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blur - Blur - Coffee and TV
Coffee and Tv
Do you feel like a chain store?
체인점 같다고 당신은 느끼나요?
Practically floored
값싼 플로어가 깔린..
One of many zeros
쓸모 없는 사람중 하나라고
Kicked around bored
이리 부때끼고 너무 지루한채 말이죠
Your ears are full but your empty
많은 말들을 듣지만 공허하죠
Holding out your heart
당신의 진정한 마음을 보여주지만
To people who never really
아무도 당신이 어떤지 진정으로
Care how you are
신경 쓰지 않는군요
So give me Coffee and TV
그러니 커피,tv를 즐기며
History
과거를..
I've seen so much
많은 일들을 봤죠
I'm going blind
점점 제정신을 잃어가요
And i'm braindead virtually
뇌사상태처럼
Sociability
사회에 적응하는게
It's hard enough for me
내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죠
Take me away from this big bad world
그러니 이 크고 힘겨운 세상에서
And agree to marry me
날 데려가 제발 결혼해주세요
So we can start over again
그렇게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죠
Do you go to the country
시골로 가볼까요
It isn't very far
그리 멀지 않아요
There's people there who will heart you
그곳엔 당신 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Cos of who you are
반결줄 사람이 많죠
Your ears are full of the language
수많을 말들. 지혜가 있다고
There's wisdom there you're sure
당신은 확실하지만
'Til the words start slurring
그 말들이 비방을 시작하면
And you can't find the door
당신은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답니다.
So give me Coffee and TV
그러니 커피,tv를 즐기며
History
과거를..
I've seen so much
많은 일들을 봤죠
I'm going blind
점점 제정신을 잃어가요
And i'm braindead virtually
뇌사상태처럼
Sociability
사회에 적응하는게
It's hard enough for me
내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죠
Take me away from this big bad world
그러니 이 크고 힘겨운 세상에서
And agree to marry me
날 데려가 제발 결혼해주세요
So we can start over again
그렇게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죠
song2
I got my head checked
By a jumbo jet
It wasn't easy
But nothing is, no
When I feel heavy metal
And I'm pins and I'm needles
Well I lie and I'm easy
All of the time but I'm never sure when I need you
Pleased to meet you
I got my head done
When I was young
It's not my problem
It's not my problem
When I feel heavy metal
And I'm pins and I'm needles
Well I lie and I'm easy
All of the time but I'm never sure when I need you
Pleased to meet you
Yeah, yeah
Yeah, yeah
Yeah, yeah
Oh, yeah
데이먼 알반과 그의 가족들은 그동안 지내어 왔던 그들의 고향인 런던을 떠나 콜체스터(colchester)로 이주한다.
그리고 바로 그곳, 콜체스터의 스탠웨이 종합학교(stanway comprehensive)에서 데이먼 알반과 그레험 콕슨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1988그레험 콕슨은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 college)에 진학한다.
그는 이 대학에서 알렉스 제임스를 만난다.
그에 앞서 이미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데이먼 알반은 바(bar)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한다.
그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무보수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레코딩
스튜디오인 더 비스 팩토리(the beat factory)에서의 일. 데이먼은 콜체스터 아트센터(chlchester arts center)에서
솔로리스트로써 한번의 공연을 갖기도 한다.
그레험과 그의 친구인 데이브는 청중 가운데 하나로 자리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험과 알렉스 그리고 데이브는 데이먼의 데모들의 레코딩을 함께 작업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합심한 그 첫번째 레코딩은 데이먼의 일터 가운데 하나였던 레코딩 스튜디오, 더 비트 팩토리에서 이루어졌다.
1989세이무어(seymour)라는 이름으로 이 네명의 사나이들은 몇번인가의 작은 공연들을 벌였다.
대부분의 공연들은 런던 근교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에는 딩월즈(dingwalls), 캠던(camden),
파워하우스(powerhaus), 이슬링턴(islington)등도 포함되어 있다.
무명시절, 지속적인 공연을 해오던 이들은 80년의 마지막 해에, 지저스 존스(jesus johns)의 소속사인 푸드 레코드
(food records)의 사장인 앤디 로즈(andy rose)의 눈에 들게 된다.
90년대를 여는 이들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이들은 3월, 푸드 레코드와 계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밴드명을 세이무어에서 블러(blur)로 교체한다. 밴드명을 교체한 가장 큰 이유는 레코드사로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레험과 알렉스는 멀쩡하게 다니던 대학을 과감하게 중퇴해 버리고 밴드의 일원으로써 레코딩에 참여한다.
그리고 데뷔싱글인 'she's so high'가 10월에 발매된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블러의 등장에 흥미로와했고, 차트 48위에 마크되는 가능성있는 출발을 기록했다. 9
0년 말, 블러는 브릭스톤아카데미(brixton academy)에 숩 드레곤스(soup dragons)의 써포터로 등장하면서 서서히
대형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91 두번째 싱글인 'there's no other way'가 발매되고 이 싱글은 신인으로써는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는 차트
8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어 들인다.
십대를 주 고객층으로 하는 잡지들과 음악 언론지들을 비롯해 가쉽 위주의 신물들까지 진지하게 블러라는 신생밴드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가슴이 풍만한 소녀들과 긴다리 열성팬들이 술주정뱅이 밴드에게 미쳐가고 있다라는
식의 우습지도 않는 문구를 헤드라인으로 뽑긴 했지만) 'the daily star'는 처음으로 블러라는 밴드를 대대적으로
다루어 가능성있는 밴드에 대한 안목에 일가견을 보이기도. 이들은 보다 광범위한 장소들을 순회하며 투어를 돌았다.
한편 브릭스톤 아카데미에서 열린 푸드 레코드 소속 밴드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앞날이 빛나는 새로운 밴드로써
쇼케이스를 선보인다.
91년 한해동안 일구어낸 두 개의 성공적인 싱글과 공연들.
통해 블러는 보다 본격적이고 영리하게 뮤직 비즈니스에 반응하게 된다.
결과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이들의 데뷔앨범 'leisure'는 봐줄만한 정도로 별볼일 없는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2바야흐로 세계가 얼터너티브-그런지의 폭풍권으로 몰입한 시기.
(아.. nevermind가 나올 시기군여..) 영국에서는 그 어떤 밴드의 지명도보다 블러 그리고 스웨이드가 가진 것이 컸다. 이 두 밴드는 말 그대로 양대 산맥을 이루어 팬과 여론을 양분하고 다양한 고리들로 (굳이) 연결되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정책적으로 스웨이드를 대변하는 브렛 앤더슨(brett anderson)과 블러를 대변하는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은 당대 가장 지명도 있는 밴드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만으로도 쉽게 비교되곤 한다.
더군다나 (이미 끝난 얘기긴 하지만) 저스틴 프리쉬먼(justine frischmann)이 브렛 앤더슨의 옛 여자친구이자, 초기
스웨이드에 음악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친 바 있고, 92년 무렵의 블러에게(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무시할 수 없는 모종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더욱 이 두밴드를 비교하는 (희극이든 블랙코미디든 일종의)
재미를 더했다. 이 해에 블러는 두번째 미국 투어 길에 올랐다.
그러나 너바나와 시애틀에 반쯤 혼이 나가있던 미국은 너덜너덜 풀어낸 청바지와 여러 겹으로 겹쳐있는 레이더으룩,
거친 장발과 수염, 그리고 지글거리는 그런지 특유의 디스토션과 노이즈만을 존중하는 듯 보인다.
물론 어디서나 예외는 여지없이 존재했지만 그 몫이 블러의 것은 아니었다.
