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P SONG & ROCK

Lee Ritenour& Larry Carlton - Room 335

 

 

 

 

 

 

LarryCarlton_3[1]

 

 

 

 

 

 

 



 

 

 

        

 

 

 

 

 

 

 

오는 26일 4년 만에 내한무대에 오르는 재즈 기타리스트 래리 칼튼은 무대에서 오로지 손맛으로, 모든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제공= 유앤아이 커뮤니케이션즈<br />

 

 

 

 

 

 

〈Room335〉는 기타리스트 래리 칼튼(Larry Carlton)의 초창기 시절 대표 연주곡이며, 그 이름이 래리 칼튼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전자기타 ‘Gibson ES-335’ 모델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은 음악 마니아나 뮤지션들은 꽤 많이

 알고 있다.

 

래리 칼튼과 그의 '335 기타'의 역사는 4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주로 스튜디오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면서

1968년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를 발매한 이래 20여 장의 솔로 앨범을 녹음한 40년

 기타 외길 인생 덕분에 래리 칼튼은 최정상의 뮤지션들에게조차 존경 받는 '사부님'이 되었다.

 

그는 마이클 프랭스에서 마이클 잭슨까지, 조니 미첼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ara Streisand)까지, 포 탑스

(Four Tops)에서 스틸리 댄까지를 아우르는 골드 레코드(gold record, 싱글 판으로 100만 매, LP 앨범으로 50만

세트 이상 팔린 레코드의 가수·그룹에 주는 상) 100여 장에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고, 1970년대에는 크루세이더스

(The Crusaders), 1990년대에는 올스타 밴드 포플레이(Fourplay)에 영입된 엘리트 뮤지션이기도 하다.

 

 

 

GRP

 

 

 

 

 

 

 

두 거장의 평범한 만남?


재즈 레이블 GRP의 간판스타 리 릿나워(Lee Ritenour)는 세션맨을 넘어 솔로 아티스트로서,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늘 래리 칼튼과 비교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그가 래리 칼튼과 함께 조인트 앨범을 낸다는 소식은 수많은 재즈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지만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것 별로 없다 했던가.

 

1995년에 나온 앨범 《Larry & Lee》는 두 거장이 서로 눈치를 너무 살폈는지 살짝 '무난한' 앨범이 되고 만 것 같아 아쉬웠다.

재미있는 것은 밥 제임스 등이 주축이 된 4인조 재즈 밴드 포플레이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리 릿나워가 1997년

팀을 떠나자 다름 아닌 래리 칼튼이 그 자리에 들어간 사실이다. 칼튼도 2010년에 포플레이를 탈퇴하고,

 이 부담스러운 두 기타 대가들의 후임에는 척 롭(Chuck Loeb)이 간택되었다.

 

1980년대 말, 불행한 사고까지 극복한 래리 칼튼은 모든 것을 초월한, 그야말로 초절정 고수 도사님 같은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섰는데, 그때 이미 음악과 인생 두 가지를 모두 달관한 듯했다. 2010년 칼튼은 기타리스트 마츠모토 다카히로(松本孝弘)와 함께 녹음한 앨범 《Take Your Pick》으로 네 번째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등 꾸준한 앨범 작업과 라이브 투어를 계속하고 있다.

 

 

 

 


 

 

 

 

 

래리 칼튼이 총에 맞았다고?


1989년 래리 칼튼은 할리우드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 Room335 근처에서 10대들이 겁 없이 쏜 총에 목 부분을

맞아 거의 죽을 뻔한다.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사고였다. 당시 칼튼은 새 앨범을 녹음 중이었는데 총상을 입은 후 재활치료를

하면서 앨범 녹음을 끝까지 해냈다.

그해 말에 나온 새 앨범의 타이틀이 '굳건한 땅 위에(On Solid Ground)'였으니 그와 팬들에게 모두 의미심장한 앨범이 아닐 수 없다.

 

화려한 장식음이나 현란한 속주 따위에는 관심 없으면서도 여섯 줄 기타에 모든 감정을 실어 연주해 내는 그의 소리는 재즈, 록, 그리고 블루스에 실려 언제나 듣는 이를 감동시킨다.

