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Gig in the Sky And I am not frightened of dying, any time will do 그리고 난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아. 언제라도 죽을수 있어 I don' t mind . Why should I be frightened of dying? 난 신경도 안써. 내가 왜 죽음을 두려워 해야해? There's no reason for it, you' ve gott a go sometime 아무런 이유도 없어 당신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거지 If you can hear this whispering you are dying 만일 나의 이 속삭임이 들린다면 넌 죽어가고 있는거야. I never said I was frigtened of dying 나는 죽음이 두렵다고 말한적 없어 Another Brick in the Wall |
Daddy's gone across the ocean,
아빠는 바다 건너 멀리 떠나갔지
Leaving just a memory, a snapshot in the family album.
가족 앨범 속의 사진 몇 장 같은 기억만 남겨놓고
Daddy, what else did you leave for me?
아빠 그것 빼고 뭘 또 남겼나요?
Daddy, whatcha leave behind for me?
아빠, 날 위해 남긴 게 뭐 있나요?
All in all it was just a brick in the wall X2
모든 건 벽을 만드는 벽돌 일뿐
We don't need no education
우린 교육이 필요 없어
We don't need no thought control.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 시스템 따윈
No dark sarcasm in the classroom
교실 안에서 비꼬는 말은 금지해줘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선생, 애들을 내버려 두라고
Hey,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이봐, 선생, 그 애들을 내버려 두라고!
All in all it's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X2
결국 모든 건 벽 속의 또 다른 벽돌 일뿐
I don't need no arms around me
날 감싸는 따뜻한 팔은 필요 없어
I don't need no drugs to calm me
날 위로할 마약들도 필요 없어
I have seen the writing on the wall
벽에 쓰여 있는 글씨를 봤지
Don't think I need anything at all
이젠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
No, don't think I'll need anything at all
그래, 이젠 아무 것도 필요 없어
All in all it was all just bricks in the wall X2
결국 모든 건 벽 속의 또 다른 벽돌 일뿐
Pink Floyd
Another Brick in the Wall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1979년 발표한 록 오페라 <The Wall>에 수록된 3부작이다. 1부는 회상(Reminiscing), 2부는 교육(Education), 3부는 마약(Drugs)이다.
모두 베이시스트 로저 워터스(RogerWaters)가 썼고 특히 2부는 영국 기숙학교의 엄격한 학교 시스템을 비판한 곡이다.
싱글로 발매되어 전 세계적으로 400만장 이상이 팔렸고 미국을 비롯해 유럽 각국에서 1위에 올랐다.
미국에서 2부는 빌보드 연말결산에서 최종 2위에 올랐고 그래미 록 그룹 공연상(Best Performance by a Rock Duo
or Group) 후보에 올랐으나 밥 시거(Bob Seger)의 Against the Wind에 밀리고 말았다.
롤링 스톤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곡에 포함되어 2004년 375위, 2010년 384위를 차지했다.
각 부분은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곡과 가사의 귀조가 비슷하다.
2부는 1부에 비해, 3부는 2부에 비해 더 크게 분을표출한다.
앨범에서 1부의 구성은 극의 주인공인 핑크가 자라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고 적나라한 현실에 충격을 받고 벽을
쌓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2부에서 핑크는 선생님에게 혼나고 폭력적인 선생에 대항해 싸우는 공상을 한다.
곡은 어떻게 그가 자신과 주변의 세상에 벽을 쌓는지를 보여준다. 선생들은 세상과 핑크를 막는 단지 하나의 벽돌에
불과하다.
프로듀서 밥 에즈린(Bob Ezrin)은 1분 20초로 구성된 2부의 초안을 듣고 대박을 예감했다.
그래서 너무 짧다고 로저에게 말하고 적어도 1절이 더 필요하고 후렴구도 두 번 더 반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멤버들은 싱글 따위는 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밥은 멤버들의 생각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후렴구를 단순 반복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것이 없을까를 생각하던 그는 이 곡이 다름아닌 아이들에 관한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의 목소리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스튜디오 근처 학교의 합창단 어린이들을 섭외했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 <The Wall>은 영국의 알란 파커(Alan Parker)감독에 의해 1982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밥 겔도프(Bob Geldof)가 주인공 핑크로 분했고 로저는 카메오로 출연했다.
알란은 <Midnight Express>, <Fame>, <Birdy>, <Angel Heart>, <Mississippi Burning>, <Commitment> 등의
영화들로 80년대와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열혈 팬들을 끌고 다니며 명장으로 평가받았었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는 영국의 록 밴드이다.
그룹 초기에는 사이키델릭 록과 스페이스 록 음악으로 인정 받았지만 후기로 가면서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으로
발전하였다.
철학적인 가사, 실험적인 음악, 유려한 앨범 커버, 특수장치를 활용한 라이브 등으로 유명하다.
가장 성공적인 록 그룹 중 하나로 미국내 판매고 7450만 장, 세계적으로는 2억 장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핑크 플로이드는 제네시스, 예스와 같은 동시대의 아티스트뿐 아니라 나인 인치 네일스,드림 시어터처럼[5] 후대
록 아티스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5년부터이며, 시드 배럿이 건축학 학생들인 닉 메이슨, 로저
워터스, 리처드 라이트, 밥 클로스로 구성된 The Tea Set에 들어온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클로스는 얼마 후
탈퇴하였지만, 그룹은 적지 않은 주류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무대에서 고정적인 인기를
받았다.
배럿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약물을 복용하여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동료들은 기타 연주자이자 가수인 데이비드 길모어를 그룹에 새롭게 영입하였다.
배럿이 탈퇴함에 따라, 베이스 연주자이자 가수인 로저 워터스는 작사가로활동하면서 밴드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후 콘셉트 음반 The Dark Side of the Moon, Wish You Were Here, Animals와 록 오페라 The Wall을
발매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1985년, 워터스가 밴드를 탈퇴하였지만, 남은 구성원들은 길모어가 리더가 되어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으로 녹음과
투어를 계속 하였다.
워터스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로 그들과 법적인 공방을 벌였으나, 판결에 따라 길모어, 메이슨, 라이트가 계속 핑크
플로이드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밴드는 다시 한번 A Momentary Lapse of Reason (1987)과 The Division Bell (1994)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워터스는 솔로 음악가로 데뷔하여 세 개의 스튜디오 음반을 발매하였다. 이후 몇 년간 로저 워터스와 남은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왔지만, Live 8 공연을 위해 일시적인 재결합을 하기도 하였다.
