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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Science news에서 선정한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이었던 이론 Top 10 (BGM)

 

 

1위 지동설( 1543년 쿠페르니쿠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폴란드 왕국의 프로이센 지방 토룬 시에서, 독일계 상인 아버지 슬하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이며, 폴란드에서는 ‘미코와이 코페르니크’로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도 어려움 없이 구사했다.

 

현존하는 그의 문헌들 대부분은 당시 유럽의 학문 공용어인 라틴어로 쓴 것들이며, 독일어로 쓴 편지가 일부 있다.

그가 태어난 토룬이 독일어권이었기에 그의 모어(母語)가 독일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공식적으로 그는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다.

 

코페르니쿠스가 10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고향에서 학교를 다닌 뒤 1491년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 천문학, 고전학 등을 공부했다.

 

바르미아 주교였던 외삼촌의 도움 덕분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 대학 철학교수 알베르트 브루제브스키가 학교 바깥에서 개설한 천문학 강좌에 참여하고

다른 몇 명의 교수들에게도 천문학을 배웠다.

 

 크라쿠프에서 그는 기하학, 대수학, 우주구조론, 천문 계산, 광학 등을 배우고 고대의 철학적 자연학을 익히면서

 천문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또한 이 시기부터 그는 천문학 문헌을 수집하여 탐독하며 기존 천문이론들 사이의 모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짧은 논문을 통해 지동설에 관한 구상 세워

 

 

코페르니쿠스가 4년간 공부한

 크라쿠프대학

 

(오늘날 야기엘론스키 대학)에 있는 그의 동상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6년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 법학, 고전학을 공부했지만 주된 관심은 천문학이었다. 파도바 대학, 페라라 대학 등에서도 공부한 그는 1500년 로마에 머무르며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했다.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의학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는

 1505년경부터 플라우엔부르크 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법학 지식으로 교구 행정에 참여했으며, 수학 지식으로 통화(通貨)와 경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성당 참사회 입장에서 그는 매 우 쓸모가 많은 ‘준비된 인재’였다.

 

1513년 코페르니쿠스는 성당 참사회의 상회에서 800개의 돌과 석회를

구입했다.

천문 관측을 위한 지붕 없는 탑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천문 관측기술의 한계 탓에, 그의 관측이 새로운 천문이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514년에는 교황의 비서관으로부터 교회력 개정을 위한 회의 참석을 요청

받았지만 거절했고, 다만 달력 개정을 위해서는 태양과 달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의견만 제출했다.

 

1510~1514년 사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천문체계에 관한 개략적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짧은 논문으로 작성했다. ‘천체 운동에 관해 구성한 가설에

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소론(小論)’, 줄여서 [소론]이라 일컫는

 논문이다.

 

논문 제목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아니라 그것을 필사하여 유포시킨 이들이

붙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논문을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배포했다(정식 인쇄본 출간은 1878년). 이 논문에서 그는 본격적인 수학적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구가 움직이는 태양

중심 체계를 가설로 제시했다.

 

 

 

 

점진적 혁명,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체계, 즉 지동설을 구상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 유학 시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수학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고대 문헌을 조사하면서 이미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체계를 생각한 고대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계기였다.

 

남은 문제는 새로운 우주체계에서 행성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소론]을 내놓은 이후 꾸준한

연구를 통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1532년경 거의

마무리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그는 먼저 우주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얘기한다. 또한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만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전체를 동시에 밝혀주는 휘황찬란한 신전이 자리 잡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혹자는 그것을 빛이라 불렀고, 혹자는 영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길잡이라 불렀으니 그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태양은 왕좌에서 자기 주위를 선회하는 별들의 무리를 내려다본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것이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탄압받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청의 일부 인사들은 그의 이론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와 동시대인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나 하늘의 덮개, 해와 달이 아니라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치는 오만불손한 주장이 나왔다. 그 바보는 천문학 전체가 뒷걸음치는 걸 바라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세계관을 바꾸어놓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요컨대 그것은 ‘점진적 혁명’이었다.

 

종교개혁이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교황청에 등 돌리게 만들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은 신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독자치하는 존재인가?

무한한 우주를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굳이 지구로 보냈단 말인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2위 진화론(1859년 찰스 다윈)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창세기의 기록은 과학적인 사실로 수용되었다.

진화론의 다음과 같은 기본 논지는 창조가 과학적인 사실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지구는 수십억 년 전에 탄생했다.

 생물은 무생물적 조건에서 진화하였다. 모든 생물은 간단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진화하였다.

 

인간도 동물에서 진화하였다. 다윈(C. Dawin)에 의해 분명하게 주장된 ‘진화론’(1819)은 그후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많은 과학적인 논증으로 뒷받침되었다.

 진화는 화학적 진화에서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대기의 전기적 방전에 의해 무기물에서 아미노산이 생성되었고, 아미노산이 돌연변이로 특정 서열의 단백질로

화학적 진화가 이루어졌다. 단백질이 더욱 복잡하게 진화하여 아메바와 같은 유기체로 진화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진화는 다시금 한 종 내에서 다양한 변종의 진화를 설명하는 소진화(micro-evolution)와,

 

 한 종에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 대진화(macro-evolution)로 전진되었다. 그리하여 아메바, 원생동물, 무척추동물, 척추동물,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원인류, 인간으로 진화하였다. 이 모든 진화는 돌연변이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2.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그러나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진화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일단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이며,

진화론 역시 모든 과학적 가설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과학적 명제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진화론을 비판하고 오히려 창조를 과학적으로 논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창조냐, 진화냐에 대한 과학적 논쟁의 불이 붙게 된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반론은 여러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

1) 초기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진화의 연결고리를 모두 제시할 수 없다는 반론이다.

소위 사라진 고리(missing link)가 너무 많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동식물의 화석이 전체의 1/10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진화의 고리를 다 제시할 수 없는 지질학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2) 1953년 밀러(S. L. Miller)는 전기방전을 통해 유기체의 기본 요소인 아미노산 합성에 성공하여 진화론자들을 들뜨게 하였다.

