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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Joan Baez - The River in the Pines

 



 

 

 

 

 
Joan Baez - The River in the Pines


 

 

 

 


 

 

The River in the Pines


 Mary was a maiden
When the birds began to sing 
She was sweeter
Than the blooming rose
So early in the spring


메리라는 처녀가 있었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되면
그녀는 초봄에 핀 장미보다

그녀는 더 아름다웠죠.

Her thoughts were gay and happy 
And the morning gay and fine 
For her lover Was a river boy
On the river in the pines


그녀는 즐겁고 행복한 생각만 했고
아침공기도 활짝 개어 싱그럽기만 했어요
솔숲사이  강물을 오르내리는  
젊은 애인이 있었거든요.

Now Charlie, he got married
To his Mary in the spring 
When the trees were budding early
And the birds began to sing 


나무에선 새싹이 돋아나고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는 이른 봄날에
챨리는 연인 메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But early in the autumn 
When the fruit is in the wine
I'll return to you, my darling
From the river in the pines 


하지만  초 가을에
챨리는 그녀에게 말하죠
"포도주가 익을때쯤 솔숲사이 강에서 돌아올게요,달링~"

It was early in the morning
In Wisconsin dreary clime
When he ruled the fatal rocket
For that last and fatal time 


그가 치명적인 급류에 휘말렸던것은 
그것은 황량한 위스콘신의
어느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They found his body lying 
On the Rocky shore below 
Where the silent water ripplets
And the whispering cedars blow


소리없는강물이 잔물결 짓고,
삼목이 흔들리며 바람소리를 내던     
아래쪽 어느 암석 해안에서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발견
했죠

Now every raft or lumber  
That's come down  
The chip away


지금도 모든 뗏목들이
그 폭포로 내려가고 있어요     

There's a lonely grave that's visited 
By drivers on their way
They plant the wild flowers upon it
In the morning fair and fine
It is the grave of two young lovers
from the river in the pines 


사람들이 차를 몰고 오가는 그 길목에는
외로운 무덤이 하나 있답니다 
어느 화창하고 맑은 아침에   
사람들은 그 무덤에 이름모를 들꽃들을 심어 주었죠 
그것은 두 젊은연인의 무덤 이랍니다.

솔밭사이의 강 주변에 살던..

 

 

 

 

 


 

 

 

 

 

 

자유와 민권을 노래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Folk의 여왕
~ 존 바에즈(Joan Baez) ~

당신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 Joan Baez ~

 

 

 

 

 

 

 

 

 

 

 

 

 

 

 

 

 

 

 

 

 

 

 

 

 

 

 

 

 

 

 

 

'조안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 / 1941년 1월 9일 ~ ]'는 미국의 가수이며 인권운동가이며 반전평화운동가입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알베르트 비니치오 바에즈[Albert Vinicio Baez]'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조안 브리지 바에즈[Joan Bridge Baez]'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핵무기 제조에 반대하는 물리학자였으며 어머니는 희곡작가였으며, 나중에 '조안 바에즈[Joan Baez]'가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반전평화운동가로서 활동하게 된 데에는 반핵물리학자였던 멕시코계 아버지를 둔 가정적 환경이

 컸다고 할 수 있스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고등학교 '팔로 알토 하이 스쿨[Palo Alto High School]'을 다닌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음악에 심취하여 졸업 무렵에는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여 음반회사에 보내기도 하였답니다. 1958년 아버지의 새로운 직장 때문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그녀는 '보스톤 대학[Boston University]'에 진학하지만

 직업적인 가수활동을 하기 위하여 곧 중퇴하였답니다.

 

1959년 '캠브리지[Cambridge]'의 '포크[Folk]' 음악클럽인 '클럽 47[Club 47]'에서 정식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을 통하여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1960년 '포크[Folk]'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 레코딩 써싸이어티[Vanguard Recording Society]'와 장

기계약을 맺고 음반들을 발매하였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1961년 뉴욕에서 '밥 딜런[Bob Dylan]'을 만나 함께 전국순회공연을 하며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인종차별 철폐운동에 앞장서고 월남 반전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국내외에서 펼친 음악활동만큼 반전운동도 맹렬했던 그녀는 직접 반전시위에 가담하여 체포당하기도 하였으며,

1968년 3월 26일 반전운동가인 '데이빗 해리스[David Harris]'와 결혼한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해리스

