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ells Like Teen Spirit
It's fun to lose and to pretend
She's over bored and self assured
Oh no, I know a dirty word
With the lights out it's less dangerous
Here we are now, entertain us
I feel stupid and contagious
Here we are now
Entertain us, a mulatto , an albino ,
a mosquito, my libido
I'm worse at what I do best
And for this gift I feel blessed
Our little group has always been
And always will until the end
Oh yeah, I guess it makes me smile
I found it hard, it was hard to find
Oh well, whatever never mind
싸움에 지거나 폼만 잡는 건 재미있어
그녀는 너무 따분해 했고 콧대가 높아
이런, 추잡한 말을 하나 아는데 말이야
불이 꺼지면 덜 위험하지
이제 우리가 왔으니깐 좀 즐겁게 해 줘봐
난 우둔한데다가 전염성이 있는 것 같아
여기 있는 우리를 좀 신나게 해 줘봐
우리를, 혼혈아도, 흰둥이도,
모기도, 나의 성욕도 말이야
내가 제일 잘하는 것에는 소질이 없어
하지만 그 재능에 난 감사하지
우리 일당은 항상 그래 왔고
세상이 끝나도록 그럴 거야
그래, 그러니 기분이 좋군
그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그게 뭐든지 간에 신경 쓰지 마
Nirvana(Kurt Cobain) - In Bloom
In Bloom
Sell the kids for food,
Weather changes moods
Spring is here again,
Reproductive glands
먹을걸 얻기위해 아이들을 팔라구.
날씨 탓인지 기분이 바뀌니까 말야.
봄은 여기에 다시 왔거든.
계속 땀을 생산해내는 땀샘처럼 말이지.
He's the one who likes all our pretty songs
And he likes to sing along
And he likes to shoot his gun
But he don't know what it means
Don't know what it means
And I say.. yeah
그는 우리의 모든 노래를 좋아라 하는 사람이지
노래 따라부르기를 좋아하고
총 쏘는 것도 좋아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지,
무슨 의미를 담고있는지 모른다고
내가 말할 때 말야
We can have some more
Nature is a whore
Bruises on the fruit
Tender age in bloom
우린 좀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어
자연은 창녀처럼 다 줘버리니까
과일 위에 나있는 생채기
만발한 젊음같이
He's the one who likes all our pretty songs
And he likes to sing along
And he likes to shoot his gun
But he don't know what it means
Don't know what it means
And I say.. yeah
그는 우리의 모든 노래를 좋아라하는 사람이지
노래 따라부르기를 좋아하고
총을 쏴갈기는 것도 좋아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지
무슨 의미를 담고있는지 모른다고
내가 말할 때 말야
Nirvana (너바나)
활동정보
Band | 미국 | 결성: 1987 ~ 해체: 1994
장 르 락/메탈> 얼터너티브 , 락/메탈> 브릿팝
대표곡
Smells Like Teen Spirit Come As You Are 현재멤버
Kurt Cobain (보컬, 기타), Dave Grohl (드럼), Krist Novoselic (베이스)
90년대 얼터너티브 밴드의 대명사임과 동시에 시애틀 그런지 밴드로 익숙한 남성 3인조 너바나(Nirvana)는
리더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여자친구였던 코트니 러브 역시 너바나의 밴드 흐름을 파악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거론되고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의 죽음을 방관한 용의자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기도 합니다.
미국 록 음악사에 있어 대단한 흔적을 남긴 너바나의 일대기는 미 서북쪽 워싱턴주에 위치한 시애틀 부근의 해안가
에버딘에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끔 너바나를 평가하는 다른이들은 시애틀 출신의 그런지 밴드로도 소개하고 있긴하지만, 시애틀은 이들이 거주했던 곳의 대도시였기에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음악을 시작한 지역은 해안도시 에버딘을 근거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987년 워싱턴 주에 위치한 에버딘에서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커트 코베인과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Krist
Novoselic)은 밴드 너바나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그후 1990년 당시 드러머로 명성이 자자했던 데이브 그롤(Dave Grohl)을 멤버로 합류시키며 이들은 3인조로 본격적인 밴드로써의 심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들의 첫 앨범 [Bleach]는 당시 독립 레이블로 알려진 Sup Pop을 통해서
1989년 발표하게 됐구요. 이후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 메이저 레이블로 알려진 DGC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메이저 계약 직후 발표한 1991년 작품 [Nevermind]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Smells Like Teen Spirit’을
수록한 명반으로, 결과적으로 너바나는 시애틀 출신의 로컬 밴드에서 승천하여 메인스트림의 드넓은 바다로 뛰어들게
됐고, 이들이 부르는 음악은 90년대 시애틀 그런지라는 고유명사를 남기며 얼터너티브 록 음악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너바나의 프론트 맨인 커트 코베인은 한 매체를 통해 자신은 X세대의 기축점인 너바나를 통해 시대를 대변하고자 하는
자신을 찾아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커트 코베인은 온갖 열악한 환경과 악조건 속에서도 오로지 밴드 음악에만 초점을 맞추며 대중들에 의해 잘못
받아들여진 밴드 음악의 상징과 아티스트에 대한 관점을 신봉하면서 1993년 그들의 3번째 앨범 [In Utero]를
선보이게 됩니다.
이듬해인 1994년 4월 5일, 커트 코베인의 자살로 너바나의 짧고 굵었던 밴드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게 됐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 오히려 밴드의 인기와 영향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전달되게 됩니다.
2002년 끝내 마무리짓지 못한 싱글 ‘You Know You’re Right’는 밴드가 남긴 마지막 곡으로 전세계 라디오 순위를
갈아치우게 되었고, 데뷔 이후 미국 내에서만 2천 5백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함과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5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의 미국 팝 역사상 가장 짧고굵은 행보를 기록한 밴드로 남아있습니다.
