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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Barock 음악에 대하여

 

 

 

 

 

 

 

J.S. Bach Orchestral Suite No.3 In D Major (BWV 1068)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관현악 모음곡 제3번 전체연주 (스크롤 영상)

 

 

 

 

 

Image:Blessed Ludovica Albertoni.jpg

 

 

 

바로크음악 (Baroque Music)-1600년 ~ 1750년  

 

역사적 배경

 

 

:1600년에서 1750년 사이의 음악을 가리켜 바로크(Baroque)음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대를 지칭하는

 '크'라는 음악사적 용어의 적용에는 많은 이견(異見)이 있다.

프랑스어인 바로크는 원래 '불규칙하게 생긴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인 바로코(barroco)에서 유래되었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1746년에 노엘 플뤼쉬(Noel Pluche)가 음악을 'musique chantante(유연한 음악)'와

 'musique baroque(거친 음악)'로 구분하면서 다소 저질스러운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 시대는 절대 군주의 시대로, 변화와 모험, 이성과 신앙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시기였다.

 

17세기 초에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혁신적인 젊은 음악가들이 일반 문화예술의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로운 양식, 다시 말해서 화성적인 반주를 가진 단선율의 양식을 장조 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노디아(Monodia)즉 단 음악이다. 이 단음악이 정착 되었을때 르네상스음악이 완성된 것이지만 이 선율음악은 대위법적인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서창적인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화성적인 반주로 가장 직접적인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독창가곡이나 오페라, 그리고 오라토리오로서 나타났는데, 이러한 양식에 의해 근대적인 음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음악의 중심이 교회로부터 궁정이나 귀족사회로 옮겨지게 되면서 교회 선법은 점차

 약회되고, 장조와 단조의 중심적 역할이 뚜렷해졌다.

 

그리고 다성 음악이 절정에 이르면서 화성 음악이 발달해 갔고, 여러 가지 새로운 모습의 양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한편 옛 겹선율에 의한 복음악이 모두 쇠퇴해버린 것은 아니며 당분간 신구 두 개 의 양식이 서로 접촉하고

 영향을 주며 사용되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의 많은 음악가는 그 풍부한 화성적 가능성에서 복음악적인 방향으로 나갔고, 이에 반해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음 악가는 르네상스적인 단음악을 택하고 오페라나 아리아,  소나타와 협주곡의 양식을 창안 발전 시켰다.

이 두 개의 조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이든이나 모짜르트등의 고전음악에서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다.

 

 이 르네상스 정신의 최고의 발현시대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부터 18세기 전 반기에 바하나 헨델이 대위법적인 음악을 완성한 복음악의 전성기에 이르는 약 150년간을 바로크음악시대라고 부른다.

 

 

원래 바로크(Barock)라는 말은 주로 미술에서 사용된 시대양식의 개념으로서 스페인의 베라스케스, 네덜란드의

란브란트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변화있는 색채, 웅대한 구도, 장식 적인 곡선, 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 등이

바로크예술의 특징이다.

 

바로크 음악은 원칙적으로 저음에 기초를 두어 그위에서 화성적인 성부를 배정해 가는 통주 저음기법을 기반으로

 대조적인 협주양식, 즉 강주와 약주, 전 합주와 독주, 밝은 것과 어두운 것과 같은 대비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감동과 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울 장식하고 화성에서 으뜸음을 중심으로 힘차고 색채감과 극감을 더해 준다.

 

그리고 마로크음악의 사회 적 바탕은 절대주의의 귀족 제도로서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의 분애로서 이탈리아가

그중심 이 되었다.

 

 

 

 

 

 

Image:Fontaine des tortues (Rome) 040.jpg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인간중신적 세계관이 팽배해져서 점차 시민계급을 성장시켰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합리적인

관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이것을 적용하여 카메라타

 일원인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와 카치니(G. Caccini) 1545∼1618)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단성음악의 선율반주는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는데 이것은 작품전체를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통주저음

(Basso Continuo)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통주저음은 저음부 아래에 화음을 지시하는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저음(Figured Bass)이라고도 부른다.

