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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Musical

Wagner -Tannhauser Overture

 

 

 

 

 

 

 

 

 

 

 

 

 

  

 

Wagner (바그너) / Tannhauser Overture (탄호이저 서곡)                                                                            
 

   

중세의 음유시인이며 기사인 탄호이저는 영주 헤르만의 조카딸 엘리자베스와 깨끗한 사랑의 서약을 한 사이였는데,
환락의 여신의 유혹에 못 이겨 베누스산에서 관능적인 생활에빠졌다. 
그러나 달콤한 생활에 지친 그는 영주 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열린 노래 자랑에서 그는 베누스를 찬미하기 때문에, 영주의 명령으로 로마 교황에거 용서를 받기위한 순례의
 길을떠난다. 
용서를 받은 자의 지팡이에는 새잎이돋고 꽃이 피지만,그는 용서를 받지 못하고 돌아온다.

실망 끝에 그는 다시 베누스를 동경하지만, 친구인 기사'볼프람'에 의하여 베누스의 환상이 사라진다. 볼프람은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고 있으나 탄호이저를 위하여 희생을각오한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탄호이저가 속죄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절망하여 죽는다.

그녀의 장례식을 본 탄호이저는엘리자베스의 유해 앞에 쓰러지며, 숨이 끊어진다.

 

이때 젊은 순례자들이 잎이 돋고 꽃이 핀 지팡이를 들고나타난다.

이것은 교황이 탄호이저에게 보낸 것으로서그는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곡 Evgeny Murvinsky(Cond) Wiener Philharmonike

 

 

서곡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관능적인 베누스베르크의 세계가 배치되고 그 앞뒤로 경건한 순례자들의

합창 음악이 배치되어 있다

  3부 형식은 이 오페라 전체의 기본 형식으로 각각의 막과 장은 모두 3부 형식을 취한다.

  제1부는 안단테 마에스토소, E장조, 3/4박자로 장엄한 '순례의 합창'이 먼저 관악기 합주로 시작된다.

 

이어서 현악기가 들어와 이 주제가 반복되면서 차차 음량이 커지고 트롬본으로 다시 장엄하게 연주된다.

이 모티브가 여러 번 연주되고 난 뒤 멀리 사라져가듯이 목관 군으로 조용히 연주된다.

제2부는 갑자기 알레그로, 2/2박자로 바뀌어 베누스베르크의 요염한 세계가 뚜렷해지며 '환락의 동기'가 먼저

비올라에 나타난다.

 

이어서 '시레네의 부르는 소리'가 목관으로 연주된 다음, 처음 템포로 돌아와 현악기로 힘차게 '베누스 찬가'가 연주된다.

그 뒤 첼로, 바이올린, 클라리넷 등으로 '베누스의 동기'가 나타난다.

 

이어서 '유혹의 동기'가 바이올린에 나타나고음악이 계속 고조되다가 베누스베르크의 세계는 멀리 사라져간다.

  제3부로 넘어오면서 관악기로 '순례의 합창'이 들려온다. 이 합창이 한층 힘차고 장엄하게 연주되면서 곡이 끝난다.

 

    

  

입장 행진곡과 합창

 

입장 행진곡과 합창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탄호이저>의 제2막 4장에서 노래 시합에 참가하는 기사들과 숙녀들의 입장에서 불리는

곡이다.

제2막 4장이 시작되면 기사들을 선두로 관중들이 당당하게 입장하는데 이 때 트럼펫이 화려하게 울려 퍼짐으로

탄호이저 행진곡이 시작되고, 이 행진곡은 그 악곡이 장엄하고 생동감 있고 아름다워 <축가>라는 제목으로 많이

불리워진다

 

 

리하르트 바그너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독일)

 

악극은 예술의 규모와 영역면에서 볼 때 독특한 업적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한데 응축시켜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전설에서 따온 소재들을 적절히

선택하여 극의 구도 속에 집어넣었다.