일례로 몇 년 전부터 같이 음반도 내고 투어도 다녔던 기타리스트 스티브 루카서(Steve Lukather)와 연주한 실황을 보면 '사부님' 래리 칼튼의 깊이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슈퍼그룹 토토(Toto)를 이끄는 불세출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루카서의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기타 이펙터

(effector, 전기 신호화한 음을 가공하여 원음과는 다른 음으로 변화시키는 일반적인 기기)들과 앰프, 이퀄라이저

(equalizer, 음의 주파수를 조절하는 기능을 포함하여 음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는 장치)들이 쌓여 있는데,

래리 칼튼은 그 오래된 '구닥다리 335 기타'만 있을 뿐이다.

 

기타리스트라면 누구나 '발가벗는 기분'이라며 겁내는 이른바 '생톤' 기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루카서의 현란하고 기기묘묘한 기타 사운드도 좋지만, 래리 칼튼의 담백한 기타 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역시 사부님의 가르침'이라는 데 식자들은 의견을 같이한다.

 

기타라는 악기는 대략 두 종류, 어쿠스틱과 일렉트릭으로 나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기타(나무통에 쇠줄을 달아 만든 가장 일반적인 기타)와 나일론 줄이 달린 클래식

 기타는 어쿠스틱에 속하며, 록 밴드나 재즈 밴드에서 연주하는 살짝 시끄러운 기타들은 일렉트릭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바이올린 빠진 오케스트라를 상상할 수 없듯이 기타 빠진 록과 팝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수많은 뮤지션들이 기타로 노래하고, 연주하고, 작곡하고, 심지어는 때려 부수거나 불을 지르는 퍼포먼스까지 벌여

우리에게는 매우 친근한 악기다.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훌륭한 기타리스트들이 훌륭한 앨범들을 녹음했다.

그런 기타 앨범들만 써 내려가도 연습장한 권을 가득 채우겠지만, 눈 딱 감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의 앨범 중에서 한 장만 뽑아 무인도에 가는 배낭에 넣으라면 틀림없이 만지작거릴 CD가 있다.

 

 

 

 

 

 

 

 

Larry Carlton

 

 

래리 칼튼이 1986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 《Alone/But Never Alone》은 단짝 친구인 일렉트릭 기타 ES-335를

잠시 손에서 놓고 어쿠스틱 통기타만으로 연주했기에 그에게나 팬들에게나 아주 각별한 앨범이라 할 수 있다.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래리 칼튼이 어쿠스틱이든 일렉트릭이든 멋지게 연주해 내는 희대의 명필임을 알고 있지만, 이 앨범 이전에 그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Alone/But Never Alone》은 일종의 '래리 칼튼 스페셜 에디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도 간간이 방송 배경음악으로 들리는 오프닝 타이틀곡 〈Smiles and Smiles to Go〉를 필두로 자장가 같은

〈Alone/But Never Alone〉까지 총 8곡이 단출하게 들어 있는 이 앨범의 가장 큰 특징은, 재즈를 기반으로 한

크로스오버 사운드에 래리 칼튼의 통기타가 사뿐히 얹혔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사운드는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다지 세련되거나 훌륭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듣기에 너무 밋밋하고 편한 이런 유의 1980~90년대 퓨전재즈 음악들을 '라운지 음악'이라고

 업신여기기도 하지만, 1986년 당시 래리 칼튼과 친구들[아브라함 라보리엘(Abraham Laboriel, 베이스),

 

릭 마로타(Rick Marotta, 드럼), 테리 트로터(Terry Trotter, 피아노) 등]이 연주하고 녹음한 이 음악들이 이후의

 수많은 뮤지션과 아티스트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만 재즈, 록, 팝의 틈바구니에 끼여 '내일의 날씨'나 '○○○의 음악□□' 따위의 배경음악으로 무난하게, 그리고 줄기차게 깔려왔던 이런 크로스오버-퓨전 음악들의 진면목을 음악 애호가들이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학창 시절에 《Alone/But Never Alone》 앨범을 턴테이블에 올려놓으면 늘 A면만을 즐겨 들었다. 특히 두 번째 곡 〈Perfect Peace〉의 평화로움과 세 번째 곡 〈Carrying You〉의 사랑스러움을 좋아했다.

그리고 A면 마지막 곡 〈The Lord's Prayer〉를 들으며 늘 래리가 치는 기타가 내 방에 뒹굴고 있는 저 기타와 정녕 같은 종류의 악기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인터넷과 유튜브(Youtube)의 보급으로 기타라는 악기가 다시금 각광받고, 사랑받고 있다. 수천만의 조회수를

자랑하는 기타 연주들을 찾아보면,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좀 어리둥절해진다.

