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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The Rolling Stones - As Tears Go By , Paint It Black












 
The Rolling Stones - As Tears Go By






As Tears Go By




It is the evening of the day,
I sit and watch the children play.
Smiling faces I can see
But not for me,

저녁무렵.. 난 앉아서 어린아이들이
나에겐 있지도 않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 놀고 있는걸 봤지...
그러나 나는 그럴수 없었어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My riches can't buy everything,
I want to hear the children sing.
All I hear is the sound
Of rain falling on the ground,

나는 주저 앉아서
눈물이 뺨으로 흘러 내리는것을 보았지
내가 가진 것(:)으로는 모든것을 얻을순 없었지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듣고 싶군...
내 귀에는 땅을 적시는 빗소리뿐이었어...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It is the evening of the day,
I sit and watch the children play.


Doing things I used to do
They think are new,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저녁무렵 주저 앉아
아이들을 지켜볼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
아이들에겐 새로운것이었지만
내가 예전에 하던 놀이들을 하는 모습을 보았을때...
나는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어...






 






Paint It Black




I see a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no colours anymore I want them to turn black.
I see the girls walk by dressed in their summer clothes,
I have to turn my head until the darkness goes.

빨간 문을 본답니다. 전 그것을 검게 칠하고 싶어요
검은 색외의 다른 색들은 필요 없답니다
여름옷을 차려 입은 소녀들이 걷는 것을 본답니다
어둠이 가기전까지 고개를 돌려야 하지요.



I see a line of cars and they're all painted black,
with flowers and my love, both never to come back.
I see people turn their heads and quickly look away,
like a newborn baby it just happens every day.



늘어선 차들을 본답니다. 그것들은 모두 검은 색이지요
사랑과 꽃을 가졌지만 모두 돌아올 수는 없지요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것을 보지요
신생아들처럼 그런 일들은 일상적이죠.



I look inside my self and see my heart is back,
I see my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Maybe then I'll fade away and not have to face the facts,
it's not easy facing up when your whole world is black.



제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이 돌아서는 것을 느끼지요
제 빨간 문을 바라보며 그것을 검게 칠하고 싶어하지요
저는 사라지겠지만 그 사실들은 외면할 수는 없지요
당신의 세상이 절망스러울 때 그것을 인정한다는 건 쉽지 않지요



No more will my green sea go turn a deeper blue,
I could not foresee this thing happening to you.
If I look hard enough into the setting sun,
my love will laugh with me before the morning comes.



제 바다는 더 이상 푸르지 못하죠
당신에게 일어날 일들을 알 수 없어요
해돋이를 보지 못한다면
아침이 오기전 사랑은 나를 비웃겠죠



I see a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no colours anymore I want them to turn black.
I see the girls walk by dressed in their summer clothes,
I have to turn my head until my darkness goes.



빨간 문을 본답니다. 전 그것을 검게 칠하고 싶어요.
검은 색외의 다른 색들은 필요 없답니다
여름옷을 차려 입은 소녀들이 걷는 것을 본답니다.
어둠이 가기전까지 고개를 돌려야 하지요.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의 밑그림을 고수하면서 갖가지의 색채와 작법을 구사했고 매번 각기

 다른 패러다임을 도입하려했다.


 롤링 스톤스를 단순히 로큰롤 밴드로 한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운드의 너른 스펙트럼으로 장식된 이들의 행적이야말로 시대 흐름의 흔적이자 팝 음악의 또 다른 실록이기 때문이다.

 

글 | 이즘

 

 

스마트 폰,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전화나 문자 등 기존 휴대전화의 기능은 물론이고 인터넷과 카메라, 여기에 신문과 도서, 영화까지 세상의 모든 걸 손바닥 만 한 몸체로 몽땅 담아낸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스마트폰 천지, 이만하면 하나의 시대 트렌드라고도 할만하다.

 

느닷없이 스마트 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런 ‘스마트’한 세상에 웬 고릴라 한 마리가 느닷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긴 혀를 늘어뜨린 그 모습이 참으로 위협적인데, 가만 보자.

어쩐지 낯이 익다.


두툼한 두 입술과 그 사이로 쑥 내민 긴 혓바닥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인데 흡사 존 파셰(John Pasche)

가 디자인했던 롤링 스톤스의 빨간 입술 로고(The tongue-and-lips)와 닮지 않았는가.





 

 


고릴라는 바로 50주년 베스트 앨범을 출시하며 위대한 밴드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내놓은 광고 캐릭터다.

그런데 이 녀석, 단순히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녀석이 아니란다.

