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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ax Bruch / Kol Nidrei O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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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rWNo8f0fEH0

 

http://www.youtube.com/watch?v=Y4d74lbAYQg

 

http://www.youtube.com/watch?v=cKp_mVii-dk

 

  브루흐 (Bruch, Max) [1838.1.6~1920.10.2] 

 

  독일의 작곡가·지휘자. 쾰른 출생.

본에서 이론을 배운 후 1852년부터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힐러와 라이네케에게 작곡을 사사하였다.

1865년 코블렌츠의 연주협회 지휘자, 1867년 존더스하우젠의 궁정악단 지휘자, 1880년부터는 영국의

 리버풀교향악단 지휘자, 1883∼1890년에는 브레슬라우 연주협회장을 지냈다.

 

1891∼1910년에는 베를린 예술아카데미의 교수 겸 작곡부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작풍은 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아

로맨틱한 아름다운 음향에 특징이 있다.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도 알려졌으나 오늘날에는 1868년 라인음악제에서 요아힘의 초연으로 대성공을 거둔

 바이올린협주곡 제l번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창작의 주된 영역은 합창음악이었으나, 3곡의 바이올린협주곡과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콜니드라이》가 가장 자주 연주되며, 그 밖에도 많은 성악곡과 오페라가 있다.

 

  저명한 음악교사이자 소프라노 가수였던 어머니에게 음악교육을 받고 일찍부터 작곡에 재능을 보여

 11세부터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852년 작곡한 현악 4중주곡으로 프랑크푸르트 모차르트 장학금을 받았다.

 쾰른에서 작곡과 이론을 F.힐러에게서, 피아노를 라이네케에게서 사사받았다.

 

  1858년 고향에서 자작 오페라 《해학, 책략과 복수》가 상연되었으며, 1867~70년 존더스하우젠의 궁정악장을

 역임하고, 그후 10년간은 베를린과 본에서 작곡활동을 하였다. 1883~90년 브레슬라우 시립관현악단 지휘자를 역임하고, 1891~10년 베를린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등을 지냈다.

 

  그의 음악은 낭만적, 서사적, 민족적인 경향이 강하다. 당시의 신독일파 들릐 진보적인 경향과는 대조적이었다.

생전의 브루흐는 주로 합창, 음악영역에서 높게 평가되었으나 오늘날에는 3곡의 바이올린협주곡,

특히《바이올린협주곡 제1번 G단조》, 헤브라이 선율에 의한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콜 니드라이》등이 유명하다.

 

  대표작품으로 칸타타·오라토리오·오페라 등이 있으나 나치에 의해 금지되어 잊혀져 버렸고,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 G단조》을 비롯한 바이올린협주곡 3곡과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콜 니드라이》만이

 알려져 있다.

  [최영옥의 백 투 더 클래식]

 

  막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깊은 참회를 아우르는 정결한 위로

 

  기사입력 2014.02.17 09:05:49

 

 

    막스 브루흐(좌)와 ‘콜 니드라이’가 수록된 앨범(우)                   

 

  지난해 이탈리아 사람들과 독일 사람들은 매우 분주하면서도 뿌듯했을 것이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베르디와 바그너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전 세계가 두 사람을 기리느라 떠들썩했으니 말이다.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유대인들은 어땠을까?

 

바벨론에서 고통 받던 히브리인들의 마음을 대변했던 ‘나부코’의 베르디는 유대인에게 당연히 기념할 만한 인물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베르디는 반유대주의자였다. 히틀러와 나치 유대 탄압에 불을 지피는 격이었던 바그너에 대해서도

 ‘글쎄’였을 것이다.

 

 

 

 

 

  이런 역사의 여파는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조국에서 외면과 탄압을 받는 음악가들로 이어진다.

 유대인이지만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으나 유대인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로 음악사 속에서

말살될 뻔했던 멘델스존이 그렇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억울한 이가 막스 브루흐(Max Bruch)다. 그는 나치 정권에 의해 10여년간 독일에서

 공식적으로 음악 연주가 금지된 작곡가였다.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 음악과 관련된 곡을 작곡했다는 이유에서다.

그 음악이 바로 ‘콜 니드라이(Kol Nidrei)’다.

 

  콜 니드라이는 아랍어로 ‘모든 서약들’이라는 뜻이다.

 유대교회에서 예배 의식은 오로지 낭송(chant)으로만 이뤄진다.

 대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일 년에 딱 한 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이 예배의식에서 부르던, 오래되고 특별한 성가가 ‘콜 니드라이’다.

 브루흐는 이 곡을 ‘관현악과 하프가 함께 하는 첼로를 위한 아다지오’라는 일종의 환상곡 형식으로 재창조했다.

이 곡은 명상적인 첼로의 선율이 감동적인 1부, 낮은 베이스가 인상적인 2부로 나눠진다.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브루흐는 쾰른대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저명한 루터교 성직자의 손자였던 그의 음악은 깊은 신앙심이 밑받침된 경건하고 사색적인 것이 특징이다.

 평소 여러 나라 민속음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차에 유대교 예배 성가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이 ‘콜 니드라이’로

이어졌다.

 

  이 곡은 곧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며 큰 사랑을 받았고 첼리스트라면 반드시 도전하고 싶은 명곡의 반열에 오른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브루흐를 유대인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멘델스존을 따른다는 이유로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 음악을 옹호하는 듯이 보이던 이 작곡가가 유대인 종교 음악까지

작곡하니, 독일 입장에서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터. 결국 그는 조국으로부터 의심받으며 배척받는 최초의

독일인 음악가가 됐다.

 

  장중한 첼로의 선율이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콜 니드라이를 들으면서, 유대교 성가, 종교곡, 이런 지엽적인 것들이

 감상을 가로막은 경우가 오늘날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깊이 마음을 흔들며 다가오는 첼로와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뾰족하게 날 선 긴장을 한순간에 허물어버림으로써

무장해제되는 경험이 되지는 않을는지.

 

  비단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절실히 위안이 필요할 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백을 털어놓고 싶을 때,

절대자에게 기대고 싶은 순간에, 콜 니드라이는 그대로가 깊은 위안이다.

 굳이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이 음악이 종교와 상관없이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고.

 

  [최영옥 음악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44호(02.12~02.18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