2008년 라이트가 사망한 이후 길모어와 메이슨은 1993 ~ 94년 "The Division Bell"(1994) 당시 라이트와 함께 진행했던 세션을 바탕으로 20년만의 신보인 2013년 "The Endless River" (2014) 제작에 들어갔고, 2014년 11월 7일에 발매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1966년까지 'Sigma 6', 'Meggadeaths', 'The Tea Set', 'The Abdabs', 'The Screaming Abdabs'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활동했다.
1966년 밥 클로스와 ‘Blues Anonymous’에서 활동하던 시드 배럿을 영입하면서 그들은 'The Pink Floyd Sound'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라는 이름은 당시 활동하던 블루스 연주자 핑크 앤더슨과 플로이드 카운실의 이름을 각각 따온 것이다.
처음 핑크 플로이드는 평범한 블루스 밴드였지만, 시드 배럿이 가입하면서 점점 사이키델릭 록으로 음악적 성향이
변해 갔다.
곧 그들은 당시 영국의 언더그라운드 공연장이었던 UFO Club, Marquee Club, the Roundhouse 등에서 인기를
얻었다.
1966년 밴드는 피터 화이트헤드 감독의 영화 “Tonite Let's All Make Love in London”에 "Interstellar Overdrive"와 "Nick's Boogie"의 두 곡을 삽입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 사운드트랙은 CD화 되었고, 이후 여기에 담긴 핑크 플로이드의 연주 두 곡만 담은 EP인 London '66-'67이
발매되기도 했다.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지자 그들은 1966년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1967년 첫 싱글 "Arnold Layne"과 "See Emily Play"를 발표했다. 싱
글은 영국 차트에서 각각 20위, 6위를 차지했다.[11] 싱글의 성공으로 인해 밴드는 처음으로 TV에 출연하게 되었다.
1967년 8월 5일 핑크 플로이드는 첫 앨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비틀즈의 evolver(1966),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와 함께 영국 사이키델릭 록 앨범의 효시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앨범은 작사와 작곡 등 거의 모든 과정을 시드 배럿 혼자서 주도했다. 앨범은 영국에서 차트 6위를 기록했지만,
미국에서는 3위에 그쳤다.
밴드는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 투어를 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과도기(1968~1972)
밴드의 인기가 점점 올라갈수록, 멤버들의 압박감은 커져 갔다.
특히 시드 배럿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점점 약물을 복용했다.
정상적인 음악 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지자나머지 멤버들은 시드 배럿을 대체할 기타리스트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들은 제프 벡을 영입할 것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블루스 기타리스트였던 데이비드 길모어를 선택했다.
애초에 길모어는 연주하기 힘든 배럿을 대신해서 기타를 연주하는 역할일 뿐이었다.
하지만 배럿의 음악 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밴드를 탈퇴하자, 그 자리에 길모어가 가입하게 되었다.
그동안 시드 배럿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 많은 시도를 했다.
이 시기에는 대체로 로저 워터스와 데이비드 길모어, 릭 라이트가 각각 역할을 분담해서 밴드를 이끌어 나갔다.
워터스가 복잡하고 상징적인 가사, 전체적인 곡의 구조를 결정했다면 길모어는 블루스적인 멜로디, 라이트는 사이키
델릭한 화음을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 워터스와는 달리 길모어와 라이트는 한결 간단한 곡을 선호했는데, 이는 나중에 멤버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시드 배럿이 없는 상태에서 발매한 첫 음반인 A Saucerful of Secrets는 소음과 여러 타악기, 전자적인 소리 왜곡,
테이프 루프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음
반은 영국에서 차트 9위를 차지했지만, 미국 차트에는 진입하지 못한 유일한 앨범이기도 하다.
1969년 5월, 밴드는 감독 바벳 슈뢰더의 의뢰를 받아 영화 More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Music from the Film More으로 그 결과물을 발표하였다.
음반은 영국 차트 9위, 미국 차트 153위까지 올라갔다.[13] 수록곡은 정규 앨범에서 미처 포함시키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특히 어쿠스틱한, 이른바 '풀냄새'가 나는 곡을 많이 포함시켰다.
앨범 삽입곡 중에 "Green is the Colour"와 "Cymbaline"은 그 시기 그들의 가장 유명한 라이브 투어였던 The Man &
The Journey에서 자주 연주되었다.
"Cymbaline"은 또한 로저 워터스가 음악 산업에 대한 냉소를 드러낸 최초의 곡이기도 하다.
"The Nile Song" 같은, 앨범의 다른 곡들은 부단히 아방가르드적이고 하드 록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Ummagumma 앨범은 그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혼란스러운 작품이다.
핑크 플로이드 최초의 더블앨범으로서, 첫 장은 라이브(실제 공연이 아닌 무관중 라이브)이고, 두 번째 장은 각 멤버들에게 LP 반 면(12분)씩을 할당하여 독립적으로 곡을 만들게 했다.
각 멤버들은 자신의 분량 내에서 최대한의 실험성을 발휘하였다.
이 앨범은 출반되자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밴드의 향후 음악적 방향을 정리하는 계기를 가져다준
음반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앨범은 영국 차트 5위, 미국 차트 74위를 차지했다.
1970년의 Atom Heart Mother는 밴드가 최초로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해 내놓은 음반이다.
그들은 아방가르드 작곡가인 론 기신과 함께 작업하였다.
음반의 A면은 21분 가량의 대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B면은 밴드의 멤버들(로저 워터스, 릭 라이트, 데이비드 길모어)이 각각 보컬을 담당한 3곡, 아침식사를 주제로 한 곡인 "Alan's Psychedelic Breakfast"로 구성되어 있다.
"Alan's Psychedelic Breakfast"는 가상의 인물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그것을 먹는 과정을 그대로 녹음하였고,
그 중간중간에 밴드의 연주가 삽입되어 있다.
비록 멤버들이 이 앨범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다른 앨범들 중에서도 특히 실험적인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55위를 기록했다. 이는 그때까지 그들의 음반 중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기록한 것이었다.
다음 앨범을 출반하기 전에, 그들은 싱글과 미발표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인 Relics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에 참여했다.
자브리스키 포인트 사운드트랙은 당시 사이키델릭 분위기를 잘 담고 있는 음반으로 제리 가르시아와 핑크 플로이드의 미공개 세션이 담긴 음원이 포함되어 재발매되었다.
