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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대선 패배 1년 … 진보의 자성론

최장집 "보수의 대선 승리는  실용적 보수로 진화한 결과"

주대환 "진보세력, 산업화 vs 민주화 1980년대 틀에 갇혀"

 

 

지난해 18대 대통령 선거는 진보 진영에서 해볼 만한 게임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변화를 요구하는 각종 여론조사 수치가 전례 없이 높게 나왔다.

양극화와 복지 문제,

 경제민주화 같은 진보적 의제가 주요 이슈로 부각됐다. 그런데 진보가 패했다. 그만큼 아쉬움이 크다.

여파가 길다.

긴 후유증이랄 수도 있다.
현재 국회에서 진행 중인 여야 공방전을 보자. 선거가 끝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마치 18대 대선이 지금도 계속되는 듯하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다.

 이게 다는 아니다. 또 다른 모습도 있다. 17대, 18대 두 차례 대선에서 잇따라 진보가 패배한 이유에 대한 자성의 움직임이다. 특히 2012년 대선의 객관적인 조건이 진보 진영에 나쁘지 않았음에도 왜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복기해보는 움직임이 눈길을 끈다. 주관적 태도와 능력의 약점을 점검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난해 대선 직후부터 계속되어온 흐름이기도 하다. 최근 보름 새 잇따라 나온 3종의 신간 서적이 눈길을 끈다. 우선 이번 주에 출간된 『18 그리고 19』(도서출판 밈)라는 책을 주목해볼 만하다. 18은 지난해 18대 대선을, 19는 앞으로 다가올 19대 대선을 가리킨다. 18대 대선을 반성하고 19대 대선을 준비하자는 의미를 제목에 담고 있다. 진보성향의 학자와 시민사회 인사 21명이 함께 저자로 참여했다. ‘진보개혁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18대 대선 평가보고서’라는 설명을 달아 놓았지만 일종의 ‘공동 참회록’으로 읽힌다.

 이 가운데 18대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 캠프에 참여했던 최해선 정치발전소 사무국장과 후마니타스 출판사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의 공동 기고문은 그동안 진보 진영 내에서 잘 들어볼 수 없었던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두 사람은 먼저 “민주화로 인해 정치의 공간이 열렸고 진보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치의 세계에서 진보가 보여준 성취는 너무 빈약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이 말하는 진보세력은 민주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을 망라한다.

 이들의 지적은 ‘운동권은 현실 정치의 세계에서 유능한 정치인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운동권이라고도 불리는 우리 사회의 진보세력은 1980년대 권위주의 체제를 마감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들이 현실 정치권에 들어와선 제대로 역할을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진보정당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시민들을 직접 인터뷰하면서 유권자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진보 정당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진보의 밖에서 문제를 찾아보려는 색다른 시도다.

 이들이 만난 유권자들은 ‘진보’라는 표현의 뜻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고, 어느 정당이 보수이고 진보인지 되묻기도 했다고 한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뭐가 다른지 모르겠고, 민주당과 그 밖의 정당들도 큰 차이가 없다” “진보라고 하면 시위나 집회 같은 것을 하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진보는 자신만이 옳고 보수는 몹쓸 집단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가 많은 것 같다” “보수는 스스로 보수라고 내세우지 않는 데 반해 진보 쪽 사람들은 진보적임을 앞세우는 일을 즐기는 것 같다”는 등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일반 시민 인터뷰에서 많이 접하는 반응은 “(진보 진영은) 비판은 잘 하지만 집권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진보정당과 진보 진영 지지자들의 경직성과 폐쇄성을 지적하는 의견도 많았다. 특히 ‘불안한 안보관’을 언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종북 논란’에 대해 두 공동 필자는 “진보 진영이 ‘말할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명확한 해명을 회피하거나 유보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유권자)의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이들은 “종북 논란에 대한 명확한 입장 정리와 이미지 쇄신을 위한 적극적 시도가 보수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런 프레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패러다임 전환의 모티브라도 던질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책을 기획한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이창곤 소장과 한귀영 연구위원은 “(대선) 결과에 불복하거나 결과를 되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찰은 미래를 여는 가장 큰 힘이다. 이 과정이 없으면 5년 후도 기약할 수 없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18대 대선에서만 패한 것이 아니라 대선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도가 계속 올라가는 현상은 진보의 현주소를 점검할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했다고 한다. 목표는 진보개혁의 새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난해 대선이 끝난 후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48% 가운데 정신적 충격과 혼돈을 경험한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중도층의 변화는 18대 대선을 복기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동아시아연구원 정한울 사무국장(정치학 박사)이 볼 때 중도층의 선택이 지난 대선의 승패를 갈랐다. 그는 “기존의 보수-진보 진영논리로는 포섭하기 어려워진 중도층의 변화가 시작됐는데 문재인 후보는 중도층에서 전혀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안희정 "이승만·박정희 공적 인정해야”