 

 게다가 유튜브 이전에 이미 유명했던 존 맥러플린, 알 디 메올라(Al Di Meola), 토미 엠마뉴엘(Tommy Emmanuel), 아드리안 레그(Adrian Legg), 비렐리 라그렌(Biréli Lagrène), 실뱅 뤽(Sylvain Luc) 등의 대가들이 엄청난 테크닉으로 통기타의 한계를 보여 줄 때마다 혀를 내두르며 놀라지만 테크닉은 늘 더 발전된 테크닉에 잊히는 법.

 마음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만들어 주는 래리 칼튼의 앨범 《Alone/But Never Alone》이야말로 "통기타!" 하면

떠오르는 첫 손가락이다

 

 

 

 

 

 

 

 

 

 

 

톤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다면 일류 기타리스트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언제 어디서 듣더라도 아! 바로 저 음색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듣는 사람들이 알아 차려야만

진정한 프로 뮤지션인 것이다."

 

부드럽고 편안한 퓨전재즈 기타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래리 칼튼.

그는 또한 작곡자로 보컬리스트로 그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스튜디오 기타 세션주자를 시작으로 탁월한 연주실력을 들려준 래리 칼튼은 블루스

필(feel)을 제대로 간직한 재즈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국 내에서 음반 녹음작업 시 가장 많이 부름을 받는 세션맨으로서 1970년대

부터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세련된 기타 플레이를 선보이며 팝 음악계에 '백만 응원군'과 같은 연주자로 부상한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 않는 정확한 연주실력, 날이 선 듯한 날카로움이 배어나는 그의 메이저 레이블 첫 리더 작

[Larry Carlton](1978)은 이미 오래 전 국내 해적판 시장을 통해 유통되며 수많은 일렉트릭 기타연주 지망생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래리 칼튼은 1948년 LA교외의 토렌스에서 로렌스 어진 칼튼(Lawrence Eugene Carlton)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6살 때부터 기타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10살 때 라디오를 통해서 조 패스(Joe Pass)의 음악을 듣고 재즈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래리는 래리 칼튼 트리오를 조직해 LA의 클럽가에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때부터 재즈와 블루스 음악에 차츰 관심을 갖게 되어 Joe Pass와 B.B. King의 연주 스타일을 완전히 터득하고

난 다음부터는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와 바니 케셀(Barney Kessel) 그리고 블루스 연주자들이 동시에 그에게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마력 같은 솔로 즉흥 연주를 남겼던 테너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은 강렬한 솔로 연주에

능한 재즈 기타리스트로서 내공을 다지는데 도움을 줬다.

그는 기타 연주기량을 고급 나이트클럽과 유명한 Los Angeles 스튜디오에서 갈고 닦았다.

 

고교 졸업 후엔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 편곡 지휘 등을 익혔다. 이즈음 래리는 여러 컨테스트에도 참가해 최우수 솔로 기타리스트 상을 휩쓸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래리는 이름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고, 그러한 명성이 계속되자 대학공부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너무 바빠’ 대학을 중퇴하게되었다.

 20세가 되던 1968년, 래리 칼튼은 독립 레이블 UNI를 통해 그의 첫 앨범[With Little Help From My Friend]를

발표한다.

 

자신의 곡이 아닌 비틀즈의 명곡들을 그의 깔끔한 기타연주로 해석한 첫 앨범은 현재에 와서도 자신이 평하길

'함량 미달'이라고 하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포드 자동차 커머셜(상업 광고) 배경 음악을 담당했던 전속 밴드

 더 고잉 씽(The Going Thing)에 가입할 기회를 얻는다. 1969년 여름 The 5th Dimension의 전미 투어에 참가하는 것을 계기로 본격 세션 기타리스트로의 길을 걷게되어 1970년부터 스튜디오 세션, 녹음 연주회를 시작하였다.

 

1969년경에 래리는 전 미국인이 다 아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해 12월부터 시작된 NBC TV의 [미세스 알파벳]이라는 어린이 대상 프로에 백 뮤지션으로서가 아니라 주역급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이 프로에서 그는 ‘래리 기타’라는 코너를 통해 주제가를 작곡 연주해 많은 어린이들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어린이들 사이에 '깁슨 기타 아저씨'로 통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그는 LA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세션 기타리스트가 되었고 이런 일들을 통해 컨트리, 록, 블루스, 재즈 등 다양한 장르들을 몸에 익혀갔다.

