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 해밀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세기의 불륜 커플' 넬슨-에마 초상화, 한국 상륙
허레이쇼 넬슨 제독과 연인 에마 해밀턴 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의 얼굴' 전시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 작품
영국 화가 조지 롬니가 1785년 그린 에마 해밀턴(1765~1815) 초상화는 세상을 뒤흔든 미녀의 매력이 뭔지 금새 알 수 있게 해 준다. 매혹적인 눈과 오똑한 콧날, 앵두같은 입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공적 평판에 집착했던 독불장군인 영국 허레이쇼 넬슨 제독(1758~1805)도 해밀턴에게 빠져 세기의 불륜을 저지른다.
넬슨이 존경하는 영국 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었는데도 지독한 사랑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의 금지된 열애는 비비언 리와 로런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영화 '해밀턴 여인(1941)'을 비롯해 수많은 책과 영화 소재가 됐다.
지금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에 넬슨과 에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소장한 명작 78점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전시다.
허레이쇼 넬슨 제독.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윌리엄 비치가 1800년 그린 넬슨 초상화는 늠름하지만 낭만적인 제독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넬슨의 고향인 노퍽의 노리치시가 의뢰한 것으로 전신 초상을 제작하기 위한 습작이다.
머리 모양을 수정한 흔적은 명확하게 남아 있지만 실명한 눈을 회색이 아닌 갈색 눈동자로 표현한 것은 그대로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독의 모습을 가장 충실히 담은 초상화로 평가받는다.
넬슨은 영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전쟁 영웅 중 한 명으로 그를 기리는 기념탑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있다.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업적을 달성하는 데 열을 올렸다.
1793년 프랑스와 전쟁이 발발하자 코르시카 전투에서 승전했지만 한쪽 눈을 실명하고 1797년 전투에서는 오른쪽 팔을 잃었다.
이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넬슨은 뛰어난 전술로 성 빈센트 곶 전투(1797)와 나일 해전(1798)에서 영국 함대를 승리로 이끌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머무르던 나폴리에서 해밀턴 경의 부인 에마와 만나게 되고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불륜으로 이어졌다.
넬슨은 이후 트라팔가 해전(1805)에서 나폴레옹 함대를 격파하지만 치명상을 입고 전사한다.
그의 연인 에마는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나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
1791년 나폴리 공국에 영국 외교관으로 파견돼 있던 윌리엄 해밀턴 경과 결혼한 그녀는 2년 후 넬슨 제독을 만난다.
그녀와 넬슨 모두 가난하게 태어나 재능 만으로 출세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등함을 느꼈다.
그녀는 고대 신화를 구연하며 주름진 천이나 조명 만을 이용해 고전적 자세를 취하는 방식으로 문학 작품 속의 분위기나 특정 순간을 표현해내는 '태도(Attitudes)'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연 예술을 발전시키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나폴리 여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몰타 십자장을 수여받는다.
하지만 넬슨과 남편 해밀턴 경이 사망한 후 파산했으며 빚을 갚지 못해 1813년 투옥된다.
2년 후 프랑스 칼레에서 궁핍하게 살다 죽음을 맞이한다.
영국 정부가 그녀에게 유산을 남긴 넬슨의 유언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지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허레이쇼 넬슨 (1758~1805)
영국 최고의 영웅, 에마의 연인, 윌리엄 비치가 1800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아름다운 5060카페에서
영웅, 넬슨 제독에 대하여
포츠머스 해군기지의 빅토리호
당시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 전투중 총맞고 쓰러진 곳 등 표시
그 자체로 살아있는 박물관 역할
- 나폴레옹으로부터 조국 구해
이탈리아에서 허 찔렸지만 인도 가는 길목 나일강서 대승
트라팔가르 해전서 쐐기 박아
1805년 10월 21일 오전, 스페인 남부의 트라팔가르 해협.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가 충돌하기 직전 갑판으로 나온 넬슨은 신호장교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했다.
"영국은 모든 대원이 각자의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믿는다."
넬슨의 그 유명한 명령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31척의 영국 전함과 33척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대격돌!
넬슨은 언제나처럼 전열의 맨 앞에 섰다. 전투는 처음부터 격렬했다.
영국이 승기를 잡았지만 연합 함대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양쪽 다 이 전투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1시 15분쯤, 기함(旗艦) 빅토리(Victory)호에서 진두지휘하던 넬슨이 총에 맞았다.
왼쪽 폐와 척추가 부서지는 치명상이었다.
