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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Gustav Mahler ~ Symphony No. 10 "Adagio"

 

 

 

 

구스타프 말러(1860~1911)

 

 

 

Gustav Mahler ~

Symphony No. 10 "Adagio" |

Vienna Philharmonic, Leonard Bernstein [HD]  

 

Gustav Mahler -

Adagio from Symphony No. 10 in F sharp minor (incomplete), 1910 |

Vienna Philharmonic, Leonard Bernstein.

Movements
00:00 I Adagio

Incomplete movements:
Scherzo (sketches)
Purgatorio (sketches)
Scherzo (sketches)
Finale (sketches)

 

구스타프 말러와 알마 말러

 

 

1악장: 아다지오

느리고 장대한 첫 악장은 비올라의 쓸쓸한 모놀로그 주제로 출발한다. 이어서 F#장조의 칸타빌레 주제가 떠오르는데, 넓은 음폭과 풍부한 화음을 지닌 이 장엄한 선율은 브루크너를 연상시킨다. 계속해서 피치카토 반주를 수반한 스케르찬도 주제가 나와서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악장은 이상의 세 가지 주제가 번갈아 등장하면서 느릿하게 흘러가다가, 후반부로 접어들면 어느 순간 a♭단조의 코랄이 터져 나와 충격을 안겨준다.

그리고 절정부에 이르면 9개의 음을 3도 간격으로 쌓아올린 강렬한 불협화음이 엄습한다. 이 고통스런 화음의 지속은 트럼펫이 길게 뽑아내는 절규와도 같은 A음으로 수렴되는데,  이 A음은 알마(Alma)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2악장: 스케르초

첫 번째 스케르초 악장으로 끊임없이 변전하는 박자와 복잡다단한 리듬들이 극도로 혼란스런 텍스추어와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중간부의 트리오는 전원풍의 렌틀러로 이루어져 있고, 뒤로 갈수록 주제들 간의 구분과 경계는 모호해지며, 마지막에는 모든 주제가 한데 모이다가 호른의 힘찬 용솟음 속에서 밝게 마무리된다.

 

3악장: 푸르가토리오

전곡 가운데 가장 짧은 악장으로 ‘연옥(Purgatorio)’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말러 자신의 가곡 ‘지상의 삶’을 연상시키는 기계적인 반주가 흐르고, 주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의 주인공을 나타내는 모티브와 유사하다.

악보에는 ‘죽음! 변용!’, ‘신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등의 메모가 적혀 있어서 당시 말러의 어지러웠던 심경을 말해주고 있다.

4악장: 스케르초

두 번째 스케르초 악장으로 왈츠 풍이며 일종의 ‘죽음의 무도’라고 할 수 있다. 구성적으로 2악장보다 더 복잡하며, 정서적으로도 더욱 심화되어 있다.

특히 <대지의 노래>의 첫 악장에 나오는 ‘기쁨도 노래도 시들고 사라지네’ 대목의 악구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이 악장의 표지에는 ‘악마가 나와 함께 춤춘다. 광기여, 저주받은 나를 데려가다오!’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또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명한 ‘머플드 드럼’(소리를 죽이기 위해 천으로 싼 큰북)의 첫 번째 타격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적힌 문구는 ‘그대만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아! 아! 아! 안녕, 나의 칠현금 연주(Saitenspiel)여, 안녕히!’이다.

알마는 이 큰북 타격이 1908년 뉴욕에서 보았던 소방사의 장례식에서 울려 퍼진 북소리와 관계가 있다고 했다. 아파트 창문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동안 눈물로 범벅이 된 말러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5악장: 피날레

첫 악장만큼이나 규모가 큰 악장으로 느리게-빠르게-느리게의 세 부분으로 나뉘며, 앞선 악장의 마지막에 나온 북소리를 이어받으며 시작된다.

처음에는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며 3악장의 ‘살로메 모티브’가 단편적으로 부각된다. 이어서 플루트 솔로가 투명한 음색으로 서정미와 신비로움이 깃들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작품의 결말을 암시하는 듯하다.