 

또한 1972년에 블루 썸(Blue Thumb)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Singing/Playing]이란 솔로앨범을 발표하였다.

 1971년에는 당시 대중적인 재즈 펑크(jazz Funk)로의 변신을 감행한 재즈 퓨전 밴드 크루세이더즈즈(Crusaders)의 객원 연주자로 초빙된다.

 

 [Crusaders 1](1971)에서부터 귀에 아른거리는 훅(hook)이 감지되는 기타 솔로를 선보인 래리 칼튼은 이후

1976년까지 크루세이더즈 이름으로 발표한 13장의 음반에서 일렉트릭 기타 세션으로 참여한다.

1년에 평균 50일 이상을 크루세이더즈와 함께 한 래리 칼튼은 이를 계기로 흑인 블루스의 느낌이 재대로 배어있는

 기타 연주의 실력을 축적했다.

 

 그는 크루세이더즈와 투어를 하는 동안에도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백 편의 레코드를 취입하기 위하여 스튜디오 세션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리듬적이며 블루스적인 스타일을 개발한 것은 바로 크루세이더즈와 함께 할 때부터였다. 그는 100편 이상의 골드 앨범을 발매하였다.

 

수많은 Los Angeles 스튜디오 뮤지션들과 같이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래리 칼튼도 수년 전에 솔로리스트로 독립해서 용감하게 혼자 나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돈도 벌고 유명한 뮤지션들과 녹음도하며 위험 부담율이 적고 좀더 편안한 세션맨으로 현직을 그냥 계속 할 것인지, 이 문제를 놓고 취사선택의 기로에 써 있은 적이 있었다.

 

전자 기타 연주자들을 위하여 다행히 그는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1978년이래 Warner Bros., MCA, GRP Records 등에서 독자적인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내 놓았다.

1970년대와 80년대 초부터 Carlton의 스튜디오 Credits, 연주자들 중에는 Steely Dan, Joni Mitchell, Michael

Jackson, Sammy Davis Jr., Herb Alpert, Quincy Jones, Bobby Bland, Dolly Parton, Linda Ronstadt 외

수많은 뮤지션들과 그룹 등이 포함된다.

 

특히 포크 록의 여장부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 재즈 록을 표방하며 발표했던 [Court & Spark](1974)에서

래리 칼튼의 기타 연주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아갈 듯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며 그 앨범이 재즈 록으로의

색채를 갖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재즈 록 밴드 스틸리 댄(Steely Dan)의 1976년 앨범 [Royal Scam]에 수록된 "Kid Charlemagne"에서 들려준

그의 섬뜩한 기타 솔로는 록 전문지 <롤링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기타 세션'들 중 하나로 뽑히는

영광도 얻는다.

 

세션 활동 중에도 자신의 솔로 앨범을 틈틈이 구상해오면서 1973년 독립 레이블 블루 섬(Blue Thum)을 통해 두 번째 솔로 앨범 [Playing/Singing]을 발표했고, 이후 1977년 6년 간 함께 연주해온 크루세이더즈를 떠나 자신의 집에

'Room 335'라 불리는 스튜디오를 완공시키고 여기서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하고 곡을 쓴 연주 앨범제작에 몰두한다.

 

 

그의 실질적인 첫 리더작이자 메이저 레이블인 워너 브라더사를 통해 발표한 [Larry Carlton](1978)은 치밀한 곡

구성력, 손색없는 연주력, 팽팽한 긴장감의 스피드 3박자가 어우러진 보기 드문 재즈 퓨전 명반이었다.

 같은 해 일본에서 화제를 모았던 [Mr. 335 Live in Japan]을 발표, ES 335 스테레오 기타와 밸리 아트 스트래토

 캐스터 기타를 라이브 공연서 능수 능란하게 연주해낸다.

 

 이후 워너브라더사에서 잇따라 [Strike Twice](1980), [Sleepwalk](1981), [Eight Time up](1982),

[Friends](1983)를 내놓는다. 특히 [Friends]엔 재즈 보컬 알 자로(Al Jearreu) 참여, 그의 독특한 스캣 연주를 들려준 "Tequila'에 힘입어 1984년 그래미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한다.

