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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Nana Mouskouri-Plaisir d'amour(사랑의 기쁨)

 

 

 

 

 

 

 

                                                                            

 

 

 

Nana Mouskouri-Plaisir d'amour(사랑의 기쁨)

 

 

 

 

Plaisir d'amour(사랑의 기쁨)

 

 

 

Plaisir d'amour ne dure qu'un moment
Chagrin d'amour dure toute la vie.
Tu m'a quitte pour la belle Sylvie,
Elle te quitte et prend un autre amant.

Plaisir d'amour ne dure qu'un moment,
Chagrin d'amour dure toute la vie.

"Tant que cette eau coulera doucement
Vers ce ruisseau qui borde la prairie,
Je t'aimerai", te repetait Sylvie.
L'eau coule encore, elle a change pourtant.

Plaisir d'amour ne dure qu'un moment,
Chagrin d'amour dure toute la vie.

 

사랑의 기쁨은 잠시 한순간 뿐
사랑의 슬픔은 일생동안 지속됩니다.
당신은 냉정한 실비아를 위해 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른 연인을 찾아 당신을 떠났죠

사랑의 기쁨은 잠시 한순간 뿐
사랑의 슬픔은 일생을 지속됩니다.

이 강물이 초원을 따라 시냇물로 조용히 흘러가는 한
그처럼 당신을 사랑할거라고 그녀는 되풀이하며 말했죠.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있건만 그녀는 변해버렸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잠시 한순간 뿐
사랑의 슬픔은 일생동안 지속됩니다.

 

 

 

 

 

 

 

 

Plaisir D'amour(사랑의 기쁨) 독일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 장 폴 에지드 마르티니(Jean Paul Egide Martini)
Jean-Pierre Claris de Florian(1755-1794)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며, 그 시절 음악가들이 대개 그랬듯이 마르티니도 유럽각국을 배회하며 활동을 했다.

 

원래 이곡은 이태리어로 된 오페라 중의 아리아 인데 이태리어로는 "Piacer d'amor"이고, 곡제는 "사랑의 기쁨"이지만
내용을 보게 되면 제목과는 사뭇 다르다.

 

 어떤 여인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절함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엉터리 전도사의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편 샹송 가수들도 이곡을 많이 불러, 이곡을 샹송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 성공회 사제인 존 뉴턴의 자전적 삶을 가사화한 것이며, 작곡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일랜드 혹은 스코틀랜드의 민요에 붙여 불렸다거나 19세기 미국 남부에서 작곡되었다고 하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존 뉴턴은 1725년 영국 런던에서 상선을 탔었던 카톨릭교도인 아버지와 독실한 개신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으나, 그가 겨우 6세였을 때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 후 아버지가 바다에 가 있는 몇 년 동안은 사이가 좋지 못한 계모의 손에 자랐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선원 학교에
한동안 다녔다.

 

11살 때부터 존 뉴턴은 상선의 선원인 아버지를 따라 도제로 배를 탔으며, 여러 곳을 다녔다. 특히 그는 흑인노예를

수송하는 소위 노예무역에 종사했다.

 

당시 노예로 납치된 흑인은 가축 이하의 대우를 받았고,수송선의 위생상태가 열악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영양실조와 갖은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존도 노예에 대한 이러한 대우를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22세일 때 전기를 맞이한다.

선장이 된 그는 배가 폭풍우를 만나 좌초될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에 그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게 된다. 모친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어도, 이전까지 마음에서 우러난 기도는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배는 기적적으로 폭풍우를 벗어났으며 무사히 귀선한다.

그는 이날을 제2의 탄생일로 생각했다.

그 후 6년간 노예무역을 계속하지만, 노예의 처우를 비약적으로 개선했다고 한다.

 

 

존 뉴턴은 1755년 병을 이유로 하선하였고, 면학에 매진해 성공회 사제가 된다.
1772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을 썼다.

이 곡은 흑인 노예무역에 관여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죄를 사하여 준 신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곡 외에도 존 뉴턴 사제가 작사한 찬송가가 몇 곡이 남아있다.

'문명화 된 다섯 인디안 부족'이라고 평가 받은 부족인 체로키 부족도 이 노래를 애송하였다.

1838년에 시행된 미국의 인디언을 보호구역에 강제로 이동시키는 정책으로 체로키 부족민 중 약 4천 명이 사망하였다.이 힘든 이주 도중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체로키어로 번역된 이 노래가 불렸고, 이후 체로키의 애국가가 되었다.