그러나 실험을 통해 아미노산을 융합하였다 하여도, 진화의 그 다음 단계인 단백질 합성의 실험이 불가능한 두 가지

 이유가 판명되었다. 첫째, 아미노산 합성 실험에서 발생한 아미노산 중에는 단백질 융합을 저해하는 D아미노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 100개의 아미노산이 특정 서열로 정돈된 하나의 단백질로 나타날 수 있는 돌연변이의 확률은 1/10130이며,

 이를 위해서는 10억 년이라는 시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3) 1940년대 이후 유전학의 발달로 세포의 염색체 속에 유전물질 DNA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포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0.0000006mm의 염색체에 2.4m의 정보고리를 가지고 있는 정보 자체인 것이 알려졌다. 모든 생물체는 DNA를 가지고 있으며, DNA의 염기 배열에 따라 무수한 변이가 생겨날 수 있음이 판명되어

소진화의 가설을 논증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유전자 변이는 한 종 내에서만 국한되며, 다른 종으로의 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어느 유전인자에 변이가 생긴다 해도 즉시 특수 효소가 작용하여 원상태로 되돌아가려는 ‘DNA 교정장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장치 때문에 DNA가 수백만 번 혹은 그 이상 복제되어도 그 염기 배열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의 법칙에 따르면 획득형질만 유전하기 때문에 돌연변이를 통한 다른 종의 출현을 설명하기 어렵다.

 유전자 조작을 통한 세포의 복제나 동일 종 내에서의 변이를 통한 소진화는 가능하나, 새로운 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를 통한 신종(新種) 생명체의 출현이라는 대진화의 가설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4) 진화론에 대한 가장 큰 반론은 현대물리학의 열역학 제 2법칙이 진화론의 전제와 모순된다는 주장으로 제기되었다. 미국과학동맹의 모리스(H.M. Morris)는 “열역학 제 2법칙(entropy)이 진화모델에 위반되는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물이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자연상태의 열에너지는 시간이 지속하면 열의 감소로, 운동에너지는 정지로,

질서는 무질서의 증가로 나아간다는 것이 열역학 제 2법칙, 즉 에너지 하강의 법칙이다.

그 반대로 자연상태의 무질서에서 질서로 전환하려면 외부에서 가해지는 의도적인 목적과 설계를 지닌 에너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일리야프 고리진은 개방체계를 지닌 생물체는 열역학 제 2법칙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평형 상태인 생명체도 계속적인 에너지와 물질의 공급 없이는 생명체가 유지되거나 성장할 수 없어 죽어

버린다.

 

 따라서 유기체도 열역학 제 2법칙의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통해 일단의 과학자들은

 물질과 생명의 창조도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하나의 과학적 가설임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전세계에 걸쳐 창조과학회가 결성되어 그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결론적으로 모리스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모델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진화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

모델이라고 하였다.

진화모델 창조모델 계속되는 자연적 기원 완성된 초자연적 기원 지질균일설에 의한 지구역사 천변설에 의한

지구역사 미생물로부터 생명의 진화 생명은 생명 자체에서 출현 인간은 양적으로 동물에 우세 인간은 질적으로

동물과 구분

3. 창조적 진화론

과학자요 신학자였던 T. D. 샤르뎅 신부는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되고 있는 창조모델과 진화모델의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하였다.

샤르뎅은 무에서 무기체인 물질현상이 생기고, 물질현상의 임계점에서 유기체인 생명현상이 생기고, 생명현상의

 임계점에서 인간의 정신현상이 생긴 것은 창조의 단계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물질현상 자체내의 무기물에서 아미노산이 생기고, 아미노산에서 단백질이 생성된 것은 진화의 과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생명현상 내에서 아메바, 원생동물, 무척추동물, 척추동물,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원인류, 인간으로의 과정 역시 진화의 과정이라고 하였다.

창조과정:물질현상 출현→생명현상 출현→정신현상 출현→공동정신현상 출현
진화과정:무기체의 진화→유기체의 진화→영장류의 진화→기독교의 전개

샤르뎅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이 그 정점인 정신현상의 임계점에서 다음 단계로 창조적으로 이행한 것으로서

공동 정신현상(co-reflection)이라는 독특한 창조적 진화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인간의 정신은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임계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즉 온 인류를 한 형제로

 사랑하는 공동정신을 지닌 존재가 창조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이며, 진화의 궁극적 정점(omega point)이라는 점에서 우주적 의미

(cosmic Christ)를 지닌다고 하였다.

샤르뎅의 창조론적 진화론은 진화론의 우연성을 비판하고, 창조적 진화의 궁극적 목표를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샤르뎅의 시도는 창조모델과 진화모델을 종합한 제 3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3위 양자역학(1900년-1926년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알버트 아인슈타인,

 에르빈 슈레딩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아인슈타인이 틀렸다..'양자 얽힘' 실험으로 증명 (네이처紙)서울신문 | 입력 2015.10.22. 13:46 |

 수정 2015.10.22.14:46

 

거의 1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고전 물리학 법칙을 깨뜨리는 것으로 보이는 '양자 얽힘'에  치열한 논쟁을 계속해왔다.

원자를 구성하는 한 쌍의 소립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처럼 보이는 양자적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짝을 이룬 두 입자들은 아무리 서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변동하면 그에 따라 '즉각' 다른 한쪽이 반응을 보인다는 불가사이한 특성을 가지는데, 양자이론에서는 이 두 입자가 서로 '얽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컬어

 '양자 얽힘'이라고 한다.

 

 

​실험에서는 쌍을 이룬 전자들을 이용했는데, 이들 전자 쌍들은 모두 측정하는 데 있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어떤 허점도 완벽히 봉쇄되었다. 또한 두 탐지기 사이의 1.3km란 거리는 한 전자를 측정하여 상태를 확정하는 사이에 빛이라도 주파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국지적인 허점을 제거한 것이다.