자국에서의 '괜찮은"은 반응과는 달리 여기저기 부딛치고, 넘어지고, 깨진 패잔병의 모양새로 이들은 영국으로
들어온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괜찮지 못한' 결과는 거대한 스트레스로 작용하게 된다.
1993싱글 'for tomorrow'가 비교적 좋은 반응을 받았고 두번째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가 공개된다.
그리고 이 앨범은 미국투어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크게 작용된 앨범이라는 의혹이 짙게 퍼진다.
1994드디어 무언가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해.
싱글 'girls & boys'가 차트에서 호기어린 성공을 거두고 3월에는 5위권에 진입한다.
이에 따라나선 세번째 앨범 'parklife'는 전설, 너바나의 프론트맨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죽음과 맞물려 거의
같은 시기에 발매된다.
이들의 사운드는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하는데 미국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틀린, 소위 브릿팝이라
호칭되는 자신들의 고향인 영국에 뿌리를 둔 사운드를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더 잼(the jam), 더 킹크스
(the kinks), 데이빗 보위(david bowie)등이 다져낸 양질의 음악적 토양을 기반으로 이들은 '브릿팝 무브먼트(
britpop movement)'의 주역으로 자리잡는다.
이 앨범에서는 세개 이상의 성공적인 싱글이 커트되었는데, 이 모든 싱글들이 차트권 20위안에 드는 성공을 거둔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성황리에 공연들을 치르며 바쁜 한해를 보낸다.
1995이들이 네번재 앨범을 레코딩 하는 와중에도 영국의 권위있는 시상식들에서는 계속해서 이들에게 각종 상들을
수여한다.
6월에 이르러 마일 앤드 스타디움(mile end stadium)에서 공연을 가진 뒤 8월에 싱글 'country house'를 선보인다.
이무렵 오아시스(oasis)가 메인스트림 락씬에 등장한다.
오아시스와 약간의 차이긴 하지만 블러의 'country house'는 차트 1위에 오르고 'the great escape'는 앨범차트
정상에 우뚝 선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추어 발매된 싱글 'the universal'은 블러의 세번째 차트 5위 히트 넘버로 기록된다.
1996
'stereotypes'가 1월에 싱글 커트되어 차트 7위에 오르고 'charmless man'이 그뒤를 따라 차트 5위를 기록한다.
작년에 거대했던 성공의 여파틑 받은 이 싱글들이 차트에서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앨범의 작업이 늦어진 이유인지 원래 대세가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이들은 대부분의 대형 시상식에서의 스포트라이트를 오아시스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리고 데이먼은 (그 유명한 언급인) 'britpop is dead'라고 선포한다.
그는 본격이지는 않지만 약간의 솔로활동들을 펼치는데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패셔너블한 사운드 트랙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이다.
확실히 무언가 변했지만 블러는 속이야 어쨌든 간에 표면상으로는 와해되지도, 혼란스러워하거나, 다급해하지도 않는, 안정적인 한해를 보낸다.
1997이들의 다섯번째 앨범 'blur'는 97년 2월 11일에 전격 공개되었다.
이 앨범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차트 1위로 진입했고, 네 개의 성공적인 싱글들 역시 대중들의 지대한 사랑을 받았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대다수의 블러 팬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곡인 동시에 한번 들으면 좀처럼 잊을수 없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역시 성공한 싱글 가운데 하나인) 'song2'는 경쾌하게 울려대며 시체(즉 브릿팝)의 위력을 아낌없이 보여운 예로 남는다. 오아시스의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신선함(혹자는 언론플레이)에서 뒤질수 있는 중견급 밴드인 블러가 객관적인 '성공'을 거머쥘 수 있는 이유는 97년작인 'blur'의 완성도에서 기인한다는 중론이다.
1998연이은 앨범들의 성공 이후, 밴드는 특기할 만한 레코딩과 관련된 행보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그레험이 솔로 프로젝트 'the sky is too high'를 발표해 화제를 불러 일으킨다.
이 앨범은 데이번 조차 놀랐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팬들에게 말 그대로 놀라운 선물이 된다. 98년 초가을 경 멤버들은 통산 여섯번째 앨범 '13'의 레코딩에 들어간다.
1999그리고, 그들의 6집 '13'이 발매된다.
프로듀서는, 오랫동안 이들의 앨범을 프로듀싱해온 스테판 스트릿(stephen street)이 아닌 자칭 블러의 팬이라는
윌리엄 오르빗(william orbit)이 담당했다.
프로듀서로 인한 부분이 큰지, 멤버들의 내적인 변화에서 기인한 부분이 더 큰 것인지에 대한 확답은 없으나, 확실히
이 앨범은 블러의 전작들과는 무척이나 다르다.
같은 것이 있다면 빛이 바랜 흑백사진 같은 예전 그때, 90년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그들이 뭉쳤을 때처럼,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들을 하겠다는 일념이 여전해 보인다는 것.
200010월, 그레험 콕슨 솔로 2집 'golden D'발표.
10월 중순, 새 생글 'music is my radar'발표.
11월 'blur : the best of'를 발표. 99년 11월 런던 웸블리 극장에서 있었던 10주년 공연 라이브 트랙 10곡이 보너스로 들어있는 2cd로 한정판으로 발매됨.
이제 블러는 베스트 앨범과 더불어 한 세대를 넘어섰습니다.
2001년 현재 데이먼 알반은 힙합 프로젝트 밴드인 고릴라즈(gorillaz)에서 보컬으로 활동하고 있구요,
알렉스는 비행기 조종에 푹 빠져서 작곡을 게을리하며 데이브는 자기가 만든 애니메이션 회사 일에 열심히
정진(??)중이라는... 아쉽게도, 올해에는 블러의 새 앨범을 발표하지 않지만 몇개의 싱글은 기대해 볼 수 있을듯.
모 사이트에서 parklife로의 회귀의 뜻을 슬쩍 비췄다 하는데, 글쎄요... 어찌되었든 간에...... 기대되지 않습니까?
출처는 핫뮤직입니다.
- 영국 밴드 'Blur'에 관하여....
출처: 네이버 지식인
스톤 로지스(Stone Roses) 이후 등장한 브릿 팝 밴드 중 하나인 블러(Blur)는 "브릿 팝을 창조했고, 브릿 팝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브릿 팝의 제왕으로 등극"한 밴드다.
이들은 킨크스(The Kinks), 스몰 페이스(The Small Faces), 후(The Who), 잼(The Jam), 매드니스(Madness),
스미스(The Smiths) 등이 형성한 영국 기타 팝의 전통을 계승한 밴드이자 이를 확립한 밴드라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90년대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밴드 중 하나인 이들은 단지 브릿 팝의 전형 안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도전적인 사운드로 발전해 나갔다.
90년대 후반 브릿 팝 무브먼트가 점차 쇠락의 길에 빠져들었을 때 블러는 인디 록과 로우 파이의 영향을 받아들여
아트 팝 밴드로의 선회을 꾀했다.
그들과 - 의도와는 무관하게 - 대결 구도에 놓였던 오아시스(Oasis)가 비틀스(The Beatles)의 수혜자로서 멜로디를 중심으로 한 사운드를 펼쳤던 것과 달리 블러는 멜로디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브릿 팝의 전형을 마련한 초기작들에서부터 미국 인디 밴드의 마인드를 빌어 그 전형으로부터 탈피하려 했던 일련의
과정에서 블러는 브릿 팝 밴드인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블러는 1989년 영국 콜체스터(Colchester)에서 데이먼 알반(Damon Alban, 보컬/키보드)과 고등학교 동창인 그래엄
콕슨(Graham Coxon, 기타/색소폰), 컴퓨터 엔지니어이자 콜체스터 로컬 밴드로 활동하던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 드럼), 그리고 알반의 대학 동창인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 베이스)에 의해 '세이무어(Seymour)'라는 이름의 밴드로 결성됐다.
