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Lennon - Oh My Love
Oh My Love
Oh my lover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eyes are wide open,
Oh my lover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eyes can see,
오 내 인생의 첫사랑이여.
나의 두 눈은 넓게 열리고,
오 내 인생의 첫 사랑이여
나의 두 눈은 볼 수 있어요.
I see the wind,
Oh I see the trees,
Everything is clear in my heart,
I see the clouds,
Oh I see the sky,
Everything is clear in our world,
나는 바람 부는 것을 보고 있어요,
오, 나는 나무들을 보고 있어요.
모든 것이 내 가슴속에서 명확해져요.
나는 구름을 보고
오 나는 하늘을 보고
우리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환해지고 있어요.
Oh my lov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mind is wide open,
oh my lover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mind can feel,
오 내 인생의 첫사랑이여,
내 마음이 크게 열려요.
오 내 인생의 첫사랑이여
내 마음은 느낄 수 있어요.
I feel the sorrow,
Oh I feel dreams,
Everything is clear in my heart
나는 슬픔을 느끼고
오 나는 꿈을 느껴요.
모든 것이 내 마음에서 분명해져요.
I feel the life,
Oh I feel love.
Everything is clear in our world
나는 인생을 느끼고
오 나는 사랑을 느껴요.
모든 것이 우리의 세계에서 분명해져 가고 있어요
존 레논(John Lennon,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은 영국의 가수이다. 비틀즈의 창립 멤버로서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의 공동 작곡(레논-매카트니)을 통해 "로큰롤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음악을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영국 싱글 차트에서 폴 매카트니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성공적인 작곡가로 기록되어 있다.
<기네스 월드 레코즈>에서는 가장 성공한 작곡 팀의 한 명으로서 '차트 1위의 곡이 미국에서 동료 폴 매카트니가 32곡, 레논이 26곡(공동 작곡은 23곡), 영국 차트로 레논이 29곡, 매카트니가 28곡(공동 작곡이 25곡)'으로 소개하고 있다.
레논이 작곡에 참여한 비틀즈 곡로는 'I Want To Hold Your Hand'와 'She Loves You', 리드 보컬이었던'Please Please Me', 'A Hard Day's Night', 'Help!', 'Strawberry Fields Forever', 'All You Need Is Love',
'Across the Universe', 'Come Together'이 있다. 또한 솔로로는 'Love', ',Imagine', 'Starting Over' 등을
발표했다.
1965년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대중음악가로서는 이례적인 서훈이었다. 그러나 존 레논은 영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후에 이 훈장을 반납한다. 또한 레논은 음악과 영화, 책, 회견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반항적인 성향과 통렬한 재치를 드러냈으며 평화 운동과 그림 작품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틀즈 해체 이후 레논은 <John Lennon/Plastic ono Band>, <Imagine> 등의 앨범과 'Imagine', 'Give Peace a Chance', 'Love' 등의 곡을 통해 성공적인 솔로 경력을 쌓았다. 레논의 마지막 앨범이 된 <Double Fantasy>는 1981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 수상작으로 선정된다.
레논은 사후인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1994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8년에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을 묻는 BBC의 설문조사에서 8번째로 선정되었다. <롤링 스톤>지는 2004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50인”(The Fifty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중에서 레논을 38위로 선정했고, 2008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에 5위로 선정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
John Lennon에 대하여
그룹 비틀스의 리더로 작가, 그래픽 아티스트, 솔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오노 요코와는 음반 및 예술기획 작업을 함께하기도 했다.
레논은 비틀스의 멤버 가운데 가장 솔직했고 선동가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는 다재다능했지만 음악에 자신의 전존재를 쏟아부었다.
반항적이고 선동적이며 다층적인 비틀스의 색깔엔 그의 문화적 흔적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레논은 1968년을 기점으로 비틀스 탈퇴에 가속도를 붙였고 거기엔 오노의 영향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73년 오노와 헤어진 후 레논은 실의에 빠져 1년 이상 허송세월을 보내다 다시 재결합했으며 곧 아이를 낳았다.
그후 레논은 음악계를 뒤로하고 은둔자적 삶을 살다가 1980년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정신병자이자 열혈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피살되면서 생을 마감했다.
그룹 비틀스의 대표를 맡아 이끌었으며 작가, 그래픽 아티스트, 솔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오노 요코와 함께 음반 및 예술기획 작업을 함께한 협력자이기도 했다.
노동자 신분으로 외향적이면서 삶의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던 레논의 부모는 짧은 결혼생활 후 이혼했다.
