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LASSIC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61

 

 

 

 

 

제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d장조 4분의4박자 소나타형식

 

 

 

 

제2악장 라르게토(Larghetto) G장조

 4분의4박자 변주곡형식


 
제3악장 론도 알레그로 D장조

 8분의6박자 론도형식


 

 

 

 

Violin Concerto  D Major OP. 61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 major op.61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

 

- Kyung Wha Chung (Violin)

- Kirill Kondrashin

- Wiener Philharmoniker

 

 

 

 

 

 

 

 

 
베토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 이 곡은 교향곡풍의 장대한 풍모를 지닌 작품으로 1806년, 그가 36세때

 

작곡했는데 이 작품 완성 16년전인
1790년에 C장조로 작곡하기 시도했으나 제1악장의 전개부를 쓰다 중단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명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크레멘토를 위해서 썼다고 전해 지는데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최대한 살리면서

 


오케스트라와 잘 조화시켜 작곡한 곡으로 그의 위대한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평소 그의 작품 한 구석에 숙명처럼 머물고 있던 비극적인 그림자를 볼 수 없는데 이 곡의 작곡을 전후로

 


테레제와의 약혼으로 생애중 가장 행복한 시기(1806년, 36세)를 맞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레제는 세이여를 비롯한 여러 연구가가 베토벤의 붙멸의 연인이라고 부른 여성으로

 


그가 고향 본에서 빈으로 이사 간지 얼마 안된 1790년대 중엽부터 그가 피아노를 가르치던 여성이었으며

 


로맹 롤랑은 그의 베토벤의 생애에서 이 불별의 연인 테레제와 1806년 5월에 약혼하고

 


그 기쁨을 가눌 길 없어 마침 쓰고있던 교향곡 제5번을 중단 한 채 제4번을 단숨에 작곡했고 이어 같은 해에

 


바이올린 협주곡도 완성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정경화 鄭京和 1948∼ 바이올리니스트

 

서울 출생. 1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음악학교에서 I. 갈라미안에게 배웠다. 1967년 레벤트리트

 기념 콩쿠르에서 동문인 P. 주커만과 함께 1위를 하고 68년 뉴욕, 70년 런던에서 데뷔에 성공을 거두어 이후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에 대한 진지한 열정으로 긴장감이 감도는 연주를 하여 세계 각지의 청중을 매료하고 있다. 첼리스트인 언니

 명화와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동생 명훈과 함께 피아노 3중주단(정트리오)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바이올린은 바

이올린, 활은 그저 활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녀를 만나는 순간 마술이 되었다.

"자, 나는 이 부분을 이가 시리도록 춥게 연주할 거예요. 여러분은 그보다 좀더 넉넉하게, 보듬듯이 따라오면 돼요"

 

정경화 뉴욕에서 공부한지 6년째(19세)인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쿨에서 공동 우승한 이래, ‘조국 근대화’의 길에

내몰려 팍팍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그는 빛이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은 아직 도저히 안 된다며 출전을 고사했던 터라 당시 기억은 새로울 수 밖에 없다.

 

결정적 계기는 콩쿨 우승 덕에 따낸 1970년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의 유럽 데뷔 무대였다. 대가 이츠하크

펄먼이 개인적 사정으로 협연을 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막 이름을 얻기 시작한 그에게 대신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공연 예술 특유의 관행 덕택에 그는 동양의 낯선 소녀에서 일약 스타가 됐다. 이후 세계의 대도시를 찾아 다니며

 경력과 명성을 쌓아갔다.

 

일본 등에서 연주 요청이 쇄도했고 세계적 음반사인 데카에서 녹음 제의가 들어왔다. 런던 데뷔 무대에서 협연했던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다시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발표한 음반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적

 메이저 음반사와 손잡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그는 거침 없는 몸놀림과 강렬한 해석으로 전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깊이 각인돼 왔다.

 

 

 

 

 

 

 

마력의 활놀림은 곧 바로 음반사의 주목을 받게 돼 일련의 대편성 협주곡 음반들이 줄을 이었다. 1973년의 월튼과

 스트라빈스키 협주곡 음반은 에디슨상을 따냈다.

1974년에는 전설의 거장 게오르크 솔티가 지휘하는 런던 필과 녹음한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은 그를 일약

 대가의 반열에 끌어 올렸다.

 

본인이 원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당시 서구 사회에서 막 태동하던 여성해방운동과도 잘 부합됐다. 동양에서 온

작은 소녀가 내뿜는 강렬한 개성은 단번에 서양인들을 사로잡았다.

 왜 그랬을까?

“여자가 내는 소리란 작다는 편견이 싫어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려 무척 노력했다”고 그는 답한다.

약소국으로부터 온 작은 소녀의 음악이라는 고정 관념은 엄청난 심적 부담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특유의

완벽주의까지 중첩, 덕분에 그가 만든 음반은 별 다섯개가 모자랐다.

 

인기 소품인 엘가의 ‘사랑의 인사’ 같은 경우 그 곡의 연주에 필요한 기교를 터득하는 데는 5분이면 충분했으나

 녹음에는 2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2,30대 그의 완벽주의는 거의 강박적이었다. 음악의 해석을 두고 자기 주장을 전면에 내세워 주도권을 가지려

했기 때문에 지휘자들과 치러야 했던 마찰은 유명하다.

 

특히 하이팅크처럼 카리스마를 갖고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지휘자들조차 동양의 마녀에게 길을 터주어야 했다.

 “내 입맛에 안 맞으면 조금도 안 했죠.” 까다롭기 짝이 없는 연주자라며 내로라 하는 매니지먼트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변덕스런 공연계의 생태를 몸으로 익힌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 매니지먼트사 ICM의 데이비드 포스터

 사장과 일체의 공연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온화함은 가정이 가져다준 선물 가정을 갖기 전까지 그의 연주는 털끝만큼의 빈틈도 용납 않았다. 

 


 

 

 

 

 

 

 

 

 

 


 
요즘 트위터 페이스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