넬슨은 스스로 마지막임을 깨달았다.
아직 전투는 한창이었다.
넬슨은 자신이 쓰러진 사실을 숨긴 채 부하들을 독려했다.
'승리'가 아닌 '완벽한 승리'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조국의 운명을 위해서. 넬슨의 최후는 전투가 끝나기 직전 찾아왔다.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 전투는 완벽한 넬슨의 승리로 끝났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 대신, 조국을 지켜냈고 대영제국의 기반을 남겼다.
빅토리호로 가는 길
그날 넬슨이 탔던 기함 빅토리호는 영국 남부 햄프셔주의 군항(軍港) 포츠머스에 있다.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110㎞ 떨어져 있는 포츠머스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군항이었고 지금도 해군의 도시다.
현대적인 밝은 분위기가 감돌지만 해군기지 쪽은 다르다.
붉은 벽돌 건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해군기지와 왕립해군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포츠머스 왕립 해군 박물관에 전시된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호의 당당한 위용.
운명의 날이었던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넬슨 제독은 이 배 위에서 나폴레옹의 야망을 침몰시키고 장렬하게 전사했다./위키백과
신분증 검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면 바다를 호령했던 위대한 전함들이 야외에 전시돼 있다.
헨리 8세가 자랑했던 메리로즈호(號)와 영국 최초의 철갑전함인 워리어호가 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이 가장 몰리는 곳은 트라팔가르 해전 때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빅토리호다. 거대한 삼단의 목재 범선인 빅토리호의 위용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당시 모습으로 완벽하게 보존된 전함은 하나의 완벽한 박물관이다.
배 안으로 들어가 정해진 루트를 따라 갑판까지 나오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위대한 뱃사람들의 일상과 전투가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영국인들이 어떻게 바다를 제패해왔는지, 어떻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는지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곳은 넬슨이 총탄을 맞고 쓰러진 상갑판의 한 지점과 넬슨이 최후를 맞은 아래갑판의 한 지점이다.
두 지점에는 표시가 돼 있다.
그 앞에 서면 말을 잃게 된다.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다.
위대함이란 무엇인가?
영웅이란 어떤 존재일까?
참 리더란 무엇을 이룬 사람일까?
프랑스 혁명으로 뒤바뀐 넬슨의 운명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1758 ~1805)은 노퍽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해군 장교였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13세 때 처음 배를 탔다.
사관후보생도 시절부터 선원으로서의 항해 기술 습득에 놀라운 열정과 재능을 보였던 넬슨은 착실하게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혁명(1789년)은 프랑스와 유럽, 세계의 운명을, 그리고 넬슨의 인생까지 바꾸었다.
프랑스 혁명 후 전 유럽이 전쟁터가 된 탓이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는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미 오랫동안 법치를 토대로 대의제와 입헌군주제를 발전시켜온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00년 넘게 식민제국 건설 경쟁을 벌여온 라이벌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더 강력한 나라로 부상할지도 몰랐다.
섬나라 영국의 기본적인 국가 전략은 바다에서는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는 한편 대륙이 강력한 한 나라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도록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對)프랑스 전쟁에 참여했지만 전황은 영국에 불리했다.
혁명을 통해 프랑스는 강력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용병이 아닌 국민병으로 구성된 군대, 무능한 귀족이 아닌 유능한 평민 장교가 이끄는 군대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존의 대륙 왕정국가들에게 프랑스는 버거운 상대였다.
넬슨과 나폴레옹의 건곤일척 승부
탁월한 공적을 상징하는 훈장으로 가득한 넬슨 제독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바다 상황은 달랐다.
영국의 강력한 해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넬슨처럼 10대 초반부터 배에서 평생을 살아온 바닷사람들이 지키는 바다는 프랑스 해군이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넬슨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를 프랑스군대의 마수로부터 지켜내는 것이었다. 넬슨은 프랑스군의 보급로가 될 제노바 앞바다를 봉쇄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프랑스 군대의 총사령관 나폴레옹이 영국 해군이 지키는 바다를 버리고 알프스를 넘은 것이다. 발상의 전환으로 영국의 해군력을 무력화시킨 나폴레옹의 군대는 북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다. 넬슨과 나폴레옹의 운명적인 첫 대결은 이렇게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다.
나폴레옹과의 간접 대결에서 패배한 넬슨은 원인을 분석했다.
