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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Peggy Lee - Fever

 

 

Peggy Lee - Fever

 

 

 Beyonce가 부른 Fever.

 

 

 

 Fever

 

First time I had the fever
They said I had the kissing disease
They said that it was quite contagios
So I did'nt even dare to sneeze

I'd give you fever, If I kissed you
Fever!, If i hold you tight
Fever!, In the morning
Fever!, All through the night

 

They play it on run-way in paris
The models do a sassy walk
They know just the way to swish it
While the local yokels stand and gawk

They give them fever
When they do it, Fever when they do a turn
Fever!, They're a fire
And what a lovely way to burn

 

Everybody's got the fever
That's something we all know
Fever isn't such a new thing
Fever started long ago

 

Captain Smith and Pocahontas
Had a very mad affair
When her daddy tried to kill him
She said : Daddy!, Oh!, Don't you dare
He gives me fever when his kisses
Fever when he holds me tight
Fever, I'm his misses
So daddy, Won't you treat him right ?

 

Romeo loved Juliette
Juliette she felt the same
When he put his arms around her he said:

Julie, Baby you're my flame
Thou giveth fever when we kisseth
Fever!, With thy flaming youth
Fever!, I'm afire, Yeah!, I burn, Forsooth

 

Now you've listened to my story
Here's the point that I have made:
Chicks were born to give you fever
Be it Fahrenheit or Centigrade

 

They give you fever when you kiss them
Fever if you live and learn
Fever!, 'Till you sizzle
What a lovely way to burn
Wa lovely way to burn
What a lovely way to burn
What a lovely way to burn

 

 

 

 

 

 

 

 

 

미국의 노스다코타(North Dakota)주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 태어난 재즈 가수 '페기 리

(본명: Norma Dolores Egstrom)'는 철도 회사의 역장으로 근무하던 '마빈 엑스트롬(Marvin Egstrom)'의

여덟 명의 자녀 중에서 일곱번째로 태어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계 혈통을 가진 페기 리는 네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재혼한 계모의 손에서 자라야 했는데 

아버지와 재혼한 계모는 페기 리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기간이 무려 11년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폭력 속에서 성장한 페기 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성인이 된 후에는 비폭력주의자가

  되었으며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으로 인해 폭력 행위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힘든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도 그나마 페기 리에게 위안을 주었던 것은 라디오였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의 음악을 들은 후재즈 음악에 매료되어 재즈 가수의 꿈을 갖게 된다.

계모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페기 리는 열네살이 되던 해에

노스다코타를 가청 지역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국 'KOVC'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공식적인 첫 무대를 가지게 된다.

 

방송 출연 이후 페기 리는 지역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라디오에 고정 출연하게 되었으며 이때  부터

계모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페기 리는 적지만 고정적으로 급여를 받으며 라디오에서 계속 노래를 부르다

노스다코타의 파고(Fargo)시에 위치한 좀더 큰 방송국 'WDAY'으로 옮겨가 출연하게 된다.

 

'WDAY' 방송국에서 페기 리는 자신의 본명인 '노마 돌로레스 엑스트롬(Norma Dolores Egstrom)' 대신에

페기 리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이름은 당시 'WDAY' 방송국의 한 평론가가 권유한 것이라고 한다.

라디오에 출연하는 한편으로 페기 리는 지역 밴드와 함께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는 가수로써 성공하기 위한 희망 하나를 안고 집을 나와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페기 리의 이 짧은 여행은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고향에 돌아온 페기 리는 예전 처럼 밴드와 함께 클럽 무대에 오르는 생활로 되돌아 가야 했으나

시카고의 한 호텔로 공연을 떠나면서 인생 최대의 기회를 잡게 된다.



시카고 앰배서더 호텔(Ambassador Hotel)의 나이트 클럽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던 페기 리의 모습을

재즈 클라리넷 주자 '베니 굿맨(Benny Goodman)'이 발견하였던 것이다. 당시 베니 굿맨은 자신의 악단에서 노래를 부르던

'헬렌 포레스트(Helen Forrest)'를 대신할 가수를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페기 리의 공연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녀에게 자신의 악단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게 된다.

페기 리는 이렇게 해서 베니 굿맨 악단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때가 1941년이었다.

베니 굿맨과 함께 한 이때 부터 페기 리는 가수로써 화려하게 주목받게 되는데 대표적인 곡이 1941년에 발표한

 'Somebody Else Is Taking My Place'였다.

 

 이 곡은 빌보드 팝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페기 리를 부각시켰고 인기 가수로 만들어 주게 된다.

 1943년 3월에는 베니 굿맨 악단의 기타 주자인 '데이브 바버(Dave Barbour)'와결혼하였고

6월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 'Stage Door Canteen'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베니 굿맨이 페기 리와 결혼한 데이브 바버를 해고해버리자 두사람은 밴드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이후 페기 리는 음악계에서 은퇴를 하고 딸 '니키(Nicki)'를 키우면서 평범한 가정 주부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가정 주부로 돌아간 2년 동안 페기 리는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

 

결국 1945년에 캐피털 음반사(Capitol Records)와 계약하고 복귀하게 되는데

그녀의 복귀작은 재즈 가수들의 옴니버스 음반에 수록한 'Waitin' for the Train to Come In'이었다.

빌보드 팝 차트에서 4위 까지 진출하며 페기 리의 식지 않은 인기를 증명한 이 곡 이후
페기 리는 인기 가수의 길을 걸으며 많은 히트 곡을 만들어내었고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인기 가수로써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페기 리가 1958년에 발표하여 빌보드 팝 차트 8위에 올려 놓은 'Fever'는 1956년에 가수 '리틀 윌리 존

(Little Willie John)'이 발표하였던 곡을 커버한 것으로 1960년에 발표한 페기 리의 음반 'All Aglow Again!'에

 수록되기도 한 페기 리를 대표하는 곡이다.



페기 리가 불렀고 백명이 넘는 많은 가수들에 의해 커버되며 사랑받은 팝의 고전인 'Fever'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팝팬들의 애청 곡이 되었다.

한편 페기 리는 2002년 1월 21일에 지병인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하였다

 

지금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연주되는 명곡이지만, 그래도 1958년 페기 리가 녹음한 이 노래가 ‘Fever’의 결정적

버전이다. 

단출한 편성에서 빚어지는 넓은 공간미를 뚫고 그녀의 목소리가 시니컬하게 피어오른다.

 

요즘처럼 흡연자들이 도둑놈 취급 받는 시절엔 쉽게 못할 얘기지만,

이 노래를 듣다 보면 한 모금 후욱, 뿜지 않을 수 없다.

매캐하고 싸늘하다. "

 

가사도 참 제목만큼 정열적인 참 매력적인 재즈보컬...

오래된 재즈가 주는 매력을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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