 

 

 

 

 

 

 

 

 

오페라 (Opera)의 탄생


16세기말경 이탈리아 피렌체의 음악애호가 바르디(G. Bardi, 1534∼1562)의 집에 젊은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다.

1597년에 시인 리눗치니(O. Rinuccini, 1563∼1623)의 대본에 페리(J. Peri, 1561∼1633)가 오페라《다프네

(Dafne)》를 작곡하였다.

 

두 번째 작품도 리눗치니 시(詩)에 페리와 카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ece)》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에우리디체뿐이다.

그런데 근대적 개념의 오페라에 접근되는 진보적인 오페라를 만든 사람은 몬테베르디(C. Monteverdi,

1567∼1643)이다.

 

그는 1607년 《오르페오(La Favola d' Orfeo)》를 상연하였는데 대규모의 합창과 관현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이전의 오페라라는 표현양식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기악의 서주로 시작하였고 댄스음악이 있고 신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1725)를 중심으로 한 나풀리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에서는 륄리

(J. Baptiste Lully, 1632∼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오라토리오(Oratorio)와 칸타타(Cantata)


특히 바흐의 헨델은 오라토리오·칸타타·협주곡 등에서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

오페라보다 조금 늦게 종교음악의 한 형식으로 태어난 오라토리오는 초기의 모습이 오페라와 매우 유사하였다.

오라토리오의 특성은 오페라와 달리 종교적 내용으로 무대장치, 연기가 없다는 것이지만 초기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연극적인 형태를 모두 갖추었다.

 

최초의 오라토리오는 카발리에리(Emilo de Cavalieri, 1550년경∼1602년)의《영혼과 육체의 극》인데 성서적

 내용이 약하고 연극적인 면이 강하여 오페라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하겠다. 그후 카리씨미(Giacomo Carissimi,

1605∼1674)가 쓴 《예프테, Jephte》로써 오라토리오의 음악양식을 확립하였다.

 

바로크말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헨델(George Friederch Handel, 1685∼1759)이다. 그는 극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여 합창을 증가시켰고, 소재도 성서적 내용이외에 고대 그리이스의 신화적 인물을등장시키는 등 기존의

오라토리오의 음악 양식에서 탈피하여 오라토리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불후의 명작 《메시아, Messiah》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범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

 

 

칸타타의 음악형식구조는 오라토리오와 유사하다. 다만 그 규모가 축소되어 전례용으로 사용되기 적합하였다.

17세기중엽부터는 성서적 내용 이외에도 서정적인 세속가사를 사용하여 칸타타의 영역을 넓혔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은 200여편의 코랄을 사용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여 바로크 칸타타의 최고경지를

이룩했다.

 

 


 

 


  

 

 

 

기악음악의 발달


바로크시대의 기악음악은 중세에세부터 내려오는 악기의 발달과 양식의 확립, 새로운 악기의 출현으로 성악음악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건반악기는 독주용악기로도 사용되었으나 통주저음의 필수적인 악기로 어떠한 기악음악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크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오르간을 위시하여 클라비코드, 쳄발로 등은 독주나 합주용 악기로

인기가 높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709년에는 크리스토포리(B. Cristofori, 1655∼1713)가 만든 피아노(Clavicembalo col Piano e Forte)가

등장하여 피아노 문헌의 첫장을 열었다.

 

현악기 부분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는데, 르네상스를 점유했던 비올족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현악기군을 이루는 바이올린 족으로 대치되어 관현악 음악의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크레모나(Cremona)출신의 아마티(N.Amati), 과르네리(G.B.Guarneri), 스트라디바리(A. Stradivari)등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우수한 악기를 만들어 바로크 현악을 더욱 수준 높은 음악으로 끌어 올렸다.

르네상스를 지배하던 루트는 바로크시대에 들어오면서 그 빛을 잃고 퇴조하여 그 명맥만을 유지시켰다.관악기는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으나, 관현악에서 그 중요성이 더 새져서 악기의 사용 빈도수가 높아갔다.