나폴레옹의 대군(大軍)이 이동하려면 엄청난 보급이 필수였고, 그 규모의 보급을 이동시키려면 해상 경로가 필수였다.
그런데 허를 찔렸다.
알프스를 건너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프랑스 군대가 병참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굶주려도 추워도 그들은 진격했다.
군대의 성격이 바뀌어 가능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국왕을 위해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傭兵)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의 성격도 변했다. 나폴레옹은 구체제의 장군처럼 형식적인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는 상대를 완전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적의 의지를 꺾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넬슨은 영국의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지 대신 바다에서, 해군의 힘을 바탕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고 판단했다.
넬슨도 나폴레옹과 같이 적을 섬멸함으로써 상대의 의지를 꺾고자 했다.
육지의 천재와 바다의 천재, 두 사람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이 시작됐다.
나일에서의 전투, 세상을 바꾸다
빅토리호 갑판 위에는 넬슨 제독이 총탄을 맞고 쓰러진 자리가 표시돼 있다. /송동훈
두 사람의 다음 대결 장소는 이집트의 나일강 하구였다. 이탈리아 원정으로 프랑스의 영웅이 된 나폴레옹의 다음 목표는 이집트였다.
천재와 범인(凡人)의 차이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다.
천재 나폴레옹은 이 전쟁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임을 알았다.
눈앞에 수십만 대군을 자랑하는 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은 허상일 뿐이고, 프랑스의 진짜 적은 강력한 해군과 광대한 식민지, 막대한 교역을 바탕으로 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영국이었던 것이다.
그 영국의 아킬레스건은 인도 식민지였다.
이집트는 인도로 가는 길목인 동시에 인도 교역의 목줄인 수에즈 해협의 입구였다.
알렉산더 대왕을 동경했던 29세의 청년 나폴레옹은 5만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넬슨은 나폴레옹의 목표가 인도의 길목인 이집트라고 확신했다.
그 역시 대국적인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천재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을 추격한 넬슨의 함대는 나일강 하구에서 정박해 있는 프랑스 함대를 발견했다.
1798년 8월 1일 오후였다.
어둡기 전 전투가 가능한 시간은 2시간에 불과했다.
넬슨은 속전속결을 선택했다.
전투가 시작됐고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향해 밤새 포격을 퍼부었다. 다음 날 새벽, 프랑스 함대는 사라졌다.
나폴레옹의 인도 정복의 꿈도, 대영제국의 근간을 흔들겠다는 야망도 물거품이 됐다.
트라팔가르 해전 이전에 넬슨은 이미 나폴레옹의 꿈을 산산이 조각냈다.
20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빅토리호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역사도 잊지 않고 있다.
어떻게 혁명의 열정에 불탄 무적(無敵) 프랑스 군대와 천재 나폴레옹은 영국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을까?
넬슨이 자신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뱃사람들이 긴 전쟁 기간 동안 넬슨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 결국 위대함은 한때의 열정과 천재 한두 명의 소산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이 맡은 바 의무를 다했을 때 달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지금 이 배가 증거다.
[전쟁 영웅이 정박한 곳은 유부녀]
에마 해밀턴. /위키피디아 나폴리 英 대사 부인과 외도
딸 낳고 결혼까지했지만 영국은 영웅 위해 외면
유부남이던 넬슨은 에마 해밀턴(1765~1815)을 뜨겁게 사랑했다.
그런데 에마는 나폴리 왕국 주(駐)영국 대사인 해밀턴 경의 아내였다.
에마와 남편(해밀턴 경)과의 나이 차는 36세나 됐다.
나폴리 궁정에서 에마를 처음 만난 넬슨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1801년).
에마와 결혼하려고 이혼까지 했다.
재치와 용기를 두루 갖췄던 에마가 잦은 전투로 심신이 지친 넬슨에게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사랑과 위안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에마의 남편인 해밀턴 경은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했고, 1803년 죽을 때까지 넬슨과의 우정을 유지했다.
넬슨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에마와 딸을 지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영국 사회는 전쟁 영웅을 위해 에마의 그림자를 지웠다.
넬슨의 작위와 재산은 그의 평범한 친척들에게 돌아갔고, 에마는 결국 가난 속에 죽었다.
