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길모어는 1946년 3월 6일, 영국의 캠브릿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더글라스 길모어는 캠브릿지 대학의 동물학의 부교수 역할을 맡고 있었고, 어머니 실비아는 당시 선생님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후에 BBC의 영상 에디터로 일하게 된다. 데이비드 길모어의 출생 후 케임브리지셔 주의 트럼핑턴에 거주했지만, 몇 번의 이주 후 1956년에 그랜체스터로 이주하게 된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의는 다음 해에 구매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났고, 에벌리 브라더스의 〈Bye Bye Love〉를 듣고 기타에 대한 흥미를 키우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길모어의 부모는 그의 흥미인 음악을 하도록 장려했으며, 기타에 관심을 갖게 된 데이비드 길모어는 이웃에게 기타를 하나 빌려 피트 시거의 레코드와 교본을 이용해 기타 연주를 연습했다. 여담으로, 이때 빌렸던 기타는 영영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한편, 데이비드 길모어는 11살부터 캠브릿지의 힐즈 로드에 위치한 'The Perse School'에 다녔는데, 그곳에 다니는 동안 'Cambridgeshire High School for Boys'를 다니고 있던 시드 바렛과 로저 워터스를 만나게 된다. 끝내지 못했지만 이수했던 언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시드 바렛도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둘은 같이 기타를 연습하며 점심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962년 말에는 길모어는 자신의 첫 밴드인 'The Ramblers'에 참여하게 되며, 1964년에는 블루스 록 밴드 'Jokers 참여했다. 밴드의 활동은 약 1년 간 활발히 진행되었다. 1965년 8월, 데이비드 길모어는 프랑스 서부 지역을 시드 바렛을 포함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비틀즈의 노래를 길거리에서 연주했는데, 여행을 하는 기간 동안 체포당하는 등의 수난이 있었다. 이후 데이비드 길모어와 시드 바렛은 파리에 방문해 도시 외곽에서 일주일 간 캠프를 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데이비드 길모어는 다양한 장소들에서 일했는데, 패션 디자이너 오시 클락의 운전자 겸 보조원으로 일한 경력도 존재한다.
1965년 말, 'Jokers Wild'는 싱글의 일부를 런던의 리젠트 소울즈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싱글 당 50장의 카피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1966년 1월에 출시된 'Sam and Dave'의 싱글 〈You Don't Know Like I Know〉가 대히트를 되었고, 싱글은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밴드는 점점 하향세를 겪게 되었으며, 몇번의 멤버 교체 후 밴드는 사실상 해체된다. 밴드가 해체된 후, 데이비드 길모어는 런던으로 떠나게 되고, Jokers Wild의 전 멤버인 릭 윌스와 데이비드 아틀람, 새 멤버인 릭 윌스와 함께 'Flowers'라는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나 결성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인 1966년 말에 데이비드 아틀람은 밴드를 떠나게 된다. 동안 데이비드 길모어는 세션 멤버로서 브리지트 바르도가 출현하는 영화 'Two Weeks in September'의 사운드트랙의 보컬을 맡았으며, 밴드는 프랑스의 빌보켓 클럽에 정규 멤버로 발탁되며 정착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급되는 급여로는 입에 풀칠만 하는 수준의 생활만이 가능했으며, 후에 데이비드 길모어는 영양부족으로 병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빈곤한 생활을 지속하다 결국 1967년 초에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솔로 활동