너바나는 1990년대 록의 주도적 경향이었던 그런지(grunge) 록 그리고 얼터너티브(alternative) 록의 수면상승과
음악계 전면장악을 주도한 역사적인 그룹이다.
거칠고 폭발적인 펑크(punk)를 개량한 그런지 록은 인디와 언더그라운드에서 암약하다가 이 그룹의 기념비적인
1991년 앨범 < Nevermind >와 함께 광채를 맞았고 때마침 공격적인 X세대의 부상과 맞물려 사회적 폭발력마저
내뿜었다.
1990년대 대중음악계를 성공적으로 유린한 뉴 펑크, 스카, 테크노 등 모던 록 전반의 스타급 밴드들이 실은 너바나에
대한 채무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4년 리더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자살에 따른 3년의 짧은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그룹의 영향력은 1990년대를 관통했다.
< 롤링스톤 >은 커트 코베인을 ‘1990년대의 아티스트’로 선정했다. 1967년 시애틀의 워싱턴 애버딘에서 태어난
커트 코베인은 벌목공이었던 아버지의 술 주정과 매질을 견디며 왜곡된 환경에서 자라난 생래적 하층계급 젊은이였다. 맘에 드는 친구도 없이 항상 주변에서 소외당했고, 반(counter)사회적인 행동과 음악에만 관심을 둔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커트는 집에서...
너바나는 1990년대 록의 주도적 경향이었던 그런지(grunge) 록 그리고 얼터너티브(alternative) 록의 수면상승과
음악계 전면장악을 주도한 역사적인 그룹이다.
거칠고 폭발적인 펑크(punk)를 개량한 그런지 록은 인디와 언더그라운드에서 암약하다가 이 그룹의 기념비적인
1991년 앨범 < Nevermind >와 함께 광채를 맞았고 때마침 공격적인 X세대의 부상과 맞물려 사회적 폭발력마저
내뿜었다.
1990년대 대중음악계를 성공적으로 유린한 뉴 펑크, 스카, 테크노 등 모던 록 전반의 스타급 밴드들이 실은 너바나에
대한 채무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4년 리더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자살에 따른 3년의 짧은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그룹의 영향력은 1990년대를 관통했다.
< 롤링스톤 >은 커트 코베인을 ‘1990년대의 아티스트’로 선정했다.
1967년 시애틀의 워싱턴 애버딘에서 태어난 커트 코베인은 벌목공이었던 아버지의 술 주정과 매질을 견디며 왜곡된
환경에서 자라난 생래적 하층계급 젊은이였다.
맘에 드는 친구도 없이 항상 주변에서 소외당했고, 반(counter)사회적인 행동과 음악에만 관심을 둔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커트는 집에서 쫓겨나 친구들 집이나 위시카 강의 제방에서 잠을 자면서 수영강사, 수위 등의 일을 했고, 그가 좋아하던 1980년대의 대표적 인디 밴드 멜빈즈(Melvins)의 투어 밴 운전과 장비를 옮기며 그들의
공연을 수없이 관람한다.
1985년 커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고 싶었던 친구인 크리스 노보셀릭(Chris Noveselic)을 멜빈즈의 멤버에 의해 소개받는다.
둘은 멜빈즈의 멤버들과 함께 밴드를 구성하여 너바나의 전신이 되는 밴드를 결성하였고, 1988년 블리스(Blis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중에 드러머 채드 채닝(Chad Channing)을 만나 너바나(Nirvana)로 그룹이름을 개명하고,
그 해 11월 그들의 첫 싱글인 ‘Love buzz’를 내놓는다.
이 싱글은 시애틀의 한 음악잡지로부터 “충분히 연습만 한다면 멜빈즈보다 크게 될 수 있을 것”이란 호평을 받았고,
다음해인 1989년에는 시애틀의 인디 레이블인 서브 팝(Sub Pop)을 통해 그들의 첫 앨범 < Bleach >를 발표한다.
너바나의 사실상 데뷔작인 < Bleach >는 단돈 600달러를 들여서 만든 앨범으로, 가장 지저분한 퍼즈톤(fuzz tone)과 아날로그 녹음방식, 다섯 코드를 통한 새로운 펑크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이후 그들의 모든 가능성이 담겨있는
앨범이었다.
이 앨범 이후 너바나는 샌프란시스코와 영국을 오가며 열심히 투어에 임했고, 그룹의 다섯 번째 드러머 데이브 그롤
(Dave Grohl)을 영입한 뒤 1991년 늘 존경해온 선배 인디 그룹 소닉 유스(Sonic Youth)의 예를 따라 서브팝에서
메이저 레이블인 게펜 디지시(Geffen DGC)로 이적하게 된다.
이후 소닉 유스의 오프닝에 나서는 등 활동의 고삐를 죈 밴드는 1991년 5월에 두 번째 앨범의 녹음에 들어가 그 해 9월, 역사적인 앨범 < Nevermind >를 내놓았다. 여기서는 새 청년 세대의 절망과 무관심을 자기 모독적으로 개탄한
시대의 송가 ‘Smells like teen spirit’가 싱글로 발표되어 미국에서는 위축된 펑크 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팝 차트에
5위까지 오르며 플래티넘(100만장 판매)이라는 쾌거를 일구어냈다.
이밖에도 한 청년이 자라나서 미국 중산층 사회의 올가미에 걸리는 과정을 노래한 ‘Breed’ ,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의
분열적인 고백인 ‘Lithium’ , 유괴되어 폭력을 당하는 14살 소녀의 이야기인 ‘Polly’ 그리고 ‘Come as you are’ 등
수록곡 전반이 라디오 전파를 독식하는 매머드 반향(反響)을 야기하며 1992년 1월에는 빌보드 앨범차트 1위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이에 따라 당시의 음악계를 주름잡던 헤비메탈과 상업적인 팝 음악은 급격히 쇠퇴했고, 시애틀을
중심으로 한 인디 소속 뮤지션들이 대거 메이저로 급부상하는 일대 혁명이 불어닥쳤다.
