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DERNISM 음악

Dalida - Le temps Des Fleurs

rose.gif rose image by Nanda24

 

 

 

 

 

 


 

 

 

Dalida - Le temps Des Fleurs(꽃들의 시절)

 

 

 

 

Le temps Des Fleurs

 

(꽃들의 시절)

 

Dans une taverne du vieux Londres

고풍스런 런던의 어느 자그마한 카페에선

Ou se retrouvaient des etrangers

낯선 이방인들이 서로 만나곤 하였어요

 

Nos voix criblees de joie montaient de l'ombre

기쁨이 넘쳐흐르던 우리들 목소리가 어둠속에서 흘러나왔고

Et nous ecoutions nos coeurs chanter

우린 우리의 가슴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C'etait le temps des fleurs on ignorait la peur

꽃들의 시절이었어요 우린 두려움이란 걸 몰랐죠

Les lendemains avaient un gout de miel

매일 매일이 꿀처럼 달콤한 나날들이었어요

 

Ton bras prenait mon bras ta voix suivait ma voix

그대의 팔이 내 팔을 잡았고 그대 음성은 내 음성을 따라 다녔어요

On etait jeunes et l'on croyait au ciel

우린 젊었고 하늘의 존재를 믿고 있었어요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Et puis sont venus les jours de brume

그러고 나서 그 후엔 안개 낀 나날들이 다가왔어요

Avec des bruits etranges et des pleurs

이상한 소문들과 눈물이 함께 말이에요

 

Combien j'ai passe de nuits sans lune

얼마나 저는 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A chercher la taverne dans mon coeur

그 카페를 찾으려고 어두운 밤들을 보냈던지요

 

Tout comme au temps des fleurs ou l'on vivait sans peur

찬사를 받던 그때처럼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았고

Ou chaque jour avait un gout de miel

매일 매일이 꿀처럼 달콤했던 나날들이었어요

 

Ton bras prenait mon bras ta voix suivait ma voix

그대의 팔이 내 팔을 잡았고 그대 음성은 내 음성을 따라다녔어요

On etait jeunes et l'on croyait au ciel

우린 젊었고 하늘의 존재를 믿고 있었어요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Et ce soir je suis devant la porte

그리고 오늘 저녁 나는 이젠 그대가 오지 않을

De la taverne ou tu ne viendras plus

자그마한 카페 문 앞에 있어요

 

Et la chanson que la nuit m'apporte

그리고 밤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노래를

Mon coeur deja ne la reconnait plus

내 가슴은 이미 이제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C'etait le temps des fleurs on ignorait la peur

꽃들의 시절이었어요 우린 두려움이란 걸 몰랐죠

Les lendemains avaient un gout de miel

매일 매일이 꿀처럼 달콤한 나날들이었어요

 

Ton bras prenait mon bras ta voix suivait ma voix

그대의 팔이 내 팔을 잡았고 그대 음성은 내 음성을 따라 다녔어요

On etait jeunes et l'on croyait au ciel

우린 젊었고 하늘의 존재를 믿고 있었어요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la

 

 

 

 

 

 

 

 

이탈리아계인 [Dalida(달리다)]는 1933년 1월 17일이집트 카이로에서 [Yolanda Gigliotti(요란다 질리오티)]란
본명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카이로 오페라의 수석바이올린 연주자였다.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낸 [Dalida]는 가톨릭학교를 졸업한 후 속기 타이피스트비서로 일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탁월한 미모 덕에 모델로 발탁되는 행운을 누린다.

1954년에 친구의 권유로 참가한 미스 이집트 선발 콩쿠르에서 [Dalida]는 미스 이집트타이틀을 얻어내는데 이는

그녀의 인생에 평생 비춰질 하이라이트의 서곡이었다.

당시미스 이집트 선출을 지켜보던 관람자 중 한명이던 프랑스 영화 제작자가 뛰어난미모와 개성에 주목 [Dalida]에게

영화 출연을 제안한다.

 

이집트에서 3편의영화에 출연한 [Dalida]는 본격적인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으로파리행을 결정한다.