이들은 클럽가를 중심으로 한 공연과 'Fool'과 'She's So High' 등이 포함된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데모 테이프를 통해 저널리스트 앤디 로스(Andy Ross)와 티어트롭 익스프로우드스(Teardrop Explodes)의 키보디스트 데이브 밸프(Dave Balfe)가 운영하는 푸드 레코드(Food Records)와 계약을 체결하게 됐다.
그러나 푸드 레코드는 밴드명을 바꿀 것을 요구했고, 블러가 바로 이들의 밴드명이 된 것. 이후 발표한 첫 싱글
'She's So High'가 영국 차트 50위에 진입하는 데 이어 'There's No Other Way'가 차트 10위권에 진입하면서 블러는 유망주로 기대를 얻기 시작했다.
1991년 블러는, 이 두 개의 싱글에서 함께 작업했던 프로듀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 그는 블러와 97년
다섯 번째 앨범 "Blur"까지 작업했다)와 데뷔작 "Leisure"를 발표. 이 데뷔작이 앨범 차트 2위까지 진입하면서 블러는
쇠락해 가는 맨체스터 팝 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밴드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들의 깔끔한 외모 탓인지 다듬어진 틴 아이돌 스타라는 비난하기도.
이후 1992년 블러는 'Pop Scene'을 통해 보다 날카로워진 사운드를 들려줬다. 그러나 이는 1992년 당시의 브릿 팝이나 미국 그런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Pop Scene'은 영국 차트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3년 두 번째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를 발표. 처음 이 앨범의 프로듀싱은 XTC의 앤디
패트리지(Andy Partridge)가 담당했었다.
그러나 그와의 작업이 원활하지 않자 이들은 다시 스티븐 스트리트와 작업을 시작해 앨범을 완성했다.
거의 1년간의 스튜디오 작업을 통해 앨범을 완성해 푸드 레코드사에 앨범을 보냈지만 레코드사는 히트할 만한 싱글이 없다는 이유로 재작업을 요구했다.
이렇게 하여 이 앨범에 새롭게 수록된 곡이 'For Tomorrow'다. 새로운 트랙의 추가로 앨범 발매 준비가 다 된 듯했지만 이번에는 푸드 레코드사의 미국 배급사인 SBK가 미국에서 히트할 만한 싱글을 원했고, 다시 블러는 새로운 곡 '
Chemical World'를 추가 수록해야만 했다.
이 곡은 미국 마이너 얼터너티브 록계에서 인기를 얻었고 영국에서는 차트 28위를 기록했다.
"Modern Life Is Rubbish"와 관련된 또 다른 일화는, 이 앨범이 발매 예정일을 앞뒀을 때 SBK가 너바나(Nirvana),
소닉 유스(Sonic Youth)의 프로듀싱을 맡았던(Garbage의 일원이기도 한) 부치 빅(Butch Vig)과 재녹음하기를
요청했다는 것.
그러나 블러는 이를 거절, 그 해 5월 영국에서 이 앨범을 발매했고, 가을에는 미국 발매를 했다.
"Modern Life Is Rubbish"는 영국 차트 15위까지 진입, 그러나 미국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1994년 발표한 "Parklife"는 첫 싱글 'Girls & Boys'의 히트에 힘입어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둬냈다.
"Parklife"는 영국 차트 정상에 올랐고, 'Girls & Boys'는 싱글 차트 5위를 기록했다. 또한 이 싱글은 미국 차트 52위까지 기록했지만 15주동안 차트에 머무는 일정의 성공을 거둬냈다.
그리고 뒤이어 발표한 싱글 'To the End'와 'Parklife'가 영국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두면서 블러는 인디 밴드라는
수식어를 떼어버릴 수 있었으며, 90년대 중반 영국 팝 문화군을 이끌어나가는 주요한 밴드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앨범으로 블러는 1995년 브릿 어워드에서 '최우수 밴드', '올해의 앨범' 부문을 포함한 4개 부문을 수상.
이러한 블러의 성공은 '영국의 남북전쟁'으로 불려질 정도로 가열됐던 블러와 오아시스의 라이벌화를 가속시켰다.
"Parklife"가 트리플 플래티넘을 획득했던 1995년, 블러는 네 번째 앨범 녹음과 단독 공연(그 중에는 매진된
(Sold-out) 스타디움 공연이 포함된다)을 가지며 한 해를 시작, 그 해 8월 첫 싱글 'Country House'를 공개했다.
그리고 때마침 오아시스가 싱글 'Roll With It'를 발매, 이성을 잃어버린 듯 영국 매스컴들이 앞다투어 불붙인 블러와
오아이스의 대결구도에서 'Country House'와 "The Great Escape"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승리는 블러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뒤이어 발표된 오아시스의 두 번째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가 영국 뿐 아니라 미국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The Great Escape"는 그 가치에 비해 팬들로부터 더욱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오아시스와의 비교에 넌더리가 난 블러는 2년 가까이 칩거해 새 앨범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들이 97년 셀프 타이틀을 붙인 앨범 "Blur"를 들고 나타났을 때, 그것은 블러의 팬들을 적잖이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브릿팝은 죽었다고 선언한 데이먼 알반은 더 이상 브리티시 뮤직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으며, 미국의 인디 록에
매혹됐다고 표명했다.
이전에 보여줬던 세련된 도시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스스로 팝 밴드라 자칭할 만큼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찾을 수 없는 "Blur"는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와 일렉트로닉적인 사운드까지 겸하고 있다.
그러나 앨범 전체적인 분위기는 단연 산란하게 들릴 수 있을 정도의 노이즈 가득한 얼터너티브 사운드였다.
브릿 팝 씬에서 완연히 벗어난 블러의 또 다른 도전은 영국 내에서는 그다지 따스한 시선을 얻지 못했지만 그와 달리 'Song 2'를 위시한 이 앨범은 블러에게 미국에서의 성공을 안겨줬다.
그러나 블러의 음악적 변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데뷔작에서부터 함께 했던 프로듀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가 아닌 최근 가장 유력한 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로 군림하고 있는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과 함께 작업한 "13"은 "Blur"의 연장선 상에서 더욱 어둡고
혼탁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으며, 로우 파이와 인디 록적인 관심을 여전히 보여 주었다.
2000년 현재 블러는 11년의 경력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을 발매, 여기에는 신곡 'Music Is My Rader'가 수록됐다.
이 앨범은 데뷔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음악적 성과를 결산함과 동시에 앞으로 블러의 음악적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간단요약
이미 솔로로 활동 중이었던 Damon albarn과 Graham coxon, Alex james, Dave rowntree는 88년 'Seymour' 결성.
레코딩 스튜디오 'The beat factory'에서 'She's so high'가 포함된 데모 테잎을 제작했고 푸드 레코드 사장이었던
'Andy Rose' 와 계약 한후 밴드명을 'Blur'로 교체한다
90년 데뷔 싱글 'She's so high' 발매. 이듬해 두 번째 싱글 'There's no other way' 발매.
91년도 데뷔 앨범 'Leisure' 발매
'There's no other way'의 성공에 힘입어 미국 진출을 시도하였고. 객원 멤버로 저스틴 프리쉬먼을 영입하기도 했다.
그들의 2집 'Modern life is rubbish'는 그들이 미국 투어 중 겪었던 경험들을 노래함.