[Harris]'가 양심적 병역거부로 투옥되자 '우드스탁 축제[The Woodstock Festival]'에 참여하는 등 반전운동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면서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활동도 변화되어 전통 '폭크[Folk]'의 모습에서 새로운 음악

'스타일[Style]'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그녀의 최대 명곡인 '다이아몬드 앤드 러스트[Diamond & Rust]'는 새로운 음반사 '에이 앤 엠[A&M]'을 통하여 1975년 4월에 발매되었스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하고 대학마저 중퇴한 그녀는 평생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8장의 '골드 앨범[gold Album]'과 1장의 '골드 싱글[Gold Single]'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래미상[Grammy Awards]' 후보에 6번 선정되었으며 200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수상하였습니다.

 

 인권과 평화운동의 공로로 2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2개 주로부터 '조안 바에즈의 날(Joan Baez

Day')을 지정 받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노래를 듣노라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처연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윤기가 흐르면서도 거만하게 들리지 않는, 쥐어짜는 음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힘차게 부르는 노래에도 편안하게 기댈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녀의 노래에 저의 거친 욕망과 다듬어지지 않은 이상을 덧칠했는지도 모릅니다.

1941년 생인 그녀는 저 보다 6년이 아래이며 그녀의 나이도 우리 나이로 어느새 63세가 더었지만 저의 머릿 속 그녀는

 여전히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깊게 패인 눈동자로 세상을 응시하는 그런 가수로 남아 있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가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4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합창반에서 노래를 했고, 1956년엔 그녀만의 첫 기타를 구입해 이곳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답니다.

그녀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해의

일이었고  이듬해인 1957년엔 간디주의 철학자인 '아이라 샌드펄[Ira Sandperl]'을 만나 그녀로부터 강한 정치적 영향을 받았답니다.

1958년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신의 데모 음반을 제작해 음반사에 보내지만 레코드 취입을 거절당하고, 아버지가 MIT와 인근의 몇 개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의 '벨몬트[Belmont]'로 이사를 했으며, '보스톤[Boston]' 대학에 등록한 그녀는 학업보다는 자신의 '뮤지션[Musician]'

경력을 꽃피우는 데 치중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엔 '보스턴[Boston]'과 '케임브리지[Cambridge]' 지역의 작은 클럽들에서 노래했는데, 곧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로 옮겨 갔습니다.

그녀가 정식으로 무대에 '데뷔[Debut]'한 것은 1959년 '캠브리지[Cambridge]'의 '포크[Folk]' 음악 클럽인 '클럽 47'에서였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이곳에서 '빌 우드[Bill Wood]'를 만났고, 얼마후엔 '테드 알레비조스

[Ted Alevizos]'까지 합류하여 앨범 '포크 싱거스 라운드 하바드 스퀘어[Folk Singers 'Round Harvard Square]'를 '보스톤[Boston]'의 지역 음반사인 '베리타스[Veritas]'에서 발표했습니다.

공연 기획자인 '알버트 그로스만[Albert Grossman]'은 그녀를 눈여겨 봐두었다가 시카고의 유명한 '포크[Folk]' 클럽인 '게이트 오브 혼[The Gate Of Horn]'에 서도록 했으며, 미국의 '컨추리[Country]' 음악이나 '포크[Folk]' 음악에서의 '뮤지션[Musician]'들은 대개 이런 경로를 통해 발굴되었답니다
.
'조안 바에즈[Joan Baez]'가 미국 전역에 알려지는 계기는 너무나 빨리 다가왔습니다. 1959년 7월 11일 개최된 제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서 '밥 깁슨[Bob Gibson]'의 '백업 보컬[Backup Vocal]'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쏟았고, 이듬해에는 정식 멤버로 참여하게 되었답니다.

그녀를 주목한 포크/부르스[Folk/Blues]' 전문 '레이블[Label]'인 '뱅가드[Vanguard]'는 '조안 바에즈

[Joan Baez]'와 12년간의 계약을 맺었고,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둬 8장의 '골드 앨범

[Gold Album]'과 한 장의 '골드 싱글[Gold Single]'을 기록했습니다.