 

 

실험에서는 쌍을 이룬 전자들을 이용했는데, 이들 전자 쌍들은 모두 측정하는 데 있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어떤

허점도 완벽히 봉쇄되었다. 또한 두 탐지기 사이의 1.3km란 거리는 한 전자를 측정하여 상태를 확정하는 사이에

빛이라도 주파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국지적인 허점을 제거한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우주에서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같은 현상을 '유령 같은 원격작용'이라면서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그 같은 양자 현상에는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숨겨진 변수'가 있으며,

그것을 알게 되면 유령 같은 원격작용의 의문이 풀릴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지난 1세기간 양자론자들과 아인슈타인이 치열하게 대결한 논점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바람과는 반대로 이 같은 양자 현상이 사실임이 기념비적인 놀라운 실험 결과로 확고하게

 입증되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두 개의 전자가 얽혔을 때, 두 전자가 어느 것이든 업 스핀이 될 수도 있고 다운 스핀이 될 수도 있지만, 한 전자가 업 스핀일 경우, 다른 전자는  반드시 다운 스핀이 된다. 그 같은 반응은 동시에 나타난다. 걸리는 시간이 제로라는 뜻이다.

 

 

두 개의 전자가 얽혔을 때, 두 전자가 어느 것이든 업 스핀이 될 수도 있고 다운 스핀이 될 수도 있지만, 한 전자가

 업 스핀일 경우, 다른 전자는 반드시 다운 스핀이 된다.

그 같은 반응은 동시에 나타난다. 걸리는 시간이 제로라는 뜻이다.

 

1964년, 영국 물리학자 존 벨은 유령 같은 원격작용을 해명할 수 있는 '숨겨진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한 실험을

고안해냈다.

이 실험으로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숨은 변수는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이를 벨의 부등식이라 한다.

하지만 이 벨의 부등식에 많은 허점이 있음이 밝혀지면서 양자 얽힘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 '네이처' 지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실험을 이끈 연구자들은 양자 얽힘 실험에서 중요한 두 개의 허점을

보완했다고 밝혔다.

독일 연구진은 작은 다이아몬드에 갇힌 '얽힌' 전자들을 델프트 대학 캠프스 양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다 두고

실험을 했다. 두 전자들이 서로 소통할 수 없게끔 두 장소 사이의 통신수단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소립자는 양자적인 속성의 하나로 스핀이라는 회전 운동량을 갖고 있다. 한 쌍의 소립자는 각각 다운 스핀과 업

스핀으로 되어 있는데, 관측되기 전까지는 한 입자가 어떤 스핀을 갖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다. 이를 양자론에서는

 두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본다.

 

일단 측정으로 한 입자의 상태가 확정되면 다른 입자는 '동시'에 그 반대되는 상태로 확정된다. 두 입자의 거리가

수백 광년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양자론자들은 측정이 없다면 실제도 없다고 말한다.

이 같은 양자론자의 주장에 아인슈타인은 "내가 달을 보지 않는다면 달이 거기 없다는 것인가?" 하고 푸념하기도 했다.

 

논문 대표저자인 로널드 핸슨 교수는 "두 개의 전자가 얽혔을 때 보여주는 현상은 참으로 흥미롭다"고 말하면서

 "두 전자가 어느 것이든 업 스핀이 될 수도 있고 다운 스핀이 될 수도 있지만, 한 전자가 업 스핀일 경우, 다른 전자는 반드시 다운 스핀이 된다"고 밝혔다. "우리가 측정할 때 그들은 완벽한 상관관계임을 보여준다.

 

한쪽이 업 스핀이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다운 스핀이 된다. 그 같은 반응은 동시에 나타난다. 걸리는 시간이 제로라는 뜻이다. 두 입자가 은하의 반대쪽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번 실험에서는 쌍을 이룬 전자들을 이용했는데, 이들 전자 쌍들은 모두 측정하는 데 있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어떤 허점도 완벽히 봉쇄되었다. 또한 두 탐지기 사이의 1.3km란 거리는 한 전자를 측정하여 상태를 확정하는 사이에

빛이라도 주파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국지적인 허점을 제거한 것이다.

 

이 반직관적인 양자 얽힘 현상은 기왕의 철학에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현상이 알려주는 바는 우주가 국지적이 아니라, 비국지적이라는 사실이다.

 공간이란 사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처럼 보여주는 관념일 뿐, 실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빅뱅에서 출발한 우주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 빛과 물질을 가장 극미한 상태에까지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번 실험에 대해 버밍엄 대학의 카이 봉스 교수는 "양자 역학이 고전 역학과 얼마나 다른지, 또 양자역학으로 인류가 앞으로 전례없는

 발전을 이룰 가능성을 보여준 실험이다"고 평가했다.

이번 실험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양자 얽힘을 이용한 통신의 암호화에 한발 다가간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4위 일반 상대성 이론(191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이론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가장 큰 세계와 가장 작은 세계의 만남이였다.

 바쁜 아침으로 유명한 도쿄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길을 가던 사람들이 다 멈춰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173년 만에 하늘이 밤처럼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개기일식이다.

아인슈타인의 열렬한 지지자인 에딩턴도 이 것을 보고별빛은 중력에 의해 별빛은 휘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일식은 태양과 달이 일직선상에서 태양이 달에 가려 보이지 않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 뒤에 숨은 별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에딩턴은 이런 상황에서도 별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점에서 의문점을 갖게되었다.

 

스위스 베른의 27살의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년이 지났는데도 중력에 툭수상대성이론을 넣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과 똑같이 물리학을 전공한 아내는 아인슈타인이 한 고민을 따라잡지 못하였다.중력에 특수상대성이론을

 넣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특수상대성이론은 바로 등속의 세계이고 중력은 가속의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떨어지는 것을 뭘까?라는 질문을 뉴턴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하였다,뉴턴은 프린키피아라는

 책을 써서 영국왕립학회에 발표하였다.

뉴턴은 일상에서도 사과 같은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관성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이런 이론을 바로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뉴턴의 프린키피아 3권을 배경으로 만든 물체가 바로 인공위성이다.