94년 세 번째 음반 'Parklife'발매. 95년 'Brit award'에서 베스트 싱글, 베스트 앨범, 베스트 비디오 부문 수상.
95년 'The great escape' 발매.
97년 셀프 타이틀 앨범 'Blur' 발매. 데이먼의 발언 'Britpop is dead' 이 나온 시기. 앨범 제작에 '소닉유스' 참여.
99년 여섯 번째 앨범 '13' 발매. 오랜 프로듀서였던 ' Stephen street' 'William orbit'과 작업.2000년 베스트 앨범 발매.
2003년 7번째 앨범 'Think Tank' 발매. '팻 보이 슬림'이 음악에 참여. 잠정적 멤버 그레이엄 콕슨 탈퇴.
블러(Blur)
블러(Blur)는 영국 록 밴드이다. 1988년, 런던에서 시모어(Seymour)라는 이름으로 처음 결성되었다.
그룹 멤버는 보컬/키보드의 데이먼 알반(Damon Albarn), 기타리스트/보컬의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
베이시스트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 그리고 드러머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로 구성되었다.
블러의 데뷔앨범 《Leisure》(1991)는 매드체스터와 슈게이징 스타일의 록 음악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킹크스, 비틀즈 그리고 XTC와 같은 기타사운드 기반 영국 그룹들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 스타일이 변화함에
따라, 《Modern Life Is Rubbish》(1993), 《Parklife》(1994) 그리고 《The Great Escape》(1995)를 차례로
발표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블러는 브릿팝이 인기를 얻는데 도움을 주었고, 1995년 라이벌 밴드인 오아시스와의 차트 전쟁인
"브릿팝 전쟁"을 통해 영국에서의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다.
후속 앨범인 《Blur》(1997)을 통해 미국 인디 록그룹들의 로파이 스타일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주므로써 밴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싱글 앨범 중 하나인 "Song 2"는 미국에서의 주류적인 성공을 가져다준다. 그들의 다음 앨범인 《13》(1999)는
일레트로닉과 가스펠 음악을 통한 실험성과 데이먼 알반의 더 많은 개인적인 가사가 특징이다.
2002년 5월, 7번째 앨범인 《Think Tank》(2003)을 녹음하는 동안 그레이엄 콕슨은 블러를 떠났다.
이 앨범은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좀 더 최소의 기타작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당시 데이먼 알반이 힙합과 아프리카 음악에 흥미가 높았음 보여주고 있다.
2003년 그레이엄 콕슨이 없는 순회 공연 이후, 블러의 각 멤버들이 다른 프로젝트에 종사함으로써 밴드로서 스튜디오 작업과 순회 공연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2008년 그레이엄 콕슨이 다시 돌아옴으로써 블러는 콘서트를 위해 재결합하였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몇몇의
싱글, 회고 자료들을 발표하였다.
2009년 7월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재결합 콘서트를 개최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 기념으로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2012년, 블러는 브릿 어워드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공립중학교 시절부터 소꿉친구인 데이먼 알반과 그레이엄 콕슨은 1988년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알렉스 제임스를 만난다.
데이먼 알반은 그 해 10월, 드러머인 데이브 로운트리와 서커스(Circus)라는 이름의 인디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서커스의 기타리스트가 밴드를 떠나고 난 뒤 그레이엄 콕슨이 합류하게 되었고, 이 계기로 밴드의 질은 비약적으로
향상 된다.
그 해 12월 데이브가 서커스의 두 멤버들을 탈퇴시킨 것을 계기로, 알렉스 제임스가 베이시스트로 합류하게 되면서
총 4명의 밴드로 재편성 하게 된다.
1988년 12월, 멤버들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D.Salinger)작의 소설인 호밀밭의 파수꾼 (Seymour: An Introduction)에서 따와 밴드 이름을 시모어 (Seymour)라고 짓는다.
1989년 여름, 이 그룹은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갖는다.
그 해 11월, 푸드레코드(Food Records' A&R)의 대표 앤디 로스 (Andy Ross)는 시모어의 공연을 본 뒤 그의 레이블과의 계약을 제안한다.
하지만 로스와 푸드레코드는 그들의 밴드명에 불만을 갖고 대체 그룹명들이 적힌 리스트를 작성하여 새 그룹명을
짓기를 제안했다.
멤버들은 그 중 '블러 (Blur)'를 그룹명으로 결정하였고 1990년 3월, 푸드레코드는 새 이름을 얻게 된 밴드인 '블러'와 계약을 하게 된다.
1990년 3월에서 7월까지 크램프스의 오프닝밴드로서 영국 전역을 투어하며 새로운 곡들에 대한 반응을 테스트 한다.
1990년 10월, 블러는 투어가 끝난 뒤 〈She's So High〉라는 싱글을 발표하는데 영국 싱글차트에 48위에 랭크 된다. 하지만 밴드는 후속싱글 제작을 하며 문제에 부딪혔고, 프로듀서인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와 함께 제작하기 시작했을때서야 제대로 된 곡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발매된 두 번째 싱글인 〈There's No Other Way〉는 최고 8위까지 찍으며 히트하게 된다. 블러는
〈She's So High〉 싱글의 성공으로 팝 스타가 되었고, 런던에 위치한 The Syndrome club의 공연 밴드로서 자주
초청되었다. 1991년, 당시 NME 매거진은 블러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블러는 맨체스터 록그룹들이 생명을 다하기 시작한 후로 등장한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미소년 밴드들 중 하나다."
세 번째 싱글인 〈Bang〉은 겨우 24위에 랭크되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낳는다.
그럼에도 앤디 로스와 푸드레코드의 사장인 데이비드 밸프는 블러의 최선책이 계속해서 매드체스터 장르를 하는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블러는 음악적 역량을 넓히기 위한 시도를 하려했지만, 그룹의 데뷔 앨범 녹음 당시 알반이
그 스튜디오에서 가사를 써야 했기때문에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첫 번째 앨범인 《Leisure》 (1991)은 영국 음반 차트에서 7위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저널리스트 존 해리스(John Harris)는 "용두사미의 냄새를 지울 수가 없다." 고 《Leisure》를 평하는 등 평단에서
엇갈린 평을 받게 된다.
브릿팝의 시대 : 1992-95
1992년 3 월, 지저스 앤 메리체인 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등이 출연하는 대규모 공연 순회인 '롤러코스터 투어'에
오프닝 그룹으로 참여하게 되지만, 그 것 전후로 매니저가 밴드의 자금을 횡령하여 은행계좌에 6만 파운드의 빚이 있는 것을 알게된다.
파산은 어떻게든 모면했지만, 도움을 준 T셔츠 회사의 따라 6만 파운드의 빚을 갚기 위해 미국투어를 결정하게 된다.
그들은 싱글인 〈PopScene〉을 발매하는 동시에 투어를 시작한다.
음악적 특징으로는 "빠르고 세찬 펑크록 기타반주, 60년대 팝 스타일의 후렴구, 요란한 영국 호른, 통제되는 맹렬함,
그리고 현대적이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PopScene〉은 블러 음악의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이 싱글은 발매 후 겨우 UK차트 32위에 머물게 되는데, 데이먼 알반의 1993년 NME 인터뷰에서 "우리는
〈PopScene〉에서 큰 변화를 느꼈어요.
매우 매우 영국적인 음반으로 말이죠."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건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했죠...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지지없이 영국적인 이상향을 밀고나갔지만 아무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죠."
결과적으로 이 싱글이 빛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 "Never Clever"의 이름의 싱글 발매 계획은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블러의 두 번째 앨범 작업은 미뤄졌다.