 

바로크시대의 작곡가들은 르네상스시대에 유행했던 몇몇 기악형식을 여전히 사용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음악형식을

개발하여 근대적인 기악 음악으로 그 모습을 점차 바꾸어나갔다.

르네상스의 기악형식이었던 푸가(Fugue)는 바로크시대에 와서는 독립된 기악작품은 물론 성악, 합창곡에서도

그 기법이 사용되었다.

 

 모음곡(Suite)은 무곡을 여러 개의 부분으로 확대해서 독주와 합주용의 기악 음악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모음곡은 주로 같은 조성의 알르망드(Allemande), 쿠랑트(Courante), 사라반드(Sarabande), 지그

(Gigue)를 주로 하여 그밖에 지그의 앞과 뒤에 미뉴에트(Minuet), 부레(Bouree), 가보트(Gavotte)등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바로크시대에 와서 르네상스의 세속 성악음  들을 성악과 기악의 혼합 내지는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형태가 흔하였는데 이것이 다악장 형식의 소나타(Sonata)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었다.

 

 

 

 

 

 

 

많은 바로크 소나타는 두 개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하여 작곡되었는데 이것이 트리오 소나타이다. 다른 형태의

소나타로 (Sonata da Camera)와 교회소나타(Sonata de Chiesa)라는 두 종류로 분류지었고 일반적으로 같은

조성의 4악장으로 구성된다.


  바로크시대의 협주곡은 합주협주곡(Comcerto Grosso)과 독주협주곡(Solo Concerto)의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합주협주곡의 확립자는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이고 독주협주곡은 3악장 형식으로 오늘날의

협주곡 악장의 구성원리를 제공하였다.

 

대표적 작곡가는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로서 근대적 개념의 협주곡 완성자이다.

 관현악을 의미하는 신포니아(Sinfornia), 서곡(Overture), 협주곡(Concerto) 등이 있었으나 용어의 구분처럼

음악적 내용의 구분이나 표준은 서 있지 않았고 관현악의 형태도 아직 악기의 구성이나 기준이 일정치 않았다.

관현악의 주된 악기는 현악기였고 관악기나 타악기는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

 

 

 

 

 

 

 Image:Baldachin petersdom.jpg

 

 

 

 

 

안토니오 비발디 - 화사한 활기의 음악

 

 

 

12개의 협주곡을 담고 있는 [조화의 영감]은 유명도에 있어서는 [사계]보다 떨어지지만 들을수록 그 맛이 우러나는 비발디 최고의 걸작이다.

1712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어 비발디의 명성이 국제적이었음을 입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곡은 독일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비발디 [10번 B단조 협주곡]을 [4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BWV 1065]로 편곡하기도 했다.

 사실 바흐는 비발디의 협주곡을 10곡이나 복사했으며, [4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외에도6곡은 쳄발로를 위해,

3곡은 오르간을 위해 편곡했다.

 

 ‘협주곡의 작곡가’ 비발디는 바로크 후기에서 고전파 음악 초기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18세기 작곡가들에게 독주와 총주의 대조와 기악적인 음향에 대한 중요성을 심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간결한 주제, 명쾌한 형식, 활기찬 리듬, 악상의 흐름에서 보이는 논리적인 지속성 등은 바흐 이외에도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성실한 질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6대에 걸친 음악가 집안 ‘대 바흐’의 가문에서 태어나 성실한 음악가의 삶을

 살았다.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했고, 쾨텐 지방 공작의 궁정악장,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칸토르로 취임했다.

바흐는 윗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료들의 즐거움을 위해, 신의 영광을 위해 늘 최선을 다했다.

 

바흐는 장인으로서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힘들게 악보를 사보하면서 모든 음악적 원천을 소화했다.

 그리고 개인과 교회, 시 당국이 후원한 18세기식 예술후원 체제를 등에 업고 ‘하나의 우주’에 가까웠던 천재성을 발휘하며 ‘대 바흐’의 명성을 이루어 내었다.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한 바로크 후기의 전 장르에서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그는 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요구하는 필요성에 따라 작곡했기 때문에 상황과 시대에 따라 작품을 분류하는것이 가능하다.