1907년 아인슈타인은 특허국을 그만두고 취리히 대학으로 와서 교수직에 취직하여 마음놓고 계속 연구를 하였다.

그래서 1930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가서 자신의 지지자 에딩턴을 만나서 일반상대성이론의 결실을 맺었다.

 

느낀점(10줄 이상) :일반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인해서 현재 우리가 이런 궁금증을 풀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성이론으로 인해서 우리가 많은 것을 얻고 진실을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을 오래전부터 사실 우주의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만약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우주를 잘 알지 못하고 우리가 아인슈타인만큼 더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맞선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과 프린키피아 3권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인공위성 만큼 우주로

 나가봐야할 것이다.

 

그만큼 아인슈타인과 아이작 뉴턴의 희생과 상대성이론,만유인력의 법칙,프린키피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희생을 감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법칙과 아인슈타인 아이작 뉴턴에게 감사하고 이런 비밀을 알 수 있게 해준 우주와 개기일식에 감사해야 한다.

 

 

 

 

 

 

 

 

 

 

 

 

 

5위 특수 상대성 이론 (190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업을 위해 이탈리아로 이사해 살고 있던 부모님을 찾아갔다.

부모님들은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스위스의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 진학하도록 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했지만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으로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코프스키 교수는 그에게 게으른

강아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교수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은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지 못해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하고

베른에 있는 특허 사무소에 취직했다.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son. 좌)과

 몰리(Edward Morley. 우)

 

아인슈타인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미국의 마이컬슨

(Albert Abraham Michelson, 1852~1931)과 몰리(Edward

Williams Morley, 1838~1923)는 정밀한 측정을 통해 빛의 속도가

 지구의 공전 속도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일정한 값을 가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 전에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 결과를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이 이에 대해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상대론에 의하면 관측자의 상태에 관계없이 속도를 제외한 모든 물리량은 같은 값으로 측정되어야 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물리법칙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빛의 속도가 모든 관측자에게 같게 관측된다는 것은

이러한 갈릴레이의 상대론이 옳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200년 동안 가장 완전한 물리법칙으로 생각해 온 뉴턴역학이 틀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러나 어떤 제안도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제안은 대부분 기존의 물리체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특허 사무소에서 물리학계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은 채 생활하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물리체계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1905년 그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그는 정지해 있는 상태나 같은 속도로 운동하는 관측자에게 같은 물리법칙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상대성 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빛의 속도는 누구에게나 항상 같은 값으로 측정된다는 광속 불변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사실이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관성계에서 측정한 물리량이 달라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정지한 상태에 있는 관측자가 측정한 물리량을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관측자가 측정한 물리량으로

 환산하는 환산식을 제안했다. 이 식이 바로 로렌츠 변환식이다.

 

아래에 나타낸 로렌츠 변환식은 정지해 있는 관측자가 측정한 물리량을 v의 속도로 x방향으로 달리는 관측자가

측정한 양으로 환산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한 마디로 말해 모든 관성계에서 같은 물리법칙이 성립하고 빛의 속도가

일정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운동 상태에 있는 관측자가 측정한 물리량이 달라야 한다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성 원리와 빛의 속도를 위해 물리량을 희생시킨 이론인 것이다. 빛의 속도와 물리량 모두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인슈타인은 과감하게 빛의 속도를 선택했던 것이다.

 

 

 



 

 

 

6위 통계역학 (19세기 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루트비히 볼츠만)

 

 

 

 

 

 

맥스웰이 도달한 전자기장 방정식은 네 개의 식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맥스웰 방정식은 가우스 법칙이며, 쿨롱의 법칙을 일반화 한 식이다.

전하를 둘러싼 임의의 폐곡면을 나가는 전기력선의 수는 폐곡면 내부의 알짜 전하에 의해 결정된다는 식이다.

 

두 번째 맥스웰 방정식 가우스 자기 법칙이며, 임의의 폐곡면을 통과하는 자기 선속이 0임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N극 또는 S극이 따로 존재하는 이른바 자기 홀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 번째 맥스웰 방정식은 패러데이의 유도 법칙이다. 자속 밀도의 시간에 따른 변화는 전기장을 생성한다는 내용의

식이다. 이 법칙은 임의의 폐경로를 따라 행한 전기장의 선적분인 기전력은 그 경로로 닫힌 임의의 면적을 통과하는

 자기 선속의 변화율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번째 맥스웰 방정식은 변위 전류에 의해 수정된 앙페르 회로 법칙으로, 앙페를 법칙이 일반화 된 식이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전기장과 전류에 따라 변하는 전기장과 전류에 의한 자기장의 생성을 설명한다.

 맥스웰은 에테르에 대한 가정으로 변위 전류에 대한 개념에 도달하였다.

 

이 방정식 속에 구현된 맥스웰의 장이론은 19세기 전자기 이론을 마무리지었고, 이 이론은 20세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방정식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과감하게 혁신할 실마리를 찾았고, 그 다음에 맥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을 따라 자신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다. 현대에 와서는 양자장론이 입자 물리학의 기둥이 되었다.

 

에테르 모형

 

전자기적 에테르의 개념은 맥스웰 방정식을 만드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자기를 역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에테르라는 개념을 가정하였는데, 에테르는 광학적, 전자기적 효과를 전파시키는 매질이라고 믿어졌던 개념이다.

에테르를 통한 전자기파의 전파 모형은 그림과 같다.

 

모든 공간은 물질로 가득 차 있어 빈 곳이 없고 진공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믿었다.

에테르가 모든 공간에 퍼져있다고 생각했는데, 상호작용이 압력과 충격을 통해서만, 즉 어떤 매개 동인이나 물체의

실체적인 작용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맥스웰은 전기장을 설명하면서 에테르를 제시하였다. 공간에 '유동'바퀴의 역할을 하는 작은 입자들이 층을 갖는

탄성 에테르가 존재하고, 도선에 전류가 흐르면 근접한 부분이 회전하고 이로 인해 에테르가 소용돌이를 형성한다.

