 스탠다드 넘버들을 노래한 것은 이러한 사고와
맥락이 닿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눈을 흘겼다.
레코드 월드(Record World)지는 이 앨범을 두고 “혁명은 끝났다. 밥 딜런이 ‘미스터 존스’에게 ‘Blue moon’을 불러주고 있다”며 혹평했다.(미스터 존스는 딜런이 <Highway 61 Revisited>의 ‘Ballad of thin man’에서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존스 씨?”라고 했던 가공의 인물로 ‘제도권 인사’를 상징한다.) 빌보드 차트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처럼 평단의 이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Self Portrait>앨범을 상업적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근본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딜런이 1970년대 후반부에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비슷한 문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神)에의 의지가 엿보인 <Show Train Coming>, <Saved>, <Shot Of Love> 등 3장의 종교풍 음반은
‘사고의 깊이’가 두드러졌지만 ‘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에 가치가 함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 딜런을 ‘혼미의 거듭’으로 규정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보면 그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충실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티스트의 본령이다.
밥 딜런은 언제나 음악을 통해 세상과 삶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의 밥 딜런은 1970년대의 습기를 벗고 ‘열기’를 회복한다.
정치적 시각도 이입한 <Infidels>, <Empire Burlesque> 그리고 1989년에 나온 <Oh Mercy>는 이전의 앨범들과
명백한 분리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보컬은 오히려 1960년대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아티스트의 모임(Sun City) 등 일련의 자선행사에 얼굴을 내밀어 저항 전선에 복귀했다. 한 무대에서 그는 U2의 보노(Bono)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기도 했다.
딜런의 1980년대 앨범들에는 당시의 보수적이고 위압적 풍토를 거부하는 저항성이 숨쉰다.
그는 시대의 주류 한복판에는 없었지만 ‘시대의 공기’와 늘 함께 호흡했다.
그 공기를 어떤때는 앞장 서 조성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피해갔다.
밥 딜런의 한 면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가 서 있던 ‘양쪽’ 자리를 다 관찰해야만 그 ‘드라마틱한 록 역사의 굴곡’ 을 읽을 수 있다.
록의 역사는 실로 위와 아래,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기존과 대안이 끊임없이 부침을 되풀이 해왔다.
밥 딜런이 밟아온 길은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라도 - 가령 프로테스트의 깃발을 울렸을 때나, 대중성에 기웃거렸을 때나 - 딜런이 주변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임한 적은 없다. 남이 시켜서 일렉트릭의 세계로 떠밀려 간 것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신비를 축적하기 위해 은둔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터전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비평가들이 밥 딜런을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포크 음악하면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바로 그 이름…밥 딜런… .
미국 서부가 서프음악의 쾌락에 젖어있을 때 동부 뉴욕 젊은이들은 미국 사회의 모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60년대 초반 베이비붐 세대들은 미국의 부와 권력이 세계 인민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케네디 대통령의 '뉴 프런티어' 구호에 자극받아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나라 미국이 흑인을 차별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것은 아마도 케네디 자신조차 그런 흐름으로 흘러갈 것이란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공민권과 반전운동을 벌이며 '미국의 민주화'를 촉구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이런 운동이 성공했는가하면 결과는
처절한 실패였다.
유럽에서 벌어진 68 혁명은 결과적으로 독일 내에 남아있던 나치 독일의 잔재를 털어 버리는 결과가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되었던 우파정권의 오랜 정치적 지배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나 좀 심하게 말해서 미국에서는 그저 포크음악이란 잔재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 달라지 않았기 때문에 딜런의 음악은 달라지지 않아야 했으나 지금 그의 음악과 오래 전 그가 포크 음악의 전성기를 열어젖히던 시기의 음악은 사실상 다른 음악이다.
이런 딜런의 변화를 두고 당시에는 딜런에 대해 '포크 음악의 배신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변해 버린 것일까? 사실 그의 음악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삶을
관조하듯 인생의 단편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그의 이야기속에는 자조 섞인 한탄과 관조적인 자아비판, 그리고 고독한
한 남자의 진한 삶의 향기가 배어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지나간 자신의 여정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그의 음악에는 반항과 자유의 정신이 깊이 배어있고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뛰어난 작곡 능력과 환상적인 가사 만들기, 그리고 통기타 하나로 풀어나가는 완벽한 메시지 전달 능력은 그를 하나의
신화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예측할 수 없는 행로를 살아온 밥 딜런
밥 딜런, 이제는 지난 추억속에 묻혀진 이름이지만 그의 음악만큼은 우리의 주위에 남아서 삶에 찌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언제나 위로해 주고있다.