 

  이 구도에서 그는 아이스킬로스가 쓴 〈오레스테이아〉를 모델로 택하여원작품의 플롯에서 결정적인 중요한 사건만을

 취하여 줄거리를 단순화했으며,행위는 주로 인물의 동기부여 과정에 할애했다.

바그너 이후의 음악사 중 상당한 부분이 바그너가 이루어놓은 혁신들에 대한 확장이거나 아니면이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그너가 오페라 음악을 통해 이룬 혁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 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음악극). 주요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1843)·〈탄호이저 Tannhäuser〉

(1845)·〈로엔그린 Lohengrin〉(1850)·〈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865), 그리고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1869~76) 등이 있다

 

  

 

 

오페라(악극) 대표작 10 작품들

이 열개의 작품들은 바그너 스스로가 인정한 작품들로 바그너 캐논(Wagner canon)또는 바이로이트 캐논

(Bayreuth Canon)이라고도 한다.

  현재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는 이 10개의 작품만 상연되고 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니벨룽의 반지[5] 4부작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

•파르지팔[6]

 

열 개의 작품 이외에도 초기작으로 요정(Die Feen), 연애금지(Das Liebesverbot),리엔치 [7] 세 개의 오페라가

 더 있다.

하지만 바그너는 이 작품들은 비성숙하여자신의 예술작으로 치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한 바 있으며, 실제로도 거의

상연되지 않는다.

바이로이트에서도 이 세개의 작품은 공연하지 않는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독일어: Wilhelm Richard Wagner, 1813522일 라이프치히~1883213

베네치아) 는 영향력 있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음악 이론가, 그리고 수필가이며, 그의 새로운 교향악적인 

오페라(또는 "악극")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곡은 연속적인 대위법적 텍스처, 풍부한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 Leitmotif;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 연관된 음악 동기)의 교묘한 사용을 눈여겨볼 만하다.

바그너의 반음계적 음악 언어는 유럽 고전음악의 이후 발전을 암시하며, 이는 극단적인 반음계법과 무조성을 지향한다.

 

그는 음악적 사고를 그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발상을 통해 전환해 나갔고, 이는 그의 기념비적인

네 개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의 반지 (1876) 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유도동기와, 종합적인 음악적 표현이라는 그의 개념은 많은 20세기의 영화음악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는 또한 극도로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서, 이는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으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반유대인적 시각에도 기인한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52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Carl Friedrich Wagner)는 경찰서 공무원이었는데, 리하르트의 출생 후

여섯 달 만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18148월에 그의 어머니는 배우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했다.

 

가이어는 사실 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있는데, 어쨌든 친아버지는 리하르트가 여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나고,

그는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젊은 리하르트 바그너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음악에 대해서는 처음에 그가 쓰고 상연하고 싶었던 

극을 한층 향상시킬 수단으로서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곧 음악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돌렸고, 그것을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1831년 입학했다. 초기, 그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183219세때 첫 교향곡인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으며 1833년에 나이 스물의 바그너는 그의 첫 완성된 오페라인

 요정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명백히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반 세기 넘게 상연되지 않았으며, 초연은 그의 죽음

직후인 1883년에 뮌헨에서 있었다.

 

그 동안에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약식 계약을 맺었으며,

 그 동안에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에 기초한 연애금지를 썼다.

이 두 번째 오페라는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연되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8361124일에 바그너는 "미나"라고 불리는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와 결혼했다.

그들은 리가로 이사해서 바그너는 거기에서 지역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몇 주 후에, 미나는 군인과 야반도주했고, 그 군인은 나중에 단 돈 한 푼도 안 남기고 그녀를 떠나 버렸다.

 

바그너는 미나를 다시 맞아들였지만, 이 일은 30년 후에 비극적으로 끝날 문제 많은 결혼 생활의 시작이었다.

1839년까지 부부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리가를 떴다 (빚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바그너를 따라다녔다).

 

그들의 도주 행각 동안에, 그들은 영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이 경험이 그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의 영감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거기에서 리하르트는 기사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바그너는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1840년에 썼다. 뜻밖에 독일의 작센의 드레스덴 왕립 극장이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했다.

