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쉥커는 현재 존재하는 몇 안되는 영향력 있는 기타리스트로 평가된다. 하지만 국내에선
아직 잉베이 맘스틴이나 반 헤일런 만큼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마이클 쉥커의 음반이 예전에
락이 한참 유행할 당시에 거의 수입되지 않았고, 라디오에서도 거의 방송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80년대 중반 잉베이 맘스틴과 같이 활발한 활약을 하였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마이클 쉥커의 인지도가 상당히 크다. 얼마전 메가데쓰의 보컬겸 기타리스트였던 데이브 머스테인이나 역시 메가데쓰의 리드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 메탈리카의 제임스 헤트필드, 영원한 기타의 신 조 새트리아니,
나이트 레인져의 제프 와트슨, 건즈 앤 로지스의 슬래쉬와 같은 명 기타리스트들 조차도 마이클 쉥커의 기타를 최고의
연주로 꼽을 정도로 그의 기타를 다루는 실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다루기가 어렵고 소리를 제대로 내기 힘들어 대부분의 기타리스트들이 다루기 싫어하는
'Flyng-V'기타를 가지고도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훌륭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마이클 쉥커는 단순히 듣고 즐기는 락음악이라기 보다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듯한 아름답고 섬세한 연주를 무기로
매우 다양한 연주기법을 선보인다.
락을 연주하던 데뷔시절부터 크로스오버 내지는 선음악을 지향하는 그의 음악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마이클 쉥커는 195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난 그는 9살이 되던 무렵, 낮에는 형 루돌프와 부모는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언제나 혼자 집을 보고 있었다.
형 루돌프는 마이클에게 숙제를 남기고 나갔는데, 그것은 기타로 좋은 리프를 만들어 녹음해놓는 것이었다.
마이클의 기타는 형 루돌프가 치고 있던 낡은 것으로,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 준 어쿠스틱 기타였다.
그런데 루돌프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자기의 기타를 사면서 그 어쿠스틱 기타를 마이클에게 주었고,마이클은
이 기타를 가지고 열심히 연습해 10세경엔 비틀즈등을 카피할 수 있었다. 15살부터 친형인 루돌프 쉥커
(現, Scorpions 기타리스트)와 함께 기타를 잡기 시작한 쉥커는 기타를 잡은지 몇개월도 지나지 않아 모든 음악을
연주할 만큼 기타의 실력이 뛰어났다. 그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형인 루돌프 조차도 놀라 할말을 잃을
정도 였다고 한다.
그렇게 쌓아온 실력을 바탕으로 쉥커는 드디어 Scorpions라는 대그룹에 참가하게 된다. 원래 스콜피온스의
기타리스트는 마이클이 아니었지만 처음 참가한 기타리스트는 입단 후 곧 마이클 쉥커로 교체된다.
이렇게 탄생한 스콜피온스는 마이클 쉥커가 16세이던 1972년 드디어 불후의 명작 'Lonesome Crow'를 발표한다.
물론 형과 같이 기타를 맡았지만 거의 모든 곡들의 솔로와 편곡을 최연소자였던 마이클이 소화해냈던 것이다.
16세! 그것도 단순한 락음악이 아닌 프로그레시브 음악과 융합된 13분여의 대곡을 소화해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초기 스콜피언즈 시절 그는 루돌프의 깁슨 레스폴을 빌려서 치고 있었는데,
어느날 공연도중 그 기타가 부서져 버리자 급하게 형의 흰색 플라잉 V를 빌리게 된다.
마이클은 플라잉 V의 독특한 음색과 부드러운 감촉에 반해버렸고마이클과 플라잉 V의 운명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그렇게 훌륭한 음악을 16세의 소년이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세계 굴지의 락그룹들은 마이클 쉥커의 영입에 힘쓰게 된다.
마이클은 스콜피언즈의 데뷔앨범 발매 직후 영국의 UFO로 부터 기타리스트로 가입해줄 것을 요청받았고,
이에 마이클은 록의 본고장 영국에서 활동해 보고픈 마음이 있어 그 제의를 받아들인다.
UFO에서 73년부터 78년까지 6장의 음반을 발표하는 등 뛰어난 활동을 하다가 잠시 스콜피온스의 게스트로 참여하고,
80년 자신의 독자적인 밴드 MSG(Michael Schenker Group)를 결성해초위력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며 최고의
록 기타리스트중 하나로 떠올랐다.