추운 겨울 조그만 오두막에 앉아 나무 난로의 타오르는 불끛 위에 작은 주전자를 올려놓고 통기타를 두들기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의 얼굴 어딘가에는 알게 모르게 밥 딜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딜런에 대해 유일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뿐이다."
Robert Allen Zimmerman이라는 다소 촌스런 본명을 가진 유태-러시아계 혈통의 밥 딜런은 1941년 5월 24일 미국 미네소타에서 태어났다. 10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0대 시절을 거치면서 피아노와 기타를 배웠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제리 리 루이스의 영향을 받으며 음악적 소양을 키웠고 리틀 리차드를 비롯해 많은 록스타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1959년에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하면서 보다 심층적으로 음악에 빠진 그는 행크 윌리암스의 컨트리, 로버트 존슨,
우디 거스리등의 음악에 심취하였으며 클럽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생활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시인 딜런 토마스의 이름을 따서 밥 딜런이라는 예명을 가진 것도 이 시기였으며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으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뉴욕에서의 그의 생활은 음악이 전부였으며 그의 재능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고 결국 콜럼비아
레코드의 존 해먼드의 제의를 받기에 이른다.
비록 그가 가진 능력은 대단하였으나 처음에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기에 62년에 나온 첫 앨범에는
그의 곡이 단지 두 곡만 실리게 되었으며 나머지 노래들은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 앤 부카 화이트등이 발표한 기존의
블루스 곡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데뷰작은 상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고 자신의 꿈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대중적인 최고작이라고 불리는 'Freewheelin' Bob Dylan'이 탄생하였다.
'Blowin' in the wind'는 수 많은 가수들이 단골로 리메이크하는 포크의 명작중 명작이며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역시 그의 대표곡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명곡이다.
특히 이 노래는 김광석을 비롯한 많은 우리나라 포크 싱어들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번안해서 즐겨
부른 곡이기도 하다.
밥 딜런의 포크 음악은 우리나라에서도 김민기를 비롯한 일군의 통기타 가수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그를 소개하는 대개의 글들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잠시였던 모던포크의 프로테스트송을 통해 반전과
인권운동을 펼쳤던 시기의 그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행적을 보인 것은 1963년 정식 데뷔 이후 몇 년간의 행적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통기타를 메고 모순된 사회를 풍자한다고 추정(?)되는 다소 난해한 노랫말의 노래를 줄러대던 그리니치 빌리지의
밥 딜런은 자신이 부르고 있는 노래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선언하고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그의 이런 행동은 미국 사회의 급격한 보수화와 맞물려 있다.
바야흐로 1960년대 잠깐동안 꽃 피었던 미국의 저항적인 록음악은 사라지고 1970년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정통 록의 정신은 사실상 거세되었다.
어쨌든 밥 딜런은 케네디 암살 이후 포크 음악에서 벗어나 록음악으로 넘어간다.
팝 역사상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로 꼽히는 Bob Dylan은 포크 록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하는 싱어 송라이터이다.
62년 셀프타이틀 앨범을 시작으로 그는 수없이 많은 외국의 뮤지션들은 물론 국내의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후에 그의 우상이었던 우디 가스리를 찾아 뉴욕으로가서 다운타운 가수로 노래를 하다가 제작자인 존 헤몬드에 의해 발탁 첫 앨범 [Bob Dylan]을 제작하였습니다.
Knocking on Heaven`s Door는 73년도 히트곡.
그의 노래들은 반항적인 노래들이 많은 것이 특색인데 60년대 중반 부터는 가사를 표현하는데 있어 리듬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포크 로크로 전향하였던 것이다.
빼어난 작사력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 가수로서, 작사 작곡가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포크 록과 컨트리 록 등의 장르에 있어 그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가 포크 뮤직에 전기 기타를 도입한 것은 당시에는 관객들로부터 야유를 받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또한 1960년대 반전 운동에 있어서도 그의 포크 음악은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심지어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음악적 영향력은 전혀 사그러들줄 모르고 있으며
월플라워스의 아들 제이콥 딜런을 통해서도 그 핏줄은 이어지고 있다.
비틀즈나 엘비스, 프린스, 마돈나, 엘튼존, 마이클잭슨, 이글스, 에어로스미스그리고 케니로저스등이 1억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고 하지만, 대중문화사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했는가가 아니라
그 상품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며, 그들의 삶에, 또 그들의 상상력을 구체화하는데 어떤 역활을 했느냐이다.

어떤 뮤지션은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프랭크 자파(Frank Zappa)와
밥 딜런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진짜 수수께끼란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풀면 풀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어떤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직도 그 매력은 모두 해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밥 딜런의 이 음반은 바로 그런 수수께끼의 시작이다.
