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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Four of the world yasya Heifetz Violin Concerto/ Tchaikovsky: Violin Concerto (Heifetz)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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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fCuMFGVwhc&feature=player_detailpage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http://www.youtube.com/watch?v=N0tqdhbnpn8&feature=player_detailpage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http://www.youtube.com/watch?v=BqoMiDjgpBg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http://www.youtube.com/watch?v=nWjilAe6Leo&feature=player_detailpage&list=PLBD576D4DB34094CA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http://www.youtube.com/watch?v=6q-Zqz7mNjQ&feature=player_detailpage

(Bach, Chaconne From Partita No.2 In D Minor, BWV 1004)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가 이루어낸 카리스마적인 업적은 그가 태어난 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모든 방향에 있어서 극대화한 연주가였다. 19세기가 파가니니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하이페츠의 시대였다고 말한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 기계적일 정도로 정확한 템포 조절, 한 음 한 음에 부여하는 긴장감,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통해 하이페츠는 바이올린 연주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더 나아가 그는 방대한 레파토리와 엄청난 레코딩, 독주와 협주, 실내악, 교육을 오가는 왕성한 음악 활동을 통해

20세기 바이올린계의 존경받는 거장으로서 권위와 명성을 얻었다.

 

 

 

 

 

 

  황홀한 음색, 냉정한 톤의 완벽주의자

 

  하이페츠가 활동하던 당시 전세계에는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페츠의 등장으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대부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하이페츠의 그림자 안으로 밀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하이페츠를 길러낸 명교사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들 경우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당시 아우어의 제자들 가운데 ‘바이올린의 악마’로 일컬어졌던 토샤 자이델은

 미국에서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렸고 ‘바이올린의 귀공자’로서 우아함을 뽐냈던

 예프렘 짐발리스트는 연주 활동보다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교육자로 남아있기를 원했으며,

 미론 폴리아킨은 소련에 머무르며 짧은 생을 뒤로 한 채 그 큰 날개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바이올린의 귀부인’으로 평가받던 이졸데 멩게스는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고,

‘황금의 보잉’으로 유명했던 캐슬린 팔로우 또한 캐나다에서 조용히 후학을 양성했다. 하이페츠 등장 이전까지

 ‘황금 톤’으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미샤 엘만은 그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그나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나탄 밀스타인과 레오폴드 아우어의 마지막 제자인

 오스카 슘스키 정도가 하이페츠가 전성기를 마칠 무렵인 1950년대 말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20세기의 명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의 모습 <제공: 소니뮤직>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유럽 대륙은 미국보다 그나마 하이페츠의 공습을 덜 받은 편이었지만 상황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이름을 날리던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츠 폰 벡세이가 급서한 이후 19세기를 호령했던 요제프 요하임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 음악원의 예뇌 후바이, ‘파가니니의 재래’로 칭송받았던 체코의 얀 쿠벨릭이 길러낸 제자들은

잊혀지다시피 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로 유명한 칼 플레쉬의 제자들은 대부분 요절했다.

 

그나마 프랑코-벨기에 악파는 자크 티보와 같은 소수의 바이올리니스트 외에는 대부분 교육과 실내악에 전념하고 있었고, 아르투르 그뤼미오나 크리스티안 페라스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이페츠 이후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음악적 자부심과 전통이 강력했던 프랑스나 독일, 동유럽 등지에서조차 하이페츠의 영향력을 대신할 만한 독보적인

 바이올리니스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 하이페츠에 대항할 수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는 죠르쥬 에네스쿠와 아돌프 부쉬의 계승자로

일컬어지는 신동 출신의 예후디 메뉴힌,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던 요제프 시게티 정도였다.

 

 

 

 

 

 

  “이제 우리의 바이올린을 부수어 버려야겠군.”

