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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Bach -Fugue 'Little' G minor BWV 578

 

 

 

 

 

바흐 오르간을 위한 작은 푸가 사단조, BWV 578

 

 

Album Title: Bach: Piano Music

Composer: Johann Sebastian Bach

Performer: Tatiana Nikolayeva (Piano)

Audio CD (January 1, 2007)


Number of Discs: 1


Format: CD, Album


Country: UK


Label: Regis Records


Copyright: 2007 Regis Records


Total Length: 1:08:12


Genres: Classical


Style: Baroque, Keyboard

Notes


Recorded Moscow 1980.

 

 

 

 

 

 

 

 

 

7. Fugue for organ in G minor ('Little'), BWV 578 (BC J66)   (5:30)

   Common Name   Little, Fugue For Organ


   Catalog No.   BWV 578


   Composer   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
   Performer   Tatiana Nikolayeva (Piano)
   Genre   Baroque Period / Fugue


   Date Written   by 1706; Arnstadt, Germany


   Period   Baroque


   Venue   Moscow


   Recording Date   1980

 

 

 

 

 

 

음반 Review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그녀의 연주는 로맨틱하고 그녀의 시각은 다른 음악의 그것과 유사하다. 샤콘느는 장엄하며

가슴을 울린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크'가 아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에 의한 존경과 사랑의 의미로서 이 레코딩은 풍부하다. - (Gramaphone)

RCA와 동일 음원. 평생을 바흐 연주에 헌신했던 니콜라예바의 음악성이 잘 드러난 음반이다. 그녀는 강렬하고

개성적인 터치로 악상의 골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특히 '샤콘느' 연주는 이 하나만으로 음반 전체를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다.

 

바흐 스페셜리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바흐 연주자는 많지만, 그녀만큼 영혼 깊숙이 따스한 바흐를 느끼게 한

 피아니스트는 없었다.

수많은 이들의 목말라하던 영혼의 소리가 니콜라예바의 바흐에는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 음반은 ’토카타와 푸가’, ’인류의 소망과 기쁨 되는 예수’,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샤콘느’,’시실리아노

’등 바흐의 명선율이 수록되어 있다.

 

바흐를 듣고 싶은 사람, 그리고 니콜라예바의 음악을 맛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망설이지 않아도 될, 후회없는 선택!

Tatiana Petrovna Nikolayeva (Russian: Татьяна Пeтрoвнa Николаева, Tat'jana Petrovna Nikolaeva;

May 4, 1924 – November 22, 1993) was a Russian Soviet pianist, composer and teacher.

 

 

 



 

 

 

 

 

 

J, S. 바하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의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하

(Johann Ambrosius Bach, 1645-1695)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래머히르트(Elisabeth Lämmerhirt)의

일곱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6세기 중엽 이후 대대로 음악가들을 배출했던 집안이었으며, 어린 J. S. 바하 역시 일찍부터 음악에

재질을 보여 그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694년 바하는 부모를 여의고 오르드루프(Ohrdruf)에 있는 그의 맏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하(Johann

Christoph Bach, 1671-1721)의 집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그는 형에게 하프시코드와 오르간을 배우는 한편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의 음악양식을

배우거나 형이 소장하고 있던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 등의 작품을 악보로 접하게 된다.

또한 오르드루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훗날 바하의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700년 바하는 함부르크 근처의 뤼네부르크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며 교회의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라인켄(Johann

Adam Reinken) 등에게 오르간을 배운다.

1703년 학교를 마치고 3월부터 9월까지 바이마르의 궁정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다가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한다.

 

 1704년 바하는 작곡에 전념하여 내림나장조의 『카프리치오』(Capricio)를 작곡하였다.

 1705년 10월 바하는 휴가를 얻어 뤼벡으로 북스테후데를 찾아가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후 깊은 감명을 받고

 예정된 휴가기간을 마음대로 연장시켜 이듬해 초에 아른슈타트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연된 휴가기간 때문에 아른슈타트 종교국으로부터 문책을 받은 바하는 1706년 그곳의 오르가니스트를

 사임하게 된다.

1707년 6월 바하는 뮐하우젠(Mühlhausen)의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10월 17일 그의 육촌 누이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와 도른하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708년 바하는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사임하고 바이마르로 초빙되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겸

 바이올린 주자로 취임하여 이후 약 10년간 그곳에서 일한다.