1971년에 발표한 앨범 Meddle은 그들의 사이키델릭적인 사운드가 나타나는 마지막 음반이다.
이 앨범의 B면에는 그들의 곡 중에서 가장 거대한 곡으로 꼽히는(23분 가량) "Echoes"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닉 메이슨이 보컬로 참여한 유일한 곡인 one of These Days", 그들의 작품 중에서 상대적으로 어쿠스틱하고 감미로운 세 곡 "A Pillow of Winds", "Fearless", "San Tropez"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앨범은 영국 차트 3위, 미국 차트 70위를 기록했다.[13]
1972년, 핑크 플로이드는 바벳 슈뢰더 감독의 영화 La Valle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하였다.
이 작업은 Obscured by Clouds란 이름으로 출반되었다. 이 앨범은 다른 밴드의 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곡 길이와, 선율적인 느낌의 곡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차트 50위 안에 들었으며(46위) 영국 차트 6위를 기록하였다.
도약기(1973~1975)
1973년부터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적 성향은 사이키델릭은 물론, 어느 한 장르에 국한하기 힘든 독창적인 위치를
갖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 발표된 두 장의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Wish You Were Here은 밴드의 이전 앨
범이나 그 이후 앨범과는 완전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멤버들 간의 음악적인 협력관계가 이 시기에 가장 균
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베이시스트인 로저 워터스의 영향력이 강하긴 했어도 지배적이지는 않았던 점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핑크 플로이드의 모든 앨범 중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고,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으며, 밴드의 유명세를 올려주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 앨범으로 그들은 미국 차트 1위를 기록할 수 있었으며, 2006년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1500만장 이상) 기록되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4000만장 이상 판매되었고, 빌보드 앨범 차트에 741주 이상, 영국 앨범 차트에 301주 이상
등재되었다.
이 앨범에서 밴드는 재즈적인 요소를 적극 수용하였다.
재즈를 공부했던 키보디스트 릭 라이트는, 앨범 전반적으로 블루스적인 화음 진행을 많이 포함시켰다
(Breathe 처음 부분의 화음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색스폰 연주자인 딕 패리, 여자 보컬리스트인 클레어 토리가 녹음에 참여했다.
앨범은 그 사운드 만큼이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앨범 전체로는 '광기(lunatic)'라는 큰 주제로 요약할 수
있지만, "Money"나 "Us and Them" 등의 곡에서는 자본주의와 반전 등의 사회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앨범 녹음 당시 로저 워터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졌는데, "가장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가?", "당신이
폭력을 행사했던 때는 언제인가? 그때 당신은 정당했다고 생각하는가?",
"죽음이 두려운가?" 등의 것이었다. 밴드는 사람들의 답변을 녹음해서 앨범 군데군데에 삽입했다.[18] 앨범의 제작을
총괄했던 엔진이어앨런 파슨스는 이런 모든 요소들을 조합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이 너무나 큰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밴드는 상업성을 배제하고 초창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실험정신을 다시 살리고자 했다.
그런 의도로 기획했던 프로젝트가 Household Object였는데, 제목 그대로 집에 있는 물건들만을 이용해서 앨범을 녹음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공연하기 어렵다는 점과 녹음의 난이도 때문에 프로젝트는 중지되었고, 그 다음 앨범인 Wish You Were Here의 음향 효과에만 그 일부가 삽입되었다.
1975년 발표된 Wish You Were Here의 주제는 '부재(absence)'이다.
음악 산업에서의 인간성의 부재에 대해서도 일부 다루고 있지만, 가장 주된 것은 시드 배럿의 부재이다.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거대한 곡인 "Shine on You Crazy Diamond"에서 가사는 한결같이 시드 배럿을 그리워하는 내용이고, 곡의 끝 부분은 핑크 플로이드로서 맨 처음 발표한 곡 중 하나인 "See Emily Play"의 선율을 차용했다.
중간의 세 곡인 "Welcome to the Machine", "Have a Cigar", "Wish You Were Here"은 음반 산업에 대한 비판과
그로 인한 시드 배럿의 부재를 다룬 곡이다.
Roger Waters의 곡인 "Have a Cigar"는 훗날 이곡을 부르려고 David Gilmore 와 Roger Waters 보이지 않는 싸움으로 인해 옆 녹음실에서 녹음 중이던 로이 하퍼가 대신 보컬로 참여했다는 증언이 인터뷰에 실리기도 했다.
한 일화에 따르면, 밴드가 이 앨범을 녹음하던 도중 녹음실에 시드 배럿이 찾아왔다. 그의 모습이 너무나 변해있었기
때문에, 처음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 모두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로저 워터스 시기(1976~1985)
이 시기부터, 베이시스트인 로저 워터스는 밴드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The Wall 앨범 녹음 도중에 릭 라이트를 해고했는데, 워터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밴드의 음악 작업에 대한
라이트의 기여도가 미약했고, 코카인 등을 복용하기도 했다는 것이 그 해고 이유였다고 한다.
그는 다른 멤버들도 그를 내보내는 것에 동의했다고 말했지만, 2000년 데이비드 길모어는 그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21] 닉 메이슨은 그의 책 《Inside Out》에서 콜럼비아 레코드가 워터스에게 1979년까지 더 월 앨범을 끝내면 특
별 보너스를 줄 것을 제안했기 때문에 라이트를 해고 했다고 했다.
더 월 앨범 제작을 서두르기 위해서 멤버들이 여름 휴가를 빨리 끝내고 밴드로 모이라는 워터스의 명령에 라이트는
이를 거부하고 늦게 나타나자 워터스가 그를 해고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릭 라이트는 탈퇴 후에도 The Wall 앨범의 라이브 공연에서 정식 멤버가 아닌 세션 형식으로 함께 연주하긴 했다.
이 시기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과 가사는 모두 로저 워터스가 자신의 사상을 반영해 만들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당시 영국의 정치인이었던 마거릿 대처와 메리 화이트하우스에 대한 냉소를 가사로
표현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음악적인 규모는 점점 커져갔고, 많은 세션 기타, 색소폰, 백보컬, 코러스,
키보드, 급기야는 대형 오케스트라까지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최초로 드러나는 앨범은 1977년 발매된 Animals 앨범이다.
