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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ahler - Symphony No.10 in F# major



 

 

 

 

 



 

Symphony No.10 in F# major

- Unfinished 

말러 / 교향곡 제10번 

Gustav Mahler, 1860∼1911

 

 

 


 

 

 

1악장: 아다지오

느리고 장대한 첫 악장은 비올라의 쓸쓸한 모놀로그 주제로 출발한다. 이어서 F#장조의 칸타빌레 주제가 떠오르는데, 넓은 음폭과 풍부한 화음을 지닌 이 장엄한 선율은 브루크너를 연상시킨다.

계속해서 피치카토 반주를 수반한 스케르찬도 주제가 나와서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악장은 이상의 세 가지 주제가 번갈아 등장하면서 느릿하게 흘러가다가, 후반부로 접어들면 어느 순간 a♭단조의 코랄이 터져 나와 충격을 안겨준다.

그리고 절정부에 이르면 9개의 음을 3도 간격으로 쌓아올린 강렬한 불협화음이 엄습한다. 이 고통스런 화음의 지속은 트럼펫이 길게 뽑아내는 절규와도 같은 A음으로 수렴되는데, 흔히 이 A음은 알마(Alma)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2악장: 스케르초

첫 번째 스케르초 악장으로 끊임없이 변전하는 박자와 복잡다단한 리듬들이 극도로 혼란스런 텍스추어와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중간부의 트리오는 전원풍의 렌틀러로 이루어져 있고, 뒤로 갈수록 주제들 간의 구분과 경계는 모호해지며, 마지막에는 모든 주제가 한데 모이다가 호른의 힘찬 용솟음 속에서 밝게 마무리된다.

3악장: 푸르가토리오

전곡 가운데 가장 짧은 악장으로 ‘연옥(Purgatorio)’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말러 자신의 가곡 ‘지상의 삶’을 연상시키는 기계적인 반주가 흐르고, 주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의 주인공을 나타내는 모티브와 유사하다. 악보에는 ‘죽음! 변용!’, ‘신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등의 메모가 적혀 있어서 당시 말러의 어지러웠던 심경을 말해주고 있다.

 

4악장: 스케르초

번째 스케르초 악장으로 왈츠 풍이며 일종의 ‘죽음의 무도’라고 할 수 있다. 구성적으로 2악장보다 더 복잡하며, 정서적으로도 더욱 심화되어 있다. 특히 <대지의 노래>의 첫 악장에 나오는 ‘기쁨도 노래도 시들고 사라지네’ 대목의 악구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이 악장의 표지에는 ‘악마가 나와 함께 춤춘다. 광기여, 저주받은 나를 데려가다오!’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또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명한 ‘머플드 드럼’(소리를 죽이기 위해 천으로 싼 큰북)의 첫 번째 타격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적힌 문구는 ‘그대만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아! 아! 아! 안녕, 나의 칠현금 연주(Saitenspiel)여, 안녕히!’이다.

알마는 이 큰북 타격이 1908년 뉴욕에서 보았던 소방사의 장례식에서 울려 퍼진 북소리와 관계가 있다고 했다. 아파트 창문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동안 눈물로 범벅이 된 말러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5악장: 피날레

첫 악장만큼이나 규모가 큰 악장으로 느리게-빠르게-느리게의 세 부분으로 나뉘며, 앞선 악장의 마지막에 나온 북소리를 이어받으며 시작된다.

처음에는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며 3악장의 ‘살로메 모티브’가 단편적으로 부각된다.

이어서 플루트 솔로가 투명한 음색으로 서정미와 신비로움이 깃들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작품의 결말을 암시하는 듯하다.

중간부로 넘어가면 말러의 마지막 투쟁이 펼쳐진다. 3악장에 나왔던 소재들이 어지러이 뒤엉키고, 1악장의 불협화음이 다시 터져 나온다. 절정부에서는 첫 악장의 모놀로그 선율이 호른에서 울려 퍼진다.