 회전하는 유동바퀴는 에테르의 다음 층으로 자신의 회전을 전달하고 첫 번째 층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는 소용돌이

고리의 두 번째 층을 형성한다.

 

유동 입자들의 초기 운동은 전기장과 연관이 있다. 이 효과는 일시적인 것이고 도선에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 후

잠시만 존재한다. 도선의 전류가 멈추면 일시적인 전기 변위가 발생하고, 초기 평형상태로 돌아가려는 에테르

때문에 반대방향으로 돌아간다.

도선 안의 전류가 일정하게 유지되면 전기 변위는 존재하지 않고, 소용돌이 필라멘트로 이루어진 자기장만 존재한다. 이는 패러데이의 유도 법칙을 설명해 준다.

 

기체의 분자 운동론

 

맥스웰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기체 분자 운동론에 관한 것이다. 다니엘 베르누이가 제창한 이 이론은 많은 과학자들을 통해 발달했지만 특히 이 분야에서 수학자이자 실험가인 맥스웰이 막대한 발전을 시켰다.

 1866, 맥스웰은 기체 분자 운동을 통계적으로 공식화 하였다. 맥스웰은 분자 분포 법칙을 정의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체 이론에 적용하였다. 이는 물리학에 통계 법칙을 제시한 최초의 논문 이었다.

 

맥스웰의 기체 분자 운동론은 기체 분자의 속도 분포를 다룬다.

그는 기체의 점성이 기체의 압력과 독립적이라고 예견했다.

맥스웰이 내린 결론은 기체가 서로 밀쳐 움직이는 무수한 분자로 구성돼 있다는 이론을 크게 발전시켰고, 이후

 독일의 물리학자인 루트비히 볼츠만에 의해 분자들간의 에너지 분포를 나타낼 수 있도록 일반화되었다.

 

것이 맥스웰-볼츠만 분포이다. 볼츠만은 맥스웰의 에너지 균등분배 원리를 일반화 했다. 맥스웰-볼츠만 통계에 의하면 기체의 분포함수는 계의 전체 에너지(E), 기체의 절대 온도(T), 볼츠만 상수(k)와 비례 상수(C)로 표현된다,

 

 e는 자연 로그의 밑을 나타낸다. 제임스는 볼츠만의 연구결과를 다시 가져와 <물질의 관점에서 본 한 계의 에너지

평균 분포에 관한 볼츠만의 정리에 관해>라는 논문을 썼다. 제임스는 속도와 에너지 분포 이론을 새로운 방법으로

 이끌어냈다. 이때 에너지 균등분배 원리가 자연스럽게 뒤따라오게 되었다.

 

 

빛깔의 인지에 대한 관심은 에든버러 대학교 학생일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물감을 혼합하는 것처럼 색소를 혼합하는 것과 여러 색깔로 이루어진 디스크 판을 회전 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색의 삼원색인 빨강, 노랑, 파랑대신 빛의 삼원색인 빨강, 초록, 파랑을 찾아냈고 색과 빛의 혼합을 감산혼합과 가산혼합으로 나누었다.

회전혼합을 실험하면서 맥스웰은 맥스웰의 빛깔 삼각형(Maxwell's colour triangle)을 발견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맥스웰 이전에 사람들은 물리적 실재를 물질의 점으로 생각했다.

그 변화는 운동만으로 구성되어 상미분방정식을 따르는 것이었다.

 

 맥스웰 이후로 사람들은 물리적 실재가 연속적인 장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편미분 방정식을 따른다.

실재의 개념에 관한 이러한 변화는 뉴턴 이후 물리학의 가장 심대하고 가장 풍성한 수확이다.""물리학은 맥스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와 더불어 과학의 한 시대가 끝나고 또 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맥스웰의 친구이자 그의 평전을 집필한 루이스 캠벨(Lewis Campbell)은 맥스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맥스웰)는 인간이 인식하는 주도적인 물리 법칙의 거대한 확실성을 줄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마치 습관적으로 무한한 것들과 신비로운 교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맥스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당신의 연구는 나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이 주제를 다룰 정도로 뛰어난 당신의 수학적 재능에 감탄했고,

그 다음에는 이 주제가 그렇게 정연한 것에 놀랐습니다."

 

 


 

 

 

 

 

7위 판구조론(1912년 알프레트 베게너)

 

 

 

대륙표이설(大陸漂移說)을 최초로 완벽하게 설명했다. 고아원장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베를린대학교에서 천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당시 고기후학(古氣候學)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1906~1908년에 극지방의 대기순환을 연구하기 위한

그린란드 탐험에 참여했다.

 

 그후에도 1912~1913, 1929, 1930년의 3차례에 걸쳐 그린란드를 탐험했다.

마르부르크·함부르크대학교에서 기상학을 가르쳤으며, 1924~1930년에 그라츠대학교의 기상학 및 지구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30년 마지막 그린란드 탐험도중 죽었다.

 

베게너는 다른 선배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과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의 해안선이 서로 비슷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들 대륙들은 한때 서로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10년경에는 오늘날의 모든 대륙들은 후기 고생대(약 2억 5,000만 년 전)에 하나의 커다란 육괴(陸塊) 혹은 초대륙

(超大陸)을 구성했으며, 그후 갈라졌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베게너는 이러한 고대륙(古大陸)을 판게아라고 불렀다.

 

 다른 과학자들도 이러한 초대륙의 존재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초대륙이 오늘날 세계의 여러 대륙들로 분리된 것은 초대륙의 일부가 함몰 또는 침강해 대서양과 인도양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게너는 판게아를 구성한 지역들이 오랜 지질시대를 통해 수천㎞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이동함으로써

서로 분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대륙의 운동을 일컬어 '대륙이동'(continental displacement:독일어로Verschiebung der Kontinente)

이라고 했는데, 이는 후에 '대륙표이'(continental drift)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1912년 베게너는 그의 학설을 강의에서 처음 제시했으며, 1915년 가장 중요한 저서인

〈대륙과 대양의 기원 Die Entstehung der Kontinente und Ozeane〉을 통해 완전한 형태로 출판했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질학적 및 고생물학적 증거를 모으기 위해 과학문헌을 조사했다. 그결과 밀접한 유연관계(類緣關係)를 가진 생물 화석 및 유사한 지층들이 멀리 떨어진 대륙들,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양쪽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베게너의 대륙표이설은 그후 10년간 몇몇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으나 대륙이동을 일으키는 힘에 대한 그의 가정은 믿기 어려워 보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그의 학설은 대부분의 지질학자들로부터 부정되었으며, 그의 이론은 그후 수십 년 간 사장되었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판구조론(板構造論)의 일부로 부활되었다

(→ 화석의 기록).