당시 록 음악은 펑크가 처음 등장하던 시기로써, 초기 로큰롤의 단순한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가 오디션에 'I Hate Pink Floyd'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올 정도로, 핑크 플로이드의
복잡한 음악은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Animals 앨범도 이런 시류를 반영해, 이전 앨범보다 거친 기타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또한 이 앨범은 릭 라이트가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첫 번째 앨범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사운드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기존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적 특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양 끝의 짧은 곡 "Pigs on the Wing"를 제외하면 나머지 3곡은 모두 10분이 넘어가는 대곡이며, 모든 곡은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서 모티브를 따온 복잡한 가사를 포함하고 있다.
각 곡의 테마이자 제목인 개, 돼지, 양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각 계층을 상징한다.
이 앨범에서 키보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지만, 다른 앨범들과는 달리 색소폰과 백보컬은 참여하지 않았다.
Animals의 커버 사진은 디자이너 테오 보쉬위버가 만든 거대한 돼지 모형을, 런던 바터시 발전소에 띄워놓고 촬영해서 만들었다.
하지만 바람 때문에 돼지를 고정시키기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그래픽 처리를 통해 돼지 그림을 삽입해야 했다.
'거대한 돼지'는 곧 밴드의 상징물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후 라이브 공연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1979년 발표된 록 오페라 The Wall은 고립과 소통의 단절에 대한 앨범이다. 로저 워터스는 계속되는 투어와 관객의
반응 속에서 이러한 단절을 느꼈다고 말했다.
싱글로 발매된 "Another Brick in the Wall Pt.2", "Comfortably Numb", "Young Lust" 등은 라디오에서 자주 방송되는 밴드의 가장 유명한 곡이 되었다.
이 앨범을 작업할 당시 로저 워터스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밴드의 재정상태를 이용해 다른 멤버들을 지배했는데, 이는 밴드의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릭 라이트는 이 앨범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는데, 제작 도중에 로저 워터스가 그를 해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투어에서만 일종의 '일당'을 받고 연주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덕분에 그는 멤버들 중에
유일하게 The Wall 투어에서 돈을 번 멤버가 되었다.
나머지 세 멤버들은 아직도 투어에 든 비용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투어는 너무나 수익성이 없어서, 몇몇 도시에서만 진행되었다.(로저 워터스는 밴드에서 탈퇴한 후 1991년 단독으로
베를린 장벽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The Wall은 영국에서 차트 3위를 기록했지만, 미국에서는 1980년에만 15주 가까이 정상을 차지했고, 1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이 앨범으로 인해 그들은 비틀즈 이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을 두 장 가진 밴드가 되었다.
1982년 상영된 영화 Pink Floyd: The Wall은 앨범의 음악과 모티브를 그대로 사용했다.
앨런 파커가 감독하고 밥 겔도프가 주연한 이 작품을 위해 로저 워터스는 보컬 파트를 다시 녹음했고, 영국 아티스트
제럴드 스카페의 애니메이션을 삽입했다.
평론가는 그 내용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14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영화에는 레코드의 길이 제한으로 넣지 못했던 "What Shall We Do Now?"가 삽입되었고, "When the Tigers Broke
Free"는 싱글과 The Final Cut의 재발매판, 컴필레이션 앨범 Echoes: The Best of Pink Floyd을 통해 발매되었다.
1983년 발매된 앨범 The Final Cut은 로저 워터스의 아버지 에릭 플레처 워터스에게 헌정된 음반이다. 이 앨범은
The Wall보다도 더 어둡고 냉소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로저 워터스의 분노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탈퇴한 릭 라이트를 대신해서 키보드 파트는 마이클 카멘과 앤디 바운이 맡았다. 앨범의 LP 커버 뒷면에는
"The Final Cut - 전쟁후 꿈을 위한 레퀴엠, 로저 워터스. 로저 워터스,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연주"라고
쓰여 있다.
이 앨범은 한 밴드의 공동작품이라기보다는 로저 워터스의 솔로 앨범에 가깝다.
모든 곡은 로저 워터스 혼자 작사·작곡을 담당했으며, 다른 멤버는 연주만을 했을 뿐이다.
로저 워터스는 인터뷰에서, 이 앨범을 솔로 앨범으로서 작업하려 했지만, 다른 멤버들이 반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닉 메이슨은 그의 책 Inside Out에서 사실은 정반대라고 주장했다.
즉, 데이비드 길모어가 로저 워터스의 솔로 앨범으로 발표하라고 제안했지만, 로저 워터스는 핑크 플로이드의 이름을 붙여서 내자고 강행했다는 것이다.
"The Final Cut"은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6위를 기록했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The Final Cut의 발표 후, 캐피톨 레코드는 컴필레이션 앨범 Works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로저 워터스의 1970년 미발표곡 "Embryo"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멤버들은 각각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1984년 데이비드 길모어는 About Face를, 로저 워터스는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을
발표했다.
또한 릭 라이트는 데이브 해리스와 Zee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으며, 1985년 닉 메이슨은 10CC의 리더 릭 펜과 함께한 Profiles를 발표했다.
데이비드 길모어 시기(1987~1995)
1985년 12월 로저 워터스는 핑크 플로이드를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사실상 핑크 플로이드는 해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밴드 내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6년, 데이비드 길모어는 닉 메이슨과 함께 핑크 플로이드의 새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솔로 앨범 Radio K.A.O.S.를 작업하고 있던 로저 워터스는 즉각 반발했고, '핑크 플로이드'란 이름에 대해
법적인 공방을 벌였다.
그는 핑크 플로이드라는 밴드가 시드 배럿의 정신과 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영혼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길모어와 메이슨의 손을 들어 줬고, 그들은 밴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취득했다.
로저 워터스는 소송에 패한 대신, The Wall과 The Final Cut에 대한 법적 권리를 얻었다.
1987년 핑크 플로이드는 A Momentary Lapse of Reason을 발표했다. 십년이 넘게 대부분의 가사를 써왔던 로저
워터스를 대신하기 위해, 그들은 전부터 그들과 협력 관계에 있던 밥 에즈린에게 작사를 맡겼다.
릭 라이트 대신 키보드 파트를 담당했던 존 카린도 "Learning to Fly"의 가사를 썼다.
릭 라이트는 앨범 제작이 끝날 무렵에 세션으로 참가했지만, 앨범 투어가 끝날 무렵 다시 정식 멤버로 가입했다.