두 달간 휴일도 없는 미국 투어동안, 블러는 종종 서로에게 좌절감을 터트렸고, 몇몇의 물리적인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점점 불행해져갔다.
미국 투어 전후로 멤버들이 알콜 중독을 앓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고, 어떤 라이브에서는 음주 상태로 최저의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멤버들은 향수병을 앓았다.
데이먼 알반은 그 당시를 회고하며 "정말 사소한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영국에 대한 모든 것이 그리웠고, 그래서 영국적인 분위기의 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했죠." 라고 이야기했다.
그룹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블러는 (특히, 데이먼 알반은) 자신들이 떠나의 있는 동안 라이벌 그룹이었던
스웨이드의 성공적인 성과에 감정이 상한다.
1992년, 같은 과정을 거친 스웨이드의 성공과 대비되는 시시한 성과 후 블러는 푸드레코드와의 계약 파기의 위험까지 닥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블러는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겪었고, 너바나와 같이 당시 인기있던 미국 그런지록 그룹들과 대비되는 영국 전통 록그룹을 바탕으로 하는 그룹으로 이미지 변화를 꾀 할 생각이었다.
비록 데이먼 알반의 대한 새로운 선언에는 회의적이었지만, 푸드레코드의 사장인 데이비드 밸프는 밴드의 선택대로
XTC의 앤디 파트리지가 후속 앨범을 제작하는 것에 찬성을 했다.
하지만 앤디 파트리지의 작업 성과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서, 〈There's No Other Way〉를 히트시킨 스티븐 스트리트가 그룹의 프로듀스를 하기 위해 돌아왔고 블러는 그와 다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1997년 10월 21일, 정동문화회관에서 블러의 국내 첫 내한 공연이 있었다.
2천여 석의 자리를 가득 채운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이 있었다고 하나, 실 관객수는 1300여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날 블러는 한시간 반이라는 공연 시간 동안 총 16곡을 불렀는데 첫곡으로 1997년 초에 발표한 5집 《blur》에
수록 된 〈Beetlebum〉을, 마지막 곡으로는 〈Song2〉를 선곡 했다.[1] 당시 Mnet이 공연 실황을 녹화하여 방영하기도 했다.
데이먼 알반은 공연 전 경향신문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영화배우가 새로운 작품에서 변신을 보여주면 박수갈채를 받지만 가수의 변신은 많은 반발을 받게 된다.
언론이나 평론가로부터 우리의 음악이 어때야 한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라며 "우리의 음악은 우리가 결정한다."라고 음악에서의 밴드의 소견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대표 곡
She's So High (1990년)
《Leisure》 수록. 블러로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곡. ‘I know’와 함께 더블 A면. 당시 유행하던 슈게이징 사운드의 영향을 받아 황홀한 기타 연주가 인상적이다. 그레이엄 콕슨과 알렉스 제임스가 중심이 되어 만들었다고 한다.
There's No Other Way (1991년)
《Leisure》 수록. 그루비한 전자오르간에 그레이엄 콕슨의 특징적인 기타 리프와 코러스를 배합 한, 최초의 메이저
히트 곡. 뮤직비디오는 UK 버전과 US 버전 두 종류가 있다.
Popscene (1992년)
앨범 미수록 (《Modern Life Is Rubbish》 일본판에는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 블러의 곡으로 처음 브라스 세션이 도입되었다. 스웨이드의 'The Drowners’ 와 함께 '최초의 브릿팝 송'이라고 할 수 있는 기념적인 곡. 밴드의 선호로 라이브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For Tomorrow (1993년)
《Modern Life Is Rubbish》 수록. 두 번째 앨범 제작 후반에 레벨의 사장이 싱글용 곡이 없다고 지적, 데이먼 알반이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철야로 작업하여 만든 곡. UK차트 28위로 판매량은 부진했지만, XTC와 킹크스를 연상시키는
엇박자의 멜로디, 현악기와 브라스 세션 등을 도입한 팝적인 사운드는 '브릿팝'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곡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후렴구의 'La La La'는 전 세계 사람들이 노래하기 좋게 도입되었다.
Chemical World (1993년)
《Modern Life Is Rubbish》 수록. 그레이엄 콕슨의 맑고 깨끗한 기타 리프와 시원 시원한 리듬이 특징인 팝.
‘For Tomorrow’에 이어 미국 레벨인 SBK와 푸드에서 이번에는 미국 싱글용 곡이 없다고 이야기해서 만들어졌다.
데이먼 알반은 비아냥대며 데모 트랙 이름을 ‘Americana’으로 했었다고 한다. 앨범 버전 이외의 미국 버전으로도
녹음 되었다고 한다.
Girls & Boys (1994년)
《Parklife》 수록. 120bpm의 저렴한 디스코 풍의 알렉스 제임스가 연주하는 특징적인 베이스 라인을 타고, 끝없이
A 코드를 반복하면서 진행하는 댄스튠. 이 곡을 통해 영국은 물론 유럽 전 지역에서 인기의 제동을 확실히 걸었다.
To The End (1994년)
《Parklife》 수록. 프렌치 팝 풍의 발라드. 앨범 버전은 스테레오랩(Stereolab)의 레티샤 사디(Laetitia Sadier)가 참가. 프랑스에서는 프랑소와즈 아르디(Françoise Hardy)와 데이먼이 듀엣 한 버전도 출시되었다. 데이먼이 프랑스어로 노래하는 부분도 있다.
Parlife (1994년)
《Parklife》 수록. 버진 라디오가 발표 한 '지난 10 년간 가장 중요한 노래 베스트 100' 5위에 랭크. 런던 사투리의
나레이션을 표현하기 위해 모즈를 다룬 영화 <콰드로페니아>(1979)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필 다니엘스를 게스트
보컬로 맞이하고 있다.
밝은 곡조 속에 영국풍의 시니컬한 유머가 넘치는, 브릿팝 무브먼트를 상징하는 곡이다.
End Of A Century (1994년)
《Parklife》 수록. 후에 'Look Inside America'(1997)의 곡에 영향을 준 발라드곡. 데이먼 알반의 집에 개미떼가 몰려왔던 '사건'이 곡의 기본이 되었다.
현재 라이브로도 즐겨 연주된다.
작곡 당시 멤버들은 20대였기에, 가사에 '30세를 향해 (to thirty)'라는 구절이 있지만, 현재 라이브에서는 '50세를 향해 (to fifty)'라고 가사를 바꿔 부르고있다.
This Is A Low (1994년)
《Parklife》 수록. 앨범 제작 중 최초로 녹음 된 곡. 싱글 컷은 되지 않았지만, 베스트 앨범에 수록되거나, 라이브
셋리스트의 마지막에 자주 연주되는 등 블러 멤버들이 좋아하는 노래.
데이먼 알반이 알렉스 제임스에게 선물 받은, 해도가 프린트 된 손수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는 가사는 영국 본토에 각종 재해를 가져온 '저기압 (Low)'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가사 중간에 비스케이만과 도거뱅크, 영국 내 흐르는 하천 등 실제 지명이 등장한다.
Country House (1995년)
《The Great Escape》 수록. 브릿팝 전성기, 이른바 '브릿팝 전쟁'이라고 불리는 '블러 오아시스 전쟁'(오아시스 싱글과 동시 발매하는 차트 경쟁)에서 'Roll With It'을 제치고 밴드 최초로 UK차트 1 위를 한 곡.
직장에서 성공하고 은퇴한 뒤 시골에 큰 '컨트리 하우스'를 구입하여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는, 스노비즘에 빠진
속물적인 남자에 대한 노래이다.
