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ias A La Vida(생에 대한 감사)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dos luceros que cuando
los abro perfecto distingo lo negro del blanco y en el alto cielo su
fondo estrellado y en las multitudes el hombre que yo amo.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흰것과 검은것, 높은 하늘의 많은 별,
그리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구별 할 수 있는 빛나는 두 눈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oido que en dado
su ancho graba noche y dia, grillos y canarios, martillos, turbinas, ladridos,
chubascos y la voz tan tierna de mi bien amado.
귀뚜라미와 까나리오 소리, 망치소리, 터빈소리, 개짖는 소리, 소나기소리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소리
이런 소리들을 밤낮으로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청각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sonido
y el abedecedario con el las palabras que pienso y declaro madre
amigo hermano y luz alumbrando, la ruta del alma del que estoy amando.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 사랑하는 영혼의 길을 비춰주는 빛
이런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는 단어의 소리와 문자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marcha de
mis pies cansados con ellos anduve ciudades y charcos, playas y
desiertos montanas y llanos y la casa tuya tu calle y tu patio.
도시와 웅덩이, 해변과 사막, 산과 평원
그리고 너의 집과 너의 길, 너의 정원을 걸었던
그 피곤한 나의 다리로 행진을 하게한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el corazon que agita su
marco cuando miro el fruto del cerebro humano, cuando miro al bueno tan
lejos del malo, cuando miro al fondo de tus ojos claros.
인간의 지식의 결실을 볼 때 악에서 아주 먼 선을 볼 때
너의 맑은 두 눈의 깊이를 볼 때 그것을 알고 떨리는 심장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 드립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me ha dado la risa y me ha dado
el llanto. asi yo distingo dicha de quebranto los dos materiales que forman mi canto.
el canto de ustedes que es el mismo canto. el canto de todos que es mi propio canto.
행운과 불행을 내가 구별하게한
웃음과 울음을 내게 준 삶에 감사 드립니다.
웃음과 울음로 내 노래는 만들어졌고
모든이의 노래는 같은 노래이고
모든이의 노래는 내 자신의 노래입니다.
Violeta Parra
Violeta Parra(비올레따 빠라) 는 1917년 10월4일 칠레남부 '뉴브레'지방 시골마을 산까를로스에서 아주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폐병으로 죽고, 엄마는 삯바느질로 생계꾸리며 근근히 살았습니다.
Violeta Parra(비올레따 빠라) 는 집안을 돕기위해 오빠와 여동생들과 술집등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어릴때부터 부모님, 동네 사람들한테 민요를 배웠고, 기타는 혼자 독학했습니다.
그리고 18살 즈음 산티아고로 홀로상경하여 싸구려 주점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빠인 니까노르 빠라가 제발 그런 가짜 노래좀 그만 부르고 시골 농부들이 스페인 사람들한테 받은 유산을 몇세기동안 불러온 진짜배기 노래를 공부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래서 1953년부터 미친듯이 칠레 전역을 다니면서 모든 민요를 다 채록하고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칠레의 진짜 민요와 삶을 알아가고, 그것을 알려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탔고, 엄청난 재능과 열정으로 그것을 이루어내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곡을 창작하고, 유화를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고, 천에 수를 놓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2차레 머물면서 64년도에는 중남미 사람으로선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였습니다.
루부르 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남미 최초의 화가이며 싱어송 라이터로 칠레의 국민적 음악가로 시인으로 추앙을
받는 화려한 경력을 소유하였슴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동안엔 그녀가 무었보다도 사랑하였던 조국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유럽에 건너가서는 칠레를 소개하고 조국에 '민요의 전당'을 다했지만 젊은에술가들의 조그마한 지원만을 이끌어 냈을뿐 힘에겨워 했으며 주위의 몰이해로 더욱더 많은 경제적인어려움을 격으면서도 유팡끼와 마찬가지로 전국을 돌면서
민요를 채집하고, 수집한 노래를 레코드와 라디오를 통해 대중화 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60년도 즈음에 스위스에서 온 한 연하남자(질버트 파브르)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집니다. 깊이 사랑했는데 나이차이도 많았고, 워낙 성격이 강해서 남자가 볼리비아로 떠나버립니다.
두번이나 남자를 붙잡으로 라빠스로 갔는데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남자는 곧 볼리비아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Gracias a la vida는 볼리비아에서 작곡하게 된 곡이고, 66년말 나온 Las ultimas canciones라는 마지막 음반에
마지막 곡으로 수록되었습니다.
67년 2월 5일 자신이 문화센터로 만든 천막에서 자살을 합니다.
실연은 자살 이유 중의 하나일 뿐, 자신의 인생에서 큰 계획이었던 이 문화센터가 실패하자 삶의 환멸을 느끼고 자살을
합니다. 이미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고, 세번째 시도였습니다.
1917년 10월 4일 칠레 남부의 산 카를로에서 출생해 1967년 쉰 살때 권총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눈물과 고통까지 감사 하고자고 노래했던 그녀였다.