 1842년에 부부는 드레스덴으로 이사했으며, 리엔지는 상당히 성공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다음 여섯 해를 보냈으며, 결국 30세에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첫 두 중기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탄호이저를 쓰고 상연했다.

 

바그너의 드레스덴 체류는 바그너의 좌익 정치의 가담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국가주의 운동은 독일 내 영방국가들에서 힘을 얻고 있었으며, 자유와 약한 주들의 한 나라로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운동에서 매우 열성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극단 좌익 잡지인 Volksblätter를 편집하던 그의

동료 아우구스트 뢰켈(August Röckel)과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 등을 포함한 손님들

을 받아들였다.

 

작센 정부에 대한 널리 퍼진 불만은 18494월에 작센의 왕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2세가 국회를 해산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새 헌법을 거부하면서 결국 끓어넘쳤다.

5월 혁명이 발발했고, 바그너는 거기에서 사소한 도움을 주었다.

 

혁명은 초기에 작센과 프로이센 연합 병력에 의해 재빨리 진압되었고, 혁명 주도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파리로, 또 취리히로 도망해야 했다.

뢰켈(Röckel)과 바쿠닌(Bakunin)은 도망치는 데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의 수감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바그너는 다음 열두 해를 망명 생활로 보내야 했다. 그는 드레스덴 봉기 이전에 로엔그린을 완성했고, 이제 그의 친구

프란츠 리스트에게 그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상영되도록 간절한 편지를 썼다.

리스트는 꼭 필요할 때의 친구라는 것을 증명하듯 결국 18508월에 바이마르에서 초연을 지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 자신이 극심한 개인적 궁핍에 시달렸고, 독일 음악계에서 고립되었으며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가 쓰고 있던 음악 단편은 나중에 거대한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로 성장할 것이었는데, 공연될 가망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의 아내 Minna는 그가 리엔치이후에 써 나간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점점 우울증이 깊어져 갔다.

 결국 그는 단독(피부병의 일종)의 희생양이 되었고, 작곡을 계속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바그너의 취리히에서의 처음 몇 해 동안 일련의 주목할 만한 수필이 나왔는데, "미래의 예술-작품" (1849)에서 그는

음악, 노래, , , 시각 예술, 무대 기술 등이 종합된 개념인 "총체예술(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

으로서의 오페라의 비전을 설명했다;"음악 속의 유대주의" (1850)은 유대인 작곡가를 반대하여 겨냥한 반유대주의

작품이다;

그리고 "오페라와 드라마" (1851)은 그가 반지 사이클에서 사용하고 있던 미학 개념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몇 년 동안, 바그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그의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창작으로 그를 이끌었다.

 

첫 원천은 1854년에 그의 시인 친구였던 게오르그 헤베그(Georg Herwegh(가 그에게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그를 찾아왔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불렀다.

 

그의 개인 환경은 분명히 그가,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이 비관적인 관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의 운이 더 나아진 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다.

 

쇼펜하우어의 주의는 음악이 예술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며, 이는 음악이 물질계와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예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이 주장을 환영했으며, 그가 그의 "오페라와 드라마" 에서 이와 직접 상반되는, 오페라의 음악이 드라마의

 원인에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강하게 공명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다.

 

 바그너 학자들은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바그너로 하여금 그의 반지 사이클의 뒤쪽 절반을 포함하는 후기 오페라에

서 음악이 더 강한 명령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는 주장을 해 왔다. 많은 측면의 쇼펜하우어적 주의는 바그너의

 이어지는 대본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마이스터징거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인 한스 작스는 일반적으로 바그너가 자신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인물로

 간주되는데,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적인 창조의 전형이다.

 

바그너의 두 번째 영감의 원천은, 비단 상인 오토 폰 베젠동크의 아내 시인 마틸데 베젠동크였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를 취리히에서 1852년에 처음 만났다.