 






 

 

 

 

 

 

 

 

 

 

 

 

 

 

 

 

 

 

함께 노래하는 '조안 바에즈[Joan Baez]'와 '밥 딜런[Bob Dylan]' - 1963년 워싱턴 D.C.에서 시민권 신장을 위한 행진을 한 뒤의 공연 모습이다

1961년 4월,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저즈 포크 시티[Gerde's Folk City]'에서 '밥 딜런
[Bob Dylan /클릭해서 음악듣기]'과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뱅가드[Vanguard / 뱅가드는 음반회사입니다]'에서 자신의 두 번째 음반을 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의 '오프닝[Opening]' 공연에 함께 했고, 이후 '포크[Folk]'의 왕과 여왕은 연인이 되어 동거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해에 그녀는 처음으로 전미 '콘서트 투어[Concert Tour]'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 '콘서트[Concert]'를 통해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 확보를 위한 주장들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녀의 활동은 19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스토리[Cover Story]'로 실리게 되었으며, 1955년 '알라바마[Alabama]'주 '몽고메리[Montgomery]'시 에서 발생한 흑인들의 버스승차거부운동은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간디의 비폭력노선을 추구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였으며, '조안 바에즈

[Joan Baez]'는 1963년 3월 25만 명의 민중과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확대를 요구하며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거리 행진에 참여했고, 이들 앞에서 '위 쉐얼 오버컴[We Shall Overcome / 우리 승리 하리라]'을 노래했답니다.

이 해 8월엔 노예해방 선언 백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대행진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는 너무도 유명한 연설의 서두로 '아이 해브 어 드림[I have a Dream /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을 말했습니다.

 

 이 행진엔 '조안 바에즈[Joan Baez]', '밥 딜런[Bob Dylan]', '피터 폴[Peter Paul]', '앤 머레이[Anne Murray]',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 등의 쟁쟁하고 의식있는 '뮤지션[Musician]'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하고, 부통령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1965년은 '조안 바에즈[Joan Baez]'에게 그리고 미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해였으며, 그녀는 1965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Monterey Folk Festival]'에 '밥 딜런[Bob Dylan]'과 함께 출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6월 17일 미국의 B-52 폭격기가 북베트남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며 베트남전은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면전이 되었고.

같은 해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port Folk Festival]'엔 '밥 딜[Bob Dylan]'과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물론 '피트 시거

 

 

 

 

[Peter Seeger / 클릭 해서 음악듣기]'(그는 50년대 '위버스[Weavers]'를 이끌며 학생 '포크[Folk]'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매카시즘[McCarthyism]' 선풍 때 공산당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미시시피 존 허트[Mississippi

John Hurt]', '잭 엘리엇[Jack Elliot]', '이안 앤 실비아[Ian & Syivia]', '탐 팩스턴[Tom Paxton]', '필 오크스

[Phillip Ochs]'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포크 뮤지션[Folk Musician]'들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였다.

'밥 딜런[Bob Dylan]'은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음악에 많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고, '존 바에즈[Joan Baez]'의 노래는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노래들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해 '포크[Folk]' 음악이 배출한 여성 '아티스트

[Artist]' 중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션[Musician]'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으며, '존 바에즈[Joan Baez]'는

 자신의 수입 중 60%가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총탄과 포탄이 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된다는 사실에 분개했으며, 그녀는 세금 징수에 불복했고,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존안 바에즈[Joan Baez]'는 자신의 주장을 좀더 널리 알리기 위해 흑인 공민권 확대를 위한 콘서트와 반전 등

 여러 현장에서 무료로 공연하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이 해 연말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앨범은

 '그래미상[Grammy Awards]'의 '베스트 포크 레코딩[Best Folk Recording]' 부문 수상 후보작이 되었습니다.

 


 

 

 

 


 

이 해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밥 딜런[Bob Dylan]'과의 연인 관계를 끝냈으며, '조안 바에즈[Joan Baez]'와

'밥 딜런[Bob Dylan]'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이 두 사람은 '포크[Folk]'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저항

정신을 실천한 운동가였숩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와 '밥 딜런[Bob Dylan]'은 당시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 - 인종차별, 베트남전, 세대간의

 갈등 등 - 을 저항과 '리얼리즘[Realism]'의 정신으로 담아냈고, 삶에 대한 열의와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했던 청년 문화의 대변인이었습니다.

물론 '조안 바에즈[Joan Baez]'에게 끼친 '밥 딜런[Bob Dylan]'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밥 딜런[

Bob Dylan]'을 가장 중요한 '포크 뮤지션[Folk Musician]'으로 주목받도록 한 사람이 '조안 바에즈[Joan Baez]'란

사실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뉴스위크[News Week]'지는 '포크송[Folk Song]'의 여왕 '조안 바에즈[Joan Baez]'가 '밥 딜런[Bob Dylan]'을

 왕자로 책봉했다, 고 대서특필하기도 했습니다.

