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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기억’되지 않고 ‘체화’된다

 

어떤 책들은 과거에 내가 그 책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 책의 내용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나에게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명상록』을 보며 문득 고등학교 시절 이 책을 무척 감명 깊게 읽으며 감동 받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책을 집어 첫 표지를 넘기니 ‘1993년 2월’이라고 쓴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고3에 올라가던 시절이다.

 

벌써 22년이 지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그 당시 이 책의 내용에 크게 공감했던 나는 마음에 드는 구절에 체크 표시를 하거나 밑줄을 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문구에는 형광펜으로 색칠을 해 두었었다.

 

약 2천 년 전의 로마의 황제가 썼던 글에 내가 그토록 마음을 빼앗겼던 이유는 아마도 철학과 종교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호기심이 작용한 까닭이 컸으리라.

그러나 『명상록』의 내용이 지금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단지 책을 매우 공들여 여러 번 읽고 아꼈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책은 소설처럼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갖춘 내용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아우렐리우스 자신이

전장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써내려간 여러 개의 짧은 문구들로 이루어진 글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책을 펼치며 내가 체크 표시하고 밑줄 쳐 두었던, 또 형광펜으로 곱게 색칠해 두었던 부분들을 위주로 빠르게

책을 내용을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미 삼아 그 시절의 나를 들여다 볼 요량으로, 또 유치하게 형광펜으로 색칠까지 해 가며 요란을 떨었던 그 때의 나를

 비웃어줄 생각으로 그렇게 책장 앞에 서서 책을 읽다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막연히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많은 가치관의 바탕들이 그 책의 내용에 상당 부분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의 성향, 습관, 또 사물과 인간과 세상을 대하고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 등의 원형이 매우 거친 형태로 『명상록』이라는 책에 서술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형광펜으로 색칠해 둔 부분들을 다시 읽으며 새삼 현재의 ‘나’가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삶을 동경하던 열아홉의 ‘나’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과 함께,

 

책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내용은 생각나지 않아도 자신이 감명 받고 공감한 만큼 책의 구절들이 내 몸속에서 나의

 일부분으로 체화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특정한 표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여러 번 따라 쓰고 외우고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투의 표현을 따라 하게 되는 것처럼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은 어느 정도 그 내용들이 읽는 이에게

내면화되는 듯하다.

 

『명상록』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으며 새삼 알게 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국내 작가의 작품이 아닌 외국 작가의 작품들은 누가 번역한 책을 읽느냐에 따라 책에 대한 감동이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외국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는 어떤 출판사의 누구의 번역인가를 늘 따져보게 되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첫 계기가 이 책 『명상록』에 대한 경험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상록』을 읽을 당시 서점에서 여러 다른 출판사의 번역본들을 번갈아 가며 본 적이 있는데, 번역이 옮긴이에 따라

얼마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지, 또 같은 글이 어떻게 번역했느냐에 따라 그 감흥과 어감이 얼마나 다른지를 직접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구입해서 읽었던 육문사의 박병덕 번역본에 비해 다른 출판사의 번역은 당시 고3이던 내 수준에서도 엉터리임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내가 『명상록』을 다른 번역본으로 먼저 읽었더라면 아마 아무런 감흥도 없이 책을 이십여 쪽 읽다가

던져버렸을지 모른다.

 

2015년 지금 포털 사이트에서 ‘명상록’을 검색하면 수많은 출판사의 책들이 소개된다. 만약 누군가 나의 독서편지를 보고 『명상록』을 읽는다면 과연 누구의 번역본으로 책을 읽게 될까.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어떤 책이든

 나에게 깊은 감동을 준 책은 ‘나’라는 사람의 몸속에 흡수되어 나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 육문사, 1993년 1월 중판.

  2015년 3월 11일(수)
 이젠, 읽을 때!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진로독서연구센터 연구원 이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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