앨범은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차트 3위를 기록해지만, 비평가들은 다른 멤버들이 앨범에 그리 많은 부분 참여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이 앨범은 길모어의 솔로 앨범과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앨범을 발표한 다음해 밴드는 그들의 투어를 Delicate Sound of Thunder라는 이름의 음반과 비디오로 발표했다.
또한 그들은 레이스 경기를 기록한 La Carrera Panamericana의 음악을 담당했다. 이 레이스에는 길모어와 메이슨도 참여했다. 여기에 쓰인 음악은 1975년 이후 릭 라이트가 처음으로 밴드에서 곡을 쓴 것이다.
1992년 박스 세트 Shine on이 발매되었다. 이 박스에는 스튜디오 앨범 A Saucerful of Secrets, Meddle, The Dark
Side of the Moon, Wish You Were Here, Animals, The Wall, A Momentary Lapse of Reason이 들어 있으며,
시드 배럿 시절의 싱글을 담은 The Early Singles도 포함되어 있다. 이 해에 로저 워터스는 Amused to Death를
발표했다.
핑크 플로이드의 정규 앨범 14집은 1994년 발표된 The Division Bell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밴드의 결속력은 더욱
강해졌고, 릭 라이트는 정식 멤버로써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앨범은 평론가들로부터 Momentary Lapse of Reason보다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하지만 여전히 전성기때의 음악보다는 못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차트 1위를 차지한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이 되었다.
'The Division Bell'이란 앨범의 제목은 그의 친구 더글라스 아담스가 제안한 것이다.
이 앨범의 많은 가사는 데이비드 길모어의 여자친구 폴리 샘슨이 썼는데, 둘은 앨범이 발매되고 얼마 있지 않아
결혼했다.
또한 녹음에는 딕 패리 등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에서 함께했던 뮤지션들이 거의 모두 참여했다.
이전 앨범에서 몇몇 곡의 가사를 썼던 슬랩 해피의 멤버 안토니 무어는 릭 라이트의 곡 "Wearing the Inside Out"의
가사를 담당했다
(이 곡은 The Dark Side of the Moon 이후 릭 라이트가 리드보컬을 맡은 첫 번째 곡이다)
그는 1996년 발표한 릭 라이트의 솔로 앨범 Broken China에도 참여했다.
1995년에 발매된 그들의 라이브 앨범 PULSE는 The Division Bell 발매 투어를 기록한 음반이다.
음반에 수록된 음원은 런던의 얼스 코트에서의 공연을 바탕으로 다른 공연들과 편집한 것이다. 이
투어는 핑크 플로이드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은 공연이었다.
이 앨범에서 밴드는 그동안 발매했던 모든 앨범의 곡을 골고루 공연했고, 특히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
전곡을 라이브로 연주했다.
이는 20년 만에 처음 공연한 것이다.
얼스 코트에서의 1994년 10월 20일 공연은 영상으로도 제작되었는데, 각각 VHS와 레이저디스크로 발매되었다.
2006년 7월 10일에는 DVD 버전도 발매되었고],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 앨범의 한정판은 패키지 속에 LED와 타이머, 배터리를 포함하고 있었고, 초당 1번씩(심장박동과 유사한 속도이다) 붉은 빛을 깜빡이도록 제작되었다.
같은 해, 밴드는 "Marooned"로 그래미 상을 수상했다.
이는 그들이 결성한 이래 처음 받은 것이었다.
그 후(1995년~현재)
1996년 1월 7일, 핑크 플로이드는 스매싱 펌킨스의 보컬인 빌리 코건의 추천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로저 워터스는 이 등재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다른 멤버들과 아직 사이가 좋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등재식장에서 데이비드 길모어는 "각기 다른 음악을 만들었던 두 멤버들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로저와
시드에게..."라고 말했다.
기념 공연으로 밴드와 빌리 코건은 "Wish You Were Here"을 연주했지만, 닉 메이슨은 연주하지 않았다.
1980년에서 1981년까지 런던에서 열린 The Wall 콘서트를 담은 라이브 음반 Is There Anybody Out There?이 2
000년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미국 음반 차트 19위를 기록했다.
그 다음해에는 그들의 베스트 앨범인 Echoes가 나왔다. 밴드의 모든 멤버들은 이 앨범을 위해 함께 모여 선곡과
편집, 마스터링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벼운 충돌이 있었다.
수록시간의 한계로 "Echoes", "Shine on You Crazy Diamond", "Sheep", "Marooned", "High Hopes" 등의 곡이 일부분 편집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영국과 미국에서 차트 2위까지 올라갔다.
2002년 4월 2일에 전 세계 라이브투어 In the Flesh의 일환으로 로저 워터스가 서울 잠실 종합 운동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공연은 총 2부로 구성되었으며, 핑크 플로이드 시절의 히트곡과 솔로곡이 공연되었다.
2003년에는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SACD 버전이 발매되었다. 이 버전은 기존 LP나 CD 버전과는 달리 새로운 커버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예전 그대로의 LP 버전도 함께 복각되었다.
이 버전에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포스터가 들어있다. 또한 10월30일에는 오랫동안 밴드의 매니저를 맡았던 스티브
오로크가 사망했다.
로저 워터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그의 장례식에서 "Fat Old Sun"과 "The Great Gig in the Sky"를 연주했다.
2004년, 닉 메이슨은 밴드의 일대기를 담은 책 Inside Out: A Personal History of Pink Floyd을 출판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을 돌면서 발매 기념회를 가졌는데, 몇몇 팬들은 그가 밴드와 함께 투어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2005년 7월 2일, 로저 워터스를 포함한 밴드의 모든 멤버들은 라이브 8 콘서트를 위해 재결합했다.
이는 밴드를 해체한 후 24년 만의 일이었다. 그들은 콘서트에서 "Speak to Me/Breathe/Breathe (Reprise)", "Money", "Wish You Were Here", "Comfortably Numb"을 연주했고, 데이비드 길모어와 로저 워터스는 함께 노래했다.
길모어는 공연이 끝나고 내려가려 했지만, 로저 워터스가 그를 다시 불러서 밴드의 모든 멤버들과 함께 포옹했다.
이 장면은 라이브 8 콘서트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의 하나로 남았다.
라이브 8 콘서트 일주일 후,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음반사 체인 HMV에 따르면, Echoes: The Best of Pink Floyd의 판매량이 일주일 만에 1343% 증가했다.