 '밥 딜런[Bob Dylan]'은 '조안 바에즈[Joan Baez]'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도록 했고, '포크[Folk]' 음악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 서로 많은 교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포크[ Folk]'라는 '포크[Folk]' 음악의 순수함을

'밥 딜런[Bob Dylan]'보다 더 오래 지켜나갔고, '포크[Folk]' 음악의 대중화란 측면에선 '밥 딜런[Bob Dylan]'보다

더 많은 공로를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를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조안 바에즈[Joan Baez]' 만큼 이런 진보의 정신에 충실했던 '뮤지션[Musician]'은 드물 것입니다.

그녀의 노래는 늘 힘없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각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민자들로 대표되는

사회적 소수의 정서를 노래에 담았고, 잊혀진 그들의 권리와 상실된 권리를 찾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소외받는 민중들의 위안이자 실탄이 되었으며,

1960년대의 미국 정부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부였고, 국민 대다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습니다.

더군다나 그 전쟁은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불의의 전쟁이었습니다.

1966년 봄 그녀의 초기 앨범 3장이 미국 레코드 산업협회(RIAA)로부터 골든 앨범으로 인정받았으며, '조안 바에즈

[Joan Baez]'는 시종일관 약자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반전시위 현장에서 흑인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쉬지 않고 노래했고, 시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미국 사회의 보수층을 적으로 돌리고 있었으며, 1967년 일본 공연에서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일이 일어났고, 당시 그녀의 통역자는 '시 아이 에이[CIA]' 요원으로부터 '조안 바에즈

[Joan Baez]'의 정치적 발언들을 오역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시 아이 에이[CIA]'는 이런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일본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예정되었던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Washington Constitution Hall]'에서의 공연을 열 수 없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유공자의 자손들 모임인 '디 에이 랄[DAR / The 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 그녀의 반전운동을 문제삼아 공연허가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안 버에즈[Joan Baez]'는 이들의 공연허가 거부에도 불구하고 즉석에서 3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로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확인되지 않은 일화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그녀의 허가되지 않은 공연을 방해하기 위해 경찰관이 야외공연의 필수인 앰프와 마이크 사이의 연결되는 코드를 모두 빼앗자,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무대에서 내려와 청중들 한 가운데 자리잡고 노래했답니다.

청중이 그녀의 노래에 호응해 함께 노래를 하자 경찰이 압수했던 공연 장비를 어쩔 수 없이 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행동은 미국의 보수 우익들에겐 눈에 가시와 같았답니다.

그러나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이들의 증오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으며, 그녀는 이 해 10월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California Oakland]'에 있는 군 입소대 입구를 무단으로 점거하기까지 했으며, 그로 인해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했답니다.

1968년은 그렇게 밝아왔고, 68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던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 뿐이었으며, 하나는 1848년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습니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으나, 하지만 둘 다 세계를 바꿔놓았다, 고 말합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이 해 3월 26일 '팔로알토[Paloalto]'의 평화와 자유 공동체의 '리더[Leader]'이자

행동가인 '데이빗 해리스[David Harris]'와 결혼을 했습니다.

 

68혁명에 대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장에서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이 한 해에는 정말 엄청난 '일['프라하(Praha)'의 봄,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 목사의 암살 등]'들이 일어났고, 그 전해에 죽은 '체 게바라[Che Guevara]'는

1968년의 젊은이들이 숭배한 주요 '영웅들[마오쩌뚱, 호치민, 두브체크와 같은 인물들]'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서구의 근대합리주의 문명이 창출해낸 모든 권위에 저항했고, 부인을했으며, 그들은 기존의 사회 체제들,

 근대적 합리주의와 그것이 낳은 관리 사회, 인간 소외의 구조를 파시즘(전체주의)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했고, 기성 세대의 권위를 깡그리 짓밟고자 했습니다.

미국에서 청년들은 징집 영장을 공공연히 불태웠고, 프랑스에서는 바리케이트를 넘어서며 해방을 외쳤으며, 그들은 모든

 금기들 '정치적·사회적·성적 금기 등 모든 금기'에 대해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1969년 그녀의 남편 '데이빗 해리스[David Harris]'가 징병 기피 혐의로 3년형을 선고 받았고, 20개월을 복역하게 되었으며,'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남편에게 바치는 《DAVID'S Album》을 발표했고, 8월에는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The Woodstock Festival / 클릭해서 음악듣기]'에 참가했습니다.