넬슨의 유일한 혈육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namu.wiki
넬슨
Horatio Nelson, Viscount Nelson
출생일1758년 9월 29일, 잉글랜드 노퍽 버넘소프
사망일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
나일강 전투와 트라팔가르 전투 등 주요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트라팔가르 전투 때 적의 포화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
넬슨의 장례식은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치러졌으며, 그의 명성은 수많은 기념비·거리·호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1770년 해군에 입대하고 1777년 대위 시험에 합격해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했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된 며칠 후 아가멤논호의 지휘를 맡았으며, 이때부터 넬슨은 차츰 천재적인 지휘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코르시카 기지에서 오른쪽 눈을 실명했으며, 테네리페를 공격하다 포도탄에 맞아 오른쪽 팔마저 잃었다.
1801년 코펜하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파커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805년 프랑스와 재개된 전쟁에서 빌뇌브 함대가 카디스로 도망가자 넬슨은 트라팔가르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내세워 적을 공격했다.
빅토리호 주위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중에 넬슨은 프랑스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Horatio Nelson - Hero of the Nile is the biography of Horatio Nelson, a British admiral famous for his participation in the Napoleonic Wars, most notably in the Battle of Trafalgar, a decisive British victory in the war, during which he lost his life. Nelson went against the conventional tactics of the time by cutting through the enemy's lines.
Nelson was noted for his ability to inspire and bring out the best in his men, to the point that it gained a name: "The Nelson Touch." His actions during these wars meant that before and after his death he was revered like few military figures have been throughout British history.
Nelson's final words were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which he repeated several times until he became unable to speak. Horatio Nelson - Hero of the Nile is highly recommended for those interested in the history and story of this brave admiral.[Horatio Nelson - Hero of the Nile (Biography)
개요
나일강 전투(1798)와 트라팔가르 전투(1805) 등 주요전역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트라팔가르 전투 때 영국 군함 '빅토리호'에서 적의 포화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
해밀턴 부인인 에마와의 오랜 연애사건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호레이쇼 넬슨은 교구목사였던 에드먼드 넬슨과 그의 아내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11명 가운데 여섯째 아이였다. 그의 집안은 품위와 학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가난했다.
이 가문에서 넬슨이 그의 입신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할 만한 주요 인맥은 먼 친척이자 18세기초 총리를 지낸 로버트 월폴 경의 후손인 월폴 경이었다.
그러나 넬슨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나중에 영국 해군 회계검사관을 지낸 외삼촌 모리스 서클링 대령이었다.
넬슨의 어머니가 죽자 서클링 대령은 어린 넬슨을 바다로 데려가기로 작정했다.
해군에 입대하고 처음 몇 해 동안 그는 템스 강 어귀에서 지낸 평범한 해군생활부터 상선(商船)을 타고 서인도제도를 항해한 일, 1773년 실패로 끝난 위험했던 북극탐사 등 아찔한 모험을 고루 겪었다.
그는 첫번째 전투를 인도양에서 치렀는데 얼마 후 말라리아 인 듯한 열병에 걸려 고향에 돌아와 병약자가 되었으며, 그결과로 인한 우울증에서 회복되는 동안 그는 낙천주의적 생각이 파도처럼 마음 속에서 우러나옴을 경험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교도의 깊은 사랑으로 강화된 애국심이 솟아나 그의 포부와 대망이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적어도 자기가 명망있는 친척 월폴 경과 동등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1777년 대위 시험에 합격해 식민지 미국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서인도제도로 항해했다(미국독립전쟁). 1779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함장으로 승진하고 프리깃 함의 지휘를 맡아 니카라과에 있는 스페인 정착민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 정착민들은 스페인이 프랑스와 더불어 미국 독립군과 연합한 뒤부터 영국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산후안 공격은 군사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은 황열병으로 영국군이 거의 전멸한 큰 재난이었다. 넬슨은 운좋게 살아남았다.
미국독립전쟁이 끝난 후 1783년 넬슨은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왔다.
1784년 런던에 돌아와 곧 서인도제도로 가는 프리깃함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기뻐했으나 이것은 즐거운 임무가 아니었다.
이미 공식적으로 상실해버린 영국의 특권을 누리며 아직도 교역을 하고 있던 미국의 선박에 대해 넬슨은 항해조례를 엄하게 시행했으므로, 그는 상인과 선박소유주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항해조례를 적용하지 않았던 그곳 주재 영국 당국과도 적이 되었다.
이런 어려움과 지휘자로서 겪는 고독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고 가장 유혹받기 쉬운 상태에서 넬슨은 1785년 3월 네비스 섬에 들렀다.
