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DERNISM 음악

Milva- Immer Und Ewig (Now And Forever) , Nessuno Di Voi

 

 

 

 

 

 


Milva -Milva- Immer Und Ewig (Now And Forever) 

 

 

 

 

 

Immer Und Ewig (Now And Forever)

 

 

 

 


Manchmal werd ich müde
Von den Zweifeln,
die tief in mir sind.
Wenn ich fast schon aufgeb`,
Gibst du der ganzen
Welt wieder Sinn.

간혹 난 내속에 가득해진 절망으로 아주 지칠때가 있어
내가 무언가를 거의 포기하려 할때
넌 이 모든 세상의 의미를 다시 알게해 줘

Wenn ich nicht weiß wohin
Lässt du mich nie allein.
Immer und ewig
will ich bei Dir sein.

만약 내가 대체 어디로 향해갈지 모를때
너는 나를 절대로 혼자두진 않지
이 세상 언제 어디까지나 난 너와 함꼐 있을거야

Wenn ich dich umarme
Und Dir in die Augen seh
Dann bin ich verzaubert
Ich weiß,
dass ich nie von dir geh.

내가 너를 꼭 안고서
네 눈을 바라보면
난 마치 마술에 걸린듯 해
난 알아, 난 절대로 너를 떠날 수 없다는걸

Du hast mir beigebracht,
wer liebt , ist nicht allein.
Immer und ewig
will ich bei Dir sein.

넌 내게 가르쳐 줬어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거
이 세상 언제까지나 난 너와 함께 있을거야

Du nimmst mir meine Ängste,
Gibst mir neuen Mut,
Du weißt gar nicht,
wie gut mir das tut.

너는 내 모든 두려움을 잊게해줘
너는 내게 새로운 용기를 줘
넌 정말 모를거야,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Oh ich schließe die Augen
Und traue dem Glück,
Trau dem Glück.

아~~나는 눈을 감아
그리고 행복이란걸 믿어
행복이란걸 믿어

Und fällt der Mond vom Himmel
Sind wir nicht allein.

그러면 저 달이 하늘부터 내려와
우린 절대로 혼자가 아닌거야

Immer und ewig
will ich bei Dir sein
Immer und ewig
werd ich bei Dir sein

언제나 어디까지나 나는 너와 함꼐 있을거야
언제나 어디가지나 나는 너의 곁에 머물게 될거야

 

 

 



 

 

 

Nessuno Di Voi

(서글픈 사랑)

 

 

 

Nessuno Di Voi, mi parla di lui mi dice la verita.
어느 누구 나에게 그에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네

Che serve ora mai la vostra pieta

se niente mi restera
잃을 것 없는 나에게 너희들의

배려가 무슨 소용있으리..

Seuno di voi ha amato cosi allora mi capira
Capira ...Capira
누군가 나처럼 사랑했다면 이해 할꺼야...

Se mi ascolti, amore mio, torna da me
Qui da me, io ti voglio troppo bene e non vivrei
Senza te!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돌아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나는 너없이 살 수 없어

Non piango per me io piango per lui
Nessuno lo capira
Come me!

내 자신이 아니라 그를 위해 나는 울지
누구도 나만큼 그를 이해 하지 못해.

Nessuno Di Voi, Nessuno Di Voi,

mi dice la verita.
Se un'altra econ lui che import!!!!!!!!!!!!!!a

io so che poi lo perdonero

어느 누구 나에게 그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네
다른 여자가 그의 옆에 있다한들...
내가 그를 용서할 것이라는 것 난 알고 있어

Dovesei? Con chi sei?
어디서 누구랑 있니?

Se mi scolti amore mio, torna da me,
Qui da me, io ti voglio troppo bene e mon vivrei
Senza te!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돌아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없이 살 수 없어

Non piango per me io piango per lui
Nessuno lo capira come me!

내 자신이 아니라 그를 위해 나는 울지
누구도 나만큼 그를 이해 하지 못해.