 여기에는 밴드의 장난스런 유머가 담겨있으니 이것이 곧 핵심 포인트, 밴드의 공식 사이트에 게시된 카메라 어플리케이션으로 고릴라를 비춰보면 휴대전화 속에서 불쑥 살아나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계 50개 도시의 유명 건축물을 비춘 화면 속에서도 나타나 난장을 피우니, 이를 기획한 발상이 참으로 기발하다.

(서울 광화문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눈앞의 입체 영상에 신기해하다가 문득 롤링 스톤스 네 할아버지들의 나이가 떠오른다.

두 중심멤버 믹 재거(Mick Jagger)와 키스 리처드(Keith Richards)는 예순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1943년생이고

맏형인 드러머 찰리 와츠(Charlie Watts)는 둘보다 두 살이 많다.


 숫자상으로는 무릇 시대감각에 뒤처지는 나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여전히 트렌드의 중심에서 노익장을 과시한다.

그렇게 보내온 이력이 50년, 딱 반세기의 장구한 세월이다.

무엇이 이들의 무한 질주를 가능케 했을까. 구르는 돌의 원동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쯤 되면 궁금증이 솟는다.

 

돌이켜보면 밴드의 행보는 언제나 당대의 유행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1960년대 영국의 브리티시 블루스(British Blues)부터 시작해 비틀스를 위시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이후의 조류인 사이키델릭의 혼란 속에서도

롤링 스톤스라는 두 단어는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하드 록의 강렬함이 세상을 지배하던 1969년 말은 이들의 완력이 정점에 자리한 전성기였고 펑크(funk)와

 디스코가 뒤흔든 1970년대에는 댄스 록의 일인자로서 자신들의 위상을 증명해냈으니 롤링 스톤스는 매번 시대의 가운데에 서있던 셈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가 아닌 ‘역사상 가장 기민한 로큰롤 밴드’라는 말로도 이들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어 남다른 면모를 보인 밴드였다.


 특히 이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특이한 역작이라 할 수 있는 1967년의 < Between The Buttons >는 비치 보이스의 < Pet Sounds >와 비틀스의 < Revolver >로 귀결되는 사이키델리아의 기조를 포착해낸 것이었으며, 밴드에게 또 다른 전성기를 안겨주었던 1970년대의 걸작 < Some Girls >와 < Emotional Rescue >는 당대에 성행했던 조지 클린턴

(George Clinton) 식의 펑크(funk) 문법과 디스코 라인의 전개 방식을 흡착한 결과물이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의 밑그림을 고수하면서 갖가지의 색채와 작법을 구사했고 매번 각기

 다른 패러다임을 도입하려했다.

 롤링 스톤스를 단순히 로큰롤 밴드로 한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운드의 너른 스펙트럼으로 장식된 이들의행적이야말로 시대 흐름의 흔적이자 팝 음악의 또 다른 실록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밴드가 드러낸 한계점 또한 여기에서 기인한다.

 ‘세계 최고의 밴드’라는 위명(偉名)을 가졌음에도 이들의 뒤에는 ‘2등 밴드’라는 애석한 꼬리표가 함께 해왔다.

앞서 제시했던 이들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 롤링 스톤스의 위치는 선발주자보다는 대체로 후발주자에 가까웠다.


본격적인 신호탄을 쏘아 올렸던 브리티시 인베이전에서의 성과는 비틀스의 성공을 힘입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구체적으로

앨범을 예로 들면 1967년의 사이키델릭 작품 <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의 경우 비틀스의 매그넘 오퍼스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의 기세를 급히 좇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틀스 시대 이후에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밴드는 창조를 통한 표출보다는 흡수를 통한 자기화라는 가공 과정에 근접한 모습을

보였다.


< Exile On Main Street >으로 마무리되는 황금기 이후에 나타났던 팝 친화적인 시도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비판의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엄밀히 말해 이들은 트렌드 세터(Trend-setter)가 아닌 트렌드 체이서(Trend-chaser)였다.

 

롤링 스톤스의 성공은 그러나 트렌드 체이서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철저히 가두는 높은 성벽을 쌓기보다는 외부의 다른 공간들과 맞닿길 원했고, 본류의 큰 강만을 따르기보다는 여러 갈래의 시류를 끌어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다른 사운드로 접근하는 것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성세대와 미디어의 질타가 빗발쳤던 1960년대에도 이들은 히피의 불량함으로 온 몸을 장식하며 전면에 나섰고,

 “로큰롤은 죽었다”며 비난을 던지던 펑크 세대의 분노 속에서도 보란 듯이 디스코와 댄스 록을 들고 나섰다.