MSG에서 80년 발표한 1집음반은 지금도 락 최고의 명반으로 꼽고 있는데, 연주곡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Into the Arena, 그 밖에 Armed and ready, Lost Horizen, 감미로운 멜로디가 매력적인 Bijou Pleasurette,
Cry for the Nation 등 어느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완벽한 음악으로 그의 MSG무대는 대성공을 이뤄낸다.
이후에도 마이클 쉥커는 발표하는 음반마다 최고의 히트를 기록하며 유럽은 물론 미국시장까지 석권하게 되는데,
지금도 아마추어 락그룹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Rock will never die'는 락음악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멤버들의 탈퇴로 인해 마이클은 큰 시련기에 접어들고 미국에서 다시 밴드를 규합하려 했지만,
돈이 없어 포기 할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Aero Smith와 White Snake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마이클은 보컬 로빈 매컬리와 함께
MSG(McAuley Schenker Group)를 낸다.
86년부터 쉥커는 보컬리스트인 로빈 멕콜리와 손을 잡고 멕콜리 쉥커그룹을 결성한다.
역시 여기서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감각적인 그만의 기타연주를 느낄 수 있는데, 'Save yourself'라는 곡은 그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명작품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쉥커는 인도로 음악여행을 하게되는데, 그곳에서 인도음악에 심취하게 된다.
마이클 쉥커의 후속으로 스콜피온스에 몸담았던 울리히 로스 역시 쉥커와 비슷한 음악에 빠지기도 했는데,
음악의 정신세계를 무척이나 중시했던 것같아 보인다.
90년대 후반으로 넘어 오면서 마이클 쉥커는 다시 MSG를 재결성을 하면서 기타리스트들이 대거 모이는 큰 공연마다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아무에게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MTV언플러그드 공연까지 성황리에 치뤄낸다.
사운드메이킹에 있어서 그는 마샬 앰프의 출력을 한껏 올리고 거기에 와와페달을 부스트시킨 파워 디스토션을 통해
박력과 긴장감, 그리고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음색을 들려주었다.
그는 게리무어등을 비롯한 몇명과 함께 록 기타를 상징하는 인물이며, 록 기타라는 측면에서 마이클은 가장 바람직한
록 프레이즈와 리프를 남긴 불세출의 명 플레이어라 평가되어진다.
전자기타의 역사는 아직 채 100년이 안된다. 이 짧은 시간동안에도 시대를 빛내는 많은 기타리스트들이 우리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들은 작고했거나 연로했기 때문에 시대는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야 할 때가 왔다.
아마도 마이클 쉥커는 이 시대를 빛낸 가장 훌륭한 기타리스트의 한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이클 쉥커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것만이 기타라는 악기의 연주가 단순한 연주가 아닌 완벽한 표현을 해내는
예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출처 : 비공개 카페 입니다
마이클 쉥커가 가장 빛나고 있던 시기가 언제인가라고 물어온다면, 그건 분명 UFO시절, 그리고 MSG의 초기였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MSG의 두 번째 앨범이 되는「MSG」가 발표될 무렵, 쉥커는 코카인과 술에 절어있었다.
그러나 워낙에 젊기도 젊었기 때문에 육체도 정신도 아직 건강하게 보였고, 플레이도 아주 날카로운 맛이 있었다.
실제로 MSG로서 최초의 전미투어를 봤었는데 귀신과 같은 플레이는 UFO의 절정기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79년 8월의 리딩 페스티발에 SCORPIONS의 응원차 방문한 마이클 쉥커는, 이 시기에 솔로 앨범의 데모를 완성시켰다. 아마 루돌프 쉥커에게는 데모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이듬해인 80년에 MSG호는 출범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게리 바든(vo)밖에 멤버는 정해져 있지 않았고, LA에서 벌어진 빌리 시언(b), 데니 카마시(ds)와의 세션도
술에 만취한 쉥커 때문에 엉망이 되는 바람에 MSG는 점점 솔로 프로젝트로서의 색이 강해지고 있었다.