Se mi scolti amore mio, torna da me,
Qui da me, io ti voglio troppo bene e mon vivrei
Senza te...Non vivrei ...Senza te...Senza te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돌아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없이 살 수 없어

 

 

 

 

 

 

 


 

 

프랑스의 대중음악 샹송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아마도 오래전 고인이 된 에디뜨 삐아프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대중음악인 칸소네를 들으면 곧바로 Milva가 떠오를 만큼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리아

가요계 여왕의 자리를 떠나본 적이 없는 칸소네의 영원한 연인이다.

밀바 마리아 비올가티라는 본명을 가진 밀바는 59년 이탈리아 국영방송(RAI)이 주최한 오페라 콘테스트에서

우승했으나 곧 칸소네 가수로 방향을 수정해 이탈리아 무대에 본격 등장한 이후, 노래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밀바의

고향 이름을 딴 '코오로의 암표범'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연극예술과 칸소네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열정적이고도 왕성한 활동으로 지속적 황금기를 구가하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노래할 수 없다'는 말로 노래에 대한 뜨거운 애착을 표현하는 밀바는 지난 1972년 내한공연 때 흔히들 외국의 인기가수들이 종종 한국의 청중들을 무시하던 태도와는 달리 깨끗하고도 공손한 무대매너와 최선을 다한

 열창으로 한국팬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산레모 가요제는 세계 3대 가요제의 하나로 니콜라 디바리, 나다, 지아니 모란디, 질리오라 징켓티 등 무수한 스타들을 배출한 칸소네의 전통적 산실로 인정받고 있지만 밀바는 61년 '서랍속의 바다'라는 노래로 이 가요제에서 3위로 입상한 이래 한 번도 빠짐 없이 산레모 가요제에 참가해 모두 입상하는 경력으로도 더욱 유명하다.

한때 연극예술에 집착해 68년 주연한 뮤지컬 '깃발 속의 천사'는 로마에서 9개월이라는 장기공연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고 그 화려한 연기생활 뒤에는 활동에 몰두하는 탓에서 비롯되는 남편과의 불화로 8년만에 파경을 맞는 불행도

함께 겪게 되지만, 이후 더욱 성숙한 목소리로 '칸소네계의 마리아 칼라스'로 인정받게 되었다.

80년에는 데미스 루소스가 리더로 있던 그룹 '아프로디테스 챠일드'의 키보드 주자 반젤리스와 함께 독일어로 발매한

음반의 성공으로 재능을 인정받는가 하면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에도 능통해 이탈리아보다 유럽에서 더욱 많은 판매고를 올리는 이상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유구한 가톨릭 교회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빛나는 예술문화의 전통을 이어온 나라. 지금도 이탈리아는 관광객들에게

조상이 후손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실감케 해줄 정도로 국가 자체가 곧 예술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뿐더러 세기의

 미술가 미켈 안젤로, 치마부에, 라파엘로, 오페라의 신화 카루소, 베르디나 파바로디 등을 비롯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예술의 본고장이다.

그래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의 노래 속에서조차 이들의 예술적 영감이 스며있음을 느낀다는 이들도 많이 있다.

축제의 노래(Aria Di Festa), 비련(Nessuno Di Voi), 사랑은 먼 곳에서(Da Troppo Tempo), 미롤르(Millor)등

고전적 향수를 가득 담은 밀바의 수많은 노래들은 보통 30세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무대의 뒤편으로 쓸쓸히

 사라져갔던 다른 이탈리아 여성가수들의 전례를 넘어서 오늘날까지도 세계를 오가며 오페라 무대는 물론, 칸소네

 무대에서도 영원한 사랑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특히 밀바의 'Da Troppo Tempo'는 사랑을 기다리는 설레임과 그를 보내야 하는 여인의 쓸쓸함을 주제로 한 노래로

 그녀의 진가는 물론 클래시컬한 칸소네의 매력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해주는 빛나는 명곡으로 오래 오래 기억되고 있다.