 

정 사무국장은 구중도층과 신중도층을 구분했다. 과거의 구중도층은 보수-진보 양 진영의 대결 과정에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대상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신중도층은 때로는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고, 때로는 보수적 선호를 보이면서 이슈별로 상반된 태도를 나타낸다. 중도층의 상당수가 이명박정부 심판에 동의하면서도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서로 상반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신중도층의 특징이다. 정 사무국장은 “신중도층은 노무현정부와 이명박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진보 대 보수, 민주 대 반민주라는 양자택일 구도에 제약받지 않고 유연하고 균형 잡힌 태도로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대표적 진보 정치학자로 꼽히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보수의 진화’를 지적했다. 지난 대선에서 보수가 이긴 것은 “과거 진보-민주 세력들이 ‘수구’라고 말하는 보수, 즉 ‘신념의 보수’로서보다는 ‘실용적 보수’로 진화한 결과”라는 시각이다. 반면 진보 세력은 그동안 누렸던 도덕적 신뢰를 잃어버렸고, 현실적인 변화에 대응하는 유능함도 보여주지 못하면서 이념적으로만 주장하는 모습을 통해 급기야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최 교수는 “지난 대선의 결과는 누가 더 진보적이고, 누가 더 도덕적이냐 하는 것을 두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민생 문제의 중심인 사회경제적 문제를 개선하는 데 어느 당이 더 능력이 있나, 그 문제에 대해 어느 당을 더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평가가 중심에 놓였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진보와 진보정당은 더욱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현실적인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며 “권위주의를 타도하는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 이후 평상시의 민주주의제도를 운영하는 논리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이를 습득하는 수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는 최전선에 역사 갈등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을 보는 시각에서 긍정과 부정이 평행선을 달린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보는 시각이 크게 엇갈린다. 그런 점에서 지난주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출간한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위즈덤하우스)를 눈여겨볼 만하다. 80년대 초 대학을 다닐 때 ‘반미(反美)청년회’라는 지하 학생운동 조직을 이끌던 그가 23년간의 정치인생을 풀어놓고 있는데, 한국 현대사의 리더들에 대한 그의 ‘달라진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를 모두 인정하며 “더 이상 과거를 놓고 싸우지 말자”고 제안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의회를 통해 대한민국을 출발시켰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이승만정부의 역할은 컸다. …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잘살아보세’ 운동을 한 것이다. 독재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역량을 결집하는 데 일차적으로 성공했다. … 전두환 정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지만 중요한 역사적 전환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아주 간략한 긍정이다. 이 몇 줄의 긍정을 제대로 하느냐 않느냐를 놓고 벌어지는 게 우리 사회의 역사 갈등이다. 안 도지사는 ‘노무현의 동업자’로 불렸다. 친노 중에서도 친노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 짧은 몇 줄은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된다.

 안 도지사는 ‘분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도 분노가 있다. 정의가 패배했던 역사에 대한 분노가 있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칼끝을 겨눴던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을 내려놓으려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꿈꾸는 ‘더 좋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분노를 내려놓아야 대한민국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난주에는 김영환 민주당 국회의원의 『잔도를 불태워라』(두리미디어)도 출간됐다. 책 제목의 ‘잔도’는 『초한지』에서 유방이 항우를 피해 서촉 땅으로 들어가며 천길 벼랑의 퇴로를 끊은 고사에서 유래한다. 김 의원은 “우리 당이 총선·대선에 연거푸 패배한 것에 대한 반성”이라며 “지난 대선 패배는 인재(人災)였다. 우리는 새누리당에 대선 승리의 꽃다발을 갖다 바쳤다. 우리는 중도를 잃었고, 중원을 빼앗겼다. 질 수밖에 없는 선거에 진 것이 아니라 이길 수밖에 없는 선거에 늘 졌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이어 “FTA 문제라든지 강정마을 문제라든지 또는 종북 문제가 있을 때 민주당이 확실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결국은 통합진보당과 광범위한 연대를 했을 뿐만 아니라 통합을 주장했기 때문에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민주당을 집권당으로 인정하고 국군통수권을 맡길 수 있는 정당이냐, 여기에서 회의가 왔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올해 3월 23일 중앙일보 새터데이 인터뷰에서 나온 우상호 민주당 국회의원의 발언도 기억할 만하다. 당시 우 의원은 선거 패배를 반성하는 의미로 당내 486(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모임인 ‘진보행동’의 해체를 선언했다.