당시 바이마르의 영주인 빌헬름 에른스트 공은 스스로가 종교적, 문화적 교양이 높은 사람이었고, 그 주변에 모여들었던 많은 지식인이나 교양인들을 높이 대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바하는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또한 교회의 오르간을 자신의 뜻대로

 개조한 후 바하는 많은 수의 오르간 작품을 이 시기에 작곡하였다.

1714년 3월 빌헬름 공은 바하를 합주단의 악장으로 승진시켰으며, 이에 대한 답으로 바하는 매달 1곡씩의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쾨텐의 궁정악장으로 부름을 받는 1717년까지 많은 칸타타와 오르간작품들을 작곡하였다.

 바하는 1717년 바이마르의 빌헬름 공에게 자신을 궁정악장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했고 때마침

쾨텐의 레오폴드 공으로부터 궁정악장을 제의받자 바이마르에 사표를 제출하고 쾨텐으로 옮겼다.

바하는 쾨텐의 레오폴드 공 아래서 가장 높은 지위와 좋은 작업조건을 획득하였으며 그가 쓴 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음악을 사랑하고 아는 자비스러운 군주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서 평생을 보낼 것으로 생각한다.

 

"(1730년에 쓴 바하의 편지) 하지만 레오폴드 공이 재혼한 두 번째 부인이 음악에 대하여 문외한이었기에 영주의

음악열이 식었다고 생각한 바하는 1723년 쾨텐의 궁정악장을 사임하고 아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로 옮기게 된다.

쾨텐시대에 바하는 17명의 우수한 단원으로 구성된 악단을 가지고 교회음악 보다는 많은 세속음악을 작곡한 것으로

나타난다.

바하 스스로도 이 악단에 비올라 주자로 참여하며 이탈리아풍과 프랑스 풍의 작곡기술을 발휘하며 관현악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쾨텐 시대의 바하는 성악음악 보다는 기악음악, 특히 합주음악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들로는 그의 아들인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n Bach, 1710-1784)을 위해

작곡한 소품들(1720)이나 브란덴부르크 주의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공에게 헌정된 브란덴부르크협주곡(1721, 3,

24),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 작곡한 평균률I(1722), 인벤션과 신포니아(1722),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의 모음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파르티타, 서곡 그리고 40여 개의 세속칸타타 등이 있다.

쾨텐에서 1720년 7월 7일 바하는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를 잃고 그 이듬해인 1721년 3월 12일 안나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 1701-1760)와 재혼을 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6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두었다.

 

그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모두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인 칼 필립 엠마누엘(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뛰어난 음악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바하는 두 번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 둔 13명의 자녀들 가운데 바하의 뒤를 이어 음악가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맨 마지막의 두 아들인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Johann Christoph Friedrich Bach,

1732-1795)와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을 꼽는다.

1723년에 바하는 쾨텐의 궁정악장을 사임하고 아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그리고 교회음악에 대한 심적 요구 등을

이유로 라이프치히로 옮긴다.

라이프치히에서 바하는 토마스 교회의 작곡가였던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이후 니콜라이 교회 등 주요 교회들의 칸토르이자 음악감독으로도 일하게 된다.

라이프치히시대에 바하는 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일하면서 세속음악보다는 교회음악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작곡한 작품들로는 칸타타, 오라토리오, 수난곡, 건반악기 연습곡, 콘체르토, 『b단조 미사』의 일부분(1733) 그리고 오르간 음악 등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1724년 4월에 초연된 『요한수난곡』과 1725년 초에 작곡한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연습곡, 『칸타타 BWV249a, 205(1725), 249b(1726), 198(1727)』 등이

 

있으며, 1729년 4월에 바하는 『마태수난곡』을 발표하였다. 이밖에 수많은 칸타타와 미사음악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734-35)가 발표되었으며, 말년에 바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1742), 『평균율 피아노 곡집 II』(1744), 『음악적 헌정』(1747), 『b단조 미사』(1748완성), 『푸가의 기법』(1745-50) 등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말년에도 쉼없는 작곡활동을 통해 바하는 과로로 인한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었는데, 특히 1750년 3월과

4월에 걸쳐 두 번의 눈수술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이후 다시 뇌일혈을 일으켜 라이프치히에서 7월 28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바하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이름은 당분간 음악계에서 잊혀져 갔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바하라는 이름들은 대부분 그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다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라는 이름은 독일의 베를린을 중심으로 재발굴되었으며, 1780년대에 들어 모차르트 등의 음악가들을 통해 서서히 음악계에서