음반의 시작을 알리는 ''Like A Rolling Stone''은 이른바 ''혁신적 고전''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음악이다.
기타 록과 포크의 결합이라는 점에서도, 히트곡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단정한 이미지(정돈된 사운드, 간결한 가사, 귀에
꽂히는 핵심적 코러스)를 무시하면서 거둔 성공적인 히트라는 점에서도, 사회적 기록으로서의 대중음악이라는 학구적
명제에 대한 철저한 본보기라는 점에서도 이 곡은 대중음악 역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다.
그 외의 곡들도 마찬가지다. (최민우)
포크의 살아있는전설 밥 딜런
반전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60년대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발표해 명성을 얻은 포크계의 살아있는 전설 밥 딜런이 오는 24 일 60회 생일을 맞는다.
지난 62년 자신의 우상이자 포크의 선구자인 우디 거스리에게 바쳐진 첫 음반 `Bob Dylan'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딜런은 첫 앨범의 상업적 실패로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63년에 내놓은 두번째 앨범 'Freewheelin' Bob Dylan'을 시작으로 화려한 가수의 길에 들어선다.
딜런은 65년에 발표한 `Bringing It All Back Home' 앨범에서 포크 음악에 최초로 일렉트릭 사운드를 도입,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는 등 끊임없는도전정신으로 포크 음악은 물론 팝 음악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60년대 후반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 딜런은 70년대 초반 침체기를 맞기도 했지만오히려 이 시기에 소설과 영화로 영역을 확대하는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면서 74년 `Blood on The Track' 앨범으로 그래미상을 받는 등 건재를 과시했다.
80년대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보인 딜런은 90년대 들어 다시 초창기 때의 분위기를 풍기는 `Good As I Been To You'를 발표했으며 97년 그의 마지막 공식앨범인 `Time Out Of Mind'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62년 인권옹호와 반전을 노래한 `Blowing In The Wind', `Masters Of War',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Blonde on Blonde', `Knocking on Heaven`s Door', `I Believe In You' 등으로 하나같이 명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딜런의 음악세계에 대해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엘비스 프레슬리는 우리의 몸을열어주었지만 딜런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본명이 로버트 앨런 짐머맨인 딜런은 지난 지난 41년 5월24일 미테소타의 덜루스에서 유대계 러시아 이민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한때 유명한 여성 포크 가수인 존바에즈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주된 활동시기였던 60년대 초반 미국에는 남부 캘리포니아를 주축으로 서해안 대중음악이 가득하던 시기였습니다. 뭐 음악적인 스타일은 딕데일, 더 델톤스(1961)부터, 벤처스와 서퍼리스등을 거쳐 비치보이스(1965) 까지의 음악이 될것 같습니다. 음악장르도 surf music이라 지었을 정도였죠.. 이 장르는 잠시 사라졌다가, 펑크나 뉴웨이브음악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주류음악이 갑작스레 무엇인가에 의해 바뀌게 되는 시기가 됩니다.
역사적인 상황에서는 케네디대통령의 뉴프런티어구호를 걸면서, 겉과 달리, 미국의 성장이 세계 다른나라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여, 그리고 흑인을 비롯한 극심한 인종차별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젊은 세대들이 분개하여, 반전운동과 흑인들의 공민원운동을 대표로 '미국의 민주화 운동'이 살벌하게 일어나던 때였죠. 물론 실패로 끝났고, 당시 남은 것은 그들을 입장을, 노래로서 대변해오던 장르, 포크와 사이키델릭락 뿐인것 같습니다.
그러한 핵심인물 중 하나,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아티스트 중 하나는 바로 이 사람, 밥딜런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로버트 앨런 짐머만이란 유태-러시아계 혈통으로 미네소타에서 태어났으며, 10살때부터 시를 쓰고, 피아노를 치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인 딜런토마스를 좋아하여, 밥딜런이란 예명을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나온 여정에 대해, 관조적 입장, 자조적 한탄, 그의 음악은 고독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반항과 자유, 평화가 녹아 있습니다. 화려한 장비 없이, 단 하나 통기타 하나와 대충 읊어대는 보컬, 이것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풀어냅니다. 음유시인이란 별명까지 가지게 되죠.
69년 우드스탁 이후, 이러한 음악들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고, 저항적인 포크, 정통 락개념의 포크음악은 변질이 되어 갑니다. 아니 범위는 더 넓어지게 된것 같습니다만, 그때의 포크음악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죠. 노래하는 이의 인생사 뿐만 아니라 역사적 상황은 그만큼 정체성 수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나 봅니다. 항상 김민기도 같이 연상되는 인물입니다.
밥 딜런을 록앤롤 명예의 전당에 추천하면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밥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엘비스는 우리의 몸을 열어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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