 중간부로 넘어가면 말러의 마지막 투쟁이 펼쳐진다. 3악장에 나왔던 소재들이 어지러이 뒤엉키고, 1악장의 불협화음이 다시 터져 나온다. 절정부에서는 첫 악장의 모놀로그 선율이 호른에서 울려 퍼진다.

이제 투쟁과 갈등은 멀어진다.

말러는 이 마지막 대목에 화해와 평화를 향해서 나아가는 ‘위대한 사랑의 송가’를 써넣었다. 말러가 알마를 향해 썼던

최초의 연가인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 나아가 그 근원인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을 환기시키는 이 에필로그는

말러가 꿈꾸었던 ‘궁극의 승리’를 형상화한 듯하다.

 

그 코다의 시작 부분에는 ‘그대를 위해 살고! 그대를 위해 죽으리!’라고, 마지막 비상 부분에는 ‘알름슈

(Almsch, 알마의 애칭)’라고 적혀 있다

 

 

 

 

 

작품의 구성과 성격

10번 교향곡은 매우 특이한 F샤프장조의 조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푸르가토리오’(Purgatorio, 연옥)라고 이름 붙인 짧은 간주곡 형태의 악장이 놓여 있다. 이 악장의 양쪽에는 두 개의 긴 스케르초 악장이 있고, 가장 바깥쪽 악장들은 아다지오 템포이다.

즉 이 교향곡은 대칭 구조의 다섯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악장과 5악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교향시를 이루고, 그 안쪽 2악장과 4악장은 10분 남짓한 스케르초이다.

이와 같은 대칭 구조는 작품에 긴장감을 가져오고 완성도를 높여준다. 이 다섯 악장은 그 순서가 분명히 지시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말러가 이 곡을 완성했더라도 어느 악장이 완전히 빠지거나 두 악장이 연결될 수는 있어도, 순서 자체는 변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악장들이 가진 성격 때문에 다른 순서로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알마가 말러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정리하여 출판한 책 <구스타프 말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의 표지.

두 번째 악장의 스케치에는 ‘2악장 스케르초 - 피날레’라고도 써져 있는데 필체를 자세히 살펴보니 ‘피날레’라는 단어는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밝혀졌다.

작품을 완성할 자신이 없었던 말러가 두 악장만으로 곡을 마치려고 했던 모양이다. 두 느린 악장이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있어 9번 교향곡을 연상시키지만 그 외의 공통점은 없다.

 

조성 배치도 9번 교향곡보다는 덜 파격적이다. F샤프장조인 1악장에 완전히 다른 조성을 가진 악장은, e단조로 시작되어 d단조로 마치는 4악장 정도다. 마지막 악장 역시 그대로 이어져 d단조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F샤프장조로 돌아오면서 종결된다.

첫 악장 아다지오의 구조는 정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크게는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고, 이 주제 외에 비올라로 전달되는 주제도 지적할 수 있지만, 첫 번째 주제의 변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두 주제는 변주되면서 여러 번 등장하는데 말러가 그때까지 보여주었던 어떤 변주곡 형태와도 다르다. 굳이 얘기하자면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등이 주도한 빈 악파의 표현주의와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어지는 스케르초는 두 주제가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전형적인 말러의 스케르초 악장 구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세 악장은 자전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처음에는 3악장의 표지에 ‘연옥’이 아니라 ‘연옥 혹은 지옥’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나중에 지옥 글자를 줄로 그어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악보의 첫 페이지는 아래 부분이 찢겨져 있는데, 매우 개인적인 내용이 적혀 있어 말러나 알마가 찢어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4악장의 악보에는 ‘죽음이 나와 함께 춤을 춘다’라고 적혀 있으며, 이 문장 아래에는 죽음에 관한 섬뜩한 몇 문장이 덧붙여 쓰여 있다.

4악장의 마지막에는 엄청난 드럼의 타격이 있으며, 이 타격으로부터 그대로 마지막 악장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악장은 느린 도입부를 거쳐 다소 활동적인 중간부를 지나 다시 도입부의 주제가 돌아오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미완성의 작품을 없애라는 유언을 거부한 미망인 알마

1910년 7월, 말러는 알프스의 휴양지 토블라흐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9번 교향곡의 끝손질을 마무리하고 구상하고 있던 다음 교향곡의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그는 다섯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쇼트스코어(약보)를 이미 만들어놓고 있었고 오케스트레이션 스케치도 지어놓고 있었다. 풀스코어(총보) 완성의 바로 전 단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말러의 생활은 아내 알마와 젊은 발터 그로피우스의 애정행각 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말러에게 알마는 정신적 동반자였다. 그녀를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과 함께 말러의 건강을 심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정신분석학을 개척한 의사 프로이트를 찾아가기까지 했다.