이곳에서 5세 된 아들 조시아를 둔 미망인 프랜시스 니즈벳을 만나 정식으로 결혼신청을 했으며, 마침내 1787년 3월 네비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를 데리고 버넘소프로 돌아왔으나 다른 자리에 임명받지 못했고, 봉급은 반으로 줄었다.
그는 5년 동안 실직상태로 있었으며 "그 이유는 추측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으나 분명히 해군본부가 나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항해조례를 준수하도록 강조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93년 1월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처형된 며칠 후 그는 64문의 포를 갖춘 '아가멤논호'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지중해 복무
넬슨(Horatio Nelson)
지휘관이었을때 넬슨의 모습
이때부터 넬슨은 열성적인 직업군인에서 차츰 천재적인 지휘관으로 변해갔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정신적으로 가장 평온한 시기였다.
집에서는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고 아들을 데리고 항해하기도 했다.
배는 빠르고 기동력이 있었으며, 선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어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의 임무는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고, 지중해에 있는 영국의 동맹국들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전쟁). 혁명군(그 가운데는 24세의 포병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있었음)에 대항해 홀로 툴롱 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다가 증원군을 모으기 위해 나폴리로 파견되었다.
뒷날 그는 자기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것은 대부분 유능하고 식견이 높은 영국 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경 덕분이었다고 고마워했는데 해밀턴 경은 30년 동안 나폴리에 살았으며 쾌활하고, 젊은 그의 아내 에마는 왕비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툴롱이 함락되자, 넬슨의 사령관 후드 경은 코르시카로 기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넬슨과 부하들은 육지로 올라가 바스티아와 칼비를 함락시키는 일을 도왔다.
이때 프랑스군이 쏜 포탄의 파편으로 오른쪽 눈을 다쳐 거의 실명상태가 되었다.
1794년말 후드 경의 후임으로 따분한 성격의 윌리엄 하섬 제독이 부임했으나 곧 존 저비스 경으로 바뀌었고, 넬슨은 이 사람이 더 마음에 들었다.
60세이던 저비스 제독은 많은 경험을 쌓은 군인으로 넬슨의 자질을 알아보고는 그를 '부하장교라기보다는 동료'로 여겼다.
저비스가 부임할 때쯤 육지에서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영국군은 하는 수 없이 지중해 기지를 버리고 지브롤터와 타호 강으로 후퇴했다.
상비센테 곶 전투와 나일 강 전투
나일 강 전투(Battle of the Nile)
넬슨은 대서양 상비센테 곶 앞바다에서 저비스와 합류하러 항진 하던 중, 자신이 안개 속에서 27척의 스페인 함대 사이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페인군은 2개 사단으로 나뉘어 항해하고 있었으며, 저비스는 이 둘 사이를 뚫고 들어가 한쪽이 구하러 오기 전에 먼저 다른 한쪽을 쳐부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고, 스페인 소함대가 다가오기 전에 작전에 들어갈 만큼 빨리 배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저비스의 명령도 받지 않고, 넬슨은 전열에서 벗어나 2번째 스페인 사단 앞머리를 공격했다.
저비스의 나머지 함대가 천천히 돌아 지원하러오는 동안, 넬슨은 2개의 스페인 소함대를 떼어놓았다. 영국군 포격의 위력은 결정적이었으며, 그는 적함 갑판에 올라가 그 배를 나포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갑판에서 또다른 배로 옮겨 타 2번째 군함도 나포했다.
상비센테 곶 전투의 승리로 저비스에게는 세인트빈센트 백작위가 주어졌으며, 넬슨은 기사작위를 받은 데 이어 연공(年功)에 따른 승진으로 소장에 진급했다.
그러나 그가 주요독립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첫번째 벌인 전투는 참패였다.
그는 테네리페를 공격하다 포도탄(匍萄彈)에 맞아 오른쪽 팔꿈치가 부서져 기함(旗艦)으로 돌아와 팔을 잘라내야 했다.
1798년 봄에는 세인트빈센트 백작과 재결합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이 좋아졌다.
백작은 그에게 원정군을 태우기 위해 대기중인 프랑스 함대를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기함 '뱅가드호'를 타고 항구 앞바다를 순항하던 중, 강한 북서풍을 만나 그의 소함대는 정박지에서 떨어져나가게 되었고, 프랑스군은 목적지인 이집트 쪽으로 쉽게 항해하게 되었다.
넬슨은 프랑스군이 시칠리아나 이집트로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추격을 시작했다.