 

이후 MCA로 이적,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만 꾸며진 [Discovery](1986)에서 래리 칼튼은 1980년대 백인 소울 가수 마이클 맥도널드(Michael Mcdonald)의 곡 "Minute by minute"를 감칠맛 나는 기타 연주곡으로 해석, 이듬해

 그래미상 '최우수 팝 연주'부문 상을 받는다.

같은 해 발표된 라이브 명반 [Last Nite](1987) 역시 그래미상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 부문에 노미네이트된다.

 

한창 음악적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1988년 [On Solid Ground]앨범 작업 도중 어처구니없는 총격 사고를 당한다.

California Burbank 근처에 있는 그의 개인 소유 스튜디오 밖에서 총기를 휘두르는 소년들 때문에 목에 총을 맞았다.

 

 그 총탄은 그의 성대를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영구적인 정신 충격을 남기는 심각한 신경 장애를 일으켰다.

그러나 철저한 치료와 확고 부동한 마음가짐으로 1989년 앨범 [On Solid Ground] 작업을 완성하였다.

 

래리 칼튼은 이유 없는 총기 난사로 인한 무모한 희생자를 돕기 위한 비영리 단체, Helping Innnocent People

 (HIP)를 설립하였다.

Carlton이 1996년 GRP 레코드사에서 최근에 발매한 두 편의 앨범은 [Gift],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등이다.

 

그외 1990년 첫 베스트 앨범 [Collection], 1992년 작 [Kid Gloves], 1993년 작 [Renegade Gentleman]이 있다. 그는 계속 1995년 Edsel에 [Playing /Singing]을 발매하였다.

 

특히 그의 라이벌이자 스튜디오 세션 연주자로 오랫동안 각광받았던 재즈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Lee Litner)와 함께 한 1995년 작 [Larry & Lee]는 1990년대 발표한 재즈 기타연주 명반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후 1998년부터 재즈 팝 그룹 포 플레이(Four play)에서 리 릿나워를 대신해 정규 멤버로 활동한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새 세기가 시작된 2001년, 그룹 토토(Toto)출신 기타리스트 스티브 루카서(Steve Lukather)와 함께 한 불꽃튀는 연주력 대결이 압권인 [No substitution: Live in Osaka]를 발표, 그를 애타게 기다려온 팬들에게 다시 한번 화려한 기타연주를 선사했다.

 

대부분의 기타리스트들이 스케일을 패턴으로 해서 연주하지만 래리 칼튼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는 스케일이

느껴지지 않는 멋진 보이싱으로 마치 노래하는 듯한 연주를 구사하는 것이다.

특정 스케일을 연속시켜 프레이즈할 때도 어딘가에 포인트를 주어 변화를 갖게 해 메카니컬한 애드립이 되는걸

 억제하고 있다.

 

 또한 그의 음악성에서는 기본적으로 블루스를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을 더욱 살리기 위해 재즈의 스케일이나 코드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솔로 이외에 리듬기타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 오른손의 다운과 업 스트로크 모션을 한껏 이용해 16비트 리듬거팅의 교과서적인 연주를 행한다.

"Kid Charlemagne"-스틸리 댄-, "Chain Reaction"-크루세이더즈- 등들어보면 배킹에 바리에이션을 가하며 시종

변화를 주는 지(知)적인 리듬기타를 접할 수 있다.

 

 

 

 

 

 

 

 

'팻메스니', '리 릿나워'등과 함께 재즈 기타 음악계의 최고 거장연주자로 손꼽히는 래리 칼튼은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기타를 연주하며 천재성을 보여준 그는 고등학교 시절 기타리스트 '조 패스'와 '존 콜트레인'등의 영향으로

재즈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B.B 킹'의 영향으로 블루스 음악에 빠져들었다. 1968년 자신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프로 뮤지션으로의 길에 들어선 그는 다양한 세션 활동과 라이블르 통해 서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기타리스트 중 한명으로 떠올랐고, '피프스 디멘션'의 투어에 합류해 연주하며 경험을 쌓았다.

 

1971년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전기가 되는 해이다. 당시 명성을 떨치던 퓨전재즈 밴드 '더 크루세이더스'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소울이 가미된 리드미컬하고 대중적인 그들의 음악은 '래리 칼튼'에게 있어 다양한 음악적 감수성을

 흡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크루세이더스'와의 6년간의 활동 이외에 '래리 칼튼'은 일급 세션뮤지션으로서 또한 맹활약하였다.