쾌활한 리듬 진행으로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곡이었지만, 위의 인연으로 인해 브릿팝 광조와 네거티브 이미지의
상징이기도 한 곡이며, 밴드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의해 오랫동안 라이브로 불리지 않았다.
그러나 2009년 재시동 된 공연에서 이 곡이 10년 만에 셋리스트에 부활하였다. 뮤직비디오 감독은 알렉스 제임스의
대학 시절의 친구이기도
한 현대 미술가 데미안 허스트가 맡고있다.
The Universal (1995년)
《The Great Escape》 수록. 유니버셜이라는 가상의 항우울제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이 사육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곡. 데모 단계에서는 더 빠른 리듬의 레게 풍 이었지만, 알렉스 제임스의 제안으로 리듬을
떨어뜨리고, 현악기를 도입하여 웅장한 발라드 곡으로 완성되었다. UK차트 5위. 뮤직비디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1971)가 모티브가 되었다.
Beetlebum (1997년)
《Blur》 수록. 가열된 '브릿팝 전쟁' 붐의 광조에서 오는 피폐감을, 마약으로 도피라는 어두운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은 내성성 안에, 위태로움과 아름다움을 내포한 얼터너티브 사이키델릭. 제목인 "Beetlebum"는 신조어이지만,
데모 당시에는 코카인 곡이라고도 형용되었었다.
보컬 부분은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수록. 그레이엄의 독창적인 기타워크가 곡의 뼈대가 된다.
밴드는 두 번째 UK차트 1위를 획득하게 된다.
뮤직비디오의 감독은 소피 뮬러가 맡았고, 블러 뮤직비디오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사용되었다.
Song 2 (1997년)
《Blur》 수록. UK차트 2위. 제목은 연주 시간 2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데모를 만들 때 코드 이름이 그대로 붙은 것이라는 설이있다.
구성은 바스와 코러스 심플한 펑크 풍으로, 그레이엄 콕슨의 기타와 데이브 로운트리의 드럼의 트윈 인트로가 인상적. 가사는 오토마티즘의 방법에 의해 쓰여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마케팅으로 성공하지 못했던 미국에서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대히트 곡이며, 인텔과 나이키를 비롯한
수많은 CM에 사용 되었고, 수많은 뮤지션들의 커버곡이 되고 있다.
미군에서 스텔스 전투기 발표기념회의 테마곡으로 사용하고 싶다고 제안하며 상당한 개런티를 제시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라이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최고조의 흥분을 끌어내는 곡으로 쓰이고 있다.
"Beetlebum '에 이어 소피 뮬러가 감독을 맡은 '록의 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강풍"이 멤버들을 덥치는 듯한 강력한 뮤직비디오도 인기가 있어 MTV 등에서 대량 온에어 되었다.
Tender (1999년)
《13》 수록. 그레이엄 콕슨의 보컬 파트가 삽입되어 데이먼 알반과의 대화를 연출하는 슬로 발라드. UK차트 2위. 배경음으로 런던 커뮤니티 가스펠 콰이어(London Community Gospel Choir)의 대대적인 코러스를 동원하고있다.
후렴구의 "Oh My Baby"의 문구는 그레이엄 콕슨의 제안에 의한 것으로, 재결성 당시 라이브에서 관중들의 대대적인
합창이 일어나기도 했다.
Coffee & TV (1999년)
《13》 수록. 작사와 바스부분의 보컬을 그레이엄 콕슨이, 작곡 및 코러스를 데이먼 알반이 담당. 뮤직비디오도 그레이엄 콕슨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참고로 이 비디오는 NME 어워드, 채널 4 그레이 테스트 비디오 등을 수상하며 전 세계의 모던 록 채널을 통해 대량 온에어가 되기도 한 인기있는 뮤직비디오였다.
이 곡은 톱 10 진입이 확실했지만 일부 대형 음반 매장의 판매가 집계되지 않는 차트 실수가 일어나 톱 10 진입을 놓친다 (UK차트 11 위)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할리우드 서스펜스 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1999)의 사운드 트랙으로도 수록.
No Distance Left To Run (1999년)
《13》 수록. 그레이엄 콕슨의 애수가 감도는 기타 소리의 인트로에서 시작되어 데이먼 알반이 애절하게 노래한다.
데이먼 알반의 오랜 파트너였던 저스틴 프리쉬먼과 헤어진 당시의 데이먼 알반의 심경을 표현한 발라드 곡. 1
999년 발매한 DVD와 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멤버들의 자는 모습을 투시카메라로 촬영된
뮤직비디오가 화제를 불렀다.
Out Of Time (2003년)
《Think Tank》수록. 그레이엄 콕슨이 탈퇴하고 3명으로 편성되고 나서의 첫 싱글 곡. UK차트 5위. 뮤직비디오는 미국 해병대 소유의 전함을 무대로 항공 모함에서 전장으로 향하는 여성 군인의 이야기다.
Under The Westway (2012년)
2009년 재결성 후 《Fool's Day》 이후 2년 만의 싱글 곡. 《The Puritan》은 더블 A면. 당초 윌리엄 오빗에게
프로듀스를 의뢰했지만 결국 셀프 프로듀스 버전으로 발표했다.
‘West London’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Westway’가 모티브가 되었다.
이슬비가 내리던 날, 런던 시내 건물 옥상에서의 라이브 연주로 매우 피곤할 즈음, 데이먼 알반은 애드립으로 가사의 '오늘 내가 사는 도시의 하늘은 파랬어 (There were blue skies in my city today)'이라는 문구를 '오늘 내가 사는
도시의 하늘은 흐렸어 (There were grey skies in my city today)'로 바꾸기도 하였고, 2012년 런던 올림픽
폐회기념 라이브에서는 '일요일에는 눈이 내린다고 했었는데 (Said snow would come on Sunday)'라는 문구를
'월요일에는 비가 내린다고 했었는데(Said rain would come on Monday)'로 바꿔 불렀다.
브릿 팝의 아이콘, Blur
1968년 3월 23일 블러의 보컬리스트인 데이먼 알반이 출생했다. 원래는 세이무어(Seymour)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블러는 1989년 보컬리스트이자 키보디스트인 데이먼 알반(Damon Albarn), 기타리스트인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 베이시스트인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 그리고 후에 영입된 드러머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로 구성을 갖추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데이먼 알반과 그레이엄 콕슨은 콜체스터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데이브 로운트리 역시 콜체스터 출신의
친구이며 알렉스 제임스는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만났다. 블러라는 이름은 이들의 소속사가 된 푸드 레이블의 관계자가 권해주는 이름들 가운데에서 골라냈다.
곧 발표한 첫 싱글 는 차트 50위권에 들었고 뒤이은 싱글 'There's No Other Way'는 톱 텐에 들었다.
싱글들에 이어 '91년 발매한 데뷔앨범 [Leisure]는 초기 핑크 플로이드나 비틀즈 그리고 당시 영국 록 신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림 팝의 영향을 담고 있었는데 당시 죽어가던 맨체스터 팝 씬과 교묘하게 맞아들어가면서 붐에 맞춰 뒤늦게 제조된 틴 아이돌 그룹 정도로 무시되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런 관계로 2집을 낼 때까지 블러는 그런 선입견들에서 적극적으로 탈피하는 싸움을 해나가야 했다.
'92에 발표된 'Pop Scene'은 음악적 방향 선회의 첫 번째 시도였다. 따라부를 수 있는 팝적 멜로디 라인과 관악기들의 건방지고 짖궂은 느낌은 이 즈음부터 블러의 독자적인 캐릭터로 굳혀졌다.