 

 

 남북전쟁 기간에도 이 노래는 남북 양군에 의해 불렸다고 한다.

가스펠 수퍼스타인 마헬리아 잭슨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으며, 그녀의 노래는 오랫동안 유명세를 유지하였다.

 

흑인 시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반전 운동에도 어김없이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불렸다.

 

 

 

 

 

Try To Remember - Nana Mouskouri
 

 

 

본명은 Ioanna Mouskouri (이오안나 무스꾸리)로 1934년 10월 13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천상의 목소리로 불리는 세계적인 가수입니다

'아테네의 흰 장미' 라고도 불리죠!

그녀의 성공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은 <하얀 손수건(Me T'aspro Mou Mantili)>이 수록된 앨범이었습니다.

그동안 450여 장의 앨범을 발매, 350여 장을 골드앨범 또는 플래티넘 앨범에 등극시킨 나나 무스꾸리는 팝 역사상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여성가수로 기록(3억장이 넘는 경이적인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녀의 음악은 영화, 드라마의 러브 테마곡으로 사용되어 국내에서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SBS 드라마 하늘이시여(2005년 방영)의 자경이 부른 노래도 나나무스꾸리의 Plaisir D'Amour (사랑의 기쁨) 입니다.


 어릴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녀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졸업을 얼마 앞두고 그 당시 유행하던 포크, 재즈, 로큰롤에 심취하게 된
그녀는 대중음악 가수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 독일에서 싱글( 하얀 손수건 )과(아테네의 횐장미)를 발매한 그녀는1백 2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어 사운드 트랙인 (Never on Sunday)를 발표하며 정상의 인기를 누렸고요..


1964년 해리 벨리폰테의 초청으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처음 공연을 가진 그녀는 미국 팝 팬들로부터 많은 환호와 갈채를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최초로 흑인 가수와 공연한 백인 여성으로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죠..


그 후 오리지널곡과 리바이벌곡 등을 노래한 그녀는, 많은 고정 팬들을 확보하며 포크 가수와 가스펠 가수로의 위치를

 확고히 했습니다.
그녀는 80년대로 접어들면서도 꾸준히 앨범들을 발표했으며

다이어스트레이츠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Why Worry)와 베트 미들러의 (The Rose), 케니 로저스의

 (Sweet Music Man)등을 나름대로 리메이크하여 음악팬들로부터 원곡 못지않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Song For Liberty)를 발표했을 때는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로 부른 작품이

 꾸준히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4~1999년까지는 유럽의회의 의원으로도 활동합니다.


사전에도 나와있듯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여 추방되는 박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1997년에는 가수 40년 기념 공연을 가졌으며, 2005년에서 2008년 사이에는 전 세계 곳곳을 순회하면서 인생 마지막 공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흰 장미의 은은한 향기

 

 


검은 테의 안경을 걸친 그녀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갈 데 없는 여학생~~
청순하고 이지적인 품위를 보이고 있지만 결코 빼어난 미모라고 말하긴 어려운 용모다.
그러나 그 독특한 마스크와 가냘픈 몸매와 그것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목소리와 조화될 때, 아무도 그녀를

 가리켜 결코 평범한 여가수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나나 무스꾸리
마치 푸르른 초원에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을 연상시킬 만큼 신선하다.
그녀의 그 이미지와, 그리고 우리들과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친숙해 온 '하얀 손수건' '여름의 마지막 장미' '아테네의

흰 장미'를 들으면서 그녀가 어느새 고희를 넘긴 72세나 되었다고 생각하는 팬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나나 무스꾸리의 이미지는 소박하고 청순해서 세속과는 저멀리 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나 무스쿠리와 같은 가수는 목소리의 아름다운 추억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을 뿐,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아로새긴 현실의 모습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녀는 분명히 금세기 최고의 가수 중의 한 사람이다.

나나 무스꾸리는 그리스 아테네의 어느 작은 영화관에 근무하던 영사기사의 딸로 1934년 10월 13일에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넉넉치 못했지만, 조촐하고 평화로운 살림이었고 의좋은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음악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영사 기사였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관 뒤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인생은 나의 꿈이었다.