데이비드 길모어의 솔로 활동은 《Animals》를 기점으로 시작된, 로저 워터스의 밴드 내 영향력 독점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데이비드 길모어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Animals》 이후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1978년에 첫 솔로 앨범 《David Gilmour》를 출시한다. 솔로 앨범 제작 도중 남은 곡은 로저 워터스에 의해 《The Wall》에서 활용되는데, 활용된 곡 중에선 〈 Numb〉이 대표적이다. 1984년에는 두 번째 솔로 앨범인《About Face》를 출시한다. 앨범은 존 레논의 사망, 현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 간의 갈등과 같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담고 있었다. 두 앨범의 성적은 각각 빌보드 29위, 32위로, 당시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의 성적과 데이비드 길모어의 핑크 플로이드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하면 시원찮은 성적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선 솔로 앨범의 평가 및 성적이 좋아졌다. 2006년에 출시된 《On an Island》는 빌보드 6위에 올랐으며, 전체적인 평 또한 호평이었다. 이후 2015년엔 네 번째 솔로 앨범인 《Rattle That Lock》을 출시해 빌보드 5위의 성적을 거둔다. 여담으로 두 앨범 모두 '더 이상의 핑크 플로이드는 없다. ' 발언 후 약 1년 가량의 기간을 가지고 출시되었는데, 이러한 발언이 판매량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여담총 2번 결혼 했다.첫 부인은 "진저 길모어"라는 예술가로 1975년 결혼해서 아이를 4명 가졌다고 한다.하지만 1987년 부터 89년까지 열린 A Momentary Lapse of Reason투어 때 벌거 생활을 하다가 1990년 이혼 했다고한다.두번째 부인은 "폴리 삼손"이라는 작가로 1993년에 The Division Bell 세션 당시 거의 대부분 곡의 가사를 담당했다.이후 1994년 앨범 발표 이후 결혼해서 지금까지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앨범 《Ummagumma》 의 수록곡 〈Grantchester Meadows〉가 여기 맞다 이때 시드 바렛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드 바렛이 데이비드 길모어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자는 2005년 Live 8 공연 후, 후자는 2014년에 출시된 핑크 플로이드의 마지막 정규 앨범 《The Endless River》 출시 후에 언급했다. |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로써 독특한 감각의 블루스 필이 깃든 연주세계를 펼치고 있는 데이빗 길모어는 1947년
3월 6일 영국 캠브리지에서 태어났다.
피트 시거, 빌 헤일리, 척 베리, 지미 헨드릭스, 키츠 리처드즈 등에 영향받은 그는 시드 배렛, 로저 워터스 등과 함께
캠브리지 고교에 다니며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리곤 68년 초 핑크 플로이드에 가입해 'Shine on You Crazy Diamond', 'Echoes', 'Another Brick In The Wall' 등등 숱한 명연을 들려주었다.
그는 핑크 플로이드에서의 활동 이외에도 Sutherland Brothers & Quiver, 로이 하퍼 등과 세션을 했고, 2장의 솔로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블루스 록 기타리스트이다.
초기 핑크 플로이드에서 보여준 사이키델릭적인 성향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타는 블루지한 감각에 의한
전통적인 포맷의 솔로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진면모는 'Another Brick In The Wall'에서의 솔로이다. 표정이 풍부한 벤딩등을 통해 다채로운 블루노트 기분을 유발시키는 이 곡에서 그는, 에릭 클랩튼으로 이어지는 화이트 블루스 록 기타의 맥을 충실히 보여주는 프레이즈를 만들고 있다.
이외에 'Echoes', 'Shine on You Crazy Diamond' 등에서도 시(時)적 분위기가 전해지는 차분한 블루스풍의 기타를 들려준다. 그의 연주는 다분히 환상적인 일면이 있고 영상미를 느끼게 하므로 주위로부터 세션 청탁도 많이 받는다.
EMG 픽업이 내장된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로 곱고 섬세한 음을 뽑아내어 후배들에게 사운드메이킹에 있어 좋은 참고가 되고있는 데이빗 길모어는 이르페지오적인 느낌의 느린 프레이즈에서 여유와 관조적인 초킹과 비브라토 등을 통해
60년대 록기타의 뿌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기타세계를 그려가고 있다.
사 용 장 비
◇Fender Stratocaster(EMG 픽업내장), Fender Esquire(55), Rickenbacker Hawallans(33), Gre-tch Penguin,
Les Paul Custom
◇Marshall Amp
changgo.com
| |
데이비드 존 길모어(David Jon Gilmour |
1944년 영국의 캠브리지에서 출생한 데이빗 길모어(David Gilmour)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그룹에서의 불화로 솔로 전향, 84년 [About Face]를 발표한다.