 

결국 시대와의 오랜 호흡, 세대와의 끝없는 소통이 장수의 비결이었고 질주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기에

1962년생의 거대한 공룡 밴드는 50년간 살아남을 수 있었고, 롤링 스톤스라는 제국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라는 별칭 속에는 반세기간 멈추지 않고 달려온 이들에 대한 감출 수 없는 경외가 담겨있다. 동시에, 이는 범백(凡百)의 밴드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름 난 이들조차 쉽게 넘보지 못하는 영예의 결과물이다.

 

여전히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고 있다. 신곡으로 가득 채운 정규 앨범을 발매함과 동시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대 앞으로 팬들을 끌어 모으고, 젊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협업하며 다양한 결과물을 내놓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키스 리처드는 영화 < 캐리비안의 해적 > 시리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기도 하고 믹 재거는

TV 쇼에 등장해 사그라지지 않는 인기를 몸소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SNS로 연결된 인터넷 공간 속에서도 이들의 움직임은 멈춤이 없다.

 






언제까지 활동을 계속 할 것인가.”

 

2006년 뉴욕 비콘(Beacon) 극장에서의 콘서트를 담은 다큐멘터리 < 샤인 어 라이트 >를 제작하며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멤버들의 옛 인터뷰 영상들을 공연 사이사이에 삽입했다.

그 중 유독 많이 등장했던 질문은 바로 저 밴드의 수명에 관한 질문이었다.


필름 속에서 스물을 갓 넘긴 앳된 믹 재거는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다며 말하고, 중년에 접어드는 키스 리처드는 운이 다하면

끝나지 않겠냐며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그 뒤에 나타나는 대답은 모두 똑같았다.



 

 

 

 

“딱히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단지 즐기면서 음악을 하는 것 뿐.”

 

그렇게 50년을 달려왔다. 롤링 스톤스에게 있어 음악은 세상과 대화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이들은 이 대화를 단 한 번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매 순간 시류와 조우하기 위해 노력했고 시대와 호흡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세상의 중심으로 자신들을 밀어 넣었고 스스로를 바꿔왔다.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서 반세기 동안이나 돌멩이들을

구를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롤링 스톤스 (The Rolling Stones) : 영국 런던에서 1962년에 결성
믹 재거 (Mick Jagger, 보컬, 하모니카) : 1943년 7월 26일 영국 켄트주 다트포드 출생
키스 리처드 (Keith Richards, 기타) : 1943년 12월 18일 영국 켄트주 다트포드 출생


믹 테일러 (Mick Taylor, 기타) : 1949년 1월 17일 영국 웰린가든시티(Welwyn Garden City) 출생
빌 와이먼 (Bill Wyman, 베이스) : 1936년 10월 24일 영국 런던 출생
찰리 왓츠 (Charlie Watts, 드럼) : 1941년 6월 2일 영국 런던 출생

갈래 : 하드 록(Hard Rock), 로큰롤(Rock & Roll), 블루스 록(Blues Rock)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록 밴드, 전세계에서 2억 5천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를 기록한 전설적인 로큰롤 밴드,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원초적인 마성(魔性)의 밴드, 로큰롤의 영원한 우상, 이런 모든 수식어가 향하는 방향에는

단지 하나의 위대한 밴드가 존재할 뿐이다.


이름하여 <롤링 스톤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같은 수식어들과 함께 전세계에서 엄청난 지명도를 얻고 있다.


롤링 스톤스의 음악은 거칠고 반항적이며 남성 중심의 비사교적인 음악으로 비춰지기 때문인데,

 이같은 반항기어린 롤링 스톤스의 음악은 대척점 관계에 있던 <비틀즈(The Beatles)>의 음악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비틀즈의 음악은 롤링 스톤스와 달리 세련되고 우아하며 귀족적인 동시에 한편으로는부드러운 여성성 까지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을 좋아하는 우리 입맛에 롤링 스톤스의 음악이 잘 맞을리가 없다.

 

지퍼를 내리면 당연히 속옷이 등장하는 이 표지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지퍼로 인해 엘피(LP) 음반을 포장하고 있는 겉비닐이 손상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여 음반 소매상들의 원성을 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지난 2003년에 미국의 한 케이블 텔레비전(VH1)으로 부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반 표지'로 선정된<Sticky

 Fingers> 음반은 초판을 제외하고는 실제 지퍼를 달지 않는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또한 <Sticky Fingers> 음반은 <존 패쉬(John Pasche)>가 디자인한 롤링 스톤스의 로고 <혀와 입술(Tongue

 & Lips)>이 처음으로 표지에 등장한 음반으로도 유명하다. 