첫 번째 뮤직비디오가 된 "Armed And Ready" 에 바덴과 쉥커, 두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정말 두 사람만으로
그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고, 앨범에 세션 뮤지션을 기용한 것도 그러한 이유때문이었다. 그러나 투어는 결코
피해가서는 안 될 것이었기 때문에 오디션을 벌였고, 거기서 前 ALEX HARVEY BAND의 크리스 글렌(b)을 발굴했고,
UFO 시절의 동료였던 폴 레이먼드(g, key)를 멤버로 맞이하게 된다.
쉥커에게 있어 가장 든든했던 것은 매니저의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쉥커를 지원하고 있었던 것은
뉴욕 최강의 매니지먼트사인 『C.C.C.』의 런던지사 담당인 피터 멘치였다. 코지 파웰의 가입은 이 멘치가 힘을 다한
공이 컸다.
파웰은 같은 해 8월 16일의 제 1회 MONSTERS OF ROCK의 무대를 끝으로 RAINBOW를 정식으로 탈퇴하고,
실은 게리 무어와 새로운 그룹의 결성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잼 세션까지 한 상태였지만(일설에 의하면 게리 무어의 『JET』레이블과의 계약관계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결국 이 슈퍼 그룹은 실현되지 못했다.
멘치가 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고 한다.
파웰은 MSG의 리허설에 참가했고 투어에 동행하기로 결정한다. 밴드는80년 9월 16일부터 락시 시어터에서
투어를 위한 리허설을 개시했고, 21일에 브리스톨의 콜스턴 홀을 시작으로 하는 최초의 전영(全英)투어를 개시한다.
파웰이 MSG의 정식멤버인가 아닌가는 대단히 미묘한 부분이었다.
나에게는 어딘가 쉥커와 선을 그어놓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엔 이유가 있는데, 같은 해 12월 22일에 LA 교외에 있는 컨트리 클럽에서 멋진 라이브 퍼포먼스를
펼친 후, 같은 장소에서 파티가 벌어졌는데 쉥커와 파웰이 함께 잡힌 사진을 촬영하는 것에 애를 먹은 기억이 있다.
투어 매니저가「곤란하다」고 했고, 분명히 그러한 분위기이기도 했기에, 결국 몇 컷트 중에서 한 장이 당시의
음악전문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밤에 쉥커와 인터뷰 했던 것은 좋았지만, 코카인을 하도 많이 해대는 바람에
아주 괴로웠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파웰은 지체없이 런던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MSG에의 평가는 점점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81년 2월 22일자 사운즈紙의 독자인기투표에서
「뉴 밴드 부문」의 1위를 획득하고, 그 기세로 MSG는 밴드 형태로서 최초의, 그리고 통산 두 번째의 앨범이 되는 작품의 레코딩에 돌입하게 된다.
당초, 새 앨범은 마틴 버치를 프로듀서로 예정하고 있었지만, 그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빴기 때문에 결국 UFO 시절의
작품을 도와줬던 론 네빈슨을 기용하게 된다. 런던의 에어 스튜디오와 몬세라 섬의 에어 스튜디오를 이용한 레코딩에서
사건은 터졌다.
파웰과 네빈슨이 대립하게 된 것이다. 파웰은 리허설에 구속되는 것을 싫어했다. 드러밍은 그 순간의 감성 표현이라는
지론을 가진 그는 항상 그것을 공언해왔다. 이 레코딩에서 프로듀서는 몇 번이고 파웰에게 드럼을 반복시켰다.
그것이 말싸움으로 발전하여 스튜디오에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앨범은 7월 하순에 완성되었고 8월에는 대망의 첫 일본 공연을 위해 일본에 도착했는데, RAINBOW의 네 번째 공연과
격돌하게 되는 운명적인 일정이었다.
첫 일본 공연이 일본 부도칸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밴드의 기세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8월 12일, 일본공연 첫 날의
일본 부도칸 공연은 라이브 레코딩되어「ONE NIGHT AT BUDOKAN」이라고 이름 붙여져 후에 두 장짜리 앨범으로
발매되게 된다.
본작「MSG」는 일본 공연으로부터 수 개월 후에 일본반이 발매되었으며, 이 일본 공연 도중에 아트워크가
결정되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편성으로의 최후의 투어가 되는 전영 투어가 9월 1일 울버햄튼의 시빅 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투어 도중에 파웰의 몸상태가 악화되어 콘서트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투어의 에딘버러 공연을 실제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파웰의 플레이는 컨디션이 나쁘다고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형태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19일의 브랫포드 공연 전에 쉥커와 파웰이 크게 싸움을 한 끝에 돌연 공연을 취소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이 MSG 붕괴의
결정타가 되었다.