오토는 바그너 음악의 팬이었는데, 바그너의 뜻에 따라 그의 땅에 작은 집을 세워 주었다. 1857년까지 바그너는 

마틸데에게 푹 빠져 버렸다.

 

마틸데는 그의 애정에 일부 답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그녀의 결혼을 위험에 빠뜨릴 의도는 없었으며,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와 바그너의 만남을 계속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정 행각은 바그너가 링 사이클을 잠시 제쳐놓고 (이후 12년 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기사 

트리스탄과 (이미 결혼한) 귀부인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에 기초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불편한 애정 행각은 1858년에 Minna가 바그너로부터 마틸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게 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어진 대면 후에, 바그너는 혼자서 취리히를 떠나 베니스로 향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다시 파리로 이동해 Metternich의 공주의 노력 덕분에 상연되는 탄호이저의 새 개정판 상연을 보게

 되었다.

 

 새 탄호이저의 1861년 초연은 대 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Jockey Club 소속의 귀족들에 의한 방해 때문이었다.

이후의 공연은 취소되었고, 바그너는 서둘러 도시를 떠났다.

1861년에 바그너에 대한 정치적인 추방이 해제되었고, 작곡가는 프로이센의 비브리히에 머무르면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작업을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오페라가 그의 작품 가운데에 가장 밝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는 나중에 "미래 세대가 이 독특한 작품 안에서 상쾌함을 찾는다면, 그들은 눈물 속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썼다.) 1862년에 바그너는 결국 Minna와 이혼했지만,

그는 (또는, 적어도 그의 채권자는) 그녀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18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리하르트와 코지마 바그너

 

바그너의 행운은 1864년에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나이 19세로 즉위하자 극적인 계기를 맞았다.

젊은 왕은 어린 시절부터 바그너의 오페라의 열렬한 숭배자였기에 작곡가를 뮌헨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그너의 상당한 빚을 해결해 주었고, 그의 새 오페라가 상연될 계획을 세웠다. 리허설에서의 각고의 어려움 끝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뮌헨 왕립 극장에서 1865610일에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그 때 바그너는 또 다른 애정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그너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와 함께였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유명한 백작 부인인 마리다구 Marie d'Agoult (필명 다니엘 스턴) 사이의 사생아로,

바그너보다 24살 연하였다.

 

 리스트는 바그너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의 딸이 바그너를 보러 다니는 것을 금했다.

 18654월에, 그녀는 바그너의 사생아를 낳았고, 이름을 이졸데라고 지었다. 그들의 부주의한 애정 행각은 뮌헨에

추문으로 떠돌았고, 설상가상으로 바그너는 왕에 대한 영향력을 의심하던 뮌헨의 왕궁 일원 사이에서 선호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186512월에, 루트비히는 결국 작곡가가 뮌헨을 떠나도록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히 왕위를 버리고 그의 영웅을 따라 망명할 생각도 했었지만, 바그너가 재빨리 그를 말렸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스위스의 루체른 호 인근의 빌라 Triebschen에 보냈다.

마이스터징거는 Triebschen에서 1867년 완성되었고, 다음 해 621일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10월에, 코지마는 결국 한스 폰 뷜로를 설득해 그녀와 이혼하게 했다.

 

 리하르트와 코지마는 1870825일에 결혼했다. (바그너는 그의 새 장인에게 몇 년간 보러 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지크프리트 목가를 선사했다.

코지마와의 결혼은 바그너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또 한 명의 딸인 에바와 아들인 지크프리트가 태어났다.

 

Triebschen에서 1869년에 바그너는 처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만났고, 곧 굳은 친구가 되었다. 바그너의 사상은

 니체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고, 그때 니체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니체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1872)는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니체가 점점 바그너의 다양한 측면의 생각,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에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멀어졌다.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1888)"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 1889)에서, 그는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고, 심지어 그 자신의 이른 시절의 미숙한 시야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했다.

 

 

 

 

 

 

 

 

 

 

바이로이트

 

바이로이트에서의 리하르트 바그너. 그의 장인이기도 했던 리스트를 피아노 앞에서 볼 수 있다.