이른바 ‘얼터너티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커다란 성공은 역으로 너바나, 특히 인디 정신에 민감했던 커트 코베인에게는 상응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예상치 못했던 성공은 커다란 압박감을 가져왔고, 유럽 투어 때는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술과 약물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1992년에 발표한 < Incesticide >의 라이너 노트에는 “나는 완전히 피폐해진 록 청년 문화를 상업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며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속내는 주류 음악 산업의 굴레에서 착취당하는 자신에
좌절하기도 했다.
또한 굶주린 언론의 지나칠 정도의 추적, 특히 커트니 러브(Courtney Love)와의 결혼 이후 계속되어온 헤로인과
총기사용에 대한 루머는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1993년 발표된 세 번째 앨범 < In Utero >는 이러한 궁지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앨범이었다.
전작보다 더욱 거칠고 단순해진 노이즈 성향의 사운드와 ‘자궁 속으로’ 라는 앨범 타이틀은 언더그라운드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려는 커트의 몸부림이었다.
펑크의 화신 섹스 피스톨스의 시드 비셔스(Sid Vicious)의 본명인 사이먼 리치를 내건 ‘사이먼 리치 블루그래스 앙상블(Simon Ritchie Bluegrass Ensemble)’이란 이름으로 미네소타의 캐논 폴스 소재 패치덤 스튜디오에서 비밀리에 녹음한 것이나, 프로듀서도 팝 경향을 보였던 부치 빅(Butch Vic)에서 픽시스(Pixies) 등을 프로듀스한 바 있는 스티브
알비니(Stevie Albini)로 바꾼 것은 조야한 인디 사운드를 되찾으려는 그의 희원(希願)을 반영한 것이었다.
수록곡 ‘Heart-shaped box’ ‘All apologies’에서는 아내와 딸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을 드러냈으며, ‘Rape me’에서는 자신과 펑크록을 상업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주류 음악계를 ‘강간’이라는 비유를 통해 비난하기도 했다.
성공을 거부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발매 1주만에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원치 않은 성공으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더욱 혼란만 가중된 커트는 점점 더 분열적으로 되어 약물에 젖어서 혼수 상태에 빠지는 등의 위험한 징후를
보였다.
한 호텔에선 진통제를 50알이나 먹고 쓰러진 채 발견되기도 하였다.
결국 커트가 실종된 지 6일째 되던 날, 시애틀의 한 고급주택에서 턱을 향하고 있는 20구경 엽총과 함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 시체는 지문 조회를 통해 커트 코베인임이 확인되었다.
혈액에서는 다량의 헤로인이 검출되었고, 시체 옆에는 부다(Boddah-어린 시절 커트의 상상 속의 친구이름)에게 보내는 커트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닐 영의 노래가사에서 따온 ‘서서히 꺼져 가는 것 보다 한꺼번에 불타오르는 것이 낫다’라는 글이 적혀있었고
이 문장은 얼터너티브의 인디 정신을 축약하는 코드로 무수히 언급되었다.
< 타임 >지는 그의 죽음을 록 신(神)의 죽음(Death of a rock god)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루었고, 호주에서는 한
16살 소녀가 커트의 죽음에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등 사후에도 충격파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방영된 MTV 언플러그드 공연에서 커트는 절정의 보컬과 함께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을
부르며 절규, 그의 죽음이 이미 예견된 것임을 나타냈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동시에 밴드는 해체됐고, 드러머였던
데이브 그롤은 현재 푸 파이터스(Foo Fighters)라는 그룹을 이끌며 활동 중이다.
'펑크 록의 직선적 표현 방식과 헤비 메탈의 강한 힘, 그리고 6-70년대 팝의 서정적 멜로디 라인을 결합시킨' 음악이라는 평처럼 이 앨범은 새로움과 역동적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
커트가 인터뷰에서 [Nevermind]에 수록된 곡들을 한두 곡씩 풀어놓으면서 나머지는 카피 곡으로 대충 채웠다면
10년도 넘게 밴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듯이 이 앨범은 한 곡도 놓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에너지가 가득하다.
첫 곡 'Smells Like Teen Spirit'은 오늘날 이미 하나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곡이다.
소위 그런지 기타라고 불리는 디스토션이 극단적으로 먹힌 지글거리는 기타음, 피드백의 효과적인 사용 등 너바나
(NIRVANA)라는 밴드의 DNA가 선명히 드러나는 곡이기도 하다.이팩트가 거의 걸리지 않은 조용한 인트로에서 갑자기 디스토션이 강력하게 걸린 파괴적인 사운드로 이행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곡의 느낌은 매우 파격적이다.
불협 화음의 기묘한 분위기와 코러스 부분의 절규에 가까운 보컬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반면 요소요소에 귀에 잘
들어오는 훅이 자리잡고 있어서 대중의 커다란 반향도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가사는 내용적 흐름이 명확하지 않아난해하다.
그러나 '지겨움, 저속함, 전염성, 고통, 망각' 들의 어휘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어 반항의 뉘앙스가 강하게 풍겨온다.
두 번째 곡인 'In Bloom'은 흔히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음악을 듣는 팬들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음반 비즈니스와 팬들에 대해 보인 예의 그 냉소적인 태도가 연상된다. 비틀즈의 패러디로 제작된 비디오 클립도
주목할 만하다.
곡 자체는 매력이 가득하다.
코러스 부분은 역시 귀에 쉽게 들어오는 평이한 팝적 멜로디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화성의 묘한 긴장도 유지하고 있다. 세 번째 곡 'Come as You Are'은 [Nevermind]의 두 번째 싱글 커트곡답게 대중성을 갖춘 친근한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전작의 'About a Girl'를 연상시키는 곡이다.