이처럼 심신이 고달팠음에도 그의 창조력은 이상할 만치 고양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듬해 55세 생일 직전인 5월 18일 훗날 ‘10번 교향곡’이라고 불리게 될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죽고 만다.

말러는 알마에게 악보를 없애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미망인 알마는 폐기하지 않았다. 이런 그녀의 처사에 대해 브루노 발터를 비롯하여 말러를 우상으로 여겼던 몇몇의 비난과 저항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발터는 말러 타계 이듬해 <대지의 노래> 초연을 이끌었고, 나중에 말러 음악 해석의 권위자가 된 지휘자이다. 알마는 말러의 직접적인 후계자인 빈의 삼총사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중 한 사람이 미완성의 이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고 내세웠지만, 제아무리 존경하는 선배의 유업이더라도 또 그냥 버려두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더라도 거기에 보필을 한다는 것은 같은 길을 걷던 그들이 할 일은 아니었다.

창작가의 작품은 그의 분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의 완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작곡가가 아니라 음악학자들이었다.

 

  

 

 

데릭 쿡이 ‘연주용 판본’을 완성하다

10번 교향곡의 역사는 1차 세계대전 후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알마의 부추김으로 이 작품의 1악장과 3악장이 1924년 10월 12일 빈 국립가극장에서 빈 필에 의해 프란츠 샬크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초연을 바로 앞두고 말러 자필의 작품 전체 필사본이 출판되었다. 자필악보 필사본이 출판되면서 이 유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나치 시대가 오면서 말러의 음악은 가려지고 이 작품도 거의 잊히고 만다.

 

1960년 말러 탄생 100주년을 맞아 10번 교향곡의 새로운 전기가 왔다. 영국의 음악학자 데릭 쿡(Deryck Cooke)이 필사본을 연구하여 해독하는 데 성공, 자신의 판본 악보로 구성해낼 수 있었다.

쿡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주위의 우려에 대하여 남겨진 악보가 단순한 스케치가 아니라 완전히 전체 모습을 갖춘 레이아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완성이란 것은 작곡가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분명히 해두었다. 말러가 이 곡을 완성시켰더라면 평소 그의 작곡

 성향으로 보아 분명 많은 부분을 다시 보완하고 수정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런 점에서 쿡은 자신의 작업이 완성이라든가 재구성이라기보다는 ‘연주할 수 있도록’ 또는 ‘악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방법을 ‘모방 작곡’으로 일컬었다. 1960년 오스트리아에서 발행한 말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데릭 쿡은 연주가 가능한 악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악보(2악장과 4악장은 축약된 형태)에 의한 녹음이 1960년 12월 19일 BBC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가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알마는 10번 교향곡을 완성시키려는 음악학자들의 노력에 대해 그동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러 저작권의 소유자로서 이 작품의 연주를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방송을 듣고 그녀는 생각을 바꾸었다.

쿡의 성과에 호의를 나타내고 마음대로 보필해도 괜찮다고 조건 없는 승인을 해주었다. 쿡은 이 작품의 ‘연주용 판본’(performing version)을 완성하여 1964년 8월 13일 베르톨트 골드슈미트의 지휘로 초연에 올렸다. 데릭 쿡이 완성한 최초의 연주용 판본에 이르러서야 말러의 미완성 10번 교향곡은 세상의 음악애호가들에 남겨진 유산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쿡이 자주 언급했듯이 그가 이 악보를 만든 의도는 초고 그대로는 오케스트라 실연이 불가능했던 악보를 연주 가능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성실하고 엄격한 쿡은 첫 연주용 판본을 완성한 후 이를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하고 수정했다.