또한 아마존 닷컴은 The Wall의 판매량이 3600%, Wish You Were Here이 2000%,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1400%, Animals가 1000% 증가했다고 발표하였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곧바로 이러한 음반 판매의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밝혔고, 라이브 8에 참여한 다른 모든 아티스트도 이에 동참했다.
2005년 11월 16일 핑크 플로이드는 더 후의 피트 타운센드가 추천하여 UK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시상식에서 릭 라이트는 눈 수술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고, 로저 워터스는 로마에서 비디오 스크린을 통해 참여했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2006년 솔로 앨범 On an Island를 발표했고, 유럽과 캐나다, 미국에서 투어를 열었다.
이 투어에는 릭 라이트와 닉 메이슨이 일부 참여했다.
투어에서 그는 핑크 플로이드의 첫 번째 싱글 "Arnold Layne"을 연주했다. 로저 워터스도 투어에 참여하려 했지만,
그의 공연 리허설 일정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닉 메이슨과 함께 아일랜드 콜크에서의 공연 후반부에 The Dark Side of the Moon 전곡을 연주했다.
많은 팬들은 그들이 재결합해서 계속 활동하기를 바라고 있지만,데이비드 길모어는 2006년 핑크 플로이드로서 재결합하려는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2007년에 로저 워터스는 "만약 다른 멤버들이 모두 원한다면 다시 함께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라고 했지만
데이비드 길모어는 "나는 과거에 얽매이기 싫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같은 해 BBC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해 7월 7일, 시드 배럿이 당뇨로 사망했다.
2008년 8월 26일, 핑크 플로이드는 폴라음악상을 수상하였다.
시상식에 참석한 리더 로저 워터스와 드러머 닉 메이슨은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오페라 가수
르네 플레밍과 함께 이 상을 수여 받았다.
같은 해 9월 15일, 암으로 투병 중이던 키보디스트 릭 라이트가 사망했다.
동료 데이비드 길모어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추도문을 올리고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누구도 리처드 라이트를 대신할 순 없다. 그는 내 뮤지컬 파트너이자 친구였다. 온화하고 겸손했으며 남에게 나서기를 꺼려 했지만 그의 감동적인 목소리와 연주는 그룹의 사운드에 있어 마법 같은 존재였다."
2011년 5월 12일 로저워터스의 the wall live투어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영국 O2 Arena the wall tour 에서
comfortably numb을 데이빗 길모어와 함께 공연했고 마지막곡 outside the wall에선 닉메이슨을 포함한 3명의
멤버가 함께 공연했다.
2014년 7월 폴리 샘슨은 2014년 11월에 핑크플로이드의 새로운 앨범이 출시된다고 트위터에 발표했다.
이 앨범은 핑크플로이드의 The Division Bell이 나오고 20년만에 출시되는 앨범이다.
새로운 앨범의 이름은 "The Endless River" 이다.
이 앨범은 로저워터스는 관여하지 않고,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릭 라이트가 참여했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The Endless River" 앨범이 핑크플로이드의 마지막 앨범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음악
기술
핑크 플로이드는 음악적으로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진보적인 밴드였다.
그들은 작곡할 때 당대의 다양한 새로운 악기들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Meddle 앨범에서 에코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한 Binson사의 Echoric이 있다[49]. 또한 그들은 테이프를 이용한 루프 기술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1970년
론 기신에게서 습득한 것이다.
(론 기신은 Atom Heart Mother에서 공동 작곡을 담당했다).
루프 기술이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된 앨범은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인데, 현금 계산기 소리가 반복되는
"Money"나 , "Speak to Me" 등에서 두드러진다.
그들은 주로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는데, 그 곳은 비틀즈 등이 작업하면서 당시 최고의 음향기술을 보유한
곳 중 하나였다(Atom Heart Mother나 The Dark Side of the Moon도 여기서 녹음되었다). 밴드는 몇몇 앨범에서
쿼드라폰 기술(4 채널 기술)을 시도하였지만, 당시에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들은 신시사이저를 메인 악기로 구성한 락 밴드이기도 했는데, 릭 라이트는 Dark Side 앨범에서 EMS Synthi AKS를 사용하였다.
악기
데이빗 길모어는 그의 블루스적 성향에 따라, 거의 모든 곡에서 펜더사의 기타를 주로 사용하였다
. 그는 대부분 스트라토캐스터와 텔레캐스터로 연주했는데, 그 외에도 몇몇 곡에서 슬라이드 기타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수많은 앰프와 이펙터를 이용했다.
초기 릭 라이트는 주로 파피사 오르간을 사용했다.
나중에 신시사이저가 도입된 1972년부터 그는 적극적으로 이를 이용하는데, The Dark Side of the Moon 이후의
앨범에서 많은 신시사이저 연주가 첨가되었다.
다른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와는 달리, 핑크 플로이드에서 베이스와 드럼은 음악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몇몇 곡을 제외하고는 그저 신시사이저와 기타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는 그들의 음악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바흐나 베토벤, 낭만주의 음악, 재즈의 영향을 받아 정교한 코드를 작곡하는 릭 라이트와는 달리,
로저 워터스는 단순하고 간단한 곡을 쓸 뿐이었다.
보컬
초창기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는 거의 시드 배럿의 몫이었지만, 그가 밴드를 탈퇴한 후에는 길모어와 워터스가 주로
노래하고, 몇몇 곡에 릭 라이트가 참여하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 이후부터는 객원 보컬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는데, Dark Side 앨범에서의 클레어
토리, Wish You Were Here 앨범에서의 로이 하퍼 등이 대표적이다.
Atom Heart Mother 앨범부터는 코러스도 많이 사용되었다. 로저 워터스가 주도권을 잡은 1973년 이후에는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는데, The Wall 앨범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영향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은 많은 후대 밴드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대부분의 프로그레시브 밴드가[52] 핑크 플로이드와 Yes의 음악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드림 시어터는 2005년 존경의 의미로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 전곡을 공연하기도 했다.
비단 프로그레시브 록뿐만 아니라 다른 밴드들도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라디오헤드는 종종 핑크 플로이드에 비교되며, 방겔리스나 키타로 등의 뉴에이지 아티스트도 그들에 대한 영향을
언급하곤 했다.
많은 밴드들이 그들의 곡을 리메이크했는데, 펄 잼("Interstellar Overdrive"), 푸 파이터스("Have a Cigar") 등을
들 수 있다.