 

그렇게 1960년대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진보의 목소리가 세상을 뒤엎을 것 같았던 60년대가 지나고 1970년대가 되자
세상이 돌연 잠잠해졌습니다.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3일간의 음악, 평화, 사랑의 제전'을 제창한 '우드스탁 페스티벌[The Woodstock Festival]'의 성공은 60년대라는 시공간이 쌓아올린 금자탑이자 동시에

정점이었습니다.

그 이후엔 끝을 알 수 없는 '순수의 추락'이 이어졌으며,

같은 해 10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인근에서 열린 '앨터몬트 페스티벌[Altamont Festival]'에서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공연 때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 - 인근의 악명높은 폭주족들이 경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로 맥주값 500달러에 행사진행 및 안전요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공연을 관람하던 흑인 관객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듬해인 1970년엔 '지미 헨드릭스[Jimi Handrix]', '제니스 조플린
[Janis Jopin / 클릭해서 음악듣기] '도어즈[Doors]'의 '짐 모리슨[Jim Morrison]'이 약물로 인해 사망했고,

'올맨 브라더스[Allman Brothers]'의 '듀언 올맨[Duane Allman]', '더 버즈[The Byrds]'의 '클라렌스 화이트

[Clarence White]' 등이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록[Rock]'의 혁명성과 '포크[Folk]'의 순수를 믿었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으며, '록[Rock]'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었고, '포크[Folk]' 음악은 활로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으며, '밥 딜런[Bob Dylan]'은 '어쿠스틱 기타

[Acoustic Guitar]'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Electric Guitar]'를 짊어졌고, 그의 노래에선 더 이상 '우리'란 말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라는 개인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이런 시기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으며, 1971년 10월 그녀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는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었고, 그 자리엔 그리스 최고의 여배우이자 역시 뛰어난 자유의 투사였던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와

그의 남편이자 영화감독 '쥘 다생[Jules Dassin]' 참여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뱅가드 레이블[Vanguard Label]'을 떠나 '에이 엠[A M]'으로 옮겨갔고, 이제 그녀의 음악형식도 '뱅가드

[Vanguard]' 시절의 전통 '포크[Folk]'의 모습에서 새로운 음악스타일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에이 엠[A M]' 시절 그녀의 최대 명곡인 《DIAMOND & Rust》는 1972년 4월에 발매되었습니다. 1973년엔 국제인권사면위원회 '엠네스티[Amnest]'의 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했고, 1975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밥 딜런[Bob Dylan]' 등과 함께 전미투어를 했습니다.

76년엔 자신의 자작곡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GULF Wind》를 발표했습니다. 그녀는 1977년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의 지배 아래있는 스페인을 방문해 TV 생방송 중 40여년 전부터 금지곡이었던

《NO Nos Moveran(We Shall Not Be Moved)》을 노래했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개의[開議]치 않았답니다.

 

 '베트남[Vietnam]' 의 '하노이[Hanoi]',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튀니지[Tunisia]', '아르헨티나

[Argentina]', '레바논[Lebanon]'에서 노래를 했고, 억울하게 구금당한 사람의 사면을 위해서 노래도 했답니다.

그녀는 노래하고 또 노래를 했답니다.

그녀는 '모스크바[Moskva]'에서 반체제 인사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 박사를 위해 노래했고,

 '캄보디아[Cambodia]'를 위해 노래도 했답니다.

이런 그녀의 활동을 인정한 '안티오크[Antioch]' 대학과 '루트거스[ Ruettgers]' 대학에선 그녀의 정치적 행동과

 음악성을 인정해 명예인문학 박사 학위도 수여를 했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전 대통령의 집권 이후 더한층 강화된 미국의 보수주의 물결 속에서도 1981년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에서 5주간의 '콘서트[Concert]'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을

강행바 있었답니다.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이 모든 일을 끝까지 해냈답니다.

또한 그녀는 핵무기 제조 및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83년 유럽을 순회공연했고,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Concorde]'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Concert]'를 개최해 12만 명의 군중 속에서 노래해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답니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가장 최근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멈춘 적이 없었으며,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한때 1 년공연의 '개런티[Guarantee]'로 10만불을 제시한 프로모터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포크[Folk]' 음악은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이다.