 

오르가니스트로 고용됐던 아른슈타트,뮐하우젠, 바이마르에서 쓴 작품의 대부분은 오르간을 위한 것이었다.

 아른슈타트 시절 바흐는 거장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를 보기 위해 4주간의 뤼벡 여행을 16주로 연장하기도 했다.

 

 유명한 [토카타와 푸가 D 단조]는 북스테후데의 작풍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뮐하우젠 시절 바흐는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 등 초기 교회 칸타타의 명작을 썼으며, 바이마르 시절에는 [오라 성령이여 주 하느님이여에 의한 환상곡]같은 대규모 코랄 편곡이나 [오르겔뷰흐라인(오르간 소곡집)],

바이센펠스의 영주 크리스티안 공의 생일을 축하하여 작곡한 사냥 칸타타 [나의 즐거움은 힘이 나는 사냥뿐] 등을

 썼다.


바흐는 중세 이래 서양음악을 집대성해 서양 고전음악의 토대를 마련했다.

 

 

마찬가지로 바흐가 교회음악과 관련이 없었던 쾨텐 시절 쓴 곡들은 교육용과 가정 오락, 궁정의 여흥을 위한 음악인

 클라비어나 기악 합주용 음악이었다.

걸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등이 이 시절 나왔다.

 

바흐가 칸타타와 그 밖의 교육 음악을 주로 많이 쓸 수 있었던 시기는 라이프치히에서의 초창기였다.

[요한 수난곡], [마태 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커피 칸타타], [쳄발로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푸가의 기법], [음악의 헌정], [B단조 미사] 등 깊이 있는 빼어난 작품들이 만년에 나왔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중세 이래 서양의 음악문화를 집대성했다. 서양 고전음악의 근간인 대위법은 곧 바흐의 음악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또한 바흐는 비발디를 비롯한 전세대와 동세대 음악에서 취할 것을 취하고, 카를 필립 에마누엘, 요한 크리스티안 등

 뛰어난 작곡가가 된 아들들과 제자를 양성해 그의 예술을 성실하게 다음 세대로 전달했다.

나는 바흐를 생각하면 수없이 많은 톱니바퀴가 정확히 작동하며 돌아가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시계가 떠오른다.

 

 바로크 시대 비발디는 이탈리아의 진보적인 음악을 대표하고 있었고, 장 필립 라모 등 프랑스 바로크 작곡가는 루이

14세 시대 이후 프랑스의 전통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바흐는 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적 업적을 흡수해 자신의 북독일 루터파의 자질과 융합시켜 강하고 독특한

개성의 연합을 이뤄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글로벌 스타

 

 

 

헨델은 완전히 글로벌 스타 작곡가였다.

헨델의 음악은 독일적인 중후함과 이탈리아적인 명쾌함, 프랑스적인 장려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마치 근대 이후의 홍콩과도 같은 국가적 색채의 완충지대였고, 국가적인 양식을 넘는 헨델의 특성을

 발전시키는 데 최적의 땅이었다.

 

 영국은 헨델에게 멍석을 깔아주었다.

자신들의 합창 전통을 개방하여 오라토리오를 쓸 수 있도록 장려했다.

 

바로크 시대 비발디가 끼친 영향은 동시대적이었으나, 상대적으로 라모의 영향은 오페라와 음악이론 부분에

한정됐으며, 바흐의 작품은 나중에 멘델스존에 의해 붐이 일기 전까지 반세기 동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헨델은 바흐와 달랐다. 

당대에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렸고 그 명성은 쉬 사그러들지 않았다.

헨델은 음악가족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이 뛰어난 나머지 마지못해 음악을 시켰다.

고향인 작센의 할레에서 오르간 주자, 쳄발로 주자가 된 헨델은 바이올린, 오보에를 배우고 대위법의 기초를 철저히 익혔으며, 독일 작곡가와 이탈리아 작곡가의 악보를 필사하며 감각을 키웠다.

 

바흐와 달리 오페라에 마음이 기울었던 헨델은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 함부르크에서 음악가 요한 마테존 등과

교류하며 최초의 오페라 [알미라]를 썼다.