파웰은 쉥커의 공연에 대한 자세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프로페셔널한 관점에서 의견을 말했는데 결과적으로
큰 말싸움으로 발전되어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가 된 것이다.
원래, 파웰은 본작「MSG」의 론 네빈슨의 일하는 방식에 실망하고 있었다.
자신의 드럼을 포함해 격렬함을 의식적으로 지우고, 미국의 라디오 취향의 앨범 만들기에 힘쓰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믹스를 다시 하는 편이 좋겠다」라고 관계자에게 말했다고 하는데,
발매일 문제 때문에 강행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욕구불만과 쉥커의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태도에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한 것이다.
파웰은 본작에 관해 이야기할 때「JOURNEY도 아니고 말이지」라고 다소 과격하게 표현했다.
분명히 라디오 방송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후에 앨범「BUILT TO DESTROY」를 미국 시장을 위해
리믹스를 해서 팬을 혼란스럽게 하는 등, 당시의 매니지먼트의 전략에는 통일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쉥커 자신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느덧 자기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록곡들에 대해 말하자면 본작은 데뷔 앨범의 연장선상에 있고, 쉥커의 플라잉 V는 진정 영혼을 울리고 있다.
"Never Trust A Stranger" 에는 놀랍게도 이웃 스튜디오에서 레코딩하고 있던 스티븐 스틸즈(Crosby, Stills & Nash)와 빌리 니콜라스가 게스트로 참가했고, 크리스 글렌이 지각했을 떄에는 역시 이웃 스튜디오에 있던 폴 매카트니가
베이스로 참가하는 등(이 테이크는 후에 글렌이 다시 녹음했다), 약간의 화제성도 가지고 있는데, 후에 MSG의 라이브에서 자주 연주되게 되는 "Attack Of The Mad Axeman" 으로 대표되는 박력있는 곡들이나, 솔로가 멋진 on And on" 등, 명곡들이 다수 수록된 앨범이다.
그러나, 파웰과 폴 레이먼드의 연이은 탈퇴로 밴드에 비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그 십자가를 쉥커가 지게 되어, 이 앨범은 앨범 그 자체가 가진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평가를 얻게 된다.
이 앨범의 일본 제목은「신화」인데, 진정 "신화" 가 된 환상의 MSG의 모습을 잡아낸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미국반은 아트워크가 다르다.
2000. 4. 13 伊藤政則/MASA-ITO
1956년 1월 10일, 독일의 하노버에서 마이클 쉥커는 태어났다. 형 루돌프의 영향을 받아 기타를 시작한 마이클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한 것은 11살 때의 일로, 후에 이 음원은 CD화되어 DM(통신판매)으로 MSG의
「Story Live」앨범을 구입한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선물되었다.
밴드의 이름은 'THE ENERVATES' 였는데, 동급생 네 명에 의한 스쿨밴드로 1966년 9월 13일, 하노버의
『BEAT CLUB ELZE』 에서의 라이브를 담은, BEATLES와 SHADOWS, McCOYS, ROLLING STONES,
PRETTY THINGS 등을 커버한 총 13곡을 수록한 앨범이었다.
게다가, ROLLING STONES의 "As Tears Go Buy" 나 BEATLES의 "Ticket To Ride" 등 다섯 곡에서는
파릇파릇한 마이클의 리드보컬을 들어볼 수 있다.
마이클이 아마츄어 밴드인 THE ENERVATES에 이별을 고하고, 프로로서 데뷔한 밴드는 CRY였다. 독일 국내의
최연소 비트 그룹으로서 매스컴에서도 다뤄졌지만,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본격적으로 쇼 비즈니스의 세계에 발을 담은
마이클은 공교롭게도 이 무렵부터 술과 담배를 배운다.
CRY는 금방 공중 분해되었고, 다음에 마이클이 결성한 밴드는 그 후의 그의 운명을 크게 바꾸게 되는 COPERNICUS였고, 이 밴드의 보컬리스트가 클라우스 마이네(Scorpions)였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은 루돌프 쉥커의 밴드인 SCORPIONS에 가입한다.