 

  이러한 그에게도 우상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리츠 크라이슬러다. 크라이슬러는 1912년 5월 베를린에서

10세의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는 사석에서 그를 위해 자신의 작품

[아름다운 로즈마린]의 피아노 반주를 맡아 연주하기도 했다.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로, 크라이슬러는 하이페츠의 연주회 때 옆에 있던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이제 우리의 바이올린을 무릎으로 부수어 버려야겠군”이라고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당시 베를린에서 진행한 그의 첫 녹음을 들어보면 크라이슬러의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이페츠를 향한 크라이슬러의 사랑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이페츠의 크라이슬러에 대한 존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연주회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53년 3월 카네기 홀에서

 하이페츠는 크라이슬러의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초]를 연주한 뒤 앞줄에 앉아있던 그를 향해 경의를 표한 뒤

우레와 같은 박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 일화는 미국 공연계의 전설적인 장면으로 화자 되고 있다. 다른 일화도 있다. 1940년대 한 연주회장에서

 미국 바이올리니스트인 앨버트 스팔딩이 활에 비누를 쏟아 연주를 못하고 있는 동안 하이페츠가 커튼 뒤에서

크라이슬러의 작품을 연주했다.

 

 이를 들은 크라이슬러는 “내 옛날 레코드로 듣는 연주가 훨씬 좋군 그래!”라고 말하며 감쪽같이 속았고,

 이에 하이페츠는 크라이슬러의 음색을 완벽하게 모방한 것을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하이페츠의 트레이드 마크는 꼿꼿이 세운 활과 바이올린,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무뚝뚝한 연주 모습이다.

이러한 레오폴드 아우어식의 러시아 연주 스타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차가운 듯한 냉정한 음색은 바흐나

모차르트와 같은 몇몇 작품들의 연주에서는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다.

 

D와 A현에서 거트현을 사용하며 집중력 높은 톤과 정교한 왼손 비브라토를 사용하며

 놀라운 뉘앙스를 만들어낸 하이페츠는, 당대 많은 사람들이 증언한 바 있듯이 단순히 차가운 음색만을 냈던

테크니션이 아니라, 오크향 가득한 황금빛 사운드를 발산했던 진정한 음악가였다.

 

다만 그가 주로 녹음했던 RCA의 음향이 근접 마이크를 사용한 탓에 소리가 과하게 녹음되었을 뿐이지,

그가 다른 유럽 레이블에서 녹음한 음반들이나 1920~30년대 녹음들을 들어보면 보다 풍성하고 짙은 음색을

 구사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이페츠는 주로 RCA 레이블을 통해 수많은 명연을 남겼다. <제공: 소니뮤직>

 

  협주곡 외에 그가 녹음한 소품을 들어보면 또한 얼마나 황홀한 톤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현재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의 한 명인 이자크 펄만은 하이페츠의 빠른 비브라토와 감각적인 포르타멘토에서

기인하는 그 마법적인 음색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는 중후한 음색을 자랑하는 1742년 엑스 다비드 과르네리 델 제수를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정작 바이올린 자체보다도 그가 사용한 활이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비결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토록 여러 개의 활을 사용했다.

 

그런데 유독 스승인 아우로부터 선물받은 1860년산 ‘니콜라우스 키텔’ 활을 자주 사용했는데,

58g 정도의 중간 무게의 이 활은 그가 자유자재로 보잉과 프레이징을 만들어내기에 무척이나 편했다고 한다.

현재는 제자인 클레르 호지킨스가 소장하고 있고, 그가 사용했던 또다른 화려한 활 ‘앙리 카스톤’은 막심 벤게로프가

사용하고 있다.

 

 

 

 

  10대 시절에 스타일을 확립한 신동

 

  하이페츠는 1901년 2월 2일 제정 러시아 지배하의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라는 작은 유태인 거주지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이미 세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다섯 살에는 왕립 음악원에서

 아우어의 제자였던 일리아 다비도비치 말킨에게 사사했다.

 

1년 후에는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두각을 보였던 그는 여덟 살 무렵에 학교를 졸업했다.

당대의 교육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는 곧바로 그를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학교로 데려가 체계적인 학습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11년 오데사와 페테르스부르크, 베를린 등지에서 공개 연주회를 갖게된 하이페츠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전 유럽에서

가장 각광받은 ‘분더킨트(신동)’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미 10대 이전에 ‘하이페츠’로 완성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레오폴드 아우어의 가르침을 받았던 샤샤 라세르손은, 전성기 시절의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는 어린 시절의 연주와 똑같다며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하이페츠의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니키쉬의 도움으로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지며 너무도 일찍 개화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하이페츠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던 하이페츠는 1917년 러시아를 떠나 10월 27일 뉴욕에서 경이로운 연주회라는 찬사를 받으며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카네기 홀에서 하이페츠의 연주를 들은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피아니스트 고도프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여기, 너무 덥지 않은가?” 고도프스키는 이렇게 응수했다.