 참고문헌을 찾고 말러의 표기법을 해독하는 것, 쇼트스코어에 쓰인 대로 특정 악기를 지정하는 것과 몇 군데 부가적인 음을 채우는 것 등 어렵고 고된 작업이었다.

1976년에 출판된 쿡의 풀스코어 개정판(두 번째 연주용 버전)은 말러가 오케스트레이션 초고에 남겨놓지 못한 부분과 그가 밝혀낸 부분이 나란히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이런 노력은 어느 부분이 첨가된 부분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완성 작품의 연주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러 음악에 대한 쿡의 기여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쿡의 주석을 읽어보면 브루노 발터 등의 완강한 저항은 적절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말러가 작품을 완성했더라면 10번 교향곡은 물론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각 악장을 좀 더 줄이거나 늘렸을지도 모른다. 또 말러의 정교한 관현악법과 연주지시를 흉내 낸다는 것이 가당치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쿡의 풀스코어를 통하여 연주되는 음악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말러가 최고의 창조력을 지닌 혁신적인 작곡가였음을 보다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쿡의 작업을 검토한 많은 음악학자들은 그의 작업을 인정했다.

 

어쨌든 쿡이 말러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 연주될 수 있도록, 그것도 그럴듯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쿡의 작업이 완전한 것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다. 말러의 스케치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작업을 했다는 것에 데릭 쿡의 공로가 있고, 그의 작업에 대한 판단은 그 다음의 일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그린칭 공동묘지에 있는 말러의 묘비와 쇤베르크가 그린 말러의 장례식 장면

 

 

 

Mahler Gustav


출생일 1860. 7. 7,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칼리슈테
사망일 1911. 5. 18, 빈
국적 오스트리아

 


여러 낭만주의적 요소들이 집약된 10곡의 교향곡과 관현악 반주에 의한 다양한 가곡들로 유명하다.

비록 그가 죽은 뒤 50년 후에야 그의 음악이 인정받았지만 이후 20세기 작곡기법에 있어 중요한 선구자로 인식되었으며

아르놀트 쇤베르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등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구스타프 말러는 지금의 체크 남서쪽 변방에 위치한 칼리슈테(독일어로는 Kalischt)라는 보헤미아 마을에서

유대교 혈통의 오스트리아인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몇 달 후 그의 가족은 이흘라바(독일어로는 Iglau) 근처로 이사했으며 그곳에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유대인 혈통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인종 차별에 시달렸고, 이것은 그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체크의 토착인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인에도 속할 수 없었다.

나중에 독일에서도 그는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인, 유대인 양쪽 모두에게 이방인이었다.

 

또한 말러는 부모 사이의 갈등으로 고통받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거세고 활동적인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교양있는 집안 출신의 섬세한 여인이었으며 아내의 사회적 우위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던 그의 아버지는 폭력으로 그녀를 학대했다.

 

그결과 말러는 아버지와는 소원했던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은 신체적인 면에 나타났다.

다리를 약간 저는 습관은 불구였던 그의 어머니를 모방한 데서 생긴 것이었다. 유년시절 그는 11명이나 되는 형제,

자매들이 질병과 죽음으로 시달리는 것을 보아왔고, 유전적으로 어머니의 약한 심장을물려받아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불안정한 초기의 성장배경은 말러의 삶과 음악에 팽배해 있는 정신적 긴장, 회의주의, 빈정댐,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끊임없는 추구 등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를 작곡과 지휘의 대가의 위치에 올려놓은 엄청난 정열과 지적인 힘,

목표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그의 기질 중에 긍정적인 요소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육체적으로 대단한 정력가였던 부계혈통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그는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한 음악감독이었고 수영을 매우 즐겼으며,

끈기있는 산악인으로서 지극히 활동적인 인생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4세 무렵 근처 병영에서 들리는 군악과 체크의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에 매료되어 이를 아코디언과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소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소리와 더불어 군대음악과 민속음악은 커서도 그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0세 때 이흘라바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으며 15세에는 이미 음악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 빈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피아노와 작곡 분야에서 상을 받고 졸업한 그는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 불규칙적인 개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주요작품 가운데 처음의 중요한 작품인 칸타타 〈탄식의 노래 Das klagende Lied〉로 빈 음악원의 베토벤 상에

 응모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보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 작곡은 긴 여름휴가에 하려고 잠시 미뤄두고, 지휘자로 변신했다.