 

 

 

 

 

 

 

 


 

[[ 밀바(마리아 일바 비올카티)는 1939년 7월 17일 이태리 페라라의 고로에서 태어났다.
1959년 이태리 국영 방송국인 RAI에서 주최하는 신인발굴대회에 참가하였고 7,600명의 참가자 가운데 1위를

 차지하였다. 이어 밀바는 에디뜨 삐아프의 유명곡들을 자신의 이태리어 버전으로 녹음한 'Milord(각하)' 앨범을 발표하였다.

1961년 밀바는 산레모 가요제에 'Il Mare nel Cassetto(서랍속의 바다)'로 3등상을 수상하였다. 밀바는 그해 이태리 레코드 비평가들로부터 '올해의 가수'로 선정되었다.

 밀바는 영화에도 출연하기 시작했는데, 당대 유명배우였던 지나 롤로브리지다 와 엔리코 마리아 살레르모와 함께 '

이포리타의 아름다움' 이란 영화로 데뷔하였다.

1963년은 이제까지 주로 이태리 곡들을 불러왔던 밀바에게 변화가 시작되는 해로 기록되는데, 영가(靈歌), 가스펠

그리고 저항가요등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당시 나온 음반 ‘Quaggiu in Filanda(여기 핀란다에서)’ 와 ‘John Brown(존 브라운)’은 대표적으로 사랑받은 곡이다.

1965년에 밀바는 '밀라노의 작은 극장'에 처음 서게된다.

그리고 'Exodus' (출애굽기), 'fischia il vento' (바람이 부네)' 'Addio Lugano Bella (안녕, 아름다운 루가노)'와

 같은 곡이 수록된 앨범 'Songs of Freedom (자유의 노래)'을 녹음한다.

 폴 팻이 밀바를 초대해 해방 20주년에 그녀의 곡들을 노래했고, 다시 밀바는 리사이틀 '그렇다면 이것이 위기인가?'

의 주인공인 게오르그 스트레러와 함께 작업하였다.

 

이 작업은 '밀라노의 작은 극장'의 이태리 투어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아울러 게오르그 스트레러가 감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와 노래'로 이른바 브레히트(Brecht)적인 쇼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1968년 밀바는 지안프란코 데 보시오의 '루잔테'에서 산문극으로도 데뷔했으며 이를 계기로 북구 유럽을 투어했다.

1969년에는 여배우로서로도 정점에 이르는데 지노 브라르니에리와 함께 출연한 가리네이와 지오바니니가 감독한

'Angels in Flag(깃속의 천사)'로 '실버 마스크'를 획득했다.

1972년 밀바는 그리피 패트론 제작의 영화 'Of love is died(사랑은 가고)에 실바나 망가나와 루크 메렌다와

 출연하면서 영화계로 다시 발을 돌렸다.

베니스에서는 'The Philander(연애주의자)'라는 영화의 최고 판매고로 '곤돌라 도로'를 획득하기도 했다.

 

1972년 앨피로 발매된 'Milva signs Brecht(밀바 브레히트를 노래하다)'로 독일 비평가들이 수상하는 음반상을

수상했다. 밀바는 필리포 지그스 감독의 두 전쟁사이의 노래 Songs between the two wars의 삽입곡 Nulla

Rimpiangero(Je ne Regrette rien)으로 베를린 페스티발에서 최고의 영애를 안았으며 이곡으로 이태리와

유럽전체를 오랫동안 투어했다.

1978년 밀바는 밀키스 테오도라키스와 음반을 발표했으며 이 앨범은 곧바로 독일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Les Enfants du Piree(Uno a te uno a me)' (피레의 아이들(하나는 너를 위해, 하나는 나를 위해)'라는 곡은

앨범의 백미로 꼽힌다.

 

1989년에 밀바는아스토르 피아졸라와 공연을 가졌으며, 결과물인 탱고 델라 겔로시아 와 탱고 델라 카피네레는 주요

유럽 페스티발의 무대에 올랐다.