아울러 <Sticky Fingers> 음반은 영국과 미국의 앨범 차트에서모두 1위를 차지한 롤링 스톤스의 첫 번째 음반이기도

하며 음반에 수록된 열 곡 중에서 싱글로 발표된 <BrownSugar>는영국의 싱글 차트에서 2위에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는 1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어 롤링 스톤스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히트 곡 <Wild Horses(미국 28위)>는 독특한 롤링 스톤스식 발라드로써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좋은

 평을 받았던 곡이었다.


새로 가입한 믹 테일러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그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자유분방하고 거친 

믹 재거의 목소리가 묘하게도 조화를 이루는 이 곡 역시 롤링 스톤스의 고전으로 남아 있으며 그들을 아끼는 팬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글 출처 -Art Rock-부분 발췌.







 





롤링 스톤스(영어: The Rolling Stones)는 1962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록 음악의 역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인 활동을 하는 몇 안되는 밴드 중 하나로, 가장 위대한 록 밴드 중 하나로

 꼽힌다.


1970년대 전성기 시절에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면서도 서던 록이나 소울, 글램 록, 댄스,

뉴 웨이브 등의 요소를 포함시킨 작품이 많다.

이름은 시카고 블루스의 거장 머디 워터스의 노래 〈Rollin' Stone〉을 기념하여 브라이언 존스가 이름지었다.

 1990년대에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이 탈퇴한 후 멤버에는 베이시스트가 없다.


롤링 스톤스의 음악적인 뿌리는 흑인의 블루스에 있다. 데뷔곡 〈Come on〉은 척 베리의 커버곡이다.

그들이 데뷔한 1960년대 초기에는 아직까지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고, 블루스 앨범의 표지에는 흑인의 사진을

실어서는 안된다는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흑인의 음악을 표현한 밴드가 롤링 스톤스이다. 그 결과 지금은 흑인 뮤지션으로부터 경의를 받는

얼마 안되는 백인 밴드가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써 롤링 스톤즈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받아들였지만, 음악적 스타일에 관해서는

앵글로 색슨적인 표현 방법-인종이나 민족의 우열과는 관련 없이 음악적 표현 방법의 테두리에 머무른 비틀즈와는

 구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롤링 스톤스의 활약은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두는 백인 뮤지션이 다수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무렵에 데뷔한 비틀즈의 깔끔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롤링 스톤스의 멤버는 자유로운 의상과 길게 늘어뜨린 머리로 그 후의 록 밴드들의 스타일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초기에 영국의 학교에서는 비틀즈의 머리 스타일은 금지되고 있었다. 잠시 후 롤링 스톤스가 데뷔하고

비틀즈의 머리 스타일을 허용한 학교가 많았지만, 롤링 스톤스의 머리 스타일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롤링 스톤스의 사진을 보면 기발하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당시 그들의 패션과 머리 스타일은 과격한 것이라고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빌보드》지는 핫 100 차트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롤링 스톤스는 10위에 올랐다. 약 2억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1]  데뷔 이래 수익은 거의 9천억 원에 달하며 《비거 뱅 투어》(Bigger Bang Tour)는 단독공연 최다 수익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재거런던 정치경제대학 경제학부 출신이며 키스 리처즈 역시 중산층 자손이었으며 초기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

 음악가정에서 자랐다. 베이스 담당 빌 와이먼과 드럼 찰리 와츠는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재거와 리처즈는 런던의 블루스 음악계에서 활약하다 한살 위인 브라이언 존스를 만났다



1962년 4월, 브라이언 존스를 주축으로[5] 믹 재거, 키스 리처즈, 이언 스튜어트, 토니 채프먼, 딕 테일러 5명이 모여 

결성되었다. 밴드 이름은 미국의 블루스 뮤지션 머디 워터스의 1950년 노래 〈Rollin' Stone〉에서 가져왔다


1962년 7월 12일, 영국의 라이브 클럽 마키에서 〈Kansas City〉, 〈Bad Boy〉 등 18곡을 선보이며 첫 공연을 가졌다


재거는 당시의 공연에 대해, "청중은 밤을 새며 놀고 있는 대학생들이었다"며 "그들은 특별히 감정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진가를 알아봤다"고 말했다

 1962년 12월 딕 테일러, 1963년 1월 토니 채프먼의 탈퇴 후, 빌 와이먼과 찰리 와츠를 차례로 영입했다. 


1963년 4월 앤드류 루그 올덤이 그룹의 매니저가 되었고, 그해 5월 이언 스튜어트가 팀에서 탈퇴했다.

1963년 6월, 그룹은 미국의 로큰롤 뮤지션 척 베리의 곡을 리메이크한 데뷔 싱글 〈Come on〉을 발표했다.