이제 투쟁과 갈등은 멀어진다. 말러는 이 마지막 대목에 화해와 평화를 향해서 나아가는 ‘위대한 사랑의 송가’를

써넣었다.

말러가 알마를 향해 썼던 최초의 연가인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 나아가 그 근원인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을 환기시키는 이 에필로그는 말러가 꿈꾸었던 ‘궁극의 승리’를 형상화한 듯하다.

그 코다의 시작 부분에는 ‘그대를 위해 살고! 그대를 위해 죽으리!’라고, 마지막 비상 부분에는 ‘알름슈(Almsch, 알마의 애칭)’라고 적혀 있다.

 

 

 

 

 

 

 

 

말러 교향곡 10번은 작곡가가 별세하기 1년 전인 1910년 여름에 작곡되었다. 작곡 도중 부인 알마가 온천 휴양지에서

그로피우스라는 젊은 청년과 외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실수인지 고의인지 겉봉에 ‘지휘자 말러에게’라고 적힌 그로피우스의 러브레터가 도착했고 말러는 이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 알마를 사모하는 청년이 말러 부부의 집을 방문했고 말러는 성경을 읽으며 “무엇을 택하든 그대로 될지니 이제

 고르라!”라고 말했다.

 알마는 자비롭게도 남편을 택했으나 이 사건 때문에 말러는 자신의 아내를 젊은 그로피우스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었다.

20세기의 해몽가 프로이트를 찾아가 상담을 받으며 점차 안정을 찾아가던 말러는 1911년 심장판막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 끝에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말러의 사후 교향곡 10번의 운명은 결국 알마의 손에 넘겨졌다.

그녀는 1924년 사위인 작곡가 에른스트 크셰넥에게강압적으로 부탁하여 1악장과 3악장을 완성하도록 했다.

 

그 후 미완성 스케치는 작곡가가 아닌 음악학자 혹은 작곡가들에게 뿌려졌고 그 중 영국의 말러 학자 데릭 쿠크가 가장

빠른 완성을 보았다.

1960년 BBC 방송국은 말러 서거 50주년을 맞아 말러 특집 방송을 기획했고 데릭 쿠크의 판본이 12월 19일

골트슈미트의 지휘로 방송되었다.

알마가 돌연 마음을 바꾸어 강력한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으나 여러 지인의 노력 끝에 결국 거부권이 철회되었다.

 알마가 방송 녹음테이프로 10번 피날레를 감상하던 도중 눈물을 쏟으며 감동했기 때문이다.

알마는 그로부터 1년 후 영면에 들어갔고 그녀의 사망을 계기로 10번에 관한 더 많은 스케치가 발견되었다.

 

이 자료가 데릭 쿠크에게 전달되어 새로운 버전이 1964년 8월 13일 초연되어 교향곡 10번에 온전한 새 생명이

부여되었다

 

말러는 제10번 교향곡의 첫 악장만을 완성한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는 5개의 악장으로 구성 될 예정 첫 악장만이 완성되있고 나머지 악장들은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

후에 영국의 데릭 쿡과 다른 여러 음악가들에 의해 편곡되어 5개의 악장 전체가 연주되기도 하지만 몇몇 지휘자들은

 여전히 말러가 완성한 1악장만을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알바 말러

 

 

1911년 5월 18일, 구스타프 말러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서랍 속에는  발표되지 못한 작품 세 편이 남아 있었다.