바그너는 그의 새 가정에 안착하여, 그의 에너지를 반지 사이클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바그너는 반지 전곡 사이클이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후원자인 루트비히2세가 전곡의 완성될 때까지 참을 수 없어 그의 명령에 따라 사이클 중 이미 완성된

첫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은 뮌헨의 "특별 시사회"에서 초연되었다.

 

1871년에, 그는 작은 마을인 바이로이트를 그의 새 오페라 극장의 위치로 결정했다.

바그너 일가는 그 다음 해에 이주하였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이 놓였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바그너 협회"가 각 도시에 결성되었고, 바그너 자신도 독일 전역에 콘서트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루트비히2세가 또 다른 거액의 보조금을 1874년에 지원한 후에야 충분한 자금이 모였다.

그 후년에, 바그너 일가는 바이로이트에 리하르트가 반프리트(독일어로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고

이름붙인 빌라를 그들의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이주를 마쳤다.

 

축제극장은 결국 18768월에 반지사이클의 초연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바이로이트

축제의 개최지로 남았다.

 

반프리트의 정원에 있는 리하르트와 코지마 바그너의 무덤.

 

1877년에 바그너는 그의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작곡에는 4년이 걸렸으며, 그 동안에 그는 또한 일련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수필을 썼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18821월에 완성했는데 이 작품을 오페라라 하지 않고 신성한 무대용 축전극이라 하였다.

 

그 해 여름 파르지팔을 초연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렸다. 바그너는 이 때에 심하게 아팠으며, 점점

심한 협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파르지팔은 총 16회 상연되었는데, 마지막 공연날인 829일에는 지휘자 헤르만 레비가 아팠기 때문에 3막이

연주되는 도중에 바그너 본인이 비밀리에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지휘자 헤르만 레비로부터 지휘봉을 받아서

작품의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지휘했다.

 

이 축제 이후에, 바그너 가족은 베니스로 요양을 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1883213, 리하르트 바그너는심장마비로 베니스 대운하 위의 Palazzo Vendramin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되돌아와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다.

 

 

 

 

Image:Nicolas Lancret 001.jpg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전용(專用)

 

20세기 동안, 바그너에 대한 공공의 이해에는 그의 반유대주의가 점점 더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이는 대부분

작곡가의 죽음 뒤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그의 음악을 나치 당이 전용한 것이다.

바그너는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유대인, 특히 유대인 작곡가가 독일의 해로운 외래 요소라고 비난했다.

 

그의 반유대인 수필 중 처음이자 가장 찬반 논란이 큰 것은 1850년에 "K. Freigedank"("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출판한 "음악 속의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이었다.

 

 

수필은 유대인 작곡가, 가령 바그너의 동시대인이자 경쟁자였던 펠릭스 멘델스존이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와 같은

 유대인 작곡가들이 "대중적인 비선호"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으며, 따라서 "...

 

우리는 항상 본능적으로 그들과의 실질적인 접촉에 불쾌감을 느낀다" 고 썼다. 그는 유대인 음악가들은 얕고 인공적인

 음악만 쓸 줄 알며, 이는 그들이 "민족의 참 정신"과의 연결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필의 결론에서, 그는 유대인에 대해 "너희들이 너희들의 저주라는 짐으로부터 정화될 방법은 단 하나다:

아하수에로(방랑하는 유대인, 전설의 인물)의 정화 - 복종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것이 실제적인 물리적 소멸을 의미하기 위해 취해진 것이지만, 수필의 문맥상 그것은 유대주의의 박멸을 가리킨다.

근본적으로, 바그너는 유대 문화의 포기와 유대인을 독일 문화계로 흡수시키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의 첫 출판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바그너는 그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소책자로 1869년에 재출판하여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공연 시에 여러 대중적 항의를 야기시켰다.