 

 

 

 

 

 

 

 

 

 

 

8위 산소의 발견 및 산소 연소 이론(1770년대 조세프 프리스틀리, 라부아지에)

 

 

 

 

 

 

 

 

 

 

1775526일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성분 중 특정 성분이 생물의 호흡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의 공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실 이 공기는 산소로, 셸레와 프리스틀리에 의해서 이미 발견되어있었다.) 1777년에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ombustion en général에서 라부아지에는 모든 산은 공기 내의 특정 성분에 의해서 생성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principe oxygine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그리스어로 '산을 생성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산소의 어원이 되었다. (principe oxygine 역시 산소와 같은

물질이나 라부아지에는 처음에 이를 알지 못하였다.)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설탕과 principe oxygine이 반응하면 옥살산이 생성되는 등 여러 물질과

반응하여 산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이론은 염화 수소 등 산소를 포함하지 않은 산에 관해서는 들어맞지 않으나, 산소산을

 설명하기 적합하다.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자신의 발견과 이전의 연소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생명의 공기'principe oxygine

연소 현상에 관계되는 화소(火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이 세 가지 기체는 모두 산소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그는 17771112일에 제출된 논문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소를 물체가 불에 타기 때문에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고, 물체가 타는 이유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플로지스톤설은 순환논법에 불과하고, 결국 플로지스톤설은 가설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물의 조성

 

1783625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협조하에 라부아지에는 수소를 연소시킬 경우 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물의 조성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1783626일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왕립 학회에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산화 납을 수소와 함께 가열했더니 산화 납이 납으로 환원되면서 수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통해서

수소가 곧 플로지스톤이며, 이것이 산화 납과 결합하여 금속의 납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은 수소가 산화 납의 산소와 반응하여 물이 된 것이었으나, 프리스틀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1784115일에는 헨리 캐번디시가 물의 정량적·정성적 조성을 발표하였으며,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할 경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탈 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가 된다고 발표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산화 납을 납으로 환원시킬 경우 물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것이

산소라는 설을 반박하였다.

 

1785227일부터 31일에 걸쳐, 라부아지에는 물의 분석과 합성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실험은 과학자 30명 이상의 입회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고열을 이용하여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반대로 수소와 산소 기체를 이용하여 물을 합성해 보이기도 하였다.

 

또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물은 원소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원소의 화합물, 특히 당시 플로지스톤의 정체라고 추정되던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연구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할 근거를 얻게 되었다.

 

새로운 이론의 제시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에 대비되는 많은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 갔으나, 여전히 많은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1785년에 제출한 논문인 Les Réfelxtions des le phlogistique에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정확히

규명되어있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는 이론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연소가 일어날 때 '생명의 공기'를 이루고 있는 principe oxygine과 화소(火素) 중 화소가 물체와 결합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로지스톤설과 그의 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소와 관련된 물질의 이동방향이다. 플로지스톤설에서는 연소가

일어나면서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에서 빠져나간다고 보았고,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와 결합한다고 본 것이다.

 

현대의 연소 이론과 이를 비교해 보면, 라부아지에가 생각하였던 '생명의 공기', principe oxygine, 그리고 화소는

모두 산소이다. 그러나 연소반응에서 산소의 변화는 라부아지에가 생각했던 것과 같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플로지스톤설을 대변하는 다른 과학자들에게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론을 비판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아일랜드의 리처드 커원에 의해서 1787년 출판된 An Essay on Phlogiston

 and the Constitution of Acids이 있다.

 

커완은 이 책에서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이며,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는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주장하였다.

 라부아지에와 기통 드 모르보 등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커완의 주장에 관해서 반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 플로지스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으며, 수소 역시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을 통해서 물체를 연소시킬 때 일어나는 질량의 변화를 손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체에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하여도 이것이 연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산소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거쳐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많은 과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편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널리 알릴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789117화학 원론

출판하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그의 연구를 정리하여 공기와 물의 조성, 연소와

산에서의 산소의 역할, 열과 호흡, 발효에 관한 이론 등을 저술하였다.

 

2부에서는 산, 염기 등의 목록과 화합물, 화학 원소 등의 목록을 저술하였는데, 이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화학

 물질 목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3부에서는 실험에 관해서 저술하였다. 

 

 

 

 

 

 

 

 

 

 

9위 게임이론 (1944년 존 폰 노이만, 오스카 모르겐슈테른)

 

 

 

 

폰 노이만은 자신의 추상적 접근방식을 통해 자신의 서적에서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분산, 표준편차 만으로

 유도할 수 없다는 정리를 발표했지만 후일 정리 내에 모순이 있음이 밝혀졌다.

   헝가리 출신 미국인 수학자이다.

 

은행가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양자 역학, 함수 해석학, 집합론, 위상수학, 컴퓨터 과학,

수치해석, 경제학, 통계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작용소 이론을 양자역학에 접목시켰고, 맨해튼 계획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참여하였으며, 게임 이론과

 셀 자동기계의 개념을 공동 개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대인 은행가 네우먼 믹서와 칸 마르기트부부 사이에서 낳은 3형제의 첫째로 태어났다.

가족들은 그를 연치(Jancsi)란 별명으로 불렀다.

 어릴 때부터 놀라운 기억력을 보였으며, 6살 때에는 8자리 숫자의 나눗셈을 암산으로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매우 어릴 때부터 폰 노이만은 수학과 수의 성질, 세상을 움직이는 논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6살때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뭘 계산하고 계세요?”라고 질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1911년에 김나지움에 입학하며, 1913년엔 그의 아버지가 귀족 작위를 사서 이름에 귀족임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가게 된다.