Et Maintenat(Che mi faro), Nulla Rimpiangero(Je ne Regrette rien)의 공연과 함께 빠리의 카지노 극장에서

 협연했다. 일본에서의 최근의 공연, 에디뜨 삐아프 헌정 리사이틀등을 비롯해 아직까지도 놀랄만한 성공이 계속되고

 있으며 레코딩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

프랑스의 대중음악 샹송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아마도 오래전 고인이 된 에디뜨 삐아프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대중음악인 칸소네를 들으면 곧바로 Milva(63)가 떠오를 만큼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리아

가요계 여왕의 자리를 떠나본 적이 없는 칸소네의 영원한 연인이다.

 

밀바 마리아 비올가티라는 본명을 가진 밀바는 59년 이탈리아 국영방송(RAI)이 주최한 오페라 콘테스트에서

 우승했으나 곧 칸소네 가수로 방향을 수정해 이탈리아 무대에 본격 등장한 이후, 노래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밀바의 고

향 이름을 딴 '코오로의 암표범'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연극예술과 칸소네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열정적이고도 왕성한 활동으로 지속적 황금기를 구가하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노래할 수 없다'는 말로 노래에 대한 뜨거운 애착을 표현하는 밀바는 지난 1972년 내한공연 때 흔히들 외국의 인기가수들이 종종 한국의 청중들을 무시하던 태도와는 달리 깨끗하고도 공손한 무대매너와 최선을 다한

 열창으로 한국팬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산레모 가요제는 세계 3대 가요제의 하나로 니콜라 디바리, 나다, 지아니 모란디, 질리오라 징켓티 등

무수한 스타들을 배출한 칸소네의 전통적 산실로 인정받고 있지만 밀바는 61년 '서랍속의 바다'라는 노래로 이 가요제에서 3위로 입상한 이래 한 번도 빠짐 없이 산레모 가요제에 참가해 모두 입상하는 경력으로도 더욱 유명하다.

한때 연극예술에 집착해 68년 주연한 뮤지컬 '깃발 속의 천사'는 로마에서 9개월이라는 장기공연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고 그 화려한 연기생활 뒤에는 활동에 몰두하는 탓에서 비롯되는 남편과의 불화로 8년만에 파경을 맞는 불행도

함께 겪게 되지만, 이후 더욱 성숙한 목소리로 '칸소네계의 마리아 칼라스'로 인정받게 되었다.

80년에는 데미스 루소스가 리더로 있던 그룹 '아프로디테스 챠일드'의 키보드 주자 반젤리스와 함께 독일어로 발매한

음반의 성공으로 재능을 인정받는가 하면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에도 능통해 이탈리아보다 유럽에서 더욱 많은

 판매고를 올리는 이상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유구한 가톨릭 교회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빛나는 예술문화의 전통을 이어온 나라. 지금도 이탈리아는 관광객들에게

조상이 후손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실감케 해줄 정도로 국가 자체가 곧 예술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뿐더러 세기의

미술가 미켈 안젤로, 치마부에, 라파엘로, 오페라의 신화 카루소, 베르디나 파바로디 등을 비롯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예술의 본고장이다.

그래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의 노래 속에서조차 이들의 예술적 영감이 스며있음을 느낀다는 이들도 많이 있다.

축제의 노래(Aria Di Festa), 비련(Nessuno Di Voi), 사랑은 먼 곳에서(Da Troppo Tempo), 미롤르(Millor)등

 고전적 향수를 가득 담은 밀바의 수많은 노래들은 보통 30세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무대의 뒤편으로 쓸쓸히

사라져갔던 다른 이탈리아 여성가수들의 전례를 넘어서 오늘날까지도 세계를 오가며 오페라 무대는 물론, 칸소네

무대에서도 영원한 사랑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특히 밀바의 'Da Troppo Tempo'는 사랑을 기다리는 설레임과 그를 보내야 하는 여인의 쓸쓸함을 주제로 한 노래로

 그녀의 진가는 물론 클래시컬한 칸소네의 매력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해주는 빛나는 명곡으로 오래 오래 기억되고 있다. 1939년 7월 18일 Goro(Fe)출생으로 세계적인 대형 가수이자 배우이다.

