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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삶의 엣세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두 가지 느낌이 공존한다.

하나는 글쓴이의 신앙적인 확신 내지 학문적인 자부심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 자체는 – 신앙과 관련된 후반부를 제외하고 – 흠잡을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막 읽고 나서는 첫 번째 생각이 강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고 이 책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이 그리 양이 많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명 깊었던 구절들이 많다.


로고테라피라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기술적인 이야기이고, 그 로고테라피라고 하는 것의 근본적인 취지와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결국 이 책의 주제는 제목과 상통한다. 바로 ‘삶의 의미를 찾자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다면 추구하는 바를 자기 자신이 설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행복이나 쾌락 그 자체를

목표로 하다 보면 앞 뒤가 뒤바뀔 수 있다.

 

 행복의 조건을 따지게 되고 그 조건을 얻기 위해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럽다.

 

 나는 ‘제품/서비스 사용자의 가치’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마무리했었는데 당시 설정으로는 행복도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 중에 하나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관련 구문을 아래와 같이 인용해 본다.


“순리적으로 쾌락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목표의 달성을 통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라는 것이다.

 

 목표의 성취가 행복을 느낄 이유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자면 만약 행복할 이유가 있다면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째서 사람이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가를 말해 준다.

그럴 이유가 있다면 그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다음으로는 보편적인 가치가 쇠퇴하고 있는 현상과 맞물리는 실존적 공허에 대한 내용이다. 이 부분은

여타 대가들도 많이 다루는 내용이다.

 

즉, 오늘날은 전통시대와 달리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퇴색되고 있어 – 반대로 다양성이 증가할 수도 있으니

꼭 나쁜 의미에서만 해석할 일은 아니다 – 여기에 순응하는 순간 개인적인 나침반 혹은 목표를 상실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달리고 살아야 하는지 등이 없으니 공허감에 시달릴 수 있다. 두 문단으로 인용해 본다.


“오늘날 우리는 전통이 붕괴되고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유일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는 대신에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보편적인 가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 없음과 공허감, 즉 실존적 공허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보편적인 가치가 사라졌어도 삶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의미는

 전통의 손실에 저촉을 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없는 시대에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인간이 충분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시대와 같은 시대, 즉 실존적 공허의 시대에 있어서 교육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통과 지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개별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데에 있다.”

 


“나는 사람들이 실존적 공허를 느끼는 이유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일깨워 주는 충동과 본능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과거와는 달리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는 인습과 전통, 가치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때로 인간은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원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순응주의나 전체주의의 희생양이 된 셈인데, 전자인 순응주의는 서양에서 후자의 전체주의는 동양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인간이 실존적 공허에 시달리게 되면, 이와 맞물려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뭔가 허전한 구석을 채울 도피처를 찾게 되는데 그것은 성적인 쾌락일 수도 있고, 권력에의

의지일 수도 있으며, 재물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빅터 프랭클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심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수의 현대인이 자기 자신 나름의 도피처를 가질 수가 있는데 근본적인 원인, 즉 실존적 공허를 제대로 알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역설한다.

 

물론 만병통치약으로 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도피처에 머무르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부분은 신경 쓰지 않으면 정말이지 휩쓸리게 되어 있다.

관련 구문을 인용해 본다.

처음에 나는 성적인 쾌락이 실존적 좌절로부터의 도피처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당했을 경우, 쾌락을 찾고자 하는 의지는 이런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의

파생물일 뿐만 아니라 대용물이기도 한다.

 

권력에의 의지 역시 이와 유사한 목적에 종사한다. 의미를 충족시키려는 원초적 관심이 좌절되었을 때, 인간은 쾌락을

지향하거나 권력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

그렇다면 재물의 의미, 즉 재물을 소유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재물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는 재물의 소유를 당하고 있으며, 그것을 모아야겠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의미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물을 가졌다는 것이 그 사람이 행복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재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수단이 목적 그 자체를 추구한다.”

 

 


블로거의 오늘의 책에 참여한 포스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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