그러나 'Pop Scene'은 영국 팝 풍토나 당시 인기 폭발이던 미국 그런지 어느 쪽과도 맞아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차트에 큰 성과는 없었다.
1집에 이어 다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가 프로듀스를 맡은 두 번째 앨범 [Modern Life Is Rubbish]는
영국적인 오만함로 가득했는데 결과적으로 영국에서는 꽤 괜찮은 성적을 거뒀지만 미국 상륙에는 실패했다.
'94년 봄에 발매된 앨범 [Parklife]가 차트 상위에 랭크되면서 드디어 블러는 명실공히 영국 팝 씬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몇몇 곡이 싱글로 크게 히트했고 'Girls And Boys'는 미국에서까지 인기를 얻었다.
블러는 당시 불거져 나온 브릿 팝 붐의 선봉장이었고 [Parklife]는 그 마스터피스로 받아들여졌다.
1995년의 절반을 다음 앨범 녹음에 보낸 그들은 첫 싱글로 'Country House'를 발표했고, 같은 주에 라이벌인
오아시스의 싱글 'Roll with It'이 나오면서 언론의 입방아는 점점 심해졌다.
이것은 판매부수를 올리려는 영국 음악 언론의 얄팍한 장삿속이 부추긴 대결의식이었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블러의 'Country House'가 밴드의 첫 번째 넘버원 싱글이 되면서 잠시 우위를 점하는 듯 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오아시스의
두 번째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가 역시 차트 1위에 올랐던 블러의 [The Great Escape]를
덮어버릴 정도로 성공하면서 오아시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또한 오아시스는 미국 시장에서도 예외적으로 승승장구
하면서 승리의 휘파람을 불었고, 점자 쇠퇴되어 가는 브릿 팝 붐과 더불어 블러에게는 점차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다.
'브릿 팝은 죽었다'는 데이먼 알반의 선언과 더불어 블러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이 대두되었고 '96년 말 데이먼 알반은 그간 그레이엄 콕슨이 늘 관심을 가져왔던 미국 인디-록에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더 이상 요즈음의 영국 음악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했다.
이런 영향은 97년에 발매된 다음 앨범 [Blur]에 그대로 나타났다. 싱글 'Beetlebum'은 발표 첫 주에 1위에 올랐고
그들의 혁신된 사운드는 미국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Song 2'가 큰 인기를 얻었다.
1999년에 발매된 신보 [13]은 또 한 번 블러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첫 싱글이자 오프닝 트랙인 'Tender'의
가스펠 터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 선회였다. 그 외에도 페이브먼트
등 미국 로-파이 음악에 대한 영향은 여전히 드러나고 있었다.
최근에는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으며 데이먼 알반의 새로운 힙합 프로젝트 고릴라즈(Gorillaz)에도 관심 집중!
프런트맨인 데이먼 알반과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의 불협화음이 주원인이었다. 몇 년 사이 데이먼 알반은 2001년의 프로젝트 그룹 고릴라즈가 강력히 시사했듯, 일렉트로니카 쪽으로 점점 마음을 빼앗겼으며 그에 따른 기타 비중의
축소는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인디 록의 향연이었던 [Blur](1997)와는 달리 전자적 소리샘이 대폭 도입되었던 [13](1999)이 그 시작이었다. 따라서 그레이엄 콕슨이 이에 반발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브릿팝의 대표 브랜드 블러의 불화설이라니...이는 영국 언론으로서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메뉴 아니겠는가. 갑작스레 해체설이 불거져 나왔으며 멤버들은 이를 억측이라며 불편함을 표시했다.
그레이엄 콕슨이 떠난 뒤 가졌던 인터뷰에서 드러머 데이브 로운트리는 “밴드를 위해서나 그레이엄 개인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레이엄이 밴드에 있었던 얼마 전까지 우리는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현재 블러는 데이먼 알반의 취향이 적극 반영된 신보 [Think Tank]를 얼마 전 발표했으며 영국 투어를 준비중에 있다.
브릿 팝의 시작
그것은 전쟁이었다. 오아시스와 블러의 남북 대결은 영국 대중 음악계를 한 순간에 대치 상태로 몰고 갔다.
누가 영국의 국가대표급 밴드냐는 문제에 모든 이들의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스타일 면에서 두 그룹은 양극단에 위치해 있었다.
블러가 영국성을 대변한 반면 오아시스는 미국적 로큰롤에 수절했다.
다채로운 악기 구성과 화려한 코드 진행이 블러만의 장기라면 오아시스의 음악 형식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또한 쿨한 블러에 비해 노동자 출신인 오아시스는 촌놈에 가까웠다. 메시지 면에서도 블러는 냉소적이었고 오아시스는 낙관론을 취했다. 모든 게 정반대였다.
이런 이유로 오아시스는 미국을 정복할 수 있었다.
사운드 자체가 미국 지향적이었으니까.
반면 블러는 6집 [13](1999) 전까지 실패만을 거듭했다. 도무지 미국적 정서와의 갭을 줄이지 못한 까닭이었다.
따라서 음악적 특질에 있어 블러가 브릿 팝이라는 용어를 '일반화' 시켰다면 오아시스는 그것의 '이면'이었던 셈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탁월한 라이벌의 존재 덕에 브릿 팝이 이후 대단한 음악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데이먼 알반이 몸담고 있는 블러(Blur)를 지나치고는 1990년대 영국 대중 음악 마당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브릿 팝의 양대 산맥 중 하나로 군림하며 미국과 구별되는 영국 록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미국산(産) 정통 로큰롤을 구사했던 오아시스와는 대조적으로 블러는 지극히 자국의 음악 전통에 충실했다.
영국 대중 음악의 계보 속에서 차지하는 그룹의 무게감이 배가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영국성(Englishness)의 강조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 미국 진출 실패의 주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블러의 음악 파일들은 따라서 실로 다양하고 화려하다. 비틀즈로부터 활짝 꽃을 피웠던 팝의 다채로운 전개 방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 3, 4개 코드 중심인 로큰롤 미학과는 대립각을 형성한다. 데이먼 알반의 "팝은 록보다
더 높은 수준의 예술 형식이다."라는 인터뷰 내용이 이를 잘 대변한다.
또한 사이키델릭 넘버 'She's So High', 펑크 팝 'Song 2', 트립합 'Essex Dogs', 대표곡이자 뉴 웨이브 댄스 팝인
'Girls & Boy' 등의 곡들이 증명하듯, 블러의 사운드 스펙트럼은 대단히 폭이 넓다.
데이먼 알반의 보컬의 톤 역시 곡에 맞춰 시시각각 변화한다. '스타일 만물상'과도 같은 곡들을 모두 소화해내는
가창력이 단연 일품이다.
1994년 등장했던 3집 [Parklife]가 이 모두를 잘 설명해준다. 발매하자마자 영국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했고 1995년
브릿 어워즈에서 베스트 싱글, 앨범, 비디오, 그룹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다. CD를 통해 브릿 팝이라는 단어가
'일반화'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기도 하다.
하나 더. 브릿 팝이 얼터너티브에 대한 영국의 답변이라는 식의 해석은 잘못된 관점이다. 미국과 무관하게 브릿 팝의
생성은 예정된 것이었고 독자적인 흐름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영국의 모드(mod)와 퍼브 록(pub rock), 투 톤 무브먼트(two tone movement), 뉴 웨이브 등을 통해, 그리고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를 통해 이미 그것의 청사진은 1980년대부터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브릿 팝은 분명 자생했던 것이다.
블러와 데이먼 알반이 펼쳐냈던 광범위한 소리샘들이 이에 대해 강력하게 증언한다.