 1954년 [Dalida]는 여행 가방 하나만 달랑들고 아는 사람이 전혀없던 미지의 도시 파리에 도착한다

 

당시 21살이던 [Dalida]의 가방 속에는 유명한영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차곡차곡 접혀 담겨 있었다.
[Dalida]는 훗날 어릴때부터 난 항상 중요한 사람이 되길원했다고회상했다.

미스 이집트로 선출된 후 이름을 달릴라로 바꾸었던 [Dalida]는파리에 도착한 후 좀 더 부르기 쉬운 [Dalida]로 이름을 다시 바꾼다.

 

아마도 삼손없이는 그 존재이유가 미미한 성경의 데릴라에서 따온 이름 달릴라가 부담이 되었는지도모른다.

그러나 이름을 바꿨지만 [Dalida]는 항상 자신의 삼손을 찾아 헤매는 운명에서벗어나지 못한다.

 파리 생활 초기에 [Dalida]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처음4년 동안 [Dalida]는 여러 하녀방 (옛날 하녀가 살았던 건물 꼭대기 층의 작은다락방을 고쳐서 학생이나 독신자에게 세를 놓은 방)을 전전하게 되는데1955년 16구에 있는 하녀방에서 살 때는 아직 무명이던 영화배우알랭 들롱이 같은

층의 다른 하녀방에서 살고 있기도 했다.

이 시기에 [Dalida]는 학원에 등록해 노래를 배우는데결국 운명은 그녀를 영화보다는 음악 쪽으로 이끈다.

카바레에서무명가수로 노래를 부르던 [Dalida]는 당시 올림피아 음악당에서 주관한아마추어 노래자랑 참가를

권유받는다.

 

그 당시 유럽1 라디오 방송의 프로그램디렉터이던 [Lucien Morris(뤼시엥 모리스)]가 이 노래자랑을 참관하는데

[Dalida]의미모에 주목한 [Lucien Morris]는 그녀를 가수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2년 후인 1956년[Dalida]가 하룻밤 만에 녹음한 샹송 [Bambino(밤비노)] 디스크가 백만장이 팔리는대히트를 치면서 가수 [Dalida]가 탄생한다.

 

[Dalida]의 매니저가 된 [LucienMorris]의 도움과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수와 매니저로 만난
두 사람은 5년 동안 동거한 끝에 결혼한다.

1961년 4월의 일이다

 

[Dalida]는 1969년 동양철학을 접하면서 가수생활을 접을까망설이기도 했지만 노래의 힘은 너무나도 컸다.

 노래를 단념할 수는없었다.

인생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하고 노래를 새로운 방식으로 부르게 된[Dalida]에게 운명의 가혹한 힘은 그 세력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전 남편이던[Lucien Morris]가 [Dalida]와 이혼한지 3년만인 1970년에 자살한다. 1975년에는[Dalida]와 친한 친구인 가수 [Mike Brant(마이크 브란트)]가 1983년에 다시 셍제르멩백작이라 불린 리샤르 샹프레가 자살했다.

샹프레는[Dalida]가 9년동안 삶을 같이 했었던동반자였다.

 

 [Dalida]는 친구 하나와 사랑하였던 연인 3명을 16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동안에 모두 잃게 되는데 이들은 자살이라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Dalida]의 곁을떠났다.

 한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역설적으로 [Dalida]는이 기간 동안 가장 주옥같은 샹송을 부른다.

 

 음유 시인이자 가수인 [LeoFerre(레오 페레)]의 노래를 리바이벌한 시간과 함께, 그는 갓18세가 지났다,

기다릴게 등의 샹송이 여기에 속한다.

 

[Dalida]가 이 기간 동안 부른 샹송은 대부분 행복을 노래하고있지만 현실에서의 [Dalida]는 점점 더 심한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1962년에 구입한 몽마르트르의 대저택에서 [Dalida]는 일요일마다 측근과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같이하고 토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고독감은 그녀를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집이 감옥처럼 느껴질때 [Dalida]는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기자들을 한없이 귀찮아 하였다. 또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할까생각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Dalida]는 그 집에서 스스로 최후를 맞게 된다.

 금의 목소리를가진 가수 [Dalida]. 1956년 [Dalida]를 위해 처음으로 골드 디스크 상이 만들어졌고1964년에는

플라티나 디스크 상이 만들어 졌는가하면 1981년에는 다시 다이아몬드디스크 상이 [Dalida]를 기리기 위해 창조됐다.