 데뷔 당시 비틀즈 흉내를 내다가 참패를 맛본 그들은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덤의 권고에 따라 곧바로 정반대 이미지로 차별화하여 재도전을 단행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는 불량, 퇴폐, 반항, 비행, 섹스 그리고 말썽과 같은 하위문화가 되었다


196427, 비틀즈의 주도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되었고, 6월에 롤링 스톤스도 편승했다.

1964년 영국에서는 The Rolling Stones, 미국에서는 England's Newest Hit Makers라는 제목으로 데뷔 음반을 발표했다.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처럼 미국에서 히트한 곡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진출하여 무모하게도 보인 미국 진출이었지만

, 2집에 수록된 Time Is on My Side가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 주목을 받게 되고, 1965년 공개된 앨범 Out Of Our Heads에 수록된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1966, 발표한 Aftermath는 믹과 키스의 곡으로만 채워진 앨범으로 그들이 1960년대에 발표한 것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브라이언 존스가 시타르를 연주한 Paint It Black은 큰 인기를 끌었고, 악동 이미지를 굳힌

Under My Thumb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67년, 재거와 리처즈가 마약 불법 소지 사건으로 무거운 형량을 선고 받고, 이어 브라이언 존스도 런던 아파트에서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타임스》는 이에 대해 "누가 바퀴로 나비를 찢어 죽이나?"라는 비호 기사를 개재했다.[3] 1968년,

《Beggars Banquet》를 발표했다. 밴드가 발표한 최고의 곡 중 하나인 〈Sympathy For The Devil〉, 반항적인

 이미지에 어울리는 〈Street Fighting Man〉을 수록한 앨범은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9년, 브라이언 존스의 탈퇴로 밴드는 큰 위기를 맞았다.

그는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을 만큼의 천재적인 능력 가진 사람이었으나, 술과 약물에 찌든 일상을 반복해 보냈고 이기적인 성향 탓에 멤버들과 불화가 잦았다.


 결국 밴드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후반에는 탈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공식적으로 밴드를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1969년 7월 3일, 27세의 나이로 자택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이에 밴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이드 파크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했다.[10] 그들은 브라이언 존스의 후임으로

믹 테일러를 영입했다.[11] 이후 발표한 싱글 〈Honky Tonk Women〉은 영국과 미국 차트 1위에 올랐다.


〈Gimme Shelter〉,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가 수록된 《Let It Bleed》(1969)도 음악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1969년 12월 6일, 롤링 스톤스가 캘리포니아 주 앨터몬트 고속도로에서 무료로 연 공연을 보기 위해 3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아수라장이 되었고, 흥분한 관중 가운데 흑인 청년이 경호팀 헬스엔젤스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후에 흑인 청년이 총기를 사용하려 했다는 증거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추방을 당했다


 '알타몬트의 비극'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사랑과 평화'로 대변되는 히피 시대의 막을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밴드는 사건 당시에 연주하고 있던 〈Sympathy For The Devil〉을 무대에서 한동안 연주

하지 않았다


1970년 자신들의 레이블 롤링 스톤스 레코드를 설립한 후,잠시 휴식기를 보낸 밴드는 1971년, 평단으로부터 "밴드\ 최고의 앨범"이라는 찬사를 받은 《Sticky Fingers》를 직접 설립한 레이블에서 발표했다.

1972년에 발표한 《Exile on Main St.》는 18곡을 수록한 더블 앨범으로 음악적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4년 믹 테일러의 탈퇴 후, 영국 록 그룹 페이시스 출신의 기타 연주자 로니 우드를 영입했다

1978년에 발표한 《Some Girls》는 디스코 영향권에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 걸작으로 〈Miss You〉,

〈Beast Of Burden〉이 히트했다.


미국에서만 600만 장 이상 판매된 앨범은 영국에서도 골드를 기록하며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

1980년에 발표한《Emotional Rescue》는 로큰롤 성향이 짙어진 앨범으로 영국, 미국 차트 1위에 올랐다.

1985년 믹 재거가 솔로 데뷔앨범 《She's The Boss》를 발표하면서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리고 1986년 믹 재거가 팀의 스튜디오 앨범 《Dirty Work》의 홍보 투어를 거부하고 솔로 활동에 매진하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팀 내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1989년에 《Steel Wheels》를 발표했다. 1992년 빌 와이먼이 탈퇴해 현재는 4명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1994년에 《Voodoo Lounge》를 발표하며 투어도 재개했다. 음반은 미국에서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1997년에 발표한 《Bridges To Babylon》은 곡을 쓰고 앨범을 녹음하는 방식에 변화를 준 앨범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