[Unplgged in N.Y]를 듣다보면 이런 스타일 곡들이 오히려 너바나의내밀한 세계를 대변하는 것 같은 심증도 갖게 된다. 비디오 클립을 보면 앨범의 자켓 속의 장면-아이가 돈을 집으려고 헤엄쳐 가는 사진-이 담겨 있다.
다음 곡은 'Breed'. 강력한 디스토션이 걸린 파괴적인 기타음으로 곡이 시작된다. 너바나 특유의 직선적인 사운드가
매력적이다.
'Plant A House, Built A Tree' 식의 언어 유희, 독설의 느낌까지 주는 가사도 주목할 거리이다.
다섯 번째 곡은 'Lithium'이다. 이 곡은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너바나의 새로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곡이다.
전체적으로 기타음을 잘 들어보면 일반적인 튜닝보다 한 음씩 낮추어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그런지
(Grunge) 튜닝이라는 것이다. 가사는 대단히 자조적이고 내성적이다.
불안과 불행의 암시가 짙게 깔려 있다. 라이브 장면을 편집한 비디오 클립도 볼거리다.
밴드의 리얼한 태도와 거친 분노가 절절히 배어나온다.
'Polly'는 너바나의 어쿠스틱한 일면이 드러나는 곡이다.
물론 이 곡도 편안한 발라드는 아니다.
멜로우함보다는 오히려 날카로운 암시와 긴장이 느껴진다.
'In Utero' 수록곡인 'Rape Me'와 마찬가지로 'Polly'도 '강간'을 소재로 한 곡이다.
실제로 이 곡을 흥얼거리면서 강간을 범한 범죄가 발생해 밴드를 곤란에 빠뜨렸지만 그것은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커트는 인터뷰에서 분명히 이 두 곡이 'Anti-Rape'적인 입장임을 밝히기도 했다.
원곡 못지 않게 [Unplugged in N.Y]에서의 연주도 빼어나고, [From the Muddy Banks of wishkah]에 수록된
일렉트릭 버전도 또 다른 흥미거리이다.
7번째 트랙인 'Territorial Pissing'는 젊음의 반항과 파멸적인 에너지가 충만한 곡이다. 거칠고 직선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음운의 대구가 묘한 후렴 부분도 독특한 감흥을 준다.
커트의 보컬은 거의 절규에 가깝다. 펑크적이라는 느낌도 드는데, 러닝 타임은 2분 22초에 불과해 혹독히 짧은 편이다.
다음 곡 'Drain You'는 얼핏 보면 사랑의 노래 같지만 대부분의 어휘들이 질척거리는 점액, 분비물의 이미지를 나타나고 있어서 '액체적인 질감'이 가득하다.
디스토션이 강하게 먹힌 기타와 불협 화음은 불안정한 정서를 지속시켜가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9번째 트랙인 'Lounge Act'는 베이스 인트로로 조용히 시작하다가 리드미컬한 사운드로 옮겨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곡 구성은 너바나로서는 매우 익숙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곡의 후반부에서 절규에 가까운 보컬로 넘어가는 것도 매우 낯익은 것이다.
곡은 매우 명쾌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이어지는 곡 'Stay Away'는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사운드가 그대로 이어지는 트랙이다.
리듬감 넘치는 드럼 인트로로 시작되다가 읊조리는 듯한 보컬과 고함에 가까운 커트의 절규가 교차하고 있다.
'I'd Rather Be Dead Than Cool'같은 가사는 커트의 자살에 비춰 볼 때 의미 심장하게 읽히기도 한다.
11번째 트랙인 'on A Plain'는 원곡에 비해 [Unplugged in N.Y.]에 수록된 곡이 보다 밴드의 본래 의도에 부합한다는 느낌이 든다. 평이한 템포이고 팝적인 멜로디도 살아 있다.
[Nevermind] 앨범에서 가장 긴 가사를 갖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내가 타의에 의해 우는 법을 배운 날은 내 생애 가장 화창한 날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매일 밤 숨이 끊어졌다' 같은
구절을 음미해 보면 자전적인 스토리라는 느낌이 든다.
다음은 마지막 곡인 'Something in the Way'. 어쿠스틱 넘버이다.
내성적이면서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가사의 상당 부분은 고향 에버딘을 떠나 싸구려 트레일러에서 생활하고 있던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듯하다.
지금까지 [Nevermind] 앨범의 각 곡에 대해 짧게 훑어 보았다. 너바나의 바이오 그래피 등은 이미 많은 자료가 올라
있으므로 참고로 하기 바란다.
글의 초반에 이미 밝혔듯이 이 앨범만이 너바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시대성과 락 역사상의 의의에 있어서는 [Nevermind]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In Utero]를 위시한 다른 앨범들도 반드시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지만 다음 앨범이었던 [In Utero]는 음악적인 면에서 결코 [Nevermind] 못지 않다.
또 [Incesticide]나 [Bleach]에서 오히려 더 생동감 넘치는 젊음의 냄새가 베어 있기도 하다('School'과
'Negative Creep', 'Aneurysm'을 기억하는가?). 특히 정규 앨범은 아니지만 커트 사후 발매된 [From the Muddy
Banks of Wishkah]는 그들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좋은 앨범이라서 꼭 추천하고 싶은 욕심이 난다.
너바나를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너바나라면 이미 물리게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분명히 이 앨범은 또 다시 새로운 열정을 선사할 것이다.
맨오른쪽 파란기타가 커트코베인 시그너쳐 기타입니다.
[ Nirvana ]
데뷔/결성: 1989년
활동/시기: 1980, 1990년대
멤//////버: 커트 코베인(Kurt Cobain) 기타 보컬, 크리스 노보셀릭
(Chris Novoselic)베이스, 데이브 그롤(Dave Grohl) 드럼
Nevermind
새로운 '세대 음악'의 출현, 그 성난 얼터너티브 록 '스멜즈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의 약동의
폭발하는 기타 록 하나로 일순간 음악세상은 바뀌어버렸다.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마이클 잭슨이나 필 콜린스의 팝과 '투우장의 황소'가 된 헤비메탈은 삽시간에 무대에서
퇴각해야 했다.