 대선 패배의 구체적 원인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실력 경쟁을 했어야 했다. 대선 패배 후 우리 당 일각에선 진보를 과도하게 내세워 졌다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진보적 담론을 차용하지 않았나. 국민은 경제민주화나 보편적 복지에 대해 상당 부분 동의했다. 무상급식이 대표적이다. 진보적 담론은 시대정신이다. 그러나 뼈아픈 건 누가 이를 제일 잘할지 여론조사로 물으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나왔다는 것이다. 486 정치인들은 문제 제기는 잘할지 몰라도 문제 해결까지 잘할진 의문이라는 국민의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했다.” 우 의원은 이런 말도 했다. “지금 당이 대선 평가 작업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 자기 계파에 불리한 내용이 담기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인물 경쟁력, 정책 차별화 다 밀렸다”

 곧이어 4월엔 한상진 민주당 대선평가위원장이 기자회견에서 내부책임론을 거론하며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우리가 잘못해서 졌다고 하는 것에 대한 동의율이 민주당 내에서 훨씬 높다.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 가운데서 84.8%가 내부책임론에 동의하고, 11.3%만이 외부책임론 입장에 서 있다. 국민 전체에서 보면 53.8% 정도가 내부책임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한 위원장은 또 “한때는 개혁의 상징이었고, 서민복지를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정치를 수행했던 분들이 어찌 됐든 오늘의 현실에 놓고 보면 원래의 이미지를 살리지 못하고 원래의 사명감을 성취하지 못한 것으로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를 받고 이미지가 하락했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라고 토로했다. 이래저래 한국 정치는 18대 대선에 묶여 있는 형국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대선 연장전’이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향한 변화가 새롭게 시작될 것인가.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18 그리고 19』에서 민주당을 ‘애물단지’에 비유했다. 애를 태우거나 성가시게 하는 물건이나 사람을 일컫는다. 민주당을 지지했던 이 소장의 애증이 교차하는 극단적 표현이다. 민주당의 처지가 그렇다는 것이다. 정권교체 여론이 60%를 상회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총선과 대선에서 졌는데 패배 후에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이 소장은 이렇게 진단했다. “인물 경쟁력에서 밀리면 정책 차별화를 통해 승부를 거는 것이 상식이다. 민주당 후보들은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 비해 턱없이 지지율이 부족했다. 1945년 영국의 노동당이 대중성이 뛰어난 스타 없이도 전쟁 영웅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에 맞서 복지플랜으로 승리했듯이 민주당도 지속적으로 정책 대결로 몰아갔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정치·도덕적 이슈에 올인했다. 결국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민주당의 무능이다.”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보수와 진보 진영의 대립구도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 있는 구도를 바꾸지 못해서 선거에 졌다는 진단이다. 전통적 구도를 뛰어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쪽은 산업화를 대표하고 한쪽은 민주화를 대변한다고 돼 있다. 이렇게 되면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니까 정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민주화 세력에 정권을 간단히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산업화 세력이 여당이 되고 민주화 세력이 야당이 되는 게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더 절실한 것이다. 그 구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주 대표가 볼 때 산업화 대 민주화의 구도는 80년대에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난해 선거에서 야권은 산업화-민주화의 대립 구도를 탈피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을 친일·친미 쪽으로 몰고 가서 그들의 약점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그 구도에서 우리는 안 벗어나겠다는 순응이나 마찬가지다. 일반 국민들 눈으로 보면 여전히 그런 구도에 머물고 싶어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벗어날 의지가 없구나, 안주하려 하는구나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주 대표는 “80년대의 구도를 벗어나자는 것이 안철수 의원 등에게서 보이는 제3의 움직임”이라며 “야권 내부의 다양한 재편 운동이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문재인 캠프에서 정책 실무를 총괄했던 김수현 세종대 교수는 “집권층의 실책에 따른 반사이익이나 이미지 좋은 누군가를 끌고 나와서 요행수를 찾는 방식은 안 된다. 풀뿌리의 정서와 요구를 읽어야 하며, 집권을 목표로 한 기층 정당조직이 살아나야 하고, 현재 국민적 요구와 불만을 해결하는 대안조직으로서의 정당 혁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자료 : 중앙일보(배영대·이상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