본명은 Maria Ilva Biolcati이며 1955년 Bologna로 이주하여 Emilia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야간 사교 클럽에

 Sabrina라는 이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Rai에서 개최된 신인 Concorso에서 우승하여 첫 번째 명성을 얻었고 1960년 Pantera di Goro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음악 세계에 나서게 되었다.

1961년 Sanremo 가요제에 Debut하여 [Mare del cassetto]로 3위에 입상하였으며 같은 해에

‘La bellezza di Ippolita’라는 영화에 처음 출연하였다.

1965년에는 Giorgio Strehler와 함께 극장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Brechtiano의 작품에서 훌륭한 연출을 하였고 특히 독일에서 평가를 받았다.

많은 훌륭한 작품중에는 Milva canta Bertold Brecht(1965), Lo Bertold Brecht(1967-1968)

L'opera da tre soldi e Canto di un mostro lusitano(1971) 등이 있다.
이후 1973년 Sanremo 가요제에서 [Da troppo tempo]로 3위에 입상한 바 있다.


70년대 초엽이던가. 밀바가 우리나라를 찾아와 지금은 불에 타 사라진 시민회관에서 공연했을 때였다. 그때 기자들이

 물어보았다.
"당신은 세계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가수라고 생각합니까?"

그때 한 밀바의 답변이 그녀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밀바는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떤 여가수 이름을 대면서, 그녀가 자기보다 훌륭한 단 한사람의 가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결국 자기가 가장 위대하다는 뜻인 셈이다. 이런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 밀바는 우리의 패티김처럼 이른바 카리스마를

지닌 대형가수의 전형이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달라진 풍토 가운데 특히 큰 인물, 위인이 사라진 점이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가령 정치가를 예로들면 루스벨트, 드골, 모택동, 이런 인물들에게서는 거대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앞서게

 되는데 반해, 예컨대 오늘날의 클린턴 대통령을 두고 생각해 보면, 명석하고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인정할 수 있어도

위대하다는 이미지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큰 인물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마도 그건 개인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세태의 변화 탓인 것 같다.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고 까발기는 풍토가 되면서 인물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져 버린 것이리라.

음악계 역시 그러하다.

현존하는 뮤지션 가운데 밀바와 같은 위광과 카리스마를 지닌 대형가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타급 가수는 점점 노련한 사업가같이 변모해 간다.

 마이클잭슨은 이미 춤추고 걸어다니는 사업체가 아닌가.

빈민가 생선가게집 딸로 태어나 그 열창의 목소리 하나로 30여 년간 음악계의 구름위에서 군림한 "코로의 암표범".

그 위풍당당함과 베일에 싸인듯한 이미지.

그녀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끝내 자살해 버린, 밀바가 버린 연인 피아베와의 사연

 

 

 

 

 

 

 

 

 

 

 

 

정염의 여인 Milva... 
 
국내에 소개된 샹송및 칸초네 스타들중 디스크 판매고나 내한 공연 횟수면에서, 우리와 가장 친숙한 가수중 한사람을

꼽는다면밀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밀바는 이탈리아 칸초네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본명이 Ilva Maria Biolcati 인 밀바의 데뷰 시절은 꾸밈없는 신선한 창법으로 일찍부터 칸초네라는 특수한

 

 노래 세계에서 자라나 타고난 미모로 저널리즘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숱한 스캔들을 만들어낸 장본인 이기도 하다.

데뷔하던 1959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스타로서의 존재는 실로 오랜 명맥을 유지하면서 팬들의 끊임없는

 

사랑과 화제의 대상이 되고있다.
지난 1972년과 74년 두 차례에 걸쳐 추억의 칸초네 "축제의 노래 (Aria di festa)",  "리코르다 (Ricorda)", 
"리베라이 (Liebelei)" 를 열창하며 국내 팬들앞에 모습을 보였던 매력적인 여인 밀바....
그녀는 우리들의 마음을 얼마나 설레이게 했던가?

利大 강당의 무대 위를 걸어나오던 그녀는 정말 굉장했었다고 한다.