그후 17년 동안 말러는 지휘자로서 최정상에 올라섰다.

오스트리아에서 소극(笑劇) 지휘를 시작으로 부다페스트와 함부르크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두루 거친 다음

1897년 37세의 나이로 빈 궁정 오페라예술감독이 되었다.

 

그는 지휘자로서는 일반 청중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작곡가로서는 처음의 창작기간 동안 대중들의 몰이해에

 부딪쳤으며 이러한 시련은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말러가 주로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완숙기의 작품 모두가 교향악적인 작품(40곡의 가곡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리트가 아니라 불완전한 교향악적 악장들인데, 사실 그 가운데 몇몇은 교향곡 작곡을 위한

부분적인 기초로 사용되기도 했음)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란츠 리스트 악파의 영향을 받은 말러의 음악적 목표는 개인적인 세계관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본질적으로 자전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오페라라는 극적 수단보다는 가곡과 교향곡이 적합했다.

 

즉 가곡은 개인적인 서정성을 갖추고 있고 교향곡은(바그너와 리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주관적인 표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작품

 

말러의 창작시기는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매 시기마다 그는 각각 3부작 교향곡을 작곡했다.

초창기의 교향곡은 음악 외적인 이야기나 생각에 근거한 표제적인 기초에 입각하여 작곡했다.

이 교향곡들의 제목은 나중에 삭제했지만 고통과 죽음, 의혹과 절망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 근거의 확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마지막에 가서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 Pastoral〉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의 예를 따라 그때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지던 4악장 구조를 탈피하여 한 곡의 교향곡 안에 더 많은

 악장을 포함시켰다.

 

시간의 확장과 다양한 음색을 내기 위한 여러 관현악법의 사용과 무제한적 감정 표현의 추구에 있어서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독창과 합창의 도입은 베토벤의 교항곡 9번 d단조 〈합창 Choral〉을 따랐고, 다른 작품에 자신의 가곡

(독일의 민속 선집인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 Des Knaben Wunderhorn〉에 실린 시에 곡을 붙인 가곡, 혹은

 민속 양식으로 쓴 자작시에 붙인 가곡 등)을 도입한 것은 슈베르트의 실내악을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들과 더불어 말러는 특유의 긴장을 주는 수사학적 양식, 놀랄 만큼 생동감 넘치는 관현악 처리,

대중음악에 대한 반어적 용법을 잘 구사함으로써 전대 미문의 폭넓은 대조를 보여주는 3편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그의 빈틈없는 창조적 재능과 교향곡 구조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으로 하나로 묶인다.

 

순전히 관현악으로만 된 교향곡 1번 D장조(다섯 악장 가운데 한 악장은 후에 삭제됨)의 표제는 그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인 것이다.

생의 환희는 칼롯(Callot : 대중음악에 대한 패러디) 기법에 의한 소름끼치는 〈장송 행진곡〉이 울리는 가운데

죽음에 대한 강박으로 뒤덮여지지만 결국 열렬하고 화려한 피날레로 끝맺게 된다.

 

5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2번은 죽음에 대한 망상(첫 악장의 〈장례식〉)으로 시작되어 영생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에서 절정에 이른다(거대한 끝악장은 심판의 날을 묘사하고 18세기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클롭슈토크의

〈부활〉에 곡을 붙인 독창과 관현악을 위한 송가로 마침).

 

교향곡 3번 역시 독창과 합창을 포함하고 있으며 보다 규모가 큰 6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생명이 없는 자연에서

 인간의 자각과 구원적인 신의 사랑으로 연결되는 생명의 대사슬이라는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표현한다.

이들 작품에 있어 종교적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말러는 불안정한 초기 성장 배경으로 인한 심적 장애와 유대교 신앙에 대한 결핍으로 인해(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지만 자유사상가였음) 형이상학적 고뇌의 상태로 이끌렸으나 그리스도교로 귀의함으로써 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다.

1897년 세례를 받은 것은 빈 오페라 극장에서 직책을 쉽게 얻으려는 편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교로의

 귀의가 절실한 동기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그곳에서의 10년 동안 그는 보다 안정된 중기 창작시대를 맞았다.