 “피아니스트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걸세.”

 

 

 

 

 

 

  레코딩과 명연, 연주 활동과 후학 양성

 

  그는 차이콥프스키, 글라주노프, 프로코피에프와 같은 러시아 바이올린 협주곡 레퍼토리는 물론 브루흐, 멘델스존,

 시벨리우스, 브람스, 베토벤, 랄로, 비에탕, 비니에프스키와 같은 대부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로부터 헌정받은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나 월튼, 코른골트,

로자 등의 현대적 협주곡도 지속적으로 연주했다. 비탈리, 바흐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바이올린 소나타를

대부분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편곡과 더불어 많은 양의 소품을 즐겨 연주했다.

 

이토록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을 구사했던 그도 파가니니의 몇 작품은 대중들 앞에서는 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1940년대에는 첼리스트 엠마뉴엘 포이어만(그의 사후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로 교체)과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100만불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앙상블리스트로도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한편,

베노 모이세비치와 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 및 윌리엄 카펠과의 [브람스 소나타 3번]과 같은 명연을 레코딩하기도 했다.

 

그리고 화려한 스타카토의 향연이 펼쳐지는 디니쿠의 호라 스타카토 또한 그의 대표적인 레파토리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냉정한 톤, 꼿꼿이 세운 활,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황홀한 음악을

만들어낸 하이페츠 <제공: 소니뮤직>

 

  1950년대부터 60년대는 그의 창조력과 지구력이 원숙함을 더하여 최고조에 도달했을 시기로서,

스테레오 녹음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새롭게 명반을 만들어내며 수많은 연주자들을 좌절케 하고 음악 애호가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기준인 양 그를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제왕처럼 군림하려고 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청중과 작품,

그리고 작곡가들에게 겸허함을 바치고자 노력했다.

 단 한 가지 그가 일체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던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음악에 있어서 완벽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 가장 혹독한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주의자로서의

 잣대를 쉼없이 들이댔던 것이다.

그는 만년에 제자인 에릭 프리드만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고 한다.

 

 “이보게, 에릭, 나 또한 음정이 틀리게 연주하곤 한다네. 왜냐하면 나도 인간이니까.”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저 무대 위에 있을 동안은 아무도 틀리게 연주한다는 것을

지적해주지 않는다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처럼 자신이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들 앞에서 만큼은

 완벽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이페츠.

그는 오른쪽 어깨를 수술한 후유증으로 이전처럼 활을 높이 들 수 없었던 탓에 1972년 무대에서 은퇴했다.

 이후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과 자신의 집에서 평생의 동료인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와 윌리엄 프림로즈와 함께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에릭 프리드만, 루돌프 코엘만, 유진 포더, 피에르 아모얄, 로버트 위트, 유키코 카메이, 폴 로젠탈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제자들은 정시에 문을 닫아버릴 정도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한 하이페츠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평생토록 자신을 채찍질해 온 위대한 연주가에게 비로소 안식을 주려는 듯한

캘리포니아의 따사로운 햇살로 인해 긴장감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는지, 1987년 12월 10일 그는 그 큰 눈을 굳게

닫아버렸다.

위대한 바이올린의 세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약력

 

  1901년: 2월 2일 러시아의 빌니우스에서 탄생

  1903년: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함

  1907년: 멘델스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짐

  1910년: 레오폴드 아우어 클래스에 입학함

  1912년: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베를린 데뷔 무대를 가짐

  1917년: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짐

  1942~44년: 미국과 이탈리아,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45회에 달하는 미국 군대 위문 공연을 가짐

  1970년: 파리에서 TV를 위한 영상물을 녹화

  1972년: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뒤 은퇴, LA에서 후학을 양성함

  1987년: 12월 10일 세상을 뜸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