누구든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Folk]' 음악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라고 말을 하였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상업화된 '록[Rock]' 이나 '팝[Pop]' 음악에 애써 혁명성을 덧칠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려는 일부

음악 평론가나 지식인의 행동은 일종의 '코스츔[Costume]'에 불과하단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운동가요 혹은 민중가요가 예전의 효용을 되찾기 위해 '록[Rock]' 음악의 형식을 띄는 것, 저녁 시간에 청춘 문화의 상징 어쩌구 하면서 다 늙은 '포크송[Folk Song]' 가수들이 나와 과거의 낭만 타령을 하는 방송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

다 비슷한 일들로 여겨집니다.

'밥 딜런[Bob Dylan]'이 '어쿠스틱 기타[Acoustic Guitar]'를 포기했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일렉트릭 기타

[Electric Guitar]'를 이용해 만든 음악의 내용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록[Rock]' 음악이란 형식을 이용한 음악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서구의 음악적 환경과 사회적 배경이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일삼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록[Rock]' 음악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이유는 될지 언정 그다지 책임있는 비평행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난 1980년대 '운동가'라는 형식을 띈 여러 형태의 음악들을 만났습니다. 이중 일부는 현재까지 즐겨 노래하

게 되는 명곡으로 살아남은 것들도 있지만 현재는 예전에 비해 그 중요성이 많이 반감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자리에서 그런 음악의 부흥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밀접한 현장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밥 딜런[Bob Dylan]'이 이야기했다는 '브로드웨이[Broadway]'에 죽치고 앉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따위의 노래를 만드는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허나 세상엔 사랑과 섹스 말고도 중요한 것이 존재하는

법입니다."란 말은 여전히 음미할 가치가 있습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가 전문적인 음악 교육 없이도 '3 옥타브[3 Octave]'를 넘나드는 '비브라토[Vibrato]'의

향연을 펼쳐보일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그녀의 음악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중요치 않은 점임니다.

 

그녀는 늘 현장에서 함께했고, 말뿐인 지성인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자신의 노랫말과 함께 했으며, 그녀의 음악이 늘 시대와 동시성을 지닐 수 있었던 것.

 그것이 그녀의 노래가 지닌 가장 강한 힘이었습니다. 그것이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노래가 영혼을 움직이는

 이유입니다

 

'웹스터[Webster]' 사전은 '포크[Folk]' 라는 단어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운율, 후렴구, '멜로디[Melody]'를

가지고서 작곡된 곡" 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백인들의 음악인 '포크[Folk]' 음악은 유럽의 '포크[Folk]' 음악과는 다른 것입니다.

미국의 '포크[Folk]' 음악은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서 흑인 음악과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혼합되었습니다.

1930-40년대 미국의 정치적 급진파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해서)들은 빈곤과 대공황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구전 민중문화를 탐구했고, 일부는 '포크송[Folk Song]'을 수집했습니다.

 

 '아메리칸 포크[American Folk]'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가 미국 공산주의 청년 동맹의 맹원이었던 사실이나, '피트 시거[Peter Seeger]'가 '매카시즘[McCarthyism]' 당시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았던 것도 이런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아메리칸 포크[American Folk]' 음악의 음악적 뿌리는 '컨트리[Country]' 음악과 다르지 않고, 그 음악적 형식도 상당히 유사합니다. '포크[Folk]' 음악의 '순수성' 이데올로기는 '어쿠스틱[Acoustic]' 악기가 만드는 '자연음'과 '진실의 노래[Song of substance]'로 상징되었습니다.

 

 '포크[Folk]' 음악의 악기 구성이 간단한 이유는 '포크[Folk]' 음악이 가사에 담긴 진실된 메시지의 투명한 전달을 목표로 만들어진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기 '포크[Folk]' 음악은 피아노와 같은 악기를 '부르주아[Bourgeois]' 가정의 악기로, '일렉트릭[Electric]' 기타를 속물적이고 상업적인 악기로 치부했고, '하모니카[Harmonica]'나 '밴조[Banjo]' 정도를 추가하는 것만으로 악기 구성이 완료되었었습니다.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는 전통 '포크[Folk]'를 '모던 포크[Modern Folk]'로 다듬은 '아티스트[Artist]'이자