그가 참여한 골드 앨범만해도 100장이 넘는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는 '퀸시 존스', '마이클 잭슨', '폴 앙카', '존 레논'등 초특급 뮤지션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의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으로는 프로듀서로서의 작업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스튜디오 룸 335(Room 335)를 설립한 그는 '바브라 스트라이젠드'나 '조앤 바에즈'등의 앨범 등에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이 시절부터 그의 스튜디오의 이름을 딴 미스터 335(Mr.335)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인기 드라마 시리즈나 '필 콜린스'의 주제곡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영화 의 사운드트랙 등에 참여하며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한 시기이기도 하다.

 

1978년 그는 드디어 워너 브라더스를 통해 메이저 데뷔 앨범을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84년까지 발표한 총 6장의 앨범은 그에게 퓨전 재즈 최고의 기타리스트라는 명성을 안겨 주었고, 또한 '스틸리 댄'의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하여 보여준 화려한 기타 워크는 그에게 많은 음악 팬들의 찬사를 자아냈다. 1986년 MCA로

이적한 그는 아티스트로서 최고의 시기를 맞이한다.

 

앨범 에 수록된 「Minute By Minute 」는 그에게 그래미 어워즈의 영예를 안겨주었고, 이어진 라이브 앨범 또한

그래미에 노미네이트되면서 래리 칼튼은 대중과 평론가들 모두에게 인정받는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굳혀왔다.

래리 칼튼은 갑작스러운 10대 강도의 총격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잠시동안 휴식을 갖게 된다. 그 결과 다음

 앨범인 는 1989년에야 발표되었다.

 

 이 치명적인 사건이후, 그는 HIP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자신과 같은 총격 사고의 희생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이후 90년대에는 래리 칼튼에 있어 잠시 휴식기를 가지며 좀 더 개인적인 활동을 가질 수 있었던 시기였다.

 

 GRP로소속사를 옮긴 이후 몇 장의 앨범을 더 선보인 그는 동료 기타리스트인 '리 릿나워'와 듀엣 앨범을 발표하고,

1997년 부터는 '포플레이'에 가입하는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2000년 다시 워너 브러더스로 돌아온 그는 두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여 이제는 스무스/퓨전 재즈 기타리스트 최고 거장으로서의 면모에 어울리는 음악작업으로 식지 않는 음악적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Los Angeles 스튜디오 뮤지션들과 같이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Larry Carlton도 수년 전에 솔로리스트로
독립해서 용감하게 혼자 나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돈도 벌고 유명한 뮤지션들과 녹음도하며 위험 부담율이

 고 좀더 편안한 세션맨으로 현직을 그냥 계속 할 것인지, 이 문제를 놓고 취사선택의 기로에 써 있은 적이 있었다.

 

 

전자 기타 연주자들을 위하여 다행히 그는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1978년이래 Warner Bros., MCA,

GRP Records  등에서 독자적인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내 놓았다.

1970년대와 80년대 초부터 Carlton의 스튜디오
Credits, 연주자들 중에는 Steely Dan, Joni Mitchell, Michael Jackson, Sammy Davis Jr., Herb Alpert,

 

Quincy Jones, Bobby Bland, Dolly Parton, Linda Ronstadt 외 수많은 뮤지션들과 그룹 등이 포함된다.

 

 

그의 주목할만한 기타연주 앨범 중에는 Joni Mitchell작 "Court and Spark"과 Donald Fagen작 "Nightfly" 등이

있다.

 

Carlton은 1970년대의 대부분을 년간 500편이 넘는 앨범들을 녹음, 취입하는 기타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비록 일찍 1968년 작 "With a Little Help"에서부터 "My Friends (Uni)"까지 그리고 1973년 작

 

 "Singing/Playing" 등 본인 명의로 많은 LP를 제작했지만 그가 1978년 Warner Bros 이전에는 일류 유명

 음반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지 못 하였다.
   Carlton은 6살 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첫 직업적 야간무대 연주 경험은 1962년 식사, 음료를 제공하는 고급 나이트클럽이었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서 Joe Pass를 듣고 난 뒤 재즈와 불루스를 연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Pass. B.B. King의 연주 스타일을 완전히 터득하고 난 다음부터는 Wes Montgomery와 Barney Kessel 그리고 불루스 연주자들이 동시에 그에게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타 연주기량을 고급 나이트클럽과 유명한 Los Angeles 스튜디오에서 갈고 딲았다.

그리고 그는 월남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어느 지방 전문대학과 Long Beach 주립 단과대학에 1년 동안 다녔다.