이제 시대는 '돌아온 펑크 록'에 대권이 넘겨졌다.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그룹 너바나는
'스멜즈 라이크 틴 스피릿'과 이 곡이 수록된 앨범 <네버마인드>(Nevermind)로 새 세대를 향해서는 긍정하고,
제도음악계를 향해선 부정하는 '얼터너티브 록'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했다.
이 앨범은 1991년 가을 거센 반향을 일으키며 얼마 후 당시 주류 음악계를 지배하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를
밀어내고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들이 암약하던 비슷한 시기에 미국 시애틀의 다른 밴드들인 펄 잼(Pearl Jam), 사운드가든(Soundgarden)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 등도 엄청난 상승 에너지를 뿌려대며 잇따라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당시 시애틀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밴드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허름한' '거지같은' 의미의 그런지(grunge)라고 불렀다.
전형적인 땅밑 음악의 성격을 지닌 이 음악은 자신들을 축축한 습기에 기거하게 만든 1980년대와 극단적 팝으로 달려간 그 시대의 상업적 만개를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와신상담 반란을 꿈꾸었다.
언론은 그들의 음악이 기존 음악에 대한 대안(代案)이란 의미에서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으로 일컬었다.
주류에 적대적인 이러한 새시대 펑크 록의 거센 웨이브를 견인한 그룹이 바로 너바나였다.
'네버마인드'라는 음반 제목은 1970년대 펑크(punk)혁명을 이룩한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명반 에서 따왔다. 너바나의 음악이 펑크의 호흡을 전수하여 그것을 활력의 근원으로 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일체의 가식이 없는 커트 코베인의 절규가 퍼져있는 'Territorial pissing'이나 'Drain you' 그리고 'Stay away'와 같은 곡에서 너바나는 거칠고 가차없는 기타사운드와 노이즈로 일관한다.
'곡선적 헤비메탈'의 세련된 볼륨에 대항하여 '직선적 펑크'의 원초적 파괴력을 표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너바나는 기타 솔로를 완전 소탕시킨 오리지널 펑크로 초지일관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Come as you are'
나 'Something in the way' 등에 무차별 삿대질이 아닌, 그들의 음악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원천이자
중요한 사운드 패턴인 멜로딕한 리프와 선율을 심었다.
'Lithium' 역시 단순한 베이스라인의 멜로디를 구사해 '공감할 수 있는 아우성'임을 연출했다. 그들의 펑크는 '들을 수
있는 펑크'였다.
너바나의 그런지는 노랫말의 스타일도 달랐다. 폭발을 기다리는 잠재의식이 반영된 'Smells like teen spirit'만 하더라도 가사는 정형화된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거칠게 내뱉어지는 단어들의 모호한 파편들로 채워졌다.
그것은 마치 암수표를 해독하는 것과 같아 누구도 뭐가 뭔지 확실히는 몰랐지만 당시 정신적 공황에 빠져있던 젊은이들은 그것이 거대한 퍽 유(fuck you)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난 내가 왜 맛보았는지 잊어 버렸어. 아, 그래. 그것이 날 웃음 짓게 한다고 생각해. 난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아냈어.
그것은 알아내기가 어렵지. 아, 괜찮아.
무엇이든지 신경쓰지마... 그것은 덜 위험하지. 우리가 여기 있어.
우리를 즐겁게 해줘. 흰둥이, 모기, 나의 성욕, 부정, 부정, 부정, 부정...'
비평가 앤서니 드커티스의 이곡에 대한 웅변은 거창하지만 적확하다. “정치를 언급하지 않는 정치적인 노래, 가사를
알 수 없는 찬가, 상업성을 비판하는 상업적 히트곡, 소외에 대한 집합적 외침. 이 곡은 새로운 시대와 불만족 젊음의
새로운 무리를 위한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었다.
그것은 만족 불능에 대한 커다란 만족의 선언이었다.”
그러한 시대와 세대 정서를 대변하면서 또 너바나는 상기한 대로 단지 '펑크의 재현'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쉽게 귀를
포박하는 '팝적인 멜로디'를 구현해 대성공했다.
새 세대의 영리함이었다.
실상 그들은 섹스 피스톨스 또는 픽시지(Pixies) 펑크의 단선적 힘을 주로 흡입했지만 블랙 새버스(Black Sabbath)의 헤비메탈 음악에도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았으며 R.E.M., 허스커 두(Husker Du), 미트 퍼피츠(Meat Puppets) 같이 멜로디가 살아있는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그룹들의 음악에도 큰 빚을 졌다.
커트 코베인 스스로가 고백한 바 있다.
“우리들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팝 포맷을 가지고있으며, 블랙 플랙(Black Flag)와 블랙 새버스의 음악에, 신나고 팝적인 내크(Knack)와 베이 시티 롤러스(Bay City Rollers)의 음악을 가미한 그 무엇과 비슷하다.”
너바나는 이런 여러 음악들을 토대로 기존의 주류 음악과는 생판 다른 독자적 형체의 음악을 창조했다.
이것이 한편으로 얼터너티브 록의 중요한 특질이었다.
펄 잼,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 같은 여러 밴드들의 음악적 스타일이 제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얼터너티브 록으로 뭉뚱그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꼭 사운드만이 얼터너티브 록을 형성하는 성질은 아니었다.
얼터너티브는 기존의 팝과 록에 적대적이라는 의미에서 비주류(언더그라운드)와 독립음반사(인디)와도 불가피한
관련을 맺는다.
1980년대 초반부터 미국 하드코어 씬 밴드들과 대학가의 로컬 밴드들은 주류에서 메탈밴드들이 주지육림에 빠져있을 때, 남모르게 언더그라운드를 지켜내고 있었다.