그룹 탈퇴 후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에 전념, 브레이안 페리(Brayan Ferry)와 더불어 "Live Aid concert"에서
연주를 하는 한편, Ferry's Bete Noire와 Grace Jones' Slave To The Rhythm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987년 그는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였던 닉 메이슨(Nick Mason)과 재결합, 핑크 플로이드 그룹의 이름을 그대로 다시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데이빗 길모어는 판에 박히지 않은 기묘한 기타 연주로 유명하다.
처음에 그는 핑크 플로이드의 리더 시드 베레트 (Syd Barrett)의 보조 기타리스트로 일했으나 후에 베레트가 정신 장애로 더 이상 기타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자 그의 후임으로 낙점돼 그룹의 정식 리드 기타리스트로 맹활약했다.
핑크 플로이드의 두 번째 앨범인 [A Saucerful Secrets](68)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로 인하여 그룹의 인기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changgo.com
가장 위대한 유산을 남긴 단 하나의 프로그레시브 밴드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 결론은 약간의 논란을 거쳐 핑크
플로이드로 귀결될 것이다.
그만큼 핑크 플로이드는 명그룹들의 격전장이라 할 프로그레시브 록 필드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했던 그룹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핵은 로저 워터스(Roger Waters)였지만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가 없었다면 그와 같은 위대한
성취는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무려 2억 5천만 장의 음반을 팔아치운 것으로 추산되는 거함 핑크 플로이드호에서 선장 로저 워터스를 보좌한 최고 실력의 1등 항해사였다.
또한 핑크 플로이드호를 떠나서는 혼자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성공한 솔로 뮤지션이었으며 수많은 동료들의
앨범을 솜씨 좋게 매만진 훌륭한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는 2011년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 순위에서 14위에 올랐으며 「토털 기타」
가 선정한 리스트에서는 그보다 여섯 계단 높은 순위인 8위에 자리했다.
록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앨범
데이비드 길모어는 1946년 영국 캠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캠브리지 고등학교 재학시절 미래의 동료들인 로저 워터스와 시드 배릿을
만났다.
이때부터 스쿨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해 몇몇 포크 밴드와 록 밴드를 거친 후 1968년 핑크 플로이드호에
승선했다. 1966년 로저 워터스와 시드 배릿이 뜻을 모아 릭 라이트(키보드, Rick Wright, 1943~2008)와 닉 메이슨
(드럼, Nick Mason)을 규합해 처음 핑크 플로이드를 결성했을 때는 데이비드 길모어는 밴드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데뷔 앨범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내고 나서 시드 배릿의 약물 문제가 심각해진 핑크 플로이드가
구조신호를 긴급 타전했고 데이비드 길모어는 이에 응답해 1968년 초 핑크 플로이드에 전격 합류했다.
이 때 1집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시드 배릿은 이미 정상적인 활동이 어려워진 상태였다.
핑크 플로이드가 공식적으로 시드 배릿을 해고했거나 시드 배릿이 공식적으로 밴드 탈퇴를 선언한 적은 없다.
다만 그는 자연스럽게 모습을 감추었다.
초창기 그의 역할이 컸으므로 한동안 그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겨져 있었다.
물론 데이비드 길모어가 그 자리를 채웠지만 한동안 시드 배릿이 돌아올 자리는 비워져 있었고, 그럴 경우 핑크
플로이드는 데이비드와 시드의 트윈 기타 체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드 배릿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데이비드 길모어는 밴드의 유일한 기타리스트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팀워크를 다져간 몇 장의 음반을 거쳐 밴드는 최고의 순간에 도달했다.
로저와 데이비드의 호흡이 최고조에 이른 가운데 알란 파슨스(Alan Parsons)가 엔지니어로 참여하기도 했던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1973)은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591주 연속으로, 전체적으로는 총 741주 동안
머무르는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경이로운 기록을 작성했다.