 

새로운 신앙과 빈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이라는 안정된 직위는 충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원숙기를 가져다 주었고 알마

마리아 슈니들러와 결혼함으로써 그의 생활은 더욱 안정되었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1902년과 1904년에 태어난 두 딸이 있다.

 

 

 

 


 

중기 작품들

말러는 빈 오페라 극장, 그리고 한 동안 빈 필하모닉 연주회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아무도 다룰 수 없는 작품 해석과 새로운 연주 기준을 확립했다.

광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개인적인 사정은 완전히 무시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과 단원들을 몰아붙였기 때문에

그의 해직을 획책하는 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많은 순회 연주를 가짐으로써 유럽 각지에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작곡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알프스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는데 이는 오히려 끊임없는 정신적·신경적 에너지의 소모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허약한 체질에 견디기 힘든 이중 부담을 안겨주었다.

중기에 작곡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원숙기에 들어선 말러의 맹렬한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초기의 특성을 지닌 교향곡 4번만이 유일하게 예외에 속한다.

6악장으로 이루어진(결국 두 악장이 삭제됨) 이 작품에 포함된 피날레 악장은 원래 교향곡 3번의 한 악장으로 구상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천국에 대한 순박한 촌부의 생각을 나타낸 소프라노를 위한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이 곡은 분명한 표제와 합창없이 일반적인 교향곡에 가까운 면모를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 있어서 중기의 3대 교향곡인 5번·6번·7번 교향곡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교향곡들은 하드에지 추상화와 같은 선명한 색채감과 기하학적 도형미, 대위법적 명료성을 갖는 악기편성법을

보여주는 순수 관현악적인 작품이며 모두 표제의 사용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작품은 정신적인 갈등을 구현시키면서 종결부에 그 갈등의 해결을 이룩하고 있다.

5번과 7번 교향곡은(두 작품은 모두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음), 비록 빛이 사후세계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의 삶을 유쾌하게 하는 것이지만,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아간다.

 

이 두 작품 사이에 말러 자신이 〈비극적 교향곡 Tragic Symphony〉이라고 한 4악장으로 된 교향곡 6번 A단조가

 있는데 어렵게 암흑에서 벗어나서는 다시 완전한 밤으로 돌아간다.

 

이 세 교향곡 이후 그는 교향곡의 한 악장 전체나 일정부분에 자신의 가곡을 도입하는 것을 중단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나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Kindertotenlieder〉 등을 새로운 곡에 미묘하게 암시했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 그는 8명의 독창자와 2개의 합창단, 관현악을 위한 기념비적 작품인 교향곡 8번 Eb장조를 작곡했다.

말러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이 필요로 하는 많은 인원 때문에 이 교향곡은

천인의 교향곡 Symphony of a Thousand〉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작품은 후기작품 중

초기의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기법으로 전환해서 이것을 양식적으로 완성한 독자적인 작품이다.

 

이 곡은 합창과 관현악이 지속적으로 함께 등장하는 최초의 교향곡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나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나

이 작품은 인류의 염원에 대한 웅대한 표명이며 밝은 세상을 위한 외침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교향곡의 1악장에 해당하는 전체 2부분 가운데 첫번째 부분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오순절 찬미가인

〈생명의 창조주이시여 어서 오소서 Veni Creator Spiritus〉에 곡을 붙인 것이며 전통적인 교향곡의 3악장 형식을

합쳐놓은 것과 같은 2번째 부분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신비스런 마지막 장면(파우스트의 속죄 장면)을

가사로 채택했다.

 

이 작품 이후로 원숙기의 절정에 오른 말러의 자신감은 차츰 상실되었는데 6번 교향곡인 〈비극적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이미 예감했던 재난들이 〈천인의 교향곡〉 이후 계속 뒤따랐기 때문이다.

 

〈천인의 교향곡〉에는 처음으로 말러의 성격에 내재한 미신적 요소가 드러나 있다. 피날레에는 "운명은 영웅에게 3번의 타격을 가하는데 그중 마지막 타격에 영웅은 나무가 베어지듯이 몰락하고 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커다란 해머로 3번 내려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중 마지막 타격은 악보에서 빼버렸다.