이들은 주류음악과 메이저 음반사의 유통망에 반대해서 직접 소규모 저예산의 인디를 만들어 악조건 속에서도 앨범을
내며 활동했다.
하지만 점점 음악적 한계가 드러나고 R.E.M.이나 소닉 유스(Sonic Youth)와 같은 언더의 희망이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함에 따라 언더그라운드는 점차 보호막을 잃어가고 있었다.
너바나 역시 이 무렵 그들이 닦아놓은 '배신의 절차'를 밟았다.
1989년 인디 레이블인 서브팝(SubPop)에서 첫 앨범 를 내놓은 그들은 마침내 2년이 지나 메이저 레이블인 게펜
DGC에서 본 앨범 를 발표했다.
어떤 사람들은 '배신의 결정체'라고 조롱했고 누구는 '언더그라운드 내공의 폭발'이라고 미화했다.
비록 제도권으로 넘어왔지만 커트 코베인과 크리스 노보셀릭(베이스) 데이브 그롤(드럼)은 순순히 주류에 해체되지
않았고 '주류 속의 비주류' '질서 속의 무질서'를 보여주고자 했다.
많은 이들이 폭발적인 동의로 답했고 너바나는 그에 걸맞은 가공할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의 스퍼트는 인디 정신이자본의 대(大)레코드사에 흡수 통합되는 역기능적 풍조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메이저 레이블이 인디와 언더를 주목하는 계기도 조성했다.
이 앨범은 새 세대 이를테면 X세대의 부상과 맞물린 언더그라운드 키드들의 포효와 관련해 1990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음반으로 남아있다.
이 음반은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시대에서는 '분노와 이상의 좌절'이 베이비붐 세대의 '사랑과 평화'만큼이나
영감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자신들의 X세대가 '저항했지만 밝은 내일이 있는' 히피세대와 달리 '저항해도 내일조차 없는' 세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1999/07 임진모 (jjinmoo@izm.co.kr) 시대를 빛낸 명반
이제 와 생각하면 너바나(Nirvana)라는 ‘현상’은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듣는 이를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덮치고
지나가버린 그 무엇이었다.
록 장르가 말초신경을 간질이며 돈을 갈구하는, 약간 더 하드한 ‘팝송’으로 귀결되었다고 누구나 여기던 1990년대 초반, 너바나(와 시애틀의 그런지 동료들)는 돌연 록을 ‘순수함’의 고갱이로 바꿔놓았다.
이들의 노래는 염증나는 세상에 대한 자기 파괴적 분노로 가득 찬 ‘저항 음악’이었다.
록 음악에서 저항은 1970년대 중반 펑크 록을 끝으로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체념했던 팬들을 완전히 압도한,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음악을 기존의 활력없던 록 신을 완전히 ‘대체’한다는 뜻의, 얼터너티브 록이라 불렀다.
< Nevermind>로 점화된 너바나의 신화는, 그러나 돌연 끝나버리고 말았다.
리더 커트 코베인의 자살(1994년 4월5일) 때문이었다.
스타덤을 못 견딘 자기 파괴의 욕망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늙기 전에 죽어버리겠다”는 록 뮤지션의 순수 강령을 드물게 지켜낸 영웅이자 순교자가 된 것이다. 불행한 것은,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얼터너티브 록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순결’의 의도를 품고 발발된 록의 도도한 흐름이, 상업자본과 매너리즘의 거대한 손길과 맞닥뜨려 ‘타협’의 나락으로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런지는 그저 쿨한 ‘트렌드’가 되어갔고, 너도나도 멋지게 보이기 위한 메이크업이 되었다.
이제 록에서 ‘저항’이라는 말은 ‘구리다’의 상투구가 되고 말았다.
오랜 진통 끝에 드디어 세상에 등장한 컴필레이션 < Nirvana>는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음반이다.
록의 순결한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구현해낸 너바나의 풍모를 ‘선물용’으로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고, ‘상업적’으로 보아도 별로 장점이 없어 보인다.
커트니 러브와 너바나의 나머지 멤버들이 아웅다웅해가며 내놓은 결과물치고는 퍽 초라한 것이다.
‘베스트 음반’의 첫째가는 덕목이 풍부한 ‘보너스 트랙(미발표곡)’일진대, 사운드가든과 앨리스 인 체인스의 영향이
짙게 풍기는 달랑 한곡뿐이다.
그렇지만 < Bleach>부터 < MTV Unplugged In New York>에 이르는 너바나의 정규 음반에 실린 주요 대표곡이
착실하게 등장하는 < Nirvana>를 들으면, 가슴 한켠에 주체하기 힘든 파동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컴필레이션의 장점 중 하나인 ‘앉은자리에서 멈춤없이 일괄처리되는’ 너바나의 연대기가 펼쳐진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워크맨으로 < In Utero>를 듣다가 날벼락처럼 커트 코베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날’로 자꾸만
돌아가려는 것이다.
어쩌면 < Nirvana>는, ‘음모론’의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이 음반의 발매를 전후하여 시애틀 그런지의 ‘원조’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는 것이 그냥 우연일까. 사운드가든의
크리스 코넬이 RATM의 멤버들과 손잡은 오디오슬레이브, 너바나와 쌍벽을 이루었던 펄 잼의 재기, 스매싱 펌킨스의
지주였던 빌리 코건의 새 밴드 즈완 등, 돌연 록계는 ‘얼트 록 리바이벌’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 시절 그 얼굴’들이 모처럼 활기찬 움직임으로 록계를 장악하려는 시도는 제법 흐뭇하기까지 한 광경이지만, 자꾸만 ‘영원히 늙지 않는’ 커트 코베인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추억하려니
불가피하게 드는 상실감 때문인지도 모른다.(유니버설 발매)
Nirvana의 데뷔 앨범인 Bleach의 뒷면에는 "시애틀의 Reciprocal Recording에서 Jack Enkino에 의해 $606.17의 비용을 들여 녹음되었음."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렇게 적은 비용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 밴드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Nirvana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팝 음악의 지형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팝 문화 전반에 대한 변화도 가져왔다.