1971년, SCORPIONS는 독일의 메트로놈 레코드와 계약하고 불과 일주일이라고 하는 경이적이라면 경이적인 가혹한
조건하에서 레코딩된 앨범은 「LONESOME CROW」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고, 일본에서의 부제는 「공포의 전갈들」이었다. 그리고, 1972년에 마이클은 형의 영향으로 그 때까지 사용하던 깁슨 레스폴을 대신하여 플라잉V를 사용하게 된다.
그 마이클의 플레이에 주목하고 있던 것이, 당시 SCORPIONS를 오프닝으로 기용하여 독일 투어를 하던 UFO였다.
탈퇴한 믹 볼튼을 대신할 기타리스트로서 마이클에게 접촉한 것이다.
술과 마약의 날들, 수 차례의 실종사건, 그리고 SCORPIONS에로의 복귀 등, UFO 가입 후의 마이클의 인생은
정말이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정신과 육체가 함께 한계를 넘어서고 있던 마이클은 어쩔 수 없이 휴식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것이 1979년의
일이다.
이 휴식기간 사이에 마이클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물론, 그것은 솔로활동에의 기반을 단단히 하기 위한 준비였으며,
곡을 만들고, 멤버를 찾는, 휴식임과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는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無)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 정신상태를 안정시켰고, 미래의 밝은 빛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당시 SCORPIONS의 매니저였던 피터 멘치(現 METALLICA, DEF LEPPARD 등의 매니저)를 형으로부터
소개받은 것도 컸다.
1990년대 후반이 되어 돌연, 해적반 시장에 등장한 「ORIGINAL MSG」의 CD. 그 내용은 1979년에 행해진 가장
초기의 MSG에 의한 세션으로서, 대부분이 잼 세션에서 따 온 것이었지만, 그 중 몇 곡은 후에 MSG의 앨범에
수록되는 곡들의 원형이 된다.
그 해적반의 자켓에서도 확인 가능한 것이지만, 라인업은 마이클 외에 게리 바덴(Vo), 빌리 시언(b),
데니 카마시(ds)였다.
FRASER NUSH라고 하는 밴드에 재적하고 있던 게리 바덴은 완전 무명의 보컬리스트였지만, 크리사리스 레코드
(Chrysalis Records)에 보낸 밴드의 데모 테이프를 우연히 마이클이 들었고 그렇게 게리를 선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데니 카마시가 MONTROSE에 재적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지만 결국 MSG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GAMMA, HEART,
COVERDALE/PAGE, WHITESNAKE에 재적한 후에 현재는 데이빗 커버데일의 솔로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미국에서부터 데니 카마시와 함께 MSG의 오디션에 찾아왔던 것이 MONTROSE,
SAMMY HAGER BAND에 재적했던 빌 쳐치였다고 하는데, 데니 카마시에 확인해 본 결과 빌리 시언이 틀림없었다고 한다. 지금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TALAS에 재적하고 있던 빌리 시언은 그 후, DAVID LEE ROTH의 밴드를 거쳐
MR. BIG을 결성하여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결국, 이 라인업에 의한 MSG는, 앞에 언급한 해적반에서 확인 가능한 세션을 수 차례 했을 뿐,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알콜의존증과 마약에 의한 후유증 때문에 마이클이 하노버의 병원에 강제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마이클 쉥커가 런던으로 돌아온 것은 1980년 4월이었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게리 바덴 뿐이었다. 미국에서의 팀은 발전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임무를 다하고 말았지만, 마이클이 떠난 팀원들을
탓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게리만이라도 팀에 남아준 것은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하긴, 게리는 미국에서 찾아왔던 멤버들 같이 여기저기서 찾는 뮤지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이클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언젠 돌아올지 모르는 어둠의 세계에 빠진 남편을 기다리는 애인, 당시의 게리는 그런 상태였다.
MSG의 레코딩 멤버는 게리와 마이클 외에도, 모 포스터(b), 사이먼 필립스(ds)로 결정되었고, 프로듀서는
RAINBOW에 재적하고 있던 로저 글로버였는데, 그는 키보드를 맡을 멤버로서 같은 RAINBOW에 재적하고 있던
돈 에이리를 불러들였다.