 

틀에 잡힌 미모에 훤칠한 키, 풍만한 육체, 육감적인 정열의 입술과 붉은 머리칼이 풍기는 야성미가 합쳐져 그녀는

 

 이미 노래를 부르기 전부터 청중들을 압도하였다고 전해진다.

타고난 음색에 에디프 피아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드라마틱한 표현과 벨 칸토 창법으로 다듬어진 노래
"리코르다" 가 정감깊은 호소로 번져나오자, 넓디넓은 강당은 이질의 공간이 생기고 청중들은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남국적인 관능이 터져나오는 힘찬 성량의 소유자 밀바를 "코오로의 암표범"이라고 부른다고 하니,
그것이 그녀에 대한 가장 어울리는 포현일지도 모른다.
터질 듯한 청중들의 박수 갈채와 찬사를 암표범 다운, 약간은 교만한 듯한 자세로 답례한 뒤 몸을 돌려 무대 안쪽으로

 

서서히 걸어들어가는 밀바의 뒷모습...

 

그날밤의 그녀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아마 오래도록 그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밀바야말로 인생을 값지게 희구하면서, 시대의 애환을 끝없이 구가하는 영원한 칸초네의 우상이리라...

밀바는 북부 이탈리아의 코오로라고 하는 강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코오로는 매년 강의 범람으로 늘 축축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水田地帶의 빈촌이었다.

오래 전 국내에서 공개 되었던 실바노 망가노와 빗토리오 가스만 공연의 영화 "애정의 쌀" 이나 "수전지대" 라는
이탈리아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전지대의 사람들은 밝은 표정은 물론이지만 지성과도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수전지대로 품팔이 가는 여인들의 집단생활을 묘사했던 영화에서처럼, 밀바 역시 생활의 흙탕물 속에서
꿈많은 소녀시대를 보냈다.

밀바가 오페라 가수의 부푼 꿈을 안고 수전지대를 떠나 RAI(이탈리아 국영 방송국)의 뉴 보이스 콩쿠르에 출전한 것은 불과 나이 16세 때,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자 칸초네 가수로 뜻을 바꾸어 1959년에는 에디트 피아프의 히트 샹송
"미를르 (Milord)" 를 노래해 크게 히트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계속해서 1961년 처녀 출전한 산 레모 가요제에서 "서랍 속의 바다 (ll marenel cassetto)" 로 3위에 입상하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도 다듬어지지 않은 시골 처녀 밀바가 코오로의 암표범이라는 애칭을 가진 대스타가 된 것은
이탈리아 귀족 출신의 멋장이 신사 마우리치오 고르니야티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비롯 되었다는 사실을 저버릴 수 없다.

밀바는 1960년경 당시 이탈리아 국영 텔레비전의 연출자였던 고르니야티를 처음으로 만나게되며, 그때 밀바의 나이

 

 31세, 고르니야티는 초로에 접어든 41세였다.
그러나 이 프로듀서는 한눈에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얼마를 텔레비전에 잇따라 출연 시키면서 버릇없고 촌티를 벗지 못했던 야성의 처녀 밀바에게
교양과 학식을 불어넣어주기 시작했다.

마치 천박하고 무식한 꽃팔이 소녀 일라이저를 다듬고 가꾸던 "마이 페어 레이디" 의 언어 학자 히긴스 교수처럼‥.
그렇게 해서 고르니야티가 완성한 것이 "코오로의 암포범" 이다.
고르니야티가 밀바에게 온 정성을 쏟아 그녀의 싱싱한 매력을 끌어내 그 결정을 칸초네의 세계에 전시한 것이다.

밀바는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연 4회를 한 번도 빠짐없이 산 레모 가요제에 출전, 입상한다.
1962년 "리코르다" 에서 시작된 그녀의 노래는 "비련(Nessuno di voi)",  "탱고 이탈리아노(Tango Italiano)", 
"플라멩코 록(Flamenco rock)",  "지중해의 사랑(Mediterraneo)", "사랑의 시(Quando 1'amore diventa

 

 poesia)", "그토록 오랜 세월(Da troppo tempo)" 등 잇따른 히트 송의 발표로 칸초네 제1의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져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