Nirvana의 이야기는 워싱턴 주의 Aberdeen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Kurt Cobain과 Krist Novoselic은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산골 동네라고 해야 할까? 시애틀로부터 두시간 반이나 걸리는 벽지?"
아무튼 그곳은 갸냘프면서도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Cobain에게는 숨막힐 정도로 답답한 동네였다.
그는 종종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녀석들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Cobain에게는 오히려 Olympia 근교에
위치한 비교적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Evergreen 주립 대학으로부터 퍼져 나온 작은 음악/예술 공동체가 더 어울리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는 1985년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자 이내 그곳으로 이사했다.
Olympia에서 그는 Novoselic과 함께 Sellouts, Skid Row, the Stiff Woodies 등의 밴드에서 활동하였다.
그 둘은 1986년 마침내 그들만의 밴드를 만들었는데, 당시 두 사람 이외의 멤버는 거의 고정적이지가 않았다.
2년 후 1988년에 Nirvana는 시애틀 지방의 인디 레이블 Sub Pop과 계약을 맺고 그들의 첫 번째 싱글인
"Love Buzz"를 내 놓았다.
"Love Buzz"는 또한 이 레이블의 전설적인 메일 오더 마케팅 전략인 the Sub Pop Singles Club의 첫 번째 타이틀이
었는데, the Sub Pop Singles Club은 가입자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받으면서 매달 각기 다른 Sub Pop 소속 밴드들의 플라스틱 싱글 레코드를 배달하는 시스템이었다.
The Singles Club은 Sub Pop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고, 그들은 그렇게 모인 자본을 '긴요하게' 사용했다.
일례로 그들은 영국 굴지의 음악 잡지 New Musical Express의 기자였다가 시애틀로 날아 들어온 Everett True를
고용해서 큰 이익을 얻기도 했다.
True는 Mudhoney, Tad, Soundgarden, Nirvana 같은 밴드들의 열광적인 팬이 되어 영국으로 돌아갔다.
영국에서 True가 행한 홍보활동은 약간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전적으로 현실적인 실체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Nirvana의 공연은 야성적이고 디스토션과 피드백으로 흠뻑 젖은 것이었으며, 종종 기타와 드럼세트 등을 때려 부수는
행동으로 절정에 달하기도 하였다.
밴드는 데뷔 이후 끊임없이 순회공연을 해왔고, 잡지의 비평들과 음악 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명성들은 그들이 공연을 할 때마다 청중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였다.
Nirvana의 첫 번째 공식 앨범 Bleach는 1989년 6월에 플라스틱 판으로만 출시 되었다.
이 앨범은 분명히 대충 만든 듯한 인상을 주었고, 곧 이어질 두 번째 앨범 Nevermind 처럼 잘 다듬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Kurt Cobain의 노래들은 이 앨범에서 부터 이미 멜로딕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School" 같은 곡은 추측컨대 당시 시애틀 음악 씬의 당파적인 성격에 대한 Cobain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Won't you believe it?/ It's just my luck" 같은 단순 반복형의 구절이나 덥썩 무는 듯"No recess"의 외침 등,
이 곡에 등장하는 가사는 그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Cobain은 또 "Negative Creep"에서는 남을 괴롭히는 악당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About a Girl"에서는 한 여인에게 열정적으로 구애를 하는 백수 건달로 등장하기도 한다.
Bleach는 밴드의 아이디어 출처들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앨범이다.
Nirvana의 인기가 치솟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멤버 교체 때문에 그들은 고통을 겪었다. Bleach 앨범을
제작할 때에도, 두 명의 드러머가 참여했을 뿐 아니라, 앨범 사진에는 실질적으로 앨범 제작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기타리스트 Jason Everman의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Kiss의 곡을 커버한 "Do You Love Me?" 라는 Kiss 트리뷰트 앨범에 수록된 곡을 녹음할 때만 밴드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다.) 드러머로는 Melvins의 Dale Crover가 1988년 1월, Cobain과 Novoselic이 San Francisco로 이사하기 전 데모를 녹음하는 일을 잠깐 도와줬었다.
1988년 봄, Chad Channing이 끝내 드럼 파트를 맡게 되기 전에도 몇 명의 드러머들이 Nirvana를 거쳐 갔었다.
하지만 Chad도 1990년 5월의 미국 순회공연을 끝으로 밴드를 떠났다.
Sub Pop에서 밴드가 마지막으로 발매한 싱글 "Sliver"에서 드럼을 맡았던 Mudhoney의 Dan Peters, 그리고
Dale Crover가 Chad의 공백을 잠시동안 메웠었다.
이 트리오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드러머인 Dave Grohl이 마침내 1990년 10월에 밴드에 가입하여, Nirvana의 파워
트리오 라인업이 마침내 갖추어지게 되었고, 곧이어 이들은 Nevermind 녹음 준비에 들어갔다.
이전 앨범에 비해 훨씬 잘 만들어진 Nevermind는 대중성과 과격함을 동시에 표현한 몇 안 되는 희귀한 앨범이다.
Sonic Youth의 권유로 Nirvana는 (Geffen Records의 일부인) DGC Records와 1991년 4월 계약을 맺는다.
이에 따라 그들의 몸값이 287,000달러로 상승했고, 그들은 빚도 갚고, 세금도 내고, 전세도 부을 수 있게되었다.
하지만 Nirvana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협상을 하여 만일 그들의 앨범이 5십만장 이상 판매가 되면 예술적인
창작에 대한 전면적인 권한과 높은 로열티를 받기로 하였다.