 

후에 그는 이것을 1907년 자신에게 닥친 3번의 충격에 대한 전조로 생각했는데 그중 마지막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빈 오페라가 그의 사직을 요구했고 3세된 딸 마리아가 죽었으며

의사가 그의 치명적인 심장질환을 진단했던 것이다.


 

 

말기 작품들

1907년을 기점으로 그의 말기가 시작되었고 47세의 말러는 다시 여기저기를 옮겨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공연을 감독하고 뉴욕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가 되는 등 미국에서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새롭게 쌓아야 했다. 매년 여름 오스트리아의 시골로 돌아가 작곡했으나 1911년 결국 빈으로 돌아와 죽었다.

 

말기의 3대 작품은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 교향곡 9번, 완성되지 못하고(비록 사후에

연주용 완성판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전체에 걸친 포괄적인 스케치만 되어 있는 교향곡 10번 F#장조인데

말러는 이것들이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가운데 말러의 미신에 대한 성향이 다시 나타난 〈대지의 노래〉는 독일어로 번역된 중국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으로

시작하며 '테너, 바리톤(혹은 콘트랄토),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베토벤과 브루크너의 경우처럼

9번째 교향곡은 그 작곡자의 마지막 교향곡이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을 '교향곡 9번'이라고 부르려 하지 않았다.

 

그후 교향곡 9번의 작곡을 시작했을 때 그는 반농담조로 이 작품이 '실제로는 10번째' 교향곡이므로 위험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교향곡은 결국,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 되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교향곡 10번은 스케치로만 남았다.

말러의 가장 심오한 개인적 업적인 말기의 3대 작품들은 중기의 3대 작품들보다도

훨씬 더 과거로부터의 확실한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대인의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의 실재성(그의 경우 죽음의 문제가 가상의

사건으로 인식됨에 따라 그 대립으로 설정했던 종교적 신앙이파괴되었음)과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대지의 노래〉는 2부분으로 된 오라토리오 교향곡인 교향곡 8번과는 달리 6개 악장으로 된 연가곡 교향곡으로

냉소·탐욕·슬픔을 차례로 나타내는 베일에 가려진 시적 언어를 통해 인간 만사의 덧없음과 인간이 죽어서 볼 수는 없지만

계속되는 대지의 아름다움에 의해 받게 되는 슬픈 위안을 표현하고 있다.

 

4악장으로 구성된 순전한 관현악적 작품인 교향곡 9번에서 죽음에의 직면은 개인적인 고뇌가 되는데,

특히 마지막 악장인 〈론도-벌레스크 Rondo-Burleske〉는 말러의 가장 현대적이고 예언적인 악장으로

공포와 쓰라림을 불러일으키면서 가슴 아픈 체념의 절정을 이룬다.

 

파국을 암시하기 위해 장황하게 길게 끄는 예외적인 방법으로 음악 짜임새를 해체하는

이 작품의 피날레는 오랫동안 인간 존재에 대한 말러 최후의 언급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교향곡 10번에 대한 이해가 더해감에 따라 그가 이 곡에서 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의 다섯 악장들은 앞선 두 작품에서와 같은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피날레 끝 부분의 체념은 무척 평온하고

긍정적이라는 해석이 새롭게 일고 있다.


 

평가

현대 비평가들은 20세기에 들어와 일어난 음악의 대변화에 끼친 말러의 지대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20세기의 급진적 기법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한 요인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는 '경과적 조성'(처음 조성과는 다른 조성으로 작품을 끝마침)과 조성 해체(반음계적 진행이나

그 조에 속하지 않은 화성의 사용을 통해 조성에 대한 느낌을 모호하게 함), 전체 관현악의 영역 안에서 독주 악기 그룹에 의한 대위법적 짜임새로의 이탈, 단순한 주제의 재현보다는 지속적으로 주제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원리, 대중 양식과

 

일상생활에서의 자연 음향(새소리, 나팔 신호)에 대한 풍자적 인용, 리스트의 '순환' 기법(한 악장의 주제를 같은 작품의 다른 악장에서도 사용함)에서 응용한 교향곡의 새로운 형식적 통합 방법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