재조명되기 시작됐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형식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면을 많이 보인 작곡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에서 대위법을 최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작곡가이었으며, 당시까지의 음악적 기법이나

표현방법을 가장 잘 활용했던 음악가이었다.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적 기법을 수용하여 통합시켰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1750년 7월 28일(독일)
경력 :  1714년 3월 궁정악단의 콘서트 마스터
1723년 라이프치히 성토마스교회 칸토르 취임
1729년 ~ 1742년 대학생 연주단체 콜레기움 무지쿰 지휘
작품 :  '오르간소곡집', '하늘의 왕이시여, 어서 오소서'

 

바흐, 요한 세바스티안 Johann Sebastian Bach(1685 ~ 1750 / 독일)


'바흐'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중부 츄우린겐의 산악지대 아이제나하에서 태어나, 1750년 7
 월 28일 역시 독일의

아리프찌히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난 바로크 음악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작곡가이다. "바흐"라고 하면 마치 서양음악이 '바흐'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는 일상 바흐가 입에 오르게 되고 그의 음악의 고고한

 고전미에 감동하고, 또 음악사를 논할 때 으례이 맨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 '바흐'이다. 그만큼 역사에 남긴 바하의

업적과 비중이 크기 때문이며, 그의 음악이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줄 만큼 위대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바흐'가 나오기 전 17세기 경에는 음악은 여러 가지 양식이 잡다하게 생겨 혼란을 빚을 정도로 분파작용을 거듭하고 있었다.

18세기 전반에 있어서, '바흐'를 이러한 여러 갈래의 양식을 자 화해시켜서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한 , 이를테면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한 위대한 대가라고 하겠다. '바흐'는 주로 과거의 전통을 따르기는 했으나, 당시의 새로운 양식도

흡수하여 대위법적이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도입한 독특한 음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근대적인 의미 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음악 양식, 이를테면 교향곡이니, 협주곡이니, 현악4중주니 하는 이른바 고전주의 양식을 수립한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와는 판이한 한계를 갖는 바하는 바로크음 악의 맨 마지막 정상을 이룬 대가이다.

'바흐'는 음악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대대로 이 가족에서는 유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전 후 200년 동안에 약 50명의 음악가가 나왔다니 대단한 음악적인 가계라고 하겠다.

 '바흐'도 어렸을 때부터 음악가인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비롯한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10살때에는 불행히도

 양친을 잃고 고향인 아이제나하를 떠나 올드루프에 있는 그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손에 의해 양육되어

그 동안 오르가니스트인 형으로부터 크라비어와 오르간등을 배웠다.

 

 바하는 15살이 되자, 류우네브르크에 있는 교회부속 학교에 들어가 고등 교육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였고 유명한

오르간 주자인 베므를 비롯한 당시의 대오르간 주자로 함부르크의 카라리이나 교회에 있는 디트리히-북스테푸데 등에게 지도를 받았다.

또한, 이웃 체레시를 자주 왕래하면서 프랑스식으로 편성된 궁정악단의 연주를 들어 프랑스음악에 대한 견식도 넓혔다. 그 후, '바흐'는 1703년 바이마르로 옮겨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다가 이룬슈타트의 오르간 주자로 다시 옮겼고, 1707년에는 뮤르하우젠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 이듬 해에 바이마르의 궁정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의 명예로운 지위를 얻어, 여기서는 직접 자기가 오르간의 설계를 하는등, 오르간에 많은 개량을 가했다.

또한, 그의 오르간 작품의 태반은 이때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바흐'는 교회음악에 대한 염원과 정열을 억누를 길이 없어 1723년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교회부속 학교

합창장겸 시의 음악 지휘자가 되었다.

 바하는 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7년간 이 직에 충실히 근무하면서 맣은 작품을 썼다.

 

 바하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걸쳐 있고, 그 수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랜 시간,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1829년에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상곡>을 연주한 데서

일반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진가를 재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작품의 성질이다.

 

 작품의 태반이 종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따라서 통속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구조가 복잡하고

내객이 깊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에 원인이 크다고 본다.

 

그의 작품이 다성부적이고 대위법적인 처리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이며, 당시에도 "너무 기교적이고 자연성이 없다" 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부한 인간적 감정이나 정화된 고고한 기풍이 느껴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요작품> "마태수난곡" [1727]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1734] "커피 칸타타" [1735]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6번"
[1721] "토카타와 푸가 d단조" "골드베르그 변주곡" [1742] "첼로 무반주 조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