갈팡질팡 추격 끝에, 영국군은 나일 강 어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프랑스군 소함대를 따라잡게 되었다. 뒤이어 밤새 전투가 벌어지고 새벽녘에 프랑스군 소함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 승리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으며 이마를 약간 다친 넬슨은 서둘러 이 소식을 런던과 지중해 전역에 알렸다.
함정을 수리하기에 가장 편리한 항구 나폴리에서 그는 해밀턴 부인이 극적으로 연출한 황홀한 영웅의 환대를 받았다(나폴리 왕국).
5년 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던 해밀턴 부인은 반쯤 정신을 잃고 그의 팔에 안기어 "오! 하느님,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라고 외쳤다.
영국 해군의 나폴리 장기체류는 이탈리아의 주요지배자인 페르디난도 왕의 허약한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페르디난도는,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을 쫓아낸 뒤 남쪽으로 진군해오던 프랑스군에 저항하고 있었다.
넬슨은 나폴리에서 40번째 생일을 맞았다.
에마 헤밀턴의 주선으로 1,800여 명의 손님이 모여들어 그를 주둔군 명사(名士)로 만들었고, 그도 이런 역할을 즐거워했다.
바다에서 보낸 피곤한 나날과 부인에게서 온 소박한 편지를 읽는 것과는 놀라울 정도로 대조를 이루는 일이었다. 노퍽에 해군소장 호레이쇼 경과 넬슨 부인이 있었다면, 나폴리에는 마르스(Mars:고대 로마의 軍神)와 비너스가 있었다.
넬슨과 에마 해밀턴의 연애사건은 위기의 순간에 펼쳐졌다.
넬슨에게 힘입은 페르디난도 왕은 영광의 환상에 빠져 공공연히 프랑스에 대항해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되찾기 위해 보잘것없는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
물론 이것은 처참한 패배로 끝났으며 프랑스군은 반격하여 그를 나폴리로 몰아냈고 곧 나폴리를 함락했다. 넬슨은 나폴리 왕족을 시칠리아로 대피시켜야 했으며, 팔레르모에 왔을 때는 그가 에마 해밀턴에게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뚜렷이 알려졌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임을 표명했고 그가 계속 치료받고 회복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를 나폴리 사교계에 소개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게 했고, 승리의 대가로 자작위가 아닌 남작위를 받게 되었을 때 그의 분노를 달래주기도 했다.
나폴리 봉쇄와 코펜하겐 전투
코펜하겐 전투(The Battle of Copenhagen)
1799년 여름 그의 함대는 페르디난도를 도와 나폴리를 되찾게 했다.
그러나 염문이 해군본부에 전해지자 그의 상관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프랑스로 갔으며, 세인트빈센트 백작 대신 총사령관이 된 키스 경이 프랑스군의 다음 목적지는 메노르카라고 판단했을 때도 프랑스는 계속 몰타를 장악하고 있었다.
넬슨은 동원가능한 모든 함선을 거느리고 메노르카 섬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나폴리가 위협받게 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과는 그의 말이 옳았음을 보여주었으나 그 넉살좋은 불복종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페르디난도 왕이 내린 시칠리아의 브론테 공작위를 받아들인 넬슨에 화가 난 해군본부는 그에게 귀국하라는 냉엄한 명령을 내렸다.
1800년 그는 해밀턴 가족과 함께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돌아왔다. 이 묘한 여행자 일행이 영국에 상륙했을 때, 넬슨이 나라의 영웅이라는 것과 그의 런던 행차는 개선행진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내와 차갑게 재결합하여 약 한 달 동안 같이 살다가 풍자만화가들이 숨김없이 표현한 것처럼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정한 아내에게로 돌아갔다. 영국 대중에게는 우상이 되었으나 런던 사교계에선 웃음거리와 추문의 대상이 되었으며 왕도 여러 사람 앞에서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에마는 넬슨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는 죄책감과 기쁨이 뒤섞인 가운데 발틱 해로 원정을 떠나는 나이 지긋한 해군제독 하이드 파커 경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출항하기 얼마 전에 넬슨은 에마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아버지임을 숨기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난 기쁨에 못지않게 그는 에마가 영국 왕세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며 미칠 듯한 질투에 사로잡혔다.
파커의 함대는 1801년초 첫번째 목적지인 코펜하겐을 향해 나아갔다.
처음에 파커는 넬슨의 의견을 묻지 않았으나 덴마크가 저항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자 그를 불렀다.