비올레따 빠라 Violeta Parra의 삶에는 항상 극단적인 것이 관통하고있었다.
일단 민요를 수집하려고 마음먹으면 그녀는 가정을 비롯한 모든 것을 희생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열정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부당한 폭력이나 사회의 부조리를 보았을 때는 온 몸을 던져 대항했다.연애 또한 일단 빠졌다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안았습니다.
당시 열악한 환경에 살던 광신 노동자나 농민속으로 파고들어 민요를 수집하면서 그들의 삶과 열악한 환경에 느낀 분노는 그녀로 하여금 공산당에 입당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해 목표를 이루고야 말지만 그 대신 자신의 수입이 없어지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곤경에 빠져도 결코신경을 쓰지 않았다.
실제로 비올레따빠라의 아들들은 제대로 정규교육도 받을수가 없었으며 빠라의 파리여행으로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못한 막내아들은 칠레에서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가나 시선을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향해 평생을 달려갔던 빠라를 세상의 잣대만으로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지나칠 정도의 순수함이 그녀의 정신세계를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갔을 뿐, 순수한 열정이 피워낸 창조적인 재능은그녀의 시와 노래에서 빛을 보았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감동의세계를 열어 놓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업적은 비올레따 빠라를 사랑과 연대를 주제로한 라틴아메리카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로 기록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Gracias a la vida(인생에 대한 감사) 는 비올레따 빠라의 대표곡으로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좌절하지 않는
희망의 메시지가 충만한 누에바 깐시온 역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겨레] [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유럽이 러시아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로 자욱했던 1917년, 가난하지만 평온했던 칠레 남부 시골,
마을의 음악교사인 아버지와 아홉 아이를 기르며 틈틈이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비올레타 파라는 열두 살에 작곡을 시작해 동네 아이들 앞에서 들려주고 산티아고 국립음악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작곡한 노래들을 동네 술집과 서커스, 마을축제 등에서 연주하고 다녔다.
세 살 터울의 오빠 니카노르 파라는 피노체트 군부 독재를 마감시키기까지 거리의 언어와 비속한 표현,
법률 용어, 장례식 조문, 정치 연설에 사용되는 진부한 표현을 자기 시에 구겨넣으며 부적절한 조합을 통해
유머와 풍자를 끌어냈던 반(反)시 운동의 기수로, 군사정권에 의해 살해된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등과
뜻을 함께하며 중남미 현대시를 주도한 대표 시인인데,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오빠의 독려와 지원에 힘입어
그녀는 1952년부터 전국을 돌며 구전민요와 노랫가락을 수집한다.
이 여행에서 남미의 다양한 소리와 문화에 눈을 뜨고, 정형화된 외래 음악을 극복하는 민속음악의
뿌리 찾기와 보존에 열정을 바쳐 전통음악을 대중가요로 새로 빚은 이른바 ‘누에바 칸시온’(새 노래) 운동을 일으켰다.
사회비판과 저항정신으로 빛나는 이 노래들은 1973년 쿠데타 이후 악랄한 군사독재 치하에서
고통 받던 칠레 민중에게 희망과 위로의 원천이었다.
순결하고 고지식한 비올레타는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탄압에 결연한 의지로 저항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가난한 삶을 끌어안고 그들과 연대했지만, 계급적인 적대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가톨릭 정서에 뿌리를 둔 휴머니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서정적인 감성으로 인간의 삶에 가해지는
제도적 굴레와 억압에 묵묵히 저항하는 쪽이었다.
이러한 서정성은 엄마의 재능을 이어받은 그녀의 두 딸을 비롯해 중남미의 ‘새 노래 운동’을 주도한 음악인들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사회당의 당원으로 열심히 활동한 덕에, 냉전 시대 동유럽과 서유럽 모두에서 대대적인 찬사와 환영을 받으며
순회공연을 하던 그녀는, 유럽 각지에서 만난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통해 자기 안에 있던 다른 재능들을 일깨워
감성이 뭉클뭉클한 시를 지었다.
어느 날은 문득 전문 요리사 솜씨를 능가하는 뛰어난 솜씨로 만찬을 준비하고 ‘낭송의 밤’을 여는가 하면,
그림과 도자기와 수예에도 놀라운 기량을 드러내 모든 분야마다 ‘비올레타 스타일’을 창조해내는 식이었다.
하지만 팔방미인과 미인박명이란 말은 딱 그녀를 두고 한 말이다.
그토록 탁월하고 총명하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비올레타 파라의 죽음은 너무 안타깝고 김이 빠진다.
1967년 반전 혹은 평화운동의 상징으로 꼽히는 존 바에즈와 메르체데스 소사의 목소리로도
유명한 ‘삶에 대한 감사’(gracias a la vida)라는 감동의 시를 쓰고 노래까지 붙인 그녀,
쉰이 채 안 된 나이로 실연의 아픔과 경제적 곤궁을 비관한 나머지 그 ‘감사한 삶’을 자살로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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