Pink Floyd는 영국의 록 그룹이다.
그룹 초기에는 사이키델릭 록과 스페이스 록 음악을 후기로 가면서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으로 발전하였다.
철학적인 가사, 실험적인 음악, 유려한 앨범 커버, 특수장치를 활용한 라이브 등으로 유명하다.
가장 성공적인 록 그룹 중 하나로 미국내 판매고 7450만 장, 세계적으로는 2억 장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핑크 플로이드는 제네시스, 예스와 같은 동시대의 아티스트뿐 아니라 나인 인치 네일스, 드림 시어터처럼 후대 록
아티스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5년부터이며, 시드 배릿이 건축학 학생들인 닉 메이슨, 로저
워터스, 리처드 라이트, 밥 클로스로 구성된 The Tea Set에 들어온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클로스는 얼마 후 탈퇴하였지만, 그룹은 적지 않은 주류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무대에서
고정적인 인기를 받았다.
배릿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약물을 복용하여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동료들은 기타 연주자이자 가수인 데이비드 길모어를 그룹에 새롭게 영입하였다.
배릿이 탈퇴함에 따라, 베이스 연주자이자 가수인 로저 워터스는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밴드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후 콘셉트 음반 The Dark Side of the Moon, Wish You Were Here, Animals와 록 오페라 The Wall을 발매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1985년, 워터스가 밴드를 탈퇴하였지만, 남은 구성원들은 길모어가 리더가 되어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으로 녹음과
투어를 계속 하였다.
워터스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로 그들과 법적인 공방을 벌였으나, 판결에 따라 길모어, 메이슨, 라이트가 계속 핑크
플로이드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밴드는 다시 한번 A Momentary Lapse of Reason (1987)과 The Division Bell (1994)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워터스는 솔로 음악가로 데뷔하여 세 개의 스튜디오 음반을 발매하였다.
이후 몇 년간 로저 워터스와 남은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왔지만, Live 8 공연을 위해 일시적인 재결합을
하기도 하였다.
핑크 플로이드 사운드 혁명의 완성
4,500만 장의 앨범 판매고,
출시 이후 15년(741주) 동안 빌보드 앨범 차트 랭크라는 엄청난 기록이 아니더라도, 핑크 플로이드의 8번째 스튜디오 앨범은 그야말로 역사상 최고의 록 앨범으로 자리할 만하다.
밴드 자신들도 이 작품이 지니는 높은 가치를 인정한 바 있다.
"사실 이 전의 모든 앨범은 이 앨범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매 시간마다 녹음 기술을 배우고 있었고, 우리의 작곡 실력은 한결 나아졌다."
키보디스트 릭 라이트(Rick Wright)의 말이다.
일상의 삶에서 오는 갈등과 욕망, 압박과 스트레스에 의한 두려움, 그리고 그로 인한 광기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이 컨셉트 앨범에서 밴드는 전에 없던 혁명적 사운드를 완성했다.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앨범에서도 어김없이 각종 효과음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게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일련의 '비트(beat)'다.
일정한 리듬을 타고 흐르는 이 비트는 첫 곡 'Speak To Me'의 인트로에서 등장하고 \끝 곡 'Eclipse'의 아우트로에서 페이드아웃 되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비롯하여, 뛰어가는 사람의 발소리, 시계추의 똑딱거리는 소리, \금전등록기의
찰카닥거리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앨범의 사운드 컨셉트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소리들은 일정한 리듬에 의해 진행된다.
37년 전의 작품이지만 지금 들어도 어떠한 군더더기나 어색함도 느낄 수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각 곡들 자체의
우수함 탓이겠지만, 이 앨범을 통해 널리 명성을 얻게 된 앨런 파슨스(Alan Parsons)의 탁월한 믹싱과 엔지니어링을 빼놓을 수 없다.
한 세대 후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에 견주어도 촌스럽지 않은, VCS3 신시사이저 사운드의 향연 'on The Run'이나
게스트 싱어 클레어 토리(Clare Torry)의 환상적인 스캣이 돋보이는 'The Great Gig In The Sky', 지극히 현대적인
감각의 'Time', 싱글 히트를 기록했던 흥겨운 'Money', 묘한 중독성을 지닌 'Brain Damage' 등모든 곡들이 시대의
정서를 초월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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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플로이드와 몇몇 이름들에 대하여
몇몇 이름들
2년 전, 전주에서 켄 러셀과 함께 ‘불면의 밤’을 보낸 적이 있다.
켄 러셀은 이단아, 혁신자라 일컬어지는 영국의 ‘문제 감독’으로 그의 영화는 기이하고 전위적인 영상, 관습 파괴적인 주제로 유명하다.
당시 보게 된 그의 영화 중, <토미>라는 아주 강렬한 느낌의 영화가 있었다. <토미>는 영국의 전설적 록 밴드
‘더 후The Who’의 앨범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한 연주를 동반한 충격적인 영상들을
제시하며 당대의 사회와 종교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켄 러셀, 하니까, 또 다른 켄, 최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칸 그랑프리를 수상한 ‘블루칼라의 시인’ 켄 로치가
떠오른다.
<랜드 앤 프리덤>이나 <내 이름은 조>, <빵과 장미>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어 한때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던
작품들이기도 하다.
섹스 피스톨즈는 영국에서 IMF가 터진 후, 스타를 혐오하기 시작한 실업자 청년들 사이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펑크
밴드이다.
이들이 연루된 국가 모독 사건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Queen>란 애국심 가득한 제목의 곡을 내놓는가 싶더니, 앨범 커버에는 여왕의 입에 안전핀을 꽂아놓은 사진을 실어 논란을
빚었다.
1977년 여왕의 25주년 기념식이 전국적으로 성대하게 열리고 있을 때, 이들은 템즈 강변에서 <대영제국의 무정부상태
Anarchy in the U.K.>를 연주하며 기념식을 공개적으로 망쳐놓는다.
단지 그 존재만으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몇몇 이름들. <핑크플로이드의 벽>(이하, <벽>)을 보면서 떠오른 것들이다.
<벽>에 대하여
1982년에 만들어진 영화 <벽>은 영국 밴드 핑크플로이드의 동명 음반을 영화화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알란 파커의 손길을 거쳐 영상으로 새롭게 태어난 <벽>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소문만 무성하다가,
1999년, 만들어진 지 17년 만에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 영화다.