 

23세의 나이로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따고, 동시에 스위스에서 화학을 공부한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베를린에서 강사생활을 한다.

 

1930년에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고등연구소의 최초 4명의 교수진 중에 한 명이 된다.

그는 1933년부터 죽을 때까지 고등연구소의 수학교수로 활동한다.

제2차 세계 대전동안 폰 노이만은 핵무기를만들기 위한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앨런 튜링이 고등연구소의 방문연구원으로 연구했으며, 폰 노이만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마친다.

 

이 방문은 튜링이 1936년 발표한 유명한 논문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을 발표한 직후였다.

 

폰 노이만은 튜링의 아이디어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가 10년후 만든 IAS 머신의 제작에 그 아이디어를

적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폰 노이만은 경쟁자간의 상호 의사결정을 예측할 수 있는 게임 이론의 아버지이며,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1944년 고전 《게임과 경제행동 이론》(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을 썼다.

 

그는 또한 냉전기간 동안 미국의 핵 정책을 주도했던 상호간에 보장된 멸망(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란 개념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맨해튼 계획의 일원으로 로스 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한스

 베테, 빅터 바이스 콥프와 함께 일했다.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하면그는 운전을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교통사고 뒤 진술서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오른쪽의 가로수들은 시속 6마일의 규칙적인 속도로 나를 스쳐가고있었다.

갑자기 그 중 하나가 내 길을 막았다."다른 일화도 있다.

 

그는 수와 관련된 그의 능력을 자랑하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첫 번째 컴퓨터가 완성되어서 시험을 하게 되자 누군가가 이런 문제를 냈다.

 "오른쪽에서 4번째 자리수가 7인 가장 작은 2의 지수는 얼마인가?" 컴퓨터와 폰노이만은 동시에 문제 풀기를

 시작하였고 결국 폰노이만이 먼저 풀어서 승리하였다.

 

하루는 폰노이만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현대 수학은 너무나 광범위하여서 누구도 그 아주 작은 일부분 밖에 알지 못한다고 한다.

폰노이만 선생님은 수학에 대하여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아주 신중하게 한참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답하였다. "28퍼센트".

 

<참고자료>http://bong.byus.net/man113.htm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구조가 대부분 존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 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순수 수학을 공부한 수학자이면서 물리학, 경제학, 컴퓨터, 핵무기 등등 손을 댄 분야마다 분야 자체를 뒤흔들어버릴

정도의 족적을 남긴 천재의 대명사가 존 폰 노이만 이다.

 

너무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그는'인간을 가장 완벽하게 연기해내는' 외계인이라는

 설까지 나왔던 인물.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수학자 존내쉬 (John Nash) 의 전기, "A beautiful mind" 의 7번째 챕터가

"John von Neumann" 이다.

 

그 책에 나온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노이만은 :

 

1. 일생 동안 약 150 여편의 논문을 썼고 60 여편은 순수 수학, 20 여편은 물리학, 60 여편은 응용 수학 관련

 2. 냉전 찬성론자, 소련에 대한 선제 공격 및 핵실험 찬성론자

 3. 무엇이든 한 번만 읽으면 다 외워버렸던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

 전화번호부를 순식간에 외워버림. 암산 능력 역시 경이적이어서 6살때 8자리 숫자끼리의 나눗셈을 암산으로만 해냄.

 

4. 8살때 calculus 를 마스터, 12 살때 전문 수학자들이 읽는 저작들을 읽기 시작했고 당시 이미 "비쟌틴 역사",

"남북전쟁", "쟌다르크" 등에 관한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보유

 

5. 직장을 염려한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 학부에서 화학 전공, 대개 수학을 공부하면서

 보냄. 베를린과 부다페스트를 왔다갔다 하면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등을 들으며 수학 공부 병행.

 

6. 19살 때, 집합론을 창시한 칸토어(Cantor) 를 능가하는 '서수'(ordinal number) 의 현대적 정의를 다룬 2번째 수학 논문 발표. 25 살때까지 10 편의 중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서른살 무렵까지 약 서른 여섯편의 논문 발표

 

7. 서른살에 아인슈타인, 괴델 등이 재직하던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에 6명의 수학 교수 중 한명으로 참여

 8. 최초로 경제학을 '전략', '게임' 의 관점에서 분석했던, 심리학의 영역에 있던 인간의 경제적 행동을 수학적 분석이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온 책 "The Theory of Games and Economics" 를 Morgenstern 과 공저

 

9. 2차대전 중에는 오펜하이머의 맨하튼 프로젝트에 top mathematician 으로 참여 해서 원폭 개발에 관여

10. 디지틀 컴퓨터의 prototype 을 만드는데 활용되는 수학적 이론 창안 이런 일화가 있다. "파리 퍼즐" 이란게

있으며서로 20 마일 떨어진 두 대의 자전거가 마주보고 출발 한다.

 

이 때 자전거 속도는 시속 10 마일. 그런데 한 쪽 자전거에는 파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파리는 시속 15 마일로 날라간다.

자전거가 출발할 때 파리도 출발해서 반대편 자전거에 도착하면 다시 방향을 정반대로 해서 맞은 편 자전거를 향해

날라간다고 할 때.

 

두 자전거가 만날 때까지 파리가 주행한 거리는 얼마인가 라는 것이 파리 퍼즐 이다.

 이 퍼즐의 트릭은 이렇다.

두 자전거는 결국 1시간 후에 부딪힙니다. (둘 다 시속 10마일 속도로 출발해서 각각 10마일씩 움직이면 만나니깐)

따라서 파리는 결국 1시간 동안 움직인 거리인 15마일을 주행하게 되는 것.

 

이 트릭을 이용하지 않고 파리의 주행거리를 계산하려면 무한급수의 합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노이만에게 이 퍼즐을 냈더니 금새 답을 말하더라는 것이다.

