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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음악( Newage* )

Narciso Yepes-Romance D`amour ,Recuerdos De La Alhambra



 

 

 

 

Narciso Yepes-Romance D`amour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에서 바르셀로나 다음으로 큰 도시인
그라나다 교외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스페인이 무어인에 의해지배를 당했던 시절, 그들의 빼어난
건축술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바로 이 궁전이다.

무어인의 스페인 지배당시 최후의 수도였던이곳은 그 기하학적인
문양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현재 세계인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이다.

 

19세기 후반의 프란시스코 타레가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기타 작곡가이자

20세기적인 의미에서 현대적인 연주법을 완성한 위대한 연주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비르투오소로서 경이적인 테크닉과 낭만적인 연주 스타일 덕분에

일명 ‘기타의 사라사테’로 불리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기타라는 악기를 통해 세계적인 인지도를 한 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다른 악기에 밀려 사라질 운명에 놓였던 기타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해냈다.

 

특히 그는 신체적인 문제 때문에 생의 마지막 9년 동안은 손톱이 아닌 손끝의 살로만

현을 튕기는 새로운 주법에 매진하기도 했다.

 

 

 



 

 

붉은 궁전 알함브라에 드리워진 추억

 

 

타레가가 발전시킨 트레몰로 주법이 그 신비로움과 애절함을 더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가 그라나다를

 방문했을 때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받은 감동을 기타로 옮긴 것이다.

이 궁전은 스페인에 존재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중반에 세우기

 시작했으며 증축과 개보수를 거쳐 완성된 것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궁전의 모습은 대부분 14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특유의 인공미는 물론이려니와 자연과의 조화 또한 일품으로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로 일컬어지는 알함브라 궁전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비극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그 해,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2세의 공격을 막지 못한 그라나다

 왕국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이 궁전을 평화적으로 내주고 아프리카로 떠난 것이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비로소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걷게 되었지만,

알함브라 궁전은 이전 800여 년간 내려온 이슬람 문화의 찬연함을 간직한 채

홀로 오롯이 서 있게 된 것이다

 

트레몰로 주법이 자아내는 그 애잔한 분위기와 낭만성 넘치는 멜로디 라인은 이러한 알함브라 궁전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음악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일설에 따르면 작곡가의 개인적인 사건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1896년 타레가는 그의 제자인 콘차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타레가의 사랑을 거부했고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알함브라 궁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달빛이 드리워진 궁전의 아름다움을 따라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고 한다.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영화 <킬링필드>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아름다운 명곡을 들으며 자신의 추억이나 옛사랑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몹시 메마른 가슴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낭만적인 작품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화 " 금지된 장난" 

 

 

 전쟁의 참혹함과 천진한 동심을 잘 대비시킨 이 영화는,

 주제음악 역시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곡.
스페인 민요인 "사랑의 로망스"를 "나르시소 예페즈"라는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기타 독주곡으로 편곡,

 

연주하여 클래식 기타...하면,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과 함께 

제일 먼저 이 곡을 연상할 만큼  일약   유명한 곡이 되어 버렸다
"

클래식 기타리스트 나르시스 예페스는  1927년 11월 14일

스페인의 무르시아 근교 로르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어린시절 마당에서 지팡이를 가지고 기타를 치는 시늉을 하며  놀고 있는 것을 본

예페스의 아버지는 힘든 살림이었지만 아들을 위해 마을의 시장에서 장난감 기타를 사와서는

아들에게 선물로 안겨 주었는데, 그 기타가 훗날 예페스라는 거장의 첫 기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페스는 점차 음악적인 재능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두말않고 아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었고,

그는 1940년 명문 발렌시아 음악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발렌시아 음악원 재학시절 그는 작곡가 Manuel Palau, 기타리스트 Marco Garcia de la Rosa,

지휘자 Lamonte de Grignon 등에게 작곡법과 기타 연주법 등을 사사받았다.

 

[생략]

 

그는 음악으로 스페인을 세계에 널리 알린 공로로 각종 서훈과 표창을 수없이 받은 마에스트로였지만,

자신의 고향 로르카를 평생 잊지 않았으며 사석에서는 소박한 시골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만년인 1980년대 그는 한쪽 눈이 거의 실명인 상태에서도 멀리 한국을 방문, 내한공연을 가졌다.
1997년, 그는 멀고도 영광스러웠던 음악인생을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클래식 기타리스트 Narciso Yepes(나르시스 예페스)는1927년 11월 14일 스페인의 무르시아 근교 로르카에서

태어났다.
Narciso Yepes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한적한 시골의 가난한 마을에서태어난 그 였지만 아버지는 자식이

농사꾼 이외의 일을 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어린시절에 마당에서 지팡이를 가지고 기타를 치는 시늉을 하며 놀고 있는 것을 본Narciso Yepes의 아버지는

 힘든 살림이었지만 아들을 위해 마을의 시장에서 장난감기타를 사와서는 아들에게 선물로 안겨 주었는데

그 기타가 훗날 Narciso Yepes라는거장의 첫 기타가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Narciso Yepes는 점차음악적인 재능을 나타내게 되었고 Narciso Yepes의 아버지는 두말않고

 아들의학비를 지원해 주었고 1940년 명문 발렌시아 음악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음악원 재학시절 작곡가 Manuel Palau(마뉴엘 파올로 ),기타리스트 Marco Garcia De La Rosa

(마르코 가르시아 드 라 로사),지휘자 Lamonte De Grignon(라몬테 드 그리곤)등에게 작곡법과 기타 연주법
등을 사사받았다.

 

1946년 발렌시아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수도 마드리드에 정착하여 음악 활동을 준비하던 중 지휘자 Ataulfo Argenta(아타울포 아르헨타)에게 로드리고의명작 아랑훼즈 협주곡의 마드리드 초연을 제의받게 된다.

 

이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Narciso Yepes라는 기타리스트의 이름은 이를 계기로 스페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페인에서의 성공이후 스위스, 이탈리아를 거쳐 빠리로 넘어가 당대 최고의 음악교육자 Nadia Boulanger

(나디아 불랑제), 작곡가 George Enesco(죠르쥬 에네스코),Walter Gieseking(발터 기제킹)등에게서 지도를

 받아 음악 실력을 쌓았다.

그의 국제적인 데뷔 연주회는 Salle Gaveau(살 가보)에서 행해졌으며기타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던 프랑스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계속 공부를 하며 연주활동을 벌이던 1952년Narciso Yepes는 영화감독 Rene Clement

(르네 끌레망)의 방문을받고 그가 만들고 있는 영화의 음악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게 된다. 그 영화는
다름아닌 지금은 고금의 명작으로 전해지는 Jeux interdits(금지된 장난) 이었다.

영화는 엄청난 성공를 거두었고 이 명작에서 사용된 Narciso Yepes 연주의 애잔한Romance(로망스)의 선율은

전세계인의 가슴에 큰 감동을 심어 주었다.

 세고비아라는큰 그늘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추구하던 그는 심지어 의학부에도진학하여 인간의

 

손의 구조를 해부학 실습을 참관하며 탐구하는 등 그야말로 진지하고아카데믹한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병적으로 세고비아류의루바토와 음악적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고전물들의 애매한 해석을 참지못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연구자세를 자신에 대한 반기를 드는 모습이라고 생각한세고비아는 동향 후배임에도

 

 Narciso Yepes를 죽는 날까지 인정하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그는 만년에 한국과 일본을방문하여 공연을 가진바 있으며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