멤버 각자가 얼마나 서로 다른 사람들인지를 알고 나서 오히려 그들이 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며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진술처럼, 새 앨범의 오프닝 트랙이자 7분 남짓한 길이의 첫 싱글 Tender는 대단히 감상적인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고 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이토록 벅찬 감정을, 아무 가리개도 없이 발가벗은 채 데이먼이 노래하리라고 우리가
언제 상상이나 해볼 수 있었던가?
이 곡을 부르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었던 그의 웃음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한 쪽 입가를
일그러뜨린 한 점 냉소와 장난끼는 여기에 없다. 런던 가스펠 합창단 40인의 코러스와 어쿠스틱 기타, 손뼉 장단,
그리고 탬버린이 곁들여진 아름다운 컨트리 가스펠 Tender는 한 마디로 경이로움과 생경함 그 자체다.
찬송가? 세기말의 위로? 뭐든 좋다. 아무튼 한동안은 두 번째 트랙으로 넘어가지 못할 것 같다.
"정말 새롭게 시작하는 것 같았죠. 새로운 관계였어요. 페이브먼트나 벡 같은 사람들이 레코딩하는 방식은 그 핵심이 '자유로움'에 있었죠.
난 우리 데모가 그런 소리들하고 비슷하다는 걸 알았어요.
블러의 레코드도 그런 소리를 가졌으면 했죠. 그건 어떤 '태도'예요. 스튜디오에 가고 녹음을 하는 거죠.
너무 많이 신경 쓰거나 걱정하지 않고 말이죠. 가사만 해도 예전처럼 그렇게 위트 있으려고 노력하진 않았어요."
-데이먼 알반, '97년 BLUR 발매 당시
진상은 이러했다.
'95년 블러는 PARKLIFE에 이은 네 번째 앨범 THE GREAT ESCAPE를 발매했다.
Country house, The universal, Stereotypes, Charmless man 등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전작에 못지 않은 대중적
성공이 그들의 손에 쥐어졌지만 어쩐지 그들 자신은 그다지 안녕치 못했던 것이다.
'명성'이라는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는데, 대신 처음엔 있었던 중요한 무언가가 이제는 없었다.
'브릿 팝'이라 뭉뚱그려지는 것도 싫었고 남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블러 스타일'이라는 것을 계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97년의 BLUR에는 이런 모든 정황과 그에 따른 변화가 잘 드러나 있다. BLUR에 실려있던 14개의 트랙들에서 그들은 여전히 블러이기는 했으나 예전에 보여주었던 영리하고 댄디하고 위트 넘치는 영국 청년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브라스 파트는 없어졌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국적 캐릭터나 팝적인 깔끔 마무리도 없었다.
한층 내성적이고 개인적이었으며 또한 어둡고 따라서 그다지 대중적이지 못했고... 하지만 그래서 더 자유롭고
느슨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벡(Beck)이나 페이브먼트(Pavement) 그리고 토터스(Tortoise) 같은 이들의 제작 방식과 사운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던 앨범 BLUR의 기타 노이즈와 실험 정신은 그간 나아왔던 방향을 선회하여 오히려 '90년대 초 그들의 초창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Death of a party는 '90년 초 그들이 만들어 놓았던 데모이기도 하다).
Beetlebum이나 Song 2 같은 것들이 싱글로 히트를 했지만,그들은 의식적으로 상업적인 이미지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고 실제로 그런 것들에 초월한 듯한 인상도 주었다.
밴드명을 새삼스레 앨범 제목으로 사용했던 것에는 자유로운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려는 그들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블러(Blur)는 89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팝 밴드로 초창기 이들은 스톤 로지즈(the Stone Roses)의 뒤를 쫓아 결
성된 수많은 영국 밴드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골드스미스(Goldsmith) 대학 재학 중이던 보컬리스트 데이먼 알반(Damon Albarn), 베이스의 알렉스 제임스
(Alex James), 기타의 그래험 콕슨(Graham Coxon), 드럼의 데이브 로운트리(Dave Rowntree)를 멤버로 세이무어
(Seymour)라는 밴드를 결성하면서 블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알반의 음악에 대한 욕구는 소프트 머신(Soft Machine)이나 캣 스티븐스(Cat Stevens)와 같은 아티스트들과 접하기 쉬운 환경으로 이사를 한 아버지의 노력이나 조안 리틀우드(Jaon Littlewood) 극단의 무대 디자이너였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로운트리의 아버지는 BBC에서 비틀즈(the Beatles)의 사운드 엔지니어였고 백파이프 레슨을 받기도 했다.
밴드 결성 후 1년 이상 공연을 가진 후, 밴드명을 블러로 변경한다는 조건으로 티어드롭 익스플로즈(Teardrop
Explodes)의 키보드 연주자였던 데이비드 밸페(David Balfe)와 사운드의 기자였던 앤디 로스(Andy Ross)가
운영하는 푸드(Food)와 계약을 체결했다.
활기에 넘치는 90년 식의 친근한 팝을 연주했던 이들의 데뷔곡 'She's So High'는 영국 차트 50위 권에 진입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의 역량을 이미 드러낸 것으로 전염성 강한 'There's No Other Way'가 91년 영국 차트 8위에 올랐을 때 이는
그다지 놀랄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성공은 결성된 지 2년만에 1집 [Leisure]가 앨범 차트 2위에 오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Popscene'이 34위에 그치면서 이들은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배
기와 맨체스터 운동이 사라졌을 때 이들은 고정된 기타 팝에서 팬들이 멀어져 가고, 레인이나 목 터틀즈같은 밴드들이 각광을 받는 그러한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2집 [Modern Life Is Rubbish](93)은 처음 완성되었을 때 레이블로부터 거절당했고 밸페는 알반에게 추가로 두 곡을 더 요청하여 이듬해에야 발매되었다.
결국 추가로 수록한 곡 'For Tomorrow', 'Chemical World'가 이 앨범에서 싱글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5만장이라는 전작과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패를 하고 말았으나 지속적인 투어와 리딩 페스티발
참가로 다시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다음 앨범 [Parklife](94)에 수록된 첫 싱글 'Girls & Boys'의 성공은 신기원을 이룩한 앨범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의 음악적인 기대를 뒤엎은 이 앨범은 비틀즈, 스몰 페이시스, 킨크스에서 잼, 매드니스, 스미스에 이르는 영국
출신의 위대한 밴드들의 요소를 거의 모두 포함한 것으로 알반과 코크니의 공동작업으로 완성되었다.
이 앨범은 95년 브릿 어워즈에서 최우수 밴드와 앨범상을 포함한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후부터 매스컴은 블러 대 오아시스의 전쟁을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알반의 비꼬는 가사와 밴드의 영국 팝 전통을
계승한 사운드의 조화로 블러는 브릿팝의 선구자가 되었으나, 브릿 팝 운동이 소멸되자 이들 역시 그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the Great Escape]가 미온한 결과를 낳자 이들은 아이슬랜드에서 두문불출하며 인디 록과 로파이 영향을 조화시켜 아트 팝 밴드로 변신했다.
다음 앨범 [Blur](97)는 싱글 'Beetlebum'의 성공과 함께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미국 시장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Song 2'와 같은 스래쉬 스타일의 하드한 곡과 다운비트된 곡인 'Death of A Party'는 이들의 초창기 싱글을 상기시키는 곡들로 블러가 영국 팝 음악계의 중요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90년대 중반 완전히 이미지 변신을 한 후, 스미스나 스몰 페이시스, 잼 등 영국 기타 팝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밴드로 부상했던 블러는 브릿 팝이라 명명되는 기타 밴드의 새로운 세대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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