이어진 앨범 「Wish You Were Here」(1975)도 기세를 이어갔다. 앨범은 다시 한 번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올랐고, 〈Wish You Were Here〉는 영미 양국 싱글차트에서 공히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Wish You Were Here」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밴드의 주도권은 로저
워터스에게 완전히 넘어갔고 다음 작품들인 「Animals」(1977)와 「The Wall」(1979)은 거의 온전히 로저 워터스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The Wall」을 녹음할 당시 로저 워터스와 데이비드 길모어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다. 밴드는 록의 역사에 뚜렷이 새겨진 'The Wall' 라이브 투어를 뒤로 한 채 1983년 마지막 앨범
「The Final Cut」을 끝으로 결국 해산했다.
밴드의 최후가 가까웠음을 예감해서였을까, 1978년 데이비드 길모어는 솔로 데뷔 앨범 「David Gilmour」를 내면서
솔로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는 더욱 독창적인 기타 스타일을 맘껏 펼쳐보였다. 핑크 플로이드 최후의 앨범 「The Final Cut」은 사실상 로저 워터스의 솔로 앨범에 가깝다.
당시 데이비드 길모어의 관심은 오히려 차기 솔로작인 「About Face」에 쏠려 있었다.
1984년 발표한 솔로 2집 「About Face」는 평단의 호평 속에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가 차기작인 「On an Island」(2006)라는 섬에 도착하기까지는 무려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기간 동안 데이비드 길모어는 주로 세션 연주자와 프로듀서로서 활동했다.
1970~80년대 동안 그가 함께 작업한 뮤지션들의 면면은 다채롭다. 폴 매카트니,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
톰 존스, 엘튼 존, 에릭 클랩튼, 비비 킹, 밥 딜런, Who, 슈퍼트램프(Supertramp), 알란 파슨스, 케이트 부쉬
(Kate Bush),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 실(Seal)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뮤지션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1985년 크게 히트했던 드림 아카데미(Dream Academy)의 〈Life in a Nothern Town〉도 그가 프로듀싱한 곡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주인은 누구인가?
데이비드 길모어는 뛰어난 리드 기타리스트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감독은 로저 워터스였지만 데이비드 길모어의
블루지하면서도 멜로디감이 넘치는 리드 기타가 밴드의 음악적 완성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신비롭고 영롱한 사운드의 가장 많은 부분은 데이비드 길모어의 기타에 의해
창조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의 기타는 기본적으로 블루스 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유연한 벤딩을 통해 감정의 교감이 뛰어난
연주를 들려준다.
그것은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의 기타 솔로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이것이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그의 기타 솔로이기도 하다. 2007년 「기타 월드」는 독자투표를 통해 선정한 '위대한 기타 솔로 100곡' 리스트에 〈Comfortably Numb〉 〈Time〉 〈Money〉 등 데이비드 길모어가 연주한 세 곡을 포함시켰다.
그 가운데 〈Comfortably Numb〉는 4위를 차지했는데 이 곡은 다른 여러 조사에서도 뛰어난 기타 솔로곡으로 자주
언급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초창기 시절 데이비드 길모어는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주로 사용했다. 덕분에 그는 영국 잡지
「기타리스트」가 실시한 '가장 뛰어난 펜더 기타리스트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어서 유명한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에서는
P-90 픽업이 장착된 1955년산 깁슨 레스 폴 골드 탑 기타를 사용했다.
이밖에도 그는 페달 스틸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 연주에도 두루 능한데 〈Wish You Were Here〉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타 이외에 베이스와 키보드, 하모니카, 드럼, 색소폰 등도 능숙하게 다루는 그는 전형적인 멀티 인스트루멘털리스트이기도 하다.
불행히도 핑크 플로이드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못했다.
로저 워터스와 다른 멤버들은 밴드의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두고 오랜 송사를 치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였다는 것이 데이비드 길모어의 이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는 1996년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로서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한편, 데이비드 길모어는 나즈막히 읊조리면서도 깊은 울림을 만드는 매력적인 보이스의 보컬리스트이기도 하다.
핑크 플로이드 시절부터 노래했던 그는 솔로 앨범들에서 본격적으로 그 매력을 펼쳐 보였는데, 특히 거장의 여유로움이 넉넉하게 담긴 2006년의 솔로 앨범 「On an Island」에서 그의 기타와 보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신비롭고 몽롱한 기타의 울림과 관조적 시선을 담은 낮은 속삭임이 불러오는 정서적 파장은 크고도 넓다.