그들은 그 전 해 4월에 함께 데모 테이프를 제작했던 Butch Vig을 프로듀서로 영입하여 그해 여름부터 캘리포니아의
Van Nuys에서 앨범을 녹음했다.
Vig은 (그 자신도 Garbage라는 밴드를 후에 결성하게 되지만) Cobain의 목소리에 청량함과 울림을 첨가시켜서 밴드의 사운드를 보다 정제된 형식으로 녹음했다.
또 Grohl의 힘찬 드러밍은 Nirvana에게 항상 결핍되어 있었던 파워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작업이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Cobain의 낡아빠진 기타는 "Something in the Way."의 음침한 긴장감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Nevermind는 종종 조용하고 예민한 부분도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 훅을 이용한 거친 하드록 사운드가 지배적인
앨범이다.
"Come As You Are," on a Plain," "Drain You" 같은 곡들은 모두 단순한 모티프와 파워 코드, 그리고 정교한 연주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그러한 특질들은 "Smells Like Teen Spirit."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하는데, Cobain의 노랫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지만, 좋아하는 가수를 종종 자신들의 대변인 격으로 받아들이기 잘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 곡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어 일으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노래의 인상적인 기타 리프는 Nirvana가 출현하기 전까지 (싱글보다는) 앨범의 형태를 고집했던 또다른 고전 록 밴드인 Boston의 "More Than a Feeling"에서 차용한 것이다.
Nevermind는 1991년 9월 24일에 발매되어, 한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골드 (5십만장 이상 판매)를 기록했다.
"Teen Spirit" 뮤직 비디오와 라디오 방송에 힘입어 이 앨범은 1992년 2월에 Bilboard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Nirvana는 Saturday Night Live에 출연하여 마지막에 크레딧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Cobain과 Novoselic이 키스를 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을 자축했다.
흉내내기를 좋아하는 일군의 팬들 -대부분이 남성인(?)-이 함께 관전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그런 프로그레시브한 행동을 따라 하지는 않았다.
1992년 내내 Nirvana는 순회공연을 계속하고 있었고, 그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소란이 끊이질 않았다.
Cobain과 2월에 결혼한 아내 Courtney Love에 대한 기사를 커버 스토리로 다룬 Vanity Fair지가 출간되자 Kurt
Cobain의 헤로인 복용에 대한 소문도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 기사에서는 Love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남편 Cobain도 강력히 반대했던 임신 사실을 발견하자, (낙태를 위해)
헤로인을 복용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Courtney Love는 1992년 8월 18일 Frances Bean이라는 이름의 딸을출산하였다.
논쟁은 이내 사그라들었지만, 1993년 9월에 발매된 이들의 세 번째 앨범 In Utero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종전의 앨범들과는 달리, Steve Albini의 녹음 테크닉에도 부분적으로 원인이 있는 In Utero의 사운드는 다소 가공되지 않은 파워풀한 것이었는데, Albini는 이들의 스튜디오 라이브를 중첩녹음하지 않고 그대로 캡쳐해서 이런 효과를 내었다.
"Serve the Servants"에서 Cobain은 갑작스런 명성이 주는 당혹감을 표현하고 있고, "Rape Me"에서는 Vanity
Fair지의 기자 Lynn Hirschberg를 공격한다.
미국판 앨범의 마지막 곡 "All Apologies"에서 그는 모든 상황이 지금의 현실과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는가라고
자문하고 있다. 그는 외관상으로 달관하는 듯한 어조의 "All in all is all we are." -그래 우리는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야-라는 표현으로 이 노래를 마무리짓고 있다.
In Utero의 출시와 함께 Nirvana는 Rolling Stone지의 주요 인터뷰에 응낙했는데, 그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지가 된
이후의 기분이라든가 명성, 장래의 계획, 그리고 그의 적들에 대해 신경쓰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을 토로했다.
밴드는 1993년 10월부터 (기타리스트 Pat Smear와 함께) 석달간의 북아메리카 순회공연에 들어갔고, 11월에는
MTV Unplugged 공연 실황을 녹음했다.
이 공연에는 Meat Puppets(Cobain이 10대 시절에 가장 좋아하던 밴드들 중 하나)의 노래가 무려 세 곡이나 등장하고, 그밖에 David Bowie, Vaselines, Leadvelly 등의 커버송들도 들어있다.
그리고 Nirvana 자신의 노래들도 불필요한 장비들을 모두 제거한 상태로 다시 편곡하여 선보여졌다. 연말에는
MTV 신년 전야 스페셜 프로의 시애틀 콘서트를 녹음했다.
다사다난하긴 했지만, Nirvana는 1993년을 무사히 넘겼고, 증기기관차처럼 씩씩거리며 앞으로 질주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애석하게도, 1994년 초에, Nirvana가 유럽 순회공연을 거의 끝마칠 무렵, 로마공연이 끝나고 Kurt Cobain이 치사량에 가까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면서 다시금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세간에는 그냥 우연한 과다복용 사고라고 알려지긴 했지만, 그는 자살 메시지를 이미 써 놓은 상태였다.
친구들과 밴드 동료들은 그의 자살을 만류하려 애썼고, Cobain도 캘리포니아에 있는 마약중독자 재활훈련소에
들어갔지만, 머지않아 다시 시애틀로 돌아왔다.
그는 1994년 4월 8일, 스스로 자행한 듯한 총상을 입고 그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Kurt Cobains의 죽음은 Nirvana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의 팬들과 함께 한 수많은 약속들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애도의 기간이 지난 후에, Dave Grohl은 기타를 들고 Foo Fighters를 결성하였고, Krist Novoselic은
워싱턴주의 공공정책과 새로운 밴드 Sweet 75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Nirvana의 유물은 1994년 Unplugged in New York의 발매와 함께 확대되었다.
그리고 1996년에는 그들의 일렉트릭 라이브 앨범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가 발매되었고, 그것을 끝으로 이들의 공식 음반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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