"이제 확실히 싸울 때가 되었고, 나는 사령관에게 불려갔다"라고 넬슨은 기록했다. 넬슨은 험한 해협을 흘수(吃水)가 얕은 배로 통과한다는 전략을 씀으로써 코펜하겐으로 가는 북부 진입로를 뒤덮고 있던 해안 포대(砲臺)를 피해갔다.
다음날인 4월 2일 아침 함대를 이끌고 교전에 돌입했다.
뛰어난 전술도 소용없는, 오직 더 우세한 포격만이 승패를 판가름할 상황이었다.
덴마크군의 용감한 저항으로, 파커는 넬슨이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전투손실을 우려하여 전투중지신호를 올렸다.
넬슨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싸워 한 시간 후에 승리를 차지했다.
다른 적군에게 비슷한 공격을 가해 이 성공에 잇따른 또 하나의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으나 러시아의 황제 파벨이 죽자 위협은 사라졌다.
넬슨은 파커의 뒤를 이어 드디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인기를 잘 알고 있던 해군본부는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그에게 국내 지휘권을 주었다.
프랑스가 침략해오지 못하도록 곧바로 불로뉴 해군기지를 공격한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운 그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 전투는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다시 공격하려던 계획은 프랑스와의 평화협상 때문에 포기했으며, 1802년 3월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었다.
마침내 그는 승리의 결과를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넬슨의 지시에 따라 에마는 런던 근처에 머턴 저택이라는 우아한 시골별장을 사서 그들의 호사를 위해 호화찬란하게 개조했다.
마침내 그녀의 남편이 분개했으나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해밀턴 경은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는 듯했으며 1803년초 아내와 그녀의 연인 넬슨 곁에서 눈을 감았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쟁재개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전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803년 5월, 지중해 지휘권을 인수한 넬슨은 빅토리호에 기(旗)를 올렸다.
다시 한번 그는 툴롱을 봉쇄해야 했다.
이번에는 툴롱의 프랑스 선박이 대서양 브레스트 항에 있던 프랑스 선박과 연합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고 스페인이 영국에 전쟁을 선포한 후에는 카르타헤나와 카디스에서 온 스페인 선박과 만나는 것도 막아야 했다. 만약 이 함대들이 합쳤다면 보나파르트는 영국을 침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전년(前年)에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1805년초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함대집결 명령을 내렸다.
3월에, 전체 지휘를 맡기로 했던 피에르 빌뇌브 제독이 악천후를 틈타 툴롱을 빠져나가자 넬슨은 추적하기 시작했다.
빌뇌브의 함대는 공세를 중지했으나, 영국 소함대의 습격으로 진로를 차단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해협통제권 장악에 실패한 빌뇌브는 카디스를 향해 남쪽으로 피했다.
지브롤터에 배치된 넬슨은 카디스 봉쇄 준비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25일 동안 고국에 있으면서 그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프랑스-스페인 함대와의 정면대결을 계획했다. 카디스에서는 영국의 커스버트 콜링우드 제독이 이끄는 소수의 함대가 그보다 많은 34척의 프랑스 함대를 봉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포기했지만 대군(Grande Armée)을 재배치하기 시작했고, 영국에서는 여전히 침공위협을 느꼈으므로 넬슨이 영국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출두명령이 떨어지자, 넬슨은 에마와 딸 호레이샤에게 슬픈 작별인사를 고하고 9월 15일 빅토리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장교들과 수병들의 숭배를 받고 있던 그는 함장들이 그의 전술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의논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47번째 생일을 맞은 그는 기함에서 15명의 함장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다음, 함대를 둘로 나누어 프랑스-스페인 함대로 진격해 전열을 깨고 분쇄한다는 전술의 윤곽을 설명했다.
이것은 전열을 지어 싸우는 엄연한 전통적 전술을 벗어난 마지막 작전계획이었다.
빌뇌브는 봉쇄선을 돌파하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고 10월 20일 카디스 앞바다로 출항했다.
다음날 새벽녘, 트라팔가르 곶 근해의 해돋이를 배경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군은 작전대로 각각 넬슨과 콜링우드의 지휘를 받는 두 개의 함대로 나뉘었다.
전투개시 전에 넬슨은 에마 해밀턴과 호레이샤를 국가에 맡긴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적 함대가 접근해오자 그는 "영국은 제군들이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길 기대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전투는 빅토리호 주위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넬슨은 '르두타블호'의 돛대에서 총을 쏘던 프랑스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가슴과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배 하부에 있는 군의관에게로 옮겨졌으나,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에마와 호레이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도 전투상황보고를 귀담아들은 그는 15척의 적선을 나포했다는 말을 듣고 "잘했다.