 

 바그너는 비슷한 시각을 여러 다른 글, 가령 "독일인이란 무엇인가?" (1878) 등에서 반복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로버트 구트만 같은 학자들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가 그의 글에 국한되지 않고 오페라 또한

숨겨진 반유대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가령, 반지의 미메(Mime)나 마이스터징어의 직스투스 베크메서(Sixtus Beckmessere)와 같은 인물은, 비록

 유대인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반유대적인 전형적인 인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논란이 많다.

그런 식으로 가정된 "숨은 메시지"는 종종 복잡하게 얽혀 있고, 편견 어린 과대해석의 결과일 수도 있다.

 

바그너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엄청난 양의 자신의 모든 측면(자기 자신의 오페라, 자신의 유대인에 대한 관점,

기타 태양 아래에 있는 실질적인 모든 다른 주제까지)을 분석하는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가정된 반유대인 메시지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다.

 

바그너 자신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독특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했지만, 그는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이스라엘의 신은 예수의 아버지인 그 신과 다르고,

십계명은 기독교의 교훈에 있는 자비와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또한 불교에 매료되었고, 여러 해 동안 불교 오페라인 "승리자"(Die Sieger)를 구상했고, 이것은 붓다의

마지막 여행을 비유한 Sârdûla Karnavadanaan에 기초할 계획이었다.

 "승리자"의 면면은 결국 파르지팔에 흡수되어, 기독교의 바그너화된 기묘한 판을 그려낸다.

 

가령 성찬식에서의 화체설(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도 된다는 설)은 미묘하게 재해석되어, 뭔가 기독교적인 것

보다는 이교도의 이식에 더 가깝에 되었다.

그의 매우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적인 시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유대인 친구와 동료의 광범위한 망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하도록 고른 유대인 지휘자 헤르만

레비였다.

바그너는 처음에, 아마도 오페라의 종교적인 내용 때문에 그러했겠지만, 파르지팔을 지휘하기 전에 레비가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나중에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레비는 바그너와의 가까운 우정을 계속 이어갔으며, 작곡가의장례식에서 운구를 부탁 받았다.

 

바그너의 죽음 무렵에, 유럽의 국가주의자 운동은 1848년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인류 평등주의를 상실하고 있었고,

군사주의와 공격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으며, 이에는 비스마르크의 정권 교체 및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적지 않은

부분 영향을 주었다.

 

1883년 바그너의 죽음 후에, 바이로이트는 신화와 오페라에 끌린 우파 독일 국가주의자의 초점이 되어갔고, 이들은

바이로이트 모임으로 불렸다.

 

이 모임은 코지마 공인을 받았는데, 그녀의 반유대주의는 리하르트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고 더 악의에

 찬 것이었다.

이 모임의 한 사람은 Houston Stewart Chamberlain으로, 나치라면 읽어야 했던 수많은 철학적 저술의 저자였다.

 

Chamberlain은 바그너의 딸인 에바와 결혼했다.

코지마와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1830년에 사망한 후, 축제의 운영권은 지크프리트의 미망인이었던, 영국 태생의

 비니프레트에게 넘어갔는데, 그녀는 아돌프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의 숭배자였고, 바그너의 음악과 독일인 국가(1871년 이전에는 형식적인 정체성이 없었던 국가)에 대한 히틀러 자신의 영웅적인 신화를 융합할 길을 물색했다.

 

예를 들어,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는 매번 마이스터징거 서곡 연주로 문을 였었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원본 악보 다수를, 빌란트 바그너가 이러한 소중한 문서를 잘 보존해 달라고 탄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의 베를린 벙커

에 보관했다;

그 악보들은 전쟁의 최후의 순간에 히틀러와 함께 사라졌다.

 

몇몇 학자들은 바그너의 시각, 특히 그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해 왔지만, 이런 주장은 찬반

논란이 많다.

바그너의 작품은 나치 식의 영웅주의와 별로 상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지 사이클의 표면상의 "영웅"인 지크프리트

는 얕고 별로 호소력 없는 시골뜨기일 뿐이다; 바그너의 공감은 분명히 염세적이고 여성같은 보탄에게 있었다.