그중 두 편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으로, 각각 1911년 11월 뮌헨과 1912년 6월 빈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반면 나머지 한 편은 미완의 토르소(torso)로 남겨져 있었는데, 오늘날 교향곡 10번으로 알려진 이 작품이 빛을 보기까지는 무척 길고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문제는 말러가 남겨 놓은 악보가 너무도 불완전하다는 데 있었다. 전체 다섯 개 악장 가운데 첫 악장을 제외하면 그 자체로는 연주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잠시 작곡이 진척된 정도를 살펴보면, 일단 1악장만은 관현악 총보로 끝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가 부족하여 세세한 템포 지시, 악상 기호, 다이내믹 및 프레이징 표시가 누락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목관 파트의 공백이 길게 이어지는 등 관현악법 면에서도 성긴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그대로 연주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악장들은 사정이 달랐는데, 2악장과 3악장은 관현악 총보가 남아 있되 일부만 작성되어 있었고, 4악장과 5악장은 그 이전 단계인 약식 총보까지만 진행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여름휴가였던 1910년 8월 이후 작업을 진척시키지 못한 말러는 자필 악보를 파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그러나 유산 상속자였던 그의 아내 알마는 남편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방황하는 유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알마는 둘째 딸 안나의 두 번째 남편인 작곡가 에른스트 크레넥(크셰네크)을 부추겨 상대적으로 진척이 많이 된 1악장과 3악장에 대한 보필 작업을 수행, ‘연주용 악보’를 마련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말러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알반 베르크가 악보 교정을 도왔고, 알마는 전체 스케치 가운데 116쪽 분량을 추려 팩시밀리 출판본의 형태로 출판하기도 했다. ▶알마

1924년 10월 12일 빈에서 크레넥이 보필한 두 악장이 프란츠 샬크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얼마 후에는 말러의 후배였던 쳄린스키도 프라하에서 같은 악장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말러의 제자였던 브루노 발터는 유감을 표명했고, 한 비평가는 알마를 비난했다. 말러의 유지를 저버린 행위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후 교향곡 10번은 오랜 동면에 들어갔다가 1940년대에 가서야 다시 깨어나게 된다. 이번 목표는 다섯 악장 전체에 대한 보필을 수행하여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었는데, 이 무모한 작업을 추진한  미국의 열광적인 말러 애호가 잭 디더였다.

그는 먼저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말러를 존경했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에게 편지를 보내 정중히 부탁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말러의 정신세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라며 고사했다. 이제 자필 악보는 무명 작곡가들과 음악학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바로 미국의 클린턴 카펜터, 독일의 한스 볼슐레거, 영국의 조 휠러, 데릭 쿡 등이었다.

 

 

 

 

데릭 쿡의 작업

이 가운데 BBC의 음악방송 프로그래밍 담당자였던 데릭 쿡(Deryck Cooke)은 독일에서 건너온 지휘자 베르톨트 골트슈미트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부지런히 매달려 작업을 가장 먼저 마무리 지었다. 쿡이 마련한 ‘5악장 연주용 판본’은 1960년 12월 19일, 말러 탄생 100주년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골트슈미트가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연주되어 방송 전파를 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알마가 거부권을 행사하고 나섰다. 이 곡이 ‘말러가 자신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와도 같은 작품’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의 거부권이 해를 두 번이나 넘기도록 지속되자 BBC 방송 녹음테이프를 지참한 관계자들이 그녀를 만났고,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자 그녀는 이내 설복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공연을 허락한다는 편지와 함께 40쪽 분량의 미공개 스케치를 쿡에게 보내 보필을 부탁했다.

이후 쿡은 알마가 추가로 보내준 악보들을 포함시켜 1964년에 첫 번째 ‘완전판’(1판)을 선보였다. 그리고 1972년에는 영국의 작곡가인 매튜스 형제와 협력하여 알마 사후에 공개된 자필 악보 전체를 검토한 후 기존의 팩시밀리 출판본에서 제외된 부분들까지 반영하여 두 번째 판본(2판)을 내놓았다.

