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io Iglesias - Caruso
Caruso
Qui dove il mare luccica e tira forte il vento
su una vecchia terraza davanti al golfo di surriento
un uomo abbraccia una ragazza dopo che aveva pianto
poi si schiarisce la voce e ricomincia il canto.
여기 저 바다 반짝이고 바람 거칠게 이는 이곳에서,
한 낡은 테라스 위, 앞에 보이는 건 쏘렌토바닷가…
한 남자가 한 소녀를 끌어 안는데, 그녀가 울고 난 후에..
그런 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노래를 시작하죠..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bene sai
E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e vene sai.
난 사랑하오 당신을 너무나 많이..
정말로, 너무도 많이.. 당신도 알잖소..
그 사랑 이젠 속박에서 녹여 버리는 걸,
당신 이젠 냉정해야 하오..
Vide le luci in mezzo al mare penso alle notti a in America
ma erano solo le lampare e la bianca di una elica
senti il dollre nella musica si alzo dal pianoforte
ma quando vide la luna uscire da una nuvola gli sembro dolce anche la morte.
그는 그 바다 한가운데 있는 불빛을 보고 생각했소
화려한 미국의 밤의 불빛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어선의 불빛들
그리고 그 배 선미에 이는 하얀 포말의 꼬리
그는 피아노 음악에서 아픔을 느끼고 일어 났는데,
그에게 보이는 구름 뒤 달이 나오는 것이.
그에겐 죽음조차 달콤해 보였다오
Guardo negli occhi la ragazza quegli occhi verdi com il mare
poi all'improvviso usci una lacrima e lui credette di affogare.
그는 들여다 보았소 그 소녀의 두 눈을
마치 바다처럼 푸른 두 눈을
그 때 문득 타고 흐르는 눈물, 그는 알았소
자신이 죽음의 심연으로 가라 앉을 거라는 걸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bene sai e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e vene sai.
난 사랑하오 당신을 너무나 많이..
정말로, 너무도 많이.. 당신도 알잖소..
그 사랑 이젠 속박에서 녹여 버리는 걸,
당신 이젠 냉정해야 하오..
Potenza della lirica dove ogni dramma e un falso
che con un po'di trucco e con la mimica puoi diventare un altro
ma due occhi che ti guardano cosi vicini e veri
ti fan scordare le parole confondono i pensieri
서정시의 힘, 그 안에서 모든 비극을 꾸며낸 거짓
약간의 화장 그리고 흉내로 당신을 될 수 있죠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하지만 당신을 바라보는 내 눈에 너무도 가깝고 진실스러워
당신에게 할말 잊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한다오
cosi diventa tutto piccolo anche le notti la in America
ti volti e vedi la tua vita come la scia di un'elica
ma si e la vita che finisce ma lui non ci penso poi tanto
anzi si sentiva gia felice e ricomincio il suo canto
그 바다 한가운데 있는 불빛을 보고 생각했소
화려한 미국의 밤의 불빛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어선의 불빛들,
그리고 그 배 선미에 이는 하얀 포말의 꼬리
그래요 그렇게 끝나는 게 삶이라오
하지만 그는 그리 많이 생각하진 않았소 그 끝에 대해선…
정 반대로 그는 이미 느꼈다오 행복하다고
그리고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bene sai e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e vene sai.
난 사랑하오 당신을 너무나 많이..
정말로, 너무도 많이.. 당신도 알잖소..
그 사랑 이젠 속박에서 녹여 버리는 걸,
당신 이젠 냉정해야 하오..
훌리오 호세 이글레시아스 데 라 쿠에바(스페인어: Julio Jos? Iglesias de la Cueva, 1943년 9월 23일 ~ )는
스페인의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영화배우이다. 14개 언어로 80장의 음반을 발매, 전 세계적으로 3억장의 음반을 팔았다.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5명에 든다고 한다.
오렌세 출신의 산부인과 의사인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푸가의 아들로,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 학위를 얻었으나, 변호사로 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레알 마드리드 CF의 2군 팀이었던 AD 플루스 울트라에서 골키퍼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1963년 10월 22일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1년 반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투병 생활 동안 간호사가 선물한 기타를 연주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슬프면서도 낭만적인 곡들을 직접 작곡하기도
하면서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대학 졸업 후 1968년 그는 바인도튼 스페니시 송 페스티발에 참가해 자작곡La Vida Sigue Igual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콜롬비아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스페인을 대표해 브라쇼프 가요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등에 참가했고 스페인을 비롯한 라틴 전역과 유럽을
돌며 투어 콘서트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명성을 높여갔다
1978 ~ 1990년 (절정기)그가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한 것은 1978년 CBS 인터내셔널과 계약을 맺게 되면서
부터였는데,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로 앨범을 제작했고, 미국과 영국 시장을
목표로 하여 영어로도 앨범을 녹음했다.
그의 이같은 노력은 'Begin the Beguine'이 넘버원 히트를 치며 빛을 발하였고 곧 이어 출판된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1984년 발매된 듀엣 모음집 '1100 Bel Air Place'는 미국 내에서만 3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도 현재 상당한 인기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
우리가 매스컴 등을 통하여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들 중 천재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사람 역시 대
단한 천재이다.
1943년생인 스페인 출신의 가수이자 작곡가, 영화배우인 그는 80장의 음반을 14개의 언어로 3억장을 제작 판매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음악가 5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상류층의 부유한 의사의 아들로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기 위해 영국 캠브릿지 대학
법학과에 유학을 했다.