그러나 나는 20척으로 기대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함 함장 토머스 하디가 그의 이마에 작별 키스를 하자, 넬슨은 마지막으로 "이제 저는 만족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저는 제 임무를 다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트라팔가르의 승리로 영국은 공격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이 승리는 넬슨의 사망소식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슬픔에 잠긴 영국은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장엄한 장례식을 치렀으며, 그의 명성은 수많은 기념비·거리·호텔 이름으로 기록되고 그의 그림·판화·흉상·액자가 만들어졌으며 마침내 빅토리호가 포츠머스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에마 해밀턴과 그의 딸은 세상에서 잊혀져, 에마는 9년 후 칼레에서 가난한 생활 속에서 죽었으며, 아버지의 쾌활한 성격을 닮은 호레이샤는 노퍽에서 성직자와 결혼하여 든든한 대가족의 어머니가 되었다.
넬슨은 마침내 창의성이 결여된 전세기(前世紀)의 전략 및 전술의 원리를 깨고 각급 장교들에게 독창적으로 사고하도록 가르쳤다.
또한 그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관행으로서 부하들을 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상비센테 곶 전투
1797년 넬슨은 대서양 상비센테 곶 앞바다에서 저비스 제독과 합류하기 위해 항진 하던 중, 자신의 함대가 안개 속에서 27척의 스페인 함대 사이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페인군은 2개 사단으로 나뉘어 항해하고 있었으며, 저비스는 이 둘 사이를 뚫고 들어가 한쪽이 구하러 오기 전에 먼저 다른 한쪽을 쳐부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고, 스페인 소함대가 다가오기 전에 작전에 들어갈 만큼 빨리 배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저비스의 명령도 받지 않고, 넬슨은 전열에서 벗어나 2번째 스페인 사단 앞머리를 공격했다.
저비스의 나머지 함대가 천천히 돌아 지원하러오는 동안, 넬슨은 2개의 스페인 소함대를 떼어놓았다.
영국군 포격의 위력은 결정적이었으며, 그는 적함 갑판에 올라가 그 배를 나포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갑판에서 또다른 배로 옮겨 타 2번째 군함도 나포했다.
상비센테 곶 전투의 승리로 저비스에게는 세인트빈센트 백작위가 주어졌으며, 넬슨은 기사작위를 받은 데 이어 연공에 따른 승진으로 소장에 진급했다.
코펜하겐 전투
하이드 파커 제독의 지휘 아래 넬슨이 이끄는 함대가 코펜하겐 항구에 돌입하여 정박중인 덴마크-노르웨이 함대를 공격했다.
처음에 파커는 넬슨의 의견을 묻지 않았으나 덴마크가 저항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자 그를 불렀다. "이제 확실히 싸울 때가 되었고, 나는 사령관에게 불려갔다"라고 넬슨은 기록했다.
넬슨은 험한 해협을 흘수가 얕은 배로 통과한다는 전략으로 코펜하겐으로 가는 북부 진입로를 뒤덮고 있던 해안 포대를 피해갔다.
다음날인 4월 2일 아침 함대를 이끌고 교전에 돌입했다.
뛰어난 전술도 소용없는, 오직 더 우세한 포격만이 승패를 판가름할 상황이었다.
덴마크군의 용감한 저항으로, 파커는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전투손실을 우려하여 전투중지신호를 올렸다. 넬슨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싸워 한 시간 후에 승리를 차지했다.
덴마크는 해전의 패배로 해상 제국으로서의 위치는 몰락했다.
cafe.daum.net/challea5913/8cGE/328 독좌인왕
Lady Hamilton as Circe 1782카페에서
'언론과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것이 알고싶다 손정민 사망 당일의 타임라인 (0) | 2021.05.30 |
---|---|
되찾은 미사일 주권… 韓 자주국방·우주산업 새 이정표 (0) | 2021.05.30 |
그날 손정민과 A씨 '밤 10시48분'에 만났다, 그리고... (0) | 2021.05.29 |
경찰 "故손정민 사망 사건, 아직 범죄 관련성 없어 수사상황 공개 (0) | 2021.05.27 |
오늘부터(5월27일) 사실상 일반인 접종… ‘11월 집단면역’ 도전 본궤도 (0) | 2021.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