 평생 동안 방랑하며 '포크[Folk]' 음악을 수집하고 자신의 창작곡을 남긴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피트 시거[Peter

Seeger]'와 함께 구전 민요였던 '포크[Folk]' 음악을 창작자가 있는 예술 작품으로 변모시켰으며,

그러나 '포크[Folk]' 음악은 '매카시즘[McCarthyism]'의 시기에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포크[Folk]' 음악의 '진실의

노래'를 추구하는 정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와 '킹스턴 트리오[Kingston Trio]', '피터 폴[Peter Paul]', '앤 메리[Anne Murray]'가 등장하면서 '포크송[Folk Song]' '리바이벌[Revival]' 이라는 '포크[Folk]' 음악의 부흥이 시작되었고, '조안 바에즈[Joan Baez]'와 '밥 딜런[Bob Dylan]'은 '포크[Folk]'의 정신에 충만한 노래들과 실천으로 '포크[Folk]' 음악의 왕과 여왕으로 군림했습니다.

특히 '밥 딜런[Bob Dylan]'은 이제까지의 '포크[Folk]' 음악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시적인 가사, 강렬한 보컬, 곡조와

박자를 무시하는 듯한 창법으로 '포크[Folk]' 음악은 물론 일반 '팝[Pop]'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port Folk Fastival]'에서 '밥 딜런[Bob Dylan]'은 상업적인 악기로 치부되던

'일렉트릭[Electric]' 기타를 들고 나와 '포크 록[Folk Rock]' 이란 새로운 '장르[Genre]'의 출발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아직 그의 변화를 이해해 주지 않았으며, 60년대 중반 이후 '포크 록[Folk Rock]'은 '포크[Folk]' 음악에

있어 하나의 대세가 되었고, '버즈 [The Byrds]', '마마스 앤드 파파스[Mamas And Papas]', '사이몬 앤 가펑클

[Simon And Garfunkel]' 등이 '포크 록 그룹[Folk Rock Group]'이었습니다.

그러나 1970 년대 '포크 록[Folk Rock]'과 '포크[folk]' 음악은 더 이상 시대를 이끌어가는 음악으로써의 힘을 잃었고,

그 명맥마저 위태롭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선 '포크[Folk]' 음악 '아티스트[Artist]'들로 분류되는 '랜디 뉴먼[Randall

Newman]',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레너드 코헨[Neonard Cohen]', '돈 맥클린[Don Mclean]' 등은

 '포크 뮤지션[Folk Musician]'보다는 '싱어송 라이터[Singer Song Writer]'로 분류됩니다.

 

어쨋든 '포크[Folk]' 음악은 이런 '싱어송 라이터[Singer Song Writer]' (이탈리아에선 '칸타토레')들을 통해 명맥이

 유지되었고, 외국에선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 '조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i]',

 '프랑소와 아르디[Francoise Hardy]', '루치오 바티스티[Lucio Battisti]' 등이 '싱어송 라이터[Singer Song

Writer]'로 활동했습니다.

1970년대 말 이후 예전의 순수 '포크[Folk]'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고, '포크[Folk]' 음악 공연장은 사실상 추억을

공유하는 이들의 동창회 같은 분위기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들어 '수잔 베가[Suzanne Vega]',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 등과 같은 여성

 '포크 뮤지션[Folk Musician]'들의 등장으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한편 '포크[Folk]' 음악이 점점 더 먹고 사는데

지장없는 이들을 위한 음악이 되는데 반기를 들고 나온 '포크[Folk]' 음악이 바로 '안티 포크[Anti Folk]' 운동이었습니다.

'아니 디프랑코[Ani DiFranco]' 같은 '뮤지션[Musician]'은 자신의 '인디 레이불[Indie Lable / 인디펜던트

(Independent)의 약자로, 거대한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한 저예산 독립음반사를 말함]'을 설립하고, 음악적으로는

 '펑크[Punk]', '힙합[Hip Hop]'등 이질적 '장르[Genre]'를 섞고 정치적으로는 '페미니즘[Feminism]'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담아 '이지 리스닝 팝[Easy Listeninf Pop]'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던 '포크[Folk]' 음악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인디 록[Indie Rock]'을 미국 대학생들의 '포크[Folk]' 음악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어쨌든 현재의 '포크[Folk]'

음악은 '어쿠스틱 기타[Acoustic Guitar]'를 통해 재현되지 않고, 그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 만큼은 명확한 듯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