 

바그너의 개인 철학의 많은 측면 분명히 나치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었을 터인데,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유대인과의 동화

와 같은 것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괴벨스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에 파르지팔을 상영 금지했는데, 이는 오페라 전체에 평화주의적

목소리가 넘쳤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 대해 후세의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가진 관점을 가지고 비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숭배는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바그너는 (1889420일에) 히틀러가 태어나기 6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는 히틀러가 좋아한 것은 무조건 싫어해야 한다는 느낌 (혹은 정반대의 상황)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쓴 바가 있다 -- 그는 이런 것을 Reductio ad Hitlerum (히틀러가 관련되었다는 것으로 돌리면 그건 무조건

틀린 게 된다는 뜻, Reductio ad absurdum (귀류법) 의 패러디) 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라면 히틀러가 채식주의를 실천했다고 (그는 채식주의를 아리아인의 순수성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것을 경멸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작품은 이스라엘에서 사실상 연주 금지되어 왔으며, 그리고 극히 적은 수의 공연이

행해지기는 했으나 엄청난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바그너의 곡은 사실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흔히 방송되고 있지만, 공공 공연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는 반대 시위, 특히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에 의해 저지되어 오고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 바렌보임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한 소절을 2001년 이스라엘 축제의 앙코르로 연주한 뒤에, 의회의

위원회는 지휘자를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처음에는 계획되어 있었던 발퀴레 공연을 포기해야 했다.

다른 경우에, 주빈 메타는 관중석의 항의성 퇴장과 야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연주했다.

 

바그너와 그의 음악이 일으키는 반응의 복잡함을 반영하는 수많은 역설 중 하나는, 현대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Theodore Herzl이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바그너의 영향과 유산

 

그는 음악사에 있어서뿐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천재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최고봉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에

 있어서의 거봉이었다.

또한 니체에게도 영향을 준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세기 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바그너의 유럽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그의 생전과 사후 여러 해 동안, 바그너는 그의 다수의 팬들 사이에서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들 사이에서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음악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특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 편에 서거나 바그너에 반대하는 편 중 하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등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그너였으며,

 처음으로 관현악단 피트(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용했던 것도

 그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다.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 미술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했다.

 

그는 파르지팔를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바그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은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톨킨 자신이 옥스포드의 고대영어 교수이었기에 북구 신화와 사가에는 정통했었고, 따라서 북구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C.S. 루이스가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으며, 20세기 초의 유럽 문화계의 풍토를 보아도

 바그너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게다가 톨킨은 C.S. 루이스와 함께 종종 바그너 공연을 보러 갔었으며, 한때는 C.S. 루이스와 함께 <니벨룽의 반지>

2부 발퀴레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 그는 바그너를 즐겨 들었고 또 열심히 연구를 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느, 그리고 샤를르 보들레르는 그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즉 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잇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파로 나뉘었다. 브람스 지지파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고 바그너식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클로드 드뷔시는 바그너를 심하게 비판했던 사람이지만 ("그 오래된 중독자"),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작곡자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받았기 때문에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강한 반응을 계속 일으켰다. 그의 후기작에서, 그는 바그너 작품의 그것처럼 긴 시간과 깊은 맥박을

 만들어내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자들이 바그너의 시간 개념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

 

로시니("바그너는 굉장한 순간과 진절머리나는 15분을 가지고 있다")를 포함해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 자신의

"Guillaume Tell"이 네 시간 이상의, 어떤 바그너 작품 하나보다도 긴 시간을 요구했다.

 

바그너의 이상은, 지크프리트의 "금발의 괴물" 영웅주의로부터, 그의 열성적인 쇼펜하우어 오독과 더불어 죽음과

신격화에 대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심하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오페라는 계속 강한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그너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그에게 자극받은 이차 문학의 양이 많은 역사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그는 계속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 원인이 그의 음악의 뿌리에 있는 능가할 자 없는 숭고함, , 장엄함, 그리고 때때로 위험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