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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樹下閑話_ FTA, 농사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환상

 

 

樹下閑話 

FTA, 농사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환상

_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수하한화(樹下閑話)’는 ‘나무 아래서 나누는 한담’이라는 뜻입니다.

*김종철 선생(64)은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80년대 말부터 생태주의와 환경운동에 초점을 둔 <녹색평론>을 주관해 오고 있습니다.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벼들이 익어가는 논 가운데로 5대의 APC 전차대가 마구잡이로 진격하고 있었다. 베기를 기다리는 익은 벼들은 종횡으로 질주해 들어오는 무한궤도 전차에 유린되고 짓이겨졌다. 앞의 전차가 지나간 자리를 다음 전차가 통과하는 식의 배려도 없었다. 묘판도, 모심기가 막 끝난 논도 무시되었다. 스포츠카라도 된 듯이 전차들은 제멋대로 논에 새로운 길들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아메리카 병사들의 심중에는 아시아 농경민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인자가 결여돼 있었다.” 이것은 1967년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베트남전쟁 르포기사 중의 한 대목이다. 당시 큰 주목을 받은 이 르포의 필자는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라는 젊은 기자였다. 그는 이후 일본의 양심적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대기자로 성장, 지금도 현역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기어이 성사시키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생각난 게 이 르포기사였다. 예전에 읽다가 노트에 적어둔 기억이 있어서 한참 뒤적여 찾아 읽어보니 새삼 충격적이다. 전쟁 중의 베트남 농촌에 관한 이 강렬한 묘사는 그대로 오늘의 한국 농촌 상황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미군 전차대’는 물론 농산물 개방을 강요하는 ‘자유무역’ 논리다. 그러나 한·미 FTA가 아니더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농촌은 절망 속에서 신음해왔다. 이제 한·미 FTA가 통과·발효되면, 한국의 농업, 농민, 농촌을 결정적으로 끝장낼 쓰나미가 밀어닥칠 것이다.


따져보면, ‘아시아 농경민족’에 대한 몰이해는 ‘아메리카 병사들’만의 것이 아니다. 언제나 경제논리를 내세워 농촌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자본가, 정부 책임자, 관료, 어용언론, 어용학자, 그리고 선거 때마다 ‘가난한 농민의 자식’임을 참칭해온 이른바 선량(選良)들도 거의 대부분 ‘아메리카 병사들’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다.


지금 국회에서는 주로 ‘투자자-국가소송제(ISD)’라는 조항을 두고, 이것을 한·미 FTA에서 삭제하도록 재협상을 해야 된다, 안 된다 하는 입씨름이 계속되고 있다. 조금이라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국가의 주권행사를 근본적으로 제약할 게 분명한 이 독소조항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ISD 조항이 아니더라도, 한·미 FTA 자체가 이미 나라의 주권 포기를 전제로 한 조약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한·미 FTA가 한국의 농업과 농민을 희생시키기로 작정을 하고 맺어진 통상조약인 이상, 농업을 방기한 국가가 진정한 주권국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미 FTA의 내용을 보면, 국내 농업의 중요성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협상 개시 때부터 이미 정부는 사실상 이 나라에서 농업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쌀만은 지킨다고 공언했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말이었다. 2004년의 세계무역기구(WTO) 다자간 교섭에서 10년간의 최소수입의무(MA) 기간 경과 후에 관세화로 간다는 게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쌀 문제는 한·미 양자 교섭에서 별반 정책적 의미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사를 대하는 근본 자세에서는 현 정부나 지난 정부나 별로 다른 게 없다. 한·미 FTA의 후속협상 과정에서 ‘참여정부’의 원래 의도가 어느 정도 왜곡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조약에 참여정부의 기본적 농업관이 반영되어 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가 한·미 FTA를 지난 정부의 작품이라고 선전하는 것도 야비하지만, 이에 대해 참여정부 관계자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들도 노무현 정부가 국내 농업을 무시 혹은 적어도 경시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한명숙 전 총리가 솔직한 발언을 한 바가 있다. 그는 연전의 어떤 시민모임에서 ‘노무현 정권 동안 우리나라 농민이 500만 명에서 350만 명으로 줄어든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당장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현재의 구도 속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을 가질 여유가 국정 속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경향신문 2009년 11월 9일자 보도).


‘국정’ 속에 농업의 자리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은, 결국 농업이 국가 전체의 경제효율성과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그릇된 신념의 소유자들이 계속해서 이 나라를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값싼 식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서민층의 여유 없는 생활형편도 해외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고, 국내 농산물을 등한시하는 구조가 지속되는 것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당장의 경제논리로만 본다면, 이런 셈법이 틀린 것은 아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농사는 통상적인 산업의 일부가 아니고, 단순한 화폐 증식 수단일 수도 없다. 농사는 인간공동체가 성립·존속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공통자본’이며, 특히 독립 자영농민은 장기적 지속이 가능한 유일한 생활방식, 즉 지역순환경제 시스템의 근본 토대이다. 단지 식량안보 문제 때문에 농사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구 전역에 걸친 급속한 사막화, 농지의 쇠퇴와 축소, 기후변화로 인해 세계의 식량생산 능력이 갈수록 감퇴되고 있는 지금 식량안보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식량자급률은 100%가 넘지만, 한국은 겨우 25%이다. 이것은 심히 두려운 사태이다. 이미 ‘피크오일’이 지났다는 유력한 설도 나오고 있지만, 모든 징후로 보아서 값싼 석유시대는 이제 끝났거나 조만간 끝날 것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수십년간 값싼 석유에 의존해 경제성장을 하면서 공산품 수출, 농산물 수입이라는 구조를 유지·확대해온 한국 경제와 사회는 어떻게 될까. 대량 기아 사태라는 파국에 직면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국가는 국제적 압력에 노출되어 주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다.” 이것은 세계 각국에 끊임없이 ‘자유무역’을 강요함으로써 자립적 농사기반을 박탈해온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어느 해 시정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경향신문 201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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