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페라, Musical

아리아 Chorus of Royal Opera House. Sop. A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 역을 맡은 마리아 칼라스


(1958년)





1964.01.24



천 가지 음색의 연기로 극복한 쇳소리의 약점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그리스가 전쟁에 말려들게 된 1940년 11월에 칼라스는 처음으로 그리스 아테네 국립오페라 무대에 데뷔한다. 이때부터 이미 완벽주의자였던 칼라스는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연애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먹는 일에만 매달렸다.


전쟁 중에 노래로 적군에게 식량을 얻은 일들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칼라스는 아테네 오페라극장에 재계약을 할 수 없었고, 일자리가 없어 고민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뉴욕에서 배역을 얻어 보려던 노력은 계속 실패로 끝났다. 그러다 친지를 통해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나비부인 역을 마침내 얻었을 때 칼라스는 눈물을 머금고 거절했다.

80Kg이 넘는 몸으로 열다섯 살 게이샤를 연기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임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었고, 이런 결정은 현명했다.드디어 1947년에 기회가 왔다. 이탈리아 베로나 페스티벌에서 조콘다 역을 부르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에 온 칼라스에게 행운의 첫걸음은 사업가 메네기니(Battista Meneghini)와의 만남이었다.

 “만난 지 5분 만에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칼라스는 회고했다. 오십대 초반의 메네기니는 세련된 교양과 탁월한 예술적 감각을 지녀 칼라스의 든든한 조언자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스물여섯 살에 메네기니와 결혼하면서 본격적인 칼라스의 시대가 열렸다.



(왼쪽) 칼라스와 남편 메네기니(1957년), (오른쪽) 칼라스와 툴리오 세라핀



두 번째 행운은 명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과의 만남이었다. 세라핀은 칼라스에게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계약서를 가져다주었고, 세라핀과 더불어 칼라스는 한 시즌에 바그너 <발퀴레>의 브룬힐데 역과 벨리니 <청교도>의 엘비라 역을 동시에 불러 이탈리아 오페라 계를 들끓게 했다.

어떤 소프라노도 이처럼 성격이 다른 배역을 며칠 사이에 완벽하게 바꿔 가며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 칼라스는 병이 난 레나타 테발디의 대타로 드디어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입성해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아이다 역이었다.

칼라스의 세 번째 행운은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와의 만남이었다. 그를 통해 좌파 예술가 및 지식인 그룹과 교류하며 칼라스는 정치, 예술, 혁명, 그리고 새로운 윤리에 눈뜨게 된다. 이즈음 칼라스는 로시니의 가벼운 색채에 매료되어 그의 오페라에 출연하기 시작했으며, 모차르트를 베르디 아리아를 부르는 듯한 가슴속 중후한 소리로 불러 화제를 모았다.

칼라스가 라 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 등 전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에서 여신처럼 군림하게 된 뒤에 비평가들은 칼라스의 목소리를 두고 “낯선 은하계에서 길을 잃은 별 같다”고 말했다.

 천부적으로 맑고 고운 목소리를 타고난 소프라노가 아니면서도 감정을 담은 목소리의 풍요로운 연기력으로 듣는 이들의 가슴속을 파고들며, 당대의 어떤 가수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개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칼라스는 “천 가지 음색으로 연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오페라 가수였다.





(왼쪽) 밀라노에서 환영받는 칼라스(1958년). (오른쪽) 나비부인의 ‘초초’상 역을 맡은 칼라스

서른 살 무렵 2년 사이에 체중을 30kg이나 감량, 오드리 헵번 스타일을 소화하면서 외모까지 완벽한 여신으로 새롭게 태어난 칼라스는 그리스 선박 왕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와의 열애와 파경 등 삶의 광휘와 굴곡으로 끊임없이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다.

 1958년에 칼라스의 파리 입성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파리 시민들은 그로부터 20년 만인 1977년,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약물중독과 우울증으로 53세에 쓸쓸히 세상을 떠난 세기의 프리마 돈나를 꽃으로 뒤덮어 떠나보냈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러나 자살이 아니냐는 의혹도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다. 한줌 재로 변한 칼라스는 그리도 좋아하던 고향 바다 에게 해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남아 지금도 온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특별한 감동으로 적신다.



The Very Best of María Callas

Tullio Serafin, conductor

Teatro alla Scala Chorus and Orchestra





      아그네스 발차 Agnes Baltsa (1944 - )

      그리스의 메조 소프라노로 1968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에서 케루비노로 데뷔했다.
      빈 국립오페라에는 이듬해 옥타비안으로 데뷔했으며 그 뒤로 국제무대에서 눈부신
      활동을 시작해 강렬한 연기와 개성있는 노래로 주목받았다.

       


      1970년부터 카라얀과 함께 찰스부르크 페스티벌에 자주나와 주로 옥타비안, 에볼리
      헤로디아스를 불렀다.

       

      카르멘, 벨리니의 카퓰렛과 몬테규 사람들의 로미오,

      체네렌톨라, 알제리의 이탈리아인의 이사벨라, 데릴라 등으로 코벤트 가든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오르페우스, 암네리스, 베를리오즈의 디도가 뛰어나다.

       

      낭랑하고 톡 쏘는 소리를 가졌으며 연주는 언제 들어도 생생하고 직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