 

프랑스 가요 역사에서 보기드문일이다.

 [Dalida]는 평생 동안 70개의 골드 디스크 상을 받았고 2000곡이넘는 [Dalida]의 샹송 디스크는 세계에서

1억 2천만장이 판매됐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영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했고 모든 옷을 소화해 내는 완벽한 몸매 덕분에

[Yves Saint Laurent(이브 생 로랑)]등 많은 디자이너들이 다투어 옷을 지어주고 싶어 하였던[Dalida]는 생전에

 파리의 의상 유행을 이끄는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또한 레게,트위스트, 디스코 등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고루 소화해 낸 만능 탤런트였다.

 

한가지특이한 사실은 말년에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화려한 의상과 독특한 제스처미국식 할리우드 쇼를

 프랑스에 선보였던 [Dalida]가 앵글로색슨 국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않았다는 것이다.

 [Dalida]가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Dalida]는사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프랑스인들의

기억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2005년에 실시된 과거부터 현재까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100명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녀를꼽았다. 당시 여가수로는 [Edith Piaf(에디뜨 삐아프)]와 [Dalida]만 선정되는 영광을안는다.

만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만 항상 외로움에 떨었던 [Dalida]는 이렇게말했다.

 

 '관중이 내 연인이고 샹송이 내 아이들이다.

인간은 모두 외로운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을 되찾을수 있고 창조할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달리다(Dalida, 1933 ~ 1987)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탈리아계 부모로부터 '욜란다 크리스티나 질리오티

(Iolanda Cristina Gigliotti)'란 이탈리아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삐에뜨로(Pietro)는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한바 있어 달리다는 어릴 적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녀는 1954년 '미스 이집트'뽑혔고, 같은 해 말에 파리로 건너갔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앞세워 프랑스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 데뷔곡 'Bambino ('아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디스크가 백만장이 팔리는 대히트로 가수 '달리다'가 탄생하였고, 인기 샹송가수로 발돋움하여 무려 1000여 곡에

 이르는 곡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화려한 출세에 비해 어수선하였다.

2살 연하 알랭 드롱(Alain Delon)을 비롯한 몇몇 남자들과 염문을 뿌린 뒤 라디오

프로듀서인 뤼시앵 모리스와 결혼했지만, 화가 장 소비에스키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이탈리아 가수 겸 작곡가 루이지 텡코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텡코는 1966년 제17회 '산 레모 가요제'의 결선을 불과 하루 앞두고 입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해버렸다. 

루이지 탱고의 자살이 준 아픈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전 남편 뤼시앙

모리스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랑했던 사람마다 자살로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이 두 죽음의 충격으로 딜리다는 한때 자살을 기도했으나, 오히려  그와 같은 비운이 거듭된 끝에, 그녀의 노래는 전보다 더욱 깊이를 더해갔으며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달리다의 노래는 열정 그 자체로, 성숙하고 풍만한 육체로부터 발산하는 요염한 열정적 매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가창력의 양면이 그녀를 마침내 일류 스타로 끌어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로서의 달리다의 인생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어서 그녀의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이 상처를 입거나

 자살을 하는 불운이 뒤따랐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평생의 절반을 우울증에 시달려 1987년 5월 3일 55세

나이에 수면제 과용으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스스로(?) 마감하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

 

 

'달리다'는 영어권 국가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 중동, 일본에서는 대중의 우상으로 군림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그녀를 참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단지 샹송가수로서의 달리다가 아닌 정말 프랑스인 가슴속에 그녀는 모두의 연인 이었다.

 

 그녀는 미스 이집트로 뽑혔을 만큼 뛰어난 미모를 앞세워 프랑스로

 건너와 영화배우로 데뷔했지만 샹송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프랑스에선 달리다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프랑스 땅에 안치되었다. 몽마르뜨 묘지에 지금도 달리다의 팬들은 꽃을 들고 찾는다.

그렇게 한 시대의 모든이의 사랑을 받았던 달리다는 떠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1000곡에 이르는 주옥같은 곡들은 꾸준히

프랑스인들뿐 아닌 전세계 달리다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