 

특히 뮤지칼 영화에 나오는 노래들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집으로 들아와 내가 본 영화의 주인공을 흥내내면서 마음껏 소리를 높여서 노래를 부르고 가사를 외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녀는 기어이 노래로 성공해 보겠다는 의지를 품었었던 것 같다.
나나 무스꾸리는 처음에는 오페라 가수를 지망하여 성악도로서의 재질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음악원의 졸업 시험을 눈앞에 둔 어느날,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음악에 넋을 잃고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에게 새로운 음악세계가 열렸다고나 할까.
후일 나나 무스꾸리의 술회를 보면 '갑자기 밝은 햇빛이 비친 듯 나의 음악 세계가 눈부시게 밝아진 느낌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녀가 하이틴 시절에 강렬하게 이끌린 것은 오페라의 세계가 아니라 재즈 음악이었다.
15세 되던 해,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신 라디오로 아테네 방송의 재즈 프로를 듣는 것이

나의 첫 일과였다.

때문에 음악원의 공부시간에는 몰려드는 잠을 쫓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노래들을 노트에 채보하면서 노래 공부에 열중했다.

나는 정말 학교 공부는 젖혀 놓고 재즈에 미쳐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 듀크 엘링턴의 재즈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물론 죠니 미첼 ·죤 바이에즈의 포크송도 무척 즐겼고, 자크 브렐이나 조르지 브라상, 레오 페레 같은 샹송 가수들은

우상이기도 했다.
나에게 이 기념할 만한 라디오는 지금도 어머니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결국 나나 무스꾸리의 남달리 적극적이고 민감한 예술적 감각은 그녀를 아테네 음악원의 이단아로 만들고,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상황을 낳게 한다.

 

학생의 신분으로 대중가수에 뜻을 두고, 아테네 라디오방송국에서 소편성의 밴드가 반주하는 유행가를 노래한 사실이

 물의를 일으켜 규율이 엄격한 음악원 측에서는 그녀의 졸업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한 것이다.

흔히 '오페라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마리아 칼라스도 아테네 음악원에서 로시니의 오페라로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명가수히달고에게 사사한 경력을 갖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나나 무스꾸리의 퇴학은 어쩌면 마리아 칼라스를 이을 인재를 잃은 반면, 유로 팝스의 역사상 불후의

위대한 스타를 탄생시킨 전화위복의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수년간 나나 무스꾸리에겐 기약 없는 무명의 나이트 클럽 가수 시대가 계속된다.

이 고달프고 기나긴 슬럼프에서 그녀를 구해낸 사람이, 그녀의 평생의 은인이며 친구가 된 위대한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였다.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영화 '페드라' '희랍인 조르바'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더불어 현대 그리스 음악계의

 최대의 거인으로 손꼽히는 작곡가로, 1960년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Never on Sunday'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최초의 외국인이었다.

1959년,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아테네의 한 작은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부르고 있는 이 가냘픈 몸매의 무명가수 나나

 무스꾸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대성할 자질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마노스하지다키스 같은 대작곡가의 작품으로 그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나 무스꾸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수였다.
그녀는 1960년 9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지중해 가요제'에 그리스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의 그랑프리를 획득, 새로운 스타로 탄생하여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가 부른 곡이 마노스 하지다키스 작곡의 '아테네의 흰 장미'였다.

 그녀의 인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이다.


나나 무스꾸리를 놓고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있다. 프랑스 '필립스 레코드'의 디렉터 루이 아장이다.

그는 나나 무스쿠리의 매력을 발굴하여 대스타로 만드는 데 공헌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당시를 루이 아장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의 공개 이후, 영화에서 부둣가 창부 역의 멜리나 메르쿠리가 흥얼거린 주제가의 인기는 파리를 뒤흔들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곡을 따라 불렀고, 독특한 울림을 전해 주는 그리스의 민속악기 부주키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에서 전해 오는 음악 중에는 보다 색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의 레코드사에 연락해서 그곳 가수들의 샘플 레코드를 부탁해 직접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며칠 뒤 산더미 같은 레코드가 그리스에서 도착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듣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게다가 멜로디가 꽤 아름다운 곡이 몇 곡인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단조롭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지루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전에 전혀 들어 보지 못했던 새릅고 신선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넋을 잃고 어느새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도취되었다. 얼마나 맑고 투명한 목소리인가! 누구의 노래일까?
그리스 어를 약간 아는 내 처 오딜이 레코드를 듣고 가수의 이름을 읽었다.
나나 무스꾸리~그러나 그녀는 우리들에게 전혀 미지의 인물이었다.