「THE MICHAEL SCHENKER GROUP」이라고 하는 심플한 제목의, HM/HR 씬에 남는 불멸의 명반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그런데, 크리사리스 레코드가 프로모션용 비디오 클립을 제작하려고 했던 단계에서 다른 멤버가
예정되었던 각각의 일(사이먼 필립스와 모 포스터는 JEFF BECK GROUP의 투어, 돈 에이리는 RAINBOW의 레코딩)로
인해 떠났기 때문에, 최초의 클립인 "Armed And Ready' 는 엄청난 양의 스모크와 눈이 돌아가는 카메라 워크를
자랑하는 영상으로 위장하면서, 게리와 마이클, 두 명만으로 촬영하는 입맛 씁쓸한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그룹으로서 멤버가 결정된 단계에서의 "Cry For The Nations" 는 다섯 명이 모여 촬영되었는데, 그 다섯 명은
막 RAINBOW를 탈퇴한 코지 파웰(ds), UFO시절의 친구인 폴 레이먼드(g, key), 그리고
SENSATIONAL ALEX HARVEY BAND에도 재적했던 크리스 글렌(b)이었다.
덧붙여서 이 앨범이 발표되었을 때 논란을 부른 것이, 이것이 밴드로서의 첫 번째 앨범인가 아니면 마이클 쉥커의 솔로
앨범인가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본작의 레코딩 멤버는 마이클과 게리, 그리고 세 명의 게스트이고, 솔로 앨범의 색채가 짙다고 하는 의견이 많았다. 코지 파웰이나 크리스 글렌, 폴 레이먼드가 가입하고 투어 멤버로서도 확정되어 그 다섯 명에 의해 레코딩된
「MSG」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그룹으로서의 출발점이라는 의견은 아날로그반의 해설에도 쓰여진 바 있다.
그러나, 1979년에 빌리 시언과 데니 카마시를 불러들인 오디션을 겸한 세션을 했기 때문에, 마이클에게는 그룹으로서
활동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마이클 본인의 의지대로 진전되지 못하고, 결국 크리사리스와의 발매계약 기한이 임박해서 급하게 세션 뮤지션을 모아 레코딩하는 응급처치가 취해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본작은 그 타이틀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그룹의 데뷔 앨범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레코딩 멤버와 투어 멤버가 다른 예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솔로다, 밴드다 라고 분류할 근거 따윈 없다. 조금 억지를 섞어 얘기해 보자면, THE MICHAEL SCHENKER GROUP은 마이클과 게리의 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에라도 그렇다.
고로,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본작을 THE MICHAEL SCHENKER GROUP의 첫 번째 앨범이라고 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팬이 이 본작은 마이클의 솔로 앨범, 그룹으로서의 첫 번째 앨범은 「MSG」라는 식으로 분류한다는
얘긴 들어본 적도 없다!
약 20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흐른 지금, 드디어 디지털 리마스터반으로 복각된 본작에는 기쁜 선물이 있다.
앨범 발매 당시, 3곡이 수록되어 12인치 EP로 발매되었던 「HALF LIVE」의 전곡이 수록된 것이 그것으로, 그 내용은
"Armed And Ready" 와 "Into The Arena" 의 라이브 버젼, 그리고 "Cry For The Nations" 의 라디오
에디트 버전이다.
특히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사용된 독일인 작곡작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발키리의 기행」을 오프닝 테마로 사용하며 코지 파웰의 하이 햇에 의한 네 개의 카운트로 시작되는
"Armed And Ready" 의 라이브 버전은 스튜디오 테이크를 압도하는 상승감, 약동감을 듣는 사람에게 전해주는
멋진 음원이다.
20년 전에 창조된 몽환적인 감동적인 사운드는 지금도 색이 바래지 않고 엄청난 에너지를 뿜고 있다.
마이클 쉥커만의 "빛" 과 “그림자”를 휘감는 플레이는 진정 "압권" 이라는 한 마디로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1981년 8월, 최초의 일본공연을 대성공으로 장식한 "신" 은, 명곡 "Looking For Love" 를 수록한 「MSG」앨범을
발표하게 되는데, 1980년부터 1981년에 걸친 단 2년 사이에 마이클 쉥커는 스스로 “신화”를 확립시켰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000년 3월 14일 酒井 康(KOH SA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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