 

1706년부터 1710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헨델은 로마,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의 주요 후원자들, 음악가들과 사귀었다. 당대의 음악가 코렐리,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교류하며 [아그리피나] 등의 오페라를 썼다.

1710년 런던을 방문한 헨델은 그곳에서 아리아 ‘울게 하소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페라 [리날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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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의 성공에 고무되어 독일 하노버 선제후(헨델은 1710년부터 선제후의 악장으로 근무했었다)에게 돌아가지

 않았던 헨델은 자신이 의리를 저버렸던 그 선제후가 영국 왕위(조지 1세)에 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즈음 헨델이 조지 1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템즈 강 뱃놀이를 위해 ‘맞춤형’으로 작곡한 곡이 [수상음악]이다.

 

헨델의 기악 작품 중에 중요한 것으로는 이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합주 협주곡 Op.3]과 [Op.6],

[오르간 협주곡 Op.4]와 [Op.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 쳄발로 모음곡(유명한 [즐거운 대장간]은 이 곡의 1권 5번의 선율을 변주한 것이다)과 트리오 소나타 등을

들 수 있다.

 

런던에서 헨델은 [줄리오 체사레], [로델린다] 등 뛰어난 오페라를 작곡하며,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오를란도], [알치나], [세르세] 등의 명작 오페라를 낳을 즈음, 영국의 오페라계는 매서운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

 있었다. 오페라의 고비용 저효율에 근심하던 헨델은 영어 가사로 된 오라토리오 장르로 선회했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보다 제작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다. 게다가 당시 영향력 있던 중산계급 음악 애호가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를 선호했다.

[아치스와 갈라테아], [에스더], [알렉산더의 향연], [사울], [이집트의 이스라엘인]등 영어 가사를 붙인 오라토리오에 이어, 1742년 헨델의 대표작 [메시아]가 더블린에서 연주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신화를 소재로 한 [세멜레], 성서의 내용을 가사로 한 [유다스 마카베우스] ,[예프타] 등도 연이어 히트를 쳤다.


1726년 헨델은 영국인으로 귀화했다. 그는 이미 사랑받는 영국인이었다.

 장년기를 모두 런던에서 보냈고, 그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모두 영국의 청중들을 위해 썼기 때문이다.

 헨델은 바로크 후기 음악을 보급하는 데 공헌했고, 18세기 중기의 새로운 양식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시대에 앞서서

 사용했다.

 

대규모 양식의 합창곡에 있어서 헨델에 필적할 사람은 없다. 바흐의 대위법 양식이 엄격했다면 헨델은 멜로디와 화성에 중점을 두었다.

 

오라토리오를 통해 중산층 계급에게 호소한 것은 음악 분야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인 변화에 대응하는 헨델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로 헨델은 고전을 넘어 멀리 낭만 음악을 바라본 선구자였다.

 

 

 

 

 

 

 

 

 

원래 바로크(Barock)라는 말은 주로 미술에서 사용된 시대양식의 개념으로서 스페인의 베라스케스, 네덜란드의 \

란브란트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변화있는 색채, 웅대한 구도, 장식 적인 곡선, 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 등이

바로크예술의 특징이다.바로크 음악은 원칙적으로 저음에 기초를 두어 그위에서 화성적인 성부를 배정해 가는 통주

 

 저음기법을 기반으로 대조적인 협주양식, 즉 강주와 약주, 전 합주와 독주, 밝은 것과 어두운 것과 같은 대비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감동과 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울 장식하고 화성에서 으뜸음을 중심으로 힘차고 색채감과 극감을 더해 준다.

 

그리고 마로크음악의 사회 적 바탕은 절대주의의 귀족 제도로서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의 분애로서 이탈리아가 그중심 이 되었다.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인간중신적 세계관이 팽배해져서 점차 시민계급을 성장시켰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합리적인

관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이것을 적용하여 카메라타 일원인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와 카치니(G. Caccini) 1545∼1618)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단성음악의 선율반주는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는데 이것은 작품전체를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통주저음

(Basso Continuo)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통주저음은 저음부 아래에 화음을 지시하는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저음(Figured Bass)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