 

우리는 곧 바캉스를 취소하고 때마침 열리고 있는 에레니크 가요제에 참석하기 위해 아테네로 향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미 무대에 나타나기를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던지 지금도 나는 그때 일을 잊지

못한다.


아름답고 자신에 찬 미녀가수들이 무대에 나타날 때마다 나나 무스꾸리가 아닌가 하며 가슴을 두근거렸으나, 번번이

 나의 기대는 어긋났고 그럴수록 초조감은 더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드레스로 몸을 감싼 한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에 코 위에는 안경을 걸친 그녀는 겨우 40킬로그램을 넘을 듯한 가냘픈 몸매를 한 볼품없는

여성이었다.


설마 저 촌스런 아가씨가 나나 무스꾸리는 아닐 테지~~
그러나 그녀가 수줍은 듯한 몸가짐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드디어 만났던 것이다. 나나 무스꾸리 를~~


나나 무스꾸리는 이때부터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 연주여행을 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196l년 아테네에서 나나 무스꾸리를 만난 해리 벨라폰테는 3년후인 1964년 그녀를 미국에 초청했다.

 

넓은 미국 무대에의 데뷔는 나나 무스쿠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꿈이었지만, 인종 분규가 절정에 이르렀던 미국사회의

분위기는 흑인 가수와 함께 무대에 서는 백인 여성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들의 숱한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흑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와 공연한 유일한 백인 여성으로,

카네기 홀을 비릇한 미국 각지의 대학 캠퍼스와 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져 대단한 환영과 절찬을 받았다.
그녀는 미국을 정복하였던 것이다.

 

그 후 나나 무스꾸리는 계속해서 그 소녀와도 같은 가련함, 그러면서도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풍모와 섬세한 목소리를

 과시하면서 숱한 히트송들을 발표해 왔다.
'로즈 Die Rose' '나부코 Nabuco' 등 FM 방송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그녀의 노래들은 모두 그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잊을 수 없는 주옥과 같은 히트 송들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다른 연예세계의 스타들처럼  스캔들과 이혼 경력이 전혀 없는 정숙한 현모양처로써 격을 높이고 있다.

 하나의 여자로서 그리고 가수로서의 행복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그녀는 '아테니안스 Athenians'의 리드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남편 조르지 페실라스와의 사이에 세 딸을 두고 있다.

 

 

그동안 450여 장의 앨범을 발매, 350여 장을 골드앨범 또는 플래티넘 앨범에 등극시킨 나나 무스꾸리는

팝 역사상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여성가수로 기록(3억장이 넘는 경이적인 기록)되고 있다.

특히 그녀의 음악은 영화, 드라마의 러브 테마곡으로 사용되어 국내에서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것이다


 

 

 

 

 

 

 

 

 

 

 

 

검은 뿔테안경에 긴 생머리, 흰 드레스, 청아한 목소리, 나나 무스꾸리1934년 그리스에서 태어났으며, 극장의 영사

기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무수한 영화를 보며 자랐다.

 

16세 때 아테네 음악학교에 입학해 성악을 전공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밴드에서 일하게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 무렵 그리스의 유명한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눈에 띄어 1958년 음반을 발표했고 이듬해 ‘그리스 음악제’에서

 대상과 차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지중해 음악제’에서도 대상을 받은 나나 무스꾸리는 유럽으로 진출했다.

독일에서 낸 음반이 밀리언 셀러가 되었고, 여러 영화의 주제곡을 불렀다.

 1962년에 퀸시 존스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앨범을 냈으며 파리에 정착한 뒤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해리 벨라폰테와 함께 미국에서 긴 순회공연을 하고 라이브 듀엣 앨범을 냈다.

1969년 영국에서 낸 음반 빅 히트를 기록했고, 1971년엔 6개의 황금 음반을 기록함과 동시에 모든 영어권 국가에서

 그 해 최고의 가수로 뽑혔다.

 

1984년엔 20여 년만에 고국 그리스에서 공연을 갖고 그리스어 앨범을 발표했다.

그녀는 클래식과 재즈, 전통음악, 샹송, 팝, 종교음악 등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활동을 해왔다.

 

총 4억 장 이상의 앨범이 판매된 세계적인 아티스트로서, 나나 무스꾸리골든 디스크 300회 수상 기록을 세워

음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Master Serie, Vol. 1 and 2Chants De Mon Pays

 

 

Moni Perpato Tierra V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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