목표한 바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나 변호사로 활동했는지는 모르겠고 축구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스페인의 유명
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 팀에 입단하여 골키퍼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의 심각한 부상으로 2년 가까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므로 축구에 대한 꿈을 접고, 투병생활동안 간호사가 선물한 기타가 인연이 되어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슬프면서도 낭만적인 곡들을 직접 작곡하기도 하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감상적인 매력적, 개성적인 저음의 목소리로 가수의 길을 걸어 스페인에서 국민 가수로 추앙을 받는 등 세계적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음악적 성공과 더불어 큰 부를 이루었고, 부인과 이혼하면서도 부에 걸맞게 세상의 놀라움이 되도록 엄청난 위자료를 지불하였으며 아들의 애인과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등 염문도 세계적인 규모로 뿌려대기도 하였다.
미국과 영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자신의 노래는 물론 이미 잘 알려진 다른 사람의 노래도 스페인어 또는 영어로 많이 불렀다.
그는 한가지만 성공하기도 어려운데 세계 일류대학인 영국의 캠브릿지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변호사 자격 취득,
프로 축구선수, 가수 겸 작곡가, 영화배우가 되고 1989년에는 유엔의 'UNICEF 친선대사’로 위임되기도 하였다.
Julio Iglesias
여성 팬들로부터 가장 많은 갈채를 받고 있는 스페인어권 출신 가수이다.
60여 장에 달하는 독집 앨범과 6개 국어로 발매된 히트 앨범, 1억 2,000만 장의 누적 판매고를 올리며 매 30초마다
전 세계 라디오 방송국에서 훌리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는 20대 초반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환자였는데 불굴의 의지력을 갖고 정상인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산부인과 의사인 부친, 스페인 유명 작가의 딸 사이에서 출생한 훌리오는 양친 사이가 원만하지 않아 어려서부터 밖으로
떠돌아다니는 문제아였다.
“집안에 들어오면 싸늘한 냉기가 돌았죠. 화목이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던 상황이었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방과 후 거리를 쏘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날, 12살 때 우연히 교내 합창단 단원 모집 시험에 응모한다.
그때까지 그는 좋아하는 가수나 노래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음악 쪽으로는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
곡조조차 맞추지 못하는 훌리오의 노래를 듣고 있던 심사 위원 한 사람이 “애야, 차라리 너는 축구 선수나 해라!”라는
비아냥거림을 던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멸조로 던진 심사위원의 이 말은 그의 초반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는 곧바로 유소년 축구팀에 가입한 뒤 스페인 축구 지망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레알 마드리드팀의 골키퍼로 활약한다.
축구선수로 명성을 얻어가고 있던 그에게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19살 되던 9월, 친구와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마을 축제에 참가한 뒤 귀가하다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사고 직후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고 생각한 뒤 별다른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1개월 뒤, 그는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을 느낀다.
2월 눈 오는 어느 날, 거리에 쓰러진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된다. 20살 되던 1월 6일, ‘사고로 인한 하체 부분 내출혈,
그로 인한 척추 압박’이라는 의사 소견을 듣는다.
의사들의 검진 이후 그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된다.
결국 그후 황소처럼 튼튼한 다리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훌리오의 두 다리는 완전 마비된다.
“병실에 있으면서 ‘왜 하필 나인가’라는 분노감에 휩싸였죠.
20살의 내 인생이 이제 불구로 시작된다는 절망감과 함께요.”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근 1년 동안 병원에 출근하지 않고 아들 훌리오를 간병한다.
병세에 차도가 없자 아버지는 근무를 마치면 병상의 아들을 찾아와 그 다음날까지 함께 하는 고단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끊임없이 격려의 말을 보낸다.
이때 아버지가 자주해주던 말이 있었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설사 하반신 마비 환자로 전락하더라도 적극적인 인생을 살아라는 무언의 충고였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는 척추가 절단된 것이 아니고 상흔만 입은 압착의 경우 꾸준한 운동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훌리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어스름한 저녁 무렵부터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지팡이를 짚고 병원 정원을
오가는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굳어가는 하반신 상태를 차단하기 위해 하루 6시간 정도의 수영을 병행한다.
고단한 재활 과정에서 그의 인생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된다.
아버지가 적절함을 달래주기 위해 갖다 놓은 기타와 악보.그는 그때까지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고 노래 실력은 이미 합창단원 응모 때 밝혀졌듯이거의 완벽한 음치에 가까웠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악보를 보고 독습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병상 생활은 3년째로 접어들었다. TV에서
방송되는 가요 프로그램을 듣고 가수의 음정에 맞추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음악 축제 다큐멘터리를 본 훌리오는 아버지에게 “저 2년 안에 저 축제에 참석해서 반드시 노래를 부르겠어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웃었다.
그런데 웬걸 사고 후 5년 만인 24세 생일, 그는 기적적으로 정상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국 캠브리지로 유학한 그는 방과 후 클럽에서 학비도 벌겸 재미 삼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장래 희망은 변호사를
꿈꾸고 있었다.
1968년 자신의 노래 실력을 공식적으로 검증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스페인 베니돔 송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덜컥
최우수상에 입상된다.
참가곡으로 불렀던 노래가 병상에서 아버지가 들려준 격려의 말을 모티브로 해서 스스로 작사, 작곡한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La Vida Sigue Igual.’
페스티벌 이후 개최된 모든 음악상에 이 곡은 단골 수상곡으로 추천되는 동시에 싱글 발매 이후 단 2주 만에 스페인
최고 인기곡이 된다.
마침내 ‘그래도 인생’은 스페인 국가처럼 애창됐고 조금 과장하자면 길 가던 강아지도 따라 부를 정도였다.
정식 데뷔로 기록되고 있는 1968년 이후 30여 년 이상 톱 가수로 전 세계 순회공연을 지속하고 있는 훌리오.
자칫 불구 청년으로 마감했을지도 모를 인생은 부친의 끊임없는 격려와 기타 선물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늘 되뇌는 포부가 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무대 위에서 죽고 싶습니다. 서 있는 채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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