문제를 낸 사람이 물었죠. 트릭을 어떻게 알아냈냐고. 노이만의 대답. . . . "무한급수의 합을 계산했는데?"

 

http://www.web-biz.pe.kr/chrx.pl?c=존폰노이만 에서..

 

 지상 최강의 천재  *존 폰 노이만, 심하게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화성인, 또는 악마의 두뇌를 가진 남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학·물리학·공학·경제학·계산과학·기상학·심리학·정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 놀이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완벽하게 암기· 현재의 PC는 노이만형 컴퓨터라고 하는데,

노이만이 만든 것이 원조· 6세 때, 전화번호부를 사용하여 8자리수의 나눗셈을 암산으로 계산할 수 있었다·

 

 8세 때「미적분」을 마스터, 12세의 무렵에는「함수론」을 독파.  참고로「함수론」은, 이공계 대학생이 1, 2년차에 배우는 수학으로 고교시절 수학에 자신있는 학생이라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수학자가

 3개월에 걸쳐 고심해온 끝에 간신히 푼 문제를 노이만은 암산으로 해결.·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않는 사진과 같은 기억력· 컴퓨터 같은 수준의 계산속도로, 실제 노이만은 스스로가 발명한

컴퓨터와 경쟁해서 승리한 적 있다·

 노벨상 수상자조차 따라갈 수 없는 머리회전· 머릿 속에는 면적 1 헥타르 정도의 버추얼 화이트 보드가 있어서

노이만은 종이와 연필을 사용하지 않고 그 뇌 캠퍼스를 이용,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인간을 초월한 사고능력에 의해 인간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수소폭탄의 효율계산을 위해 페르미는 대형 계산자, 파인먼은 탁상 계산기로, 노이만은 천정을 바라보며 암산했지만, 노이만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값을 냈다·

 

하루 4시간의 수면 시간 이외에는 항상 뭔가를 골똘히 생각, 짖궂은 성희롱을 너무 즐겨서 비서의 스커트 안을

 들여다보는 등 그 행동은 그야말로 에로 그 자체였다고 한다.

 추정 IQ는 250~300으로, 만일 동경대 의대를 목표로 공부 한다면 1주일 만에 쉽게 합격할 레벨이다.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학자 중에서도 발군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으며 계산은 일반적인 컴퓨터보다 빠르다...

 

 

 


 

 

 

 

10위 정보이론(1948년 클로드 섀넌)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은 오늘날 디지털 정보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학자. 이분법(binary sorting)에 의한 정보 '체계화' 이론을 구축한 그는 디지털 정보에 최초로 '엔트로피(entrophy)'개념을 도입한 매우 독창적인 사람이었음. 그의 정보 이분법 방식은 오늘날 컴퓨터 데이터 전송 뿐 아니라 카드 마법에서까지 활용되고 있음.]
 

클로드 새넌(Claude Shannon)이 오늘날 정보 이론의 근간이 된 "커뮤니케이션의 수학적 이론(The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을 발표함. 새넌의 이론은 컴퓨터의 '비트(bit: 0과 1)'를 이용해 메시지 데이터를

 정확히 전달하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컴퓨터 정보통신 기술의 중요한 기초 이론을 제공함. 

 

새넌의 정보통신 이론은 기본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어떻게 주변의 '잡음'들과 섞이지 않고 온전히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잡음'들로부터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추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새넌은 '스무고개 게임' 방식을

제안한다. 

 

스무고개 게임은 상대편이 어떤 사물이나 생명체를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나씩 던져 답에 접근해가놀이.

스무고개 게임을 (스무 질문 안에) 풀기 위해 사람들은 "생물? 무생물?" "동물? 식물?"과 같은 식으로 넓은 영역에서

 좁은 영역으로 범위를 점점 좁혀가게 된다. 

 

새넌은 이 스무고개 게임 방식을 0과 1에 기반한 컴퓨터 회로에 응용한다.

 즉, 원하는 메시지(정보, 데이터)를 구분하기 위해 각각의 '질문'에 컴퓨터는 '예/아니오(1/0)'로만 대답해 답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가령, 1부터 100사이의 숫자 중 어느 하나를 추출하기 위해 컴퓨터는 "50보다 큰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한다.

 50보다 작을 경우 대답은 '아니오(0)'가 되고, 그 다음엔 "25보다 큰가?"라는 질문에서 25보다 클 경우 대답은 예(1),

 그 다음엔 "33보다 큰가?"라는 질문… 이런 식으로 전달하려는 데이터의 범위를 절반씩 좁혀 나가 결국엔 원하는

데이터를 얻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예/아니오, 즉 1과 0으로만 처리되는 것이다. 

 

영어 알파벳을 전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먼저 "L보다 앞에 있는 알파벳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영어 문장을 구성하는 30개의 심볼들을 하나씩 맞춰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최대 5개의 질문만으로 전달하려는 심볼을 찾아낼 수 있다.

 역시 모두 1과 0의 대답으로만 말이다. 

 

요컨대, 컴퓨터 회로가 1과 0의 대답을 할 때마다 정보의 '정확도'는 점점 높아지는 것이다.

새넌은 이 1과 0의 대답이 정보의 최소 기준점인 '비트(bit)'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오늘날 컴퓨터 정보 이론가들에게 '비트'라는 개념은 바로. 대상의 범위를 좁혀가는, 0과 1의 대답을 의미한다. 

 

새넌은 자신의 이론에서 '비트'로 어떤 메시지든 '코드화(coded)'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주변에 아무리 많고 복잡한 잡음들이 있더라도 0과 1의 비트 코드를 자세히 구성해 놓으면 원하는 메시지가,

잡음 속에 섞이지 않고,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넌의 이론에 의해 음성, 비디오 동영상과 같은 고용량 디지털 데이터도 코드화를 통해 전기 신호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새넌의 정보 이론은 이후 수많은 과학 분야에 뿐만 아니라, 컴퓨터 정보처리 이론 및 컴퓨터 네트웍의 프로토콜

(protocol)에까지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