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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12.12 사태

[12.12사태,군사쿠데타,전두환,군인연금]참 낯짝도 두꺼운 사람들

 

♣ 12.12 사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2.12군사반란의 주체세력인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전신은 `五星會`라고

   하는 데 이 조직은 육사 11기 생도시절인 1954년 봄경 `松竹會`(38선 이북 출신 주류 모임)에

  대응하기 위하여 결성된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영남 출신자 들의 단순 사조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관 후 5.16을 맞은 五星會는 `七星會`로 탈바꿈을 하여 하나회의 모체가 되고 말았다고 역사

  학자들은 평하고 있다. 이 七星會의 리더인 전두환 대위는 5.16당시 육사 생도들에 의한 지지데모를

  주도한 공로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격려(회식 및 `一心` 휘호등)를 받으 므로서 군내에 친위세력성

  사조직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당연히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10.26으로 그의 중심 기반이던

  박정권이 무너지고 곧 있은 11월 인사 이동때 하나회 맴버들의 제외와 합수부장의 보임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도가 지나친 월권행위로 말미암은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 육군 대장과의

 

  잦은 마찰로 육군 수뇌부와 골이 깊은 불신감이 팽배해지자 정승화 총장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 소장의 보직 변경 문제를 건의 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고 이에 하나회의 정치군인세력은

 

  입지보존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고 급기야는 보다 강한 반항심으로 심화되면서 저항심으로 작용

  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은 치밀한 계획끝에 12.12군사 반란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1.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의 강제연행 실질적 육군 정식계통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정총장의 체포를 위하여 반란군측은 사전에 이학봉 중령(육사 18기 `하나회` 합수부 수사 제1국장)이

     수일간 정총장의 동정을 살핀 후 3가지의 안(총장실에서 체포,이동중 노상에서 체포, 총장공관에서

 

     체포)을 심의 한 결과 3안을 채택하여 12.12일에 총장공관에 우경윤 대령,성환옥 대령, 허삼수 대령

     등과 함께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3헌병대 1개중대병력을 불법으로 출동시켜 총장공관의 경비

     헌병과 공관부 외곽 및 정문을 경비하는 해병경비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이 과정에서 총기를 발사

     하면서 정총장을 강제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측 보안사 합수부측 김대균,한길성 소령과 박원철 원사등 3명은 총장부관실에

     있는 이재천 총장수행부관과 김인선 총장경호장교 등에게 불법적으로 총기를 난사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아군에게 총기를 사용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2.진압군 측 주요 지휘관의 격리작전 반란군의 전두환 소장은 반란에 장애가 되는 진압군 측 지휘관

    들을 예하 부대와 격리시키기 위하여 거사 당일인 12.12 저녁 6시30분까지 수도권 주요 대전복부대

    핵심 지휘관인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육군소장과 특전사령관인 정병주 육군소장, 김진기 육본

    헌병감등을 전두환의 자택인 연희동으로 저녁식사 초대로 유인하였으나 식사도중 정총장의 납치

    사건이 전해지면서 격리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3.본문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이끄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 내부의 무력충돌.

 

     1212사태는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을 계기로 정승화 참모

    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하는 등 내부개혁이 진행

    되면서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전두환 합동수사

    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불법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합수부 소속의 허삼수·우경윤 대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5·16이후 또 한 번의 군사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

    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 국장이던 허삼수 대령은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2국장 우경윤 등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저녁 6시 50분 경 무장한 제33

    헌병대 병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하였다.

 

    이로부터 약 20분이 지난 7시 10분경

    참모총장 공관으로 들어가서 총으로 위협하는 가운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여 강제로 끌고

    나와 저녁 7시 30분경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다.

 

    연행과정에서 참모총장 부관이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하자 합수부측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발사해 양측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신군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을 연행 함으로써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다.

    같은 시간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저녁 9시30분경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백운택·박희도 등과 함께 집단적으로 대통령을 찾아가

    재차 정승화 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부분에 대해 대법원은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 신군부세력의 주장대로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승화 총장이 이미 체포되었고 또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후

    승낙'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란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하고 있다.

 

    12.12사태 다음날 아침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짤막한 배경설명을 발표했지만 그 역시 신군부에 의해 장관직

    에서 물러났다.

 

 

 

12.12 사태를 아시나요

 

 

    12.12사태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에 육군본부·국방부·중앙청·경복궁 등 핵심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하에

   두었다.

 

    한편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동참모 본부장 등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자로 정승화 추종세력인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장태완 등을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들과는 달리 12.12사태를 주도했던 신군부세력은 대부분 승승장구하여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이 임명되었고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황영시·김복동·유학성·유병현·박준병 등 신군부 세력은 군요직을 독점하다시피했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함으로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12.12사태의 진상은

    그후 십여년간 밝혀지지 못한 채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해병대 와 12.12사태 ( 한남동 공관 경비대의 임무 수행 이야기)

 

 

  ▶12.12 사태 관련자들

 

   [사령관]전두환 소장(육군 2사단장)

 

   [가담자들] 노태우 소장(제9 사단장), 황영시 중장(제3 군단장), 허화평 대령(제2 사단 부관), 허삼수

   대령(제9 사단 부관) 장세동 대령(수도방위사령부 6연대장) 우경윤 대령(수도방위사령부 1연대장)

   김진기 소장(헌병사령관) 최세창 준장(제1 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제2 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제4

   공수여단장) 유학성 중장(포병사령관) 차규헌 준장(제5 산악여단장) 박준병 소장(제20 사단장) 박윤택

   소장(제1 산악사단장) 김진영 준장(제3 산악여단장)

 

   [동원병력] 2사단 7연대(1200명) 9사단 11연대 2대대(600명) 헌병6대대(540명) 제1공수여단 25연대  

    2대대(510명) 제2 공수여단 16연대 1, 3대대(1320명) 제4 공수여단 33연대 1, 4대대(1290명)

    포병 1사단 1, 2대대(800명) 제5 산악여단 6연대 1대대(620명) 20사단 28연대(1800명) 제3 산악여단

    7연대 5대대(470명)

 

   [주요장비] M-16 자동소총 3400정, K-2 자동소총 1500정 카빈 소총 560정 M-1 소총 2500정 대한제국

    -1842 소총 500정 권총 ? M-60 경기관총 200정 M-1919 경기관총 35정 M-2 중기관총 8정 토우

    대전차 미사일 24정 무반동총 30정 3.5인치 바주카포 44정 105밀리 야포 3문 M-113 장갑차 10대 M-4

   셔먼 전차 3대 군용트럭 50대 진압군

 

   [동원병력] 3만 8000명 (수도방위사령부 병력 3만명, 예비군 병력 8000명) [주요장비] M-16 소총 2만

     3000정 M-1 소총 4000정 대한제국-1942 소총 4000정 권총 ? M-60 경기관총 1300정 M-2 중기관총

     40정 토우 대전차 미사일 58정 무반동총 85정 바주카포 60정 105밀리 야포 24문 155밀리 야포 16문

     88밀리 야포 10문 견인포 8문 8인치포 2문 M-48 전차 20대 M-4셔먼 전차 10대 M-113 장갑차 28대

     군용트럭 84대 UH-1 헬기 4기 경비행기 1기


출처: 펌글

 

 

 

{8월 첫째주} 장태완과 12.12사태, 7.28 재보선과 민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