다만 쿡은 출판된 스코어의 서문에서 자신이 ‘말러의 10번’을 완성한 것은 아니며 단지 ‘연주 가능본’을 마련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쿡은 1976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악보를 다시 출판했고, 1989년에는 그의 유지를 받든 골트슈미트와 매튜스 형제에 의해 세 번째 판본(3판)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스타프 말러와 알마 말러

 

 

 

전향적 시각

현재 이 작품의 ‘5악장 판본’은 데릭 쿡 외에도 클린턴 카펜터, 조 휠러, 레모 마제티 주니어, 루돌프 바르샤이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중에서 말러 애호가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판본은 하나도 없다. 누가 감히 말러의 작품을 대신 ‘완성’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까닭에 다수의 저명한 말러 전문가들은 ‘5악장 판본’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너드 번스타인, 클라우스 텐슈테트,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같은 지휘자들이 1악장만을 다룬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으리라. ▶구스타프 말러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서 ‘5악장 판본’에 대한 전향적 시각이 차츰 확산되는 추세인 듯하다. 과거에는 1악장만을 인정했던 엘리아후 인발, 미하엘 길렌과 같은 지휘자들이 데릭 쿡의 판본을 수용한 것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사실 말러의 작은 유품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팬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의 단편들을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그의 음악이 늘 그러하듯, 여기서 생애의 마지막 노정을 걷고 있던 무렵 그의 생각과 감정, 예술혼이 투영된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화에는 근현대예술사를 주름잡는 유명 인사들의 칵테일 파티라 정도로 역사적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말러 주변 인물, 특히 알마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영화의 줄거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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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의 외도

1910년 여름, 말러는 티롤 남부 지방의 토블라흐에서 마지막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교향곡 10번을 작곡하면서 9월에 뮌헨에서 거행될 교향곡 8번의 초연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알마는 요양 차 그라츠 근처의 온천지 토벨바트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젊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로피우스가 알마에게 춤을 청한 직후 두 사람은 마치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 나오는 발터와 에바처럼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알마는 유부녀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그로피우스는 현대건축의 산실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현대 건축계의 거장이다. 알마 말러는 말러 사망 5년 뒤 1916년에 그로피우스와 결혼하였다.

말러가 50번째 생일을 혼자서 보낸 일주일 후 알마는 토블라흐에 도착했다. 그리고 7월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그로피우스가 알마에게 보내는 연서 하나가 도착했다. 그런데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겉봉에 적힌 수신인은 알마가 아니라 ‘말러 감독’이었고, 피아노 앞에서 봉투를 뜯어본 말러는 경악했다.

말러는 아내의 외도를 추궁했지만, 알마는 오히려 남편의 강압과 무관심 때문에 피폐했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며 항변했다. 큰 충격을 받은 말러는 “모든 게 내 잘못이오!”라고 소리치며 흐느꼈고, 그 후 부부는 착잡한 심경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얼마 후 더 심각한 사건이 터졌다. 알마의 응답을 기다리던 그로피우스가 급기야 토블라 흐로 찾아왔던 것이다. 삼자대면이 이루어졌고, 말러는 모든 결정을 알마에게 맡기고 자리를 떴다. 알마는 (당분간) 말러의 곁에 남기로 했지만, 말러는 그 사건 이후로 아내를 그로피우스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노이로제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가 작곡한 가곡을 연주하고 출판을 주선하는가 하면, 유명한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를 찾아가 상담을 받기도 했다. 교향곡 10번의 작업은 거기서 중단되었고,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던 말러의 생명력은 그렇게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말러의 오두막 별장(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인근 잘츠캄머굿 호수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한 여정

이 교향곡의 자필 악보에는 여기저기 말러가 끄적인 메모들이 남아 있다. 그 메모들은 ‘필생의 연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힌 한 예술가의 절망과 갈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러에게 있어서 알마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가 프로이트를 만난 직후에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두 딸 안나 마리아와 안나 유스티나와 함께한 알마 말러(1906). 첫째 딸 안나 마리아는 1907년에 사망했는데, 말러는 1905년에 발표한 연가곡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가 딸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여겨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혔으며, 이때부터 심장병을 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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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요하네스 질버슈나이더)에게 최면을 걸고있는 프로이트 박사

(카를 마르코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