1968년 Carlton은 Fifth Dimension과 투어를 하고, 1970년 스튜디오 세션, 녹음 연주회를 시작하였다.

 그의 초기 세션 작업에는 Vicki Carr, Andy Williams, Partridge Family 등의 스튜디오 녹음 계약이 포함된다.

 

1971년 Crusaders는 그들의 명칭에서 `재즈`란 단어를 떼버리고 난 직후 Carlton을 그룹에 가입하도록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Carlton은 1976년까지 그들과 함께 하였다.

그가 Crusaders와 투어를 하는 동안에도 모든 장르를 가리지않고 수백 편의 레코드를 취입하기 위하여 스튜디오
션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리듬적이며 불루스적인 스타일을 개발한 것은 바로 그가 Crusaders와 함께 할 때

부터였다.

그는 100편 이상의 골드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의 TV와 영화에 나오는 테마음악은 "Against All Odds" "Who`s the Boss" "Hill Street Blues" 등이다.

 

 

마지막 곡은 1981년 베스트 팝 기악연주 부문 Grammy 상을 받았다. 그리고 1978년 Carlton이 Warner Bros.에서 그의 이름을 딴 데뷔 앨범이 성공한 것은 그가 "Steely Dan`s Royal Scam"을 연주하면서 그의 개척적인 기타

기량을 인정받고 난 직후였다.

 

 

그리고 그는 Warner Bros.에서 4편의 앨범, "Strikes Twice"(1980), "Sleepwalk"(1981), "Eight Times Up"

(1982), "Friends"(1983) 등을 더 발매하였다.

그리고 "Friends"는 Grammy 상에 지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스튜디오 세션 작업을 계속하면서 간간이 투어도 하고 1986년 어쿠스틱 앨범 "Discovery"를 녹음하기 위하여
MCA Records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Michael McDonald의 힛트곡, "Minute by Minute"를 기악 연주곡으로 곡, 녹음하여 1987년 팝 싱글 부문에서 Grammy 상을 받았다.

Carlton의 Live 앨범, "Last Nite"는 1987년에 발매되었는데 재즈 기악 연주부문에서 Grammy 상에 지명도기도

 하였다.

 

Carlton이 MCA에서 on Solid Ground"를 작업하는 동안 난데없이 이유 없는 총기 난사가 발생하여 부상을 입었다. 그는 California Burbank 근처에 있는 그의 개인 소유 스튜디오 335호실 밖에서 총기를 휘두르는 소년들 때문에

 

목에 총을 맞았다.

그 총탄은 그의 성대를 못 쓰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영구적인 정신 충격을 남기는 심각한 신경 장애를 일어켰다.

그러나 철저한 치료와 확고 부동한 마음가짐으로 1989년 Carlton은 앨범, on Solid Ground" 작업을 완성하였다.

 

 

Carlton은 이유 없는 총기 난사로 인한 무모한 회생자를 돕기 위한 비영리 단체, Helping Innnocent People (HIP)를 설립하였다.

Carlton이 1996년 GRP Records에서 최근에 발매한 두 편의 앨범은 "Gift"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등이다.

 

 

그밖에 1990년 작 "Collection", 1992년 작 "Kid Gloves", 1993년 작 "Renegade Gentleman"이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1995년 Edsel에서 "Playing/Singing"을 발매하였다.

그가 총기를 휘두르는 이단자들에 의하여 총상을 입은 후 80년대에 불법 저작물의 비참한 비극을 당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길고 어두은 입원가료와 명예회복 기간을 겨우 끝내고 Carlton의 작품활동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통하여 수년간 계속 꾸준하였다.

 


Carlton은 그의 투어 계획은 조금 줄인 것 같이 보였으나 레코딩 계획은 줄이지 안 했다. 그는 성품이 다정스럽

 따뜻하여 비평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맞이하였다.

 그것은 그의 특이하고, 율동적이며, 온화한 화성과 울려 퍼지는 기타 음색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POP SONG & ROCK' 카테고리의 다른 글

Leo Sayer-More Than I Can Say   (0) 2016.04.04
Eric Clapton -Change the World ,Tears In Heaven  (0) 2016.04.04
Rod McKuen -You   (0) 2016.04.02
Emmylou Harris & Linda Ronstadt-1917   (0) 2016.04.02
Freddie Aquilar-Anak   (0) 201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