영화는, 80년대의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상영금지처분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관습 파괴적이고 실험적인 영상들로 가득 차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핑크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간다.
늘 혼자인 핑크는 전쟁 공포증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는 교육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어머니는 핑크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지 않고 오히려 과잉보호로 그를 억누를 뿐이다.
핑크는 기존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성장하여 록 스타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박수는 오히려 참기 힘든 짐이 되고, 사랑에도 실패한 핑크는 소통불능의
상황 속에서 세상과 벽을 쌓은 채, 무기력하게 TV화면을 응시하거나 자학적인 행동을 하면서 소외되고 불안정한
생활을 지속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내용적인 것보다도 핑크의 불안정한 내면과 핑크에게 가해진 억압의 양상을
묘사하는 분절되고 파편화된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들일 것이다.
자신이 흘린 핏물에 빠져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린 채) 허우적거리는, 온 몸의 털을(젖꼭지와 눈썹까지) 면도기로
밀어버리는 핑크의 그로테스크한 모습들, 그리고 외부적 폭력(전쟁)과 내면적 폭력(억압)의 양상들을 형상화한
애니메이션 장면들까지, 극단적인 영상들은 음악과 결합되어 영화를 보는 우리의 뇌리를 파고든다.
신화, 그것의 이면
영화 <벽>은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신화’로 자리매김 된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입지점에서 <벽>의 영상과 음악이 보내는 메시지에 공감하였다.
누군가는 반전의 메시지를, 반제국주의와 반파시즘의 메시지를 보았고, 누군가는 교육 제도의 모순에 관한 심도 있는
경고를, 또 누군가는 (미약하나마) 연대와 소통의 희망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 <벽>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벽>을 보고나서의 반응은 대개 양극으로 나뉜다.
‘절대적 공감’이 한 극에 자리하고, ‘도대체 알 수 없다’는 반응이 다른 한 극에 자리한다.
나는 ‘절대적 공감’을 표하는 관객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묻고 싶다.
실상, ‘세상에 의해 상처 입은 예술가의 영혼’이란 주제는, 그것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어쩌면 단순하고도 진부한
비극이지 않은가?
<벽>의 내용과 주제는 단순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직설적이기 이를 데 없다.
영화는 분노로 가득 차서 영국의 현실을 (가족-학교-국가사회를 가로지르며) 전체적으로 고발한다. ‘단지’ 분노로 가득 차서 그렇게 한다.
바로 그 덕에, 그러니까 일관된 정서(분노)를 설정한 덕에, 영화는 한계를 넘어서는 형식적 실험들을 마음껏 수행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일관된 분노의 정서’에 공감하는 한 <벽>은 ‘신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관객들에게 영화는 난해한 것이 되고 말며, 단지 ‘오버’스런 것이 되고 만다.
주지해야할 사실은, ‘공감자들’에게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벽> 관람 후, 기억 속에 남게 되는 것은
강렬한 분노의 감정과 파괴의 제스처뿐이기 쉽다.
그것은 끝을 모르는 분노이며 대안이 없는 파괴라는 점에서 자못 위험하다. 물론 영화의 내적 구조 속에서 그 분노와 파괴는 (주인공이 예술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파괴가 주로 주인공의 환상을 통해 제시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용인될 수 있으며
나름 설득력도 강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관객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화 자체가 스타일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관객의 탓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벽>이 ‘신화’가 된 배후에는 관객의 절대적 공감이 가장 큰 동력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Another Brick in the Wall
오로지 ‘저항의 정신’으로 충만한 어떤 영화들이, 음악들이 있다.
그것들은 분명 억압으로 가득한 시대, <자본론>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야했던, 장산곶매가 영화 한 편을 상영하기 위해, 최루가스와 곤봉세례, 때론 헬기의 소음까지를 감당해야 했던 그 시대에, 한 줄기 ‘구원의 빛’으로,
사막의 ‘오아시스’로 기능하였다. <벽> 역시 ‘구원의 빛’의 반열에 오를만한 영화다.
그것의 저항 정신은 한 예술가의 내면을 프리즘으로 삼아 가족-학교-국가이데올로기와 인종, 계급의 층위를 모두
훑어내며 펼쳐진다.
그런데 <벽>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쇼의 광란’을 경계한다.
상처 입은 예술가인 핑크가 ‘두 개의 망치 상징(나치와 스탈린주의 하의 소련을 결합한 듯한)’을 팔에 두른 독재자로
변모하여 펼치는 환상 속의 공연 장면은 가장 섬찟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벽을 쌓는 행위’의 막다른 지점을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어떤 것에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행위의 위험성에 대한 도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벽>의 신화화 말이다. 저항 정신이 신화가 될 때, 그것은 또 다른 억압이
되고 만다.
신화에 대해서라면 어떠한 진지한 논의도 신성 모독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벽>이 만들어진 영국의 80년대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한국의 8-90년대를 감안하면, <벽>이 ‘신화성’을 지니게 된 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억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저항에 대한 요구 역시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문제는 저항에 대한 갈망이 그 수준을
넘어 신화가 되는 것일진대,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대리만족이 아닐까?
<벽>의 두 장짜리 시디와 한정판 DVD를 소비하는 것, 그리고 두 명의 켄(켄 러셀, 켄 로치)의 영화에 대해, 섹스
피스톨즈의 유명한 에피소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영화 <벽>이 전하고 있는 가장 준엄한 메시지―제발, 이 쇼를, 미친 폭력의 광란을 멈추라는―
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벽>에 열광하는 우리들이야말로 같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같은 구호를 외쳐대며, 개성 없는
‘또 하나의 벽돌another brick in the wall’이 되기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은 오로지 ‘소비 행위’에 국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미있는 사실 하나. <벽>을 보면서 내가 떠올린 이름들은 하필 모두 ‘영국’과 관련 있는 이름들이었다.
자연히, 영국이란 나라의 어떤 특징이 저런 ‘저항의 신화’들을 만들어 낸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그러다 문득, 영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이제야 ‘교육’ 얘기를 하게 된 셈인데).
이어서 우리의 교육 제도는 대부분 일본의 그것을 흡수한 것이고, 일본의 그것은 영국에서 도입된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렇게 영화 외적의 단상 수준에서 (겨우) 교육 문제에 생각이 이르게 된 것은, 영화 <벽>이 교육의 모순에 대한
충격적인(동시에 가장 유명한) 영상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단지 교육에 관한 영화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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