22년 만에 발표된 이 앨범은 영국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다.

1974년 발매한 ‘Dark Side Of The Moon’으로
741주간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에 머물렀던 핑크 플로이드.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로저 워터스, 리처드 라이트,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사진 제공·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차트란 동시대 인기 음악의 집산이지만 또한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1964년 4월 4일 비틀스가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부터 5위까지 차지했다던가, 핑크 플로이드의 ‘Dark Side Of The Moon’이 74년 발매 이후 741주간 빌보드 앨범
차트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당시 해당 그룹의 인기를 보여주는 자료일 뿐 아니라 후대의 대중에게 그 음악의 진가를
말해주는 사료가 된다.
홍보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대중의 열광과 무의식이 만들어낸 기록인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그런 기록의 탄생이 불가능하다. 차트가 특정한 시기에 걸쳐 불특정 다수가 선호한 음악의 지표가
아닌, 공정한 룰 없는 격투기장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한국 음악 소비자가 새로운 음악을 듣는 창구는 대부분 음원사이트의 실시간 차트다. 특정 가수 팬이 아닌 이상, 지금 이 시간 차트에 올라 있는 음악에 관심을 갖는 게 인지상정이다. 순위를 보며 클릭해 듣는 경우가 많고, 아니면
차트 전곡을 틀어놓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음원을 발매해도 차트에 오르지 않으면 그대로 사장되기 십상이다.
차트에 없으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음악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모두 차트에 목숨을 건다.
브로커를 통해 음원을 사재기하고, 팬덤은 개인별로 수십 개씩 아이디를 만들어 스트리밍을 한다.
이런 ‘조작’이 용이한 시간은 일반 이용자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심야시간대다. 밤새 다양한 방법으로 차트에 올리고,
이렇게 반영된 순위는 다음 날 일반 이용자가 재생함으로써 생명력을 이어간다. 그동안 유명 가수들이 자정에 음원을 발표한 주된 이유다.
그런데 이런 관행에 최근 변화가 생겼다.
2월 27일부터 주요 음원사업자가 정오~오후 6시에 발매한 음원만 차트에 즉각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음원을 언제 발매하든 그 시간에 바로 차트에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은 정오~오후 6시 외 시간에 발매한 음원은 다음 날 오후 1시에 차트에 반영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실시간’의 범위가 좁아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왜곡돼 있는 차트에 공정성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그 시간대에 학생들은 학교에 있느라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보이는손’의 개입이 불가능한
까닭이다.
나머지 18시간 동안 쌓이는 데이터양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니, 적어도 차트 왜곡이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묻고 싶다. 왜 근본적인 해결 방법, 즉 실시간 차트를 폐지하지 않고 이런 편법을 쓰는지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시간 차트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많은 이용자가 이 차트에 의존한다는 이야기다.
이 경우 순간적 관심에 의한 동시 접속이 주된 데이터가 된다.
여기엔 취향이 끼어들 여지가 적다. 한 시대의 취향이라는 빅 데이터가 동시 접속이라는 화력에 의해 사라진다.
시장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게 차트의 취지라면, 굳이 실시간이 필요할까.
주간, 아니 일간 집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다양성이야말로 건전한 생태계의 기본이라는 명제를 떠올린다면, 조작이나 개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통계를 바탕으로
집계할 때 그 차트가 진정한 시장 흐름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후대에게 지금 우리의 취향을 보다 정확히 전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 ‘가요톱10’ 순위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것처럼 말이다.
'POP SONG & ROCK' 카테고리의 다른 글
Selena Gomez - Love You Like A Love Song (0) | 2017.04.14 |
---|---|
Flo Rida-Whistle , with Kesha Right Round (0) | 2017.04.13 |
Pink Floyd - The Great Gig in the Sky ,Another Brick in the Wall (0) | 2017.04.11 |
Sting-Englishman In New York ,Fragile (0) | 2017.04.11 |
Arctic Monkeys - Arabella (0) | 2017.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