5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살며 정신적 충격을 안게 된 레논은 리버풀 외곽지역 울턴에서 이모 미미 스미스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이모부는 레논의 생모와 마찬가지로 레논이 청소년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이모는 레논에게 밴조 연주법을 가르쳐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레논과 같은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러한 환경은 레논의 가슴 속에 분노를
만들었고 그 분노는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한 요구로 승화되었다.
21세 때 레논은 내조를 잘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성향의 신시아 파웰과 결혼했으나 1968년에 이혼했다.
그리고 28세에 독립적이면서 인습에 얽매이지 않았던 독특한 성격의 오노 요코와 결혼했다.
레논은 16세 때 이미, 20세기 중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그룹이 된 비틀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스키플 음악 그룹을 결성했다.
기본적으로 비틀스는 실용 대중음악의 고수였던 폴 매카트니와 비사교적인 성격의 로큰롤 반항아였던 레논이 결합해서 만든 그룹이었다.
그러나 파괴적인 문화적 영향력 때문에 항상 레논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솔직 담백함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그 중 2가지만 말하자면 하나는 1964년 스모키
로빈슨이 쓴 곡이었던 〈유브 리얼리 갓 어 홀드 온 미 You've Really Got a Hold on Me〉에서의 존 레논의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1967년 매카트니의 긍정적인 사고가 엿보이는 곡 〈게팅 베터 Getting Better〉 간주 부분에 덧붙인 "나는 내 여인에게 잔인하게 굴곤 했어요"(I used to be cruel to my woman)라는 가사이다.
문화적으로도 레논은 솔직한 선동가의 태도를 취했다. 비틀스 멤버 4명 모두는 재치가 있고, 또 불손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라고 발언하거나, 청년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미국에는 십대가 있었고 그 외 모든 곳에는 사람들만 있었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레논이었다.
레논의 천재성은 글쓰기와, 유일하게 정규교육을 받았던 시각예술 분야에서 드러났다.
두 분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은 상당했으나, 결국 이류 유머작가이자 가볍지만 흔적을 남긴 만화가로 평가되었다.
친할아버지가 오랫동안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 가곡을 부르는 가수로 활동했지만, 레논은 음악에 대해서는 타고난
재능이 적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존재를 쏟아부었던 그곳에 바로 음악이 있었다.
레논은 록 리듬을 잘 표현한 뛰어난 기타 연주자였다. 그는 틀에 박힌 연주기법을 뒤얽히게 만드는 연주 방식과 강하고
비음이 섞인 음색으로, 실제로는 더 실력 있는 매카트니의 멋지고 부드러운 음색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다층적이고 모순되는 가치는 비틀스의 특색이 되었고, 계획적인 다양성과 집단성에서 비틀스의 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레논에게 큰 영향을 끼친 오노와의 관계로 인해 1968년을 기점으로 레논의 비틀스 탈퇴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레논의 생각은 명문가 출신의 일본인 전위예술가이자 7년 연상인 오노의 예술 철학과 아주 잘 맞았다.
레논은 첫눈에 오노에게 매료되었고, 그 후 1964년에 출간된 오노의 저서 〈그레이프프루트 Grapefruit〉에 수록된
'넘버 피스 1 Number Piece 1'에 적혀 있는 "책을 읽는 대신 책 속의 단어를 세어라"(Count all the words in the
book instead of reading them)와 같은 오노의 간결하면서도 때로는 역설적인 지시에 영향을 받았다.
앨범 〈더 비틀스 The Beatles〉(1968)에 수록된 〈이어 블루스 Yer Blues〉와 〈아임 소 타이어드 I'm So Tired〉를 시작으로 첫 솔로 앨범인 〈플라스틱 오노 밴드 Plastic ono Band〉(1970)와 〈더블 판타지 Double Fantasy〉
(1980)에 이르기까지, 1968년 이후 레논의 음악은 예술에서 기계 사용을 피해야 한다는 오노의 신념을 반영했다.
실제로 기계를 사용했든 안 했든 간에 두 사람은 창작을 위해 분투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앨범 〈더블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오노와 함께 작업한 대부분의 영화와 음반은 대중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차이가 극명한 앨범 〈플라스틱 오노 밴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는다.
후속 앨범 〈이매진 Imagine〉(1971)은 오노로부터 개념을 가져온 희망 찬가로 인기를 얻은 동명 타이틀 곡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그보다 일찍 발표된 〈기브 피스 어 챈스 Give Peace a Chance〉와 마찬가지로, 〈이매진〉은 1972년에 정점에 이른, 오노와 함께한 공인 존 레논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인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972년은 선동·선전용 앨범이라 할 수 있는 〈섬 타임 인 뉴욕시티 Some Time in New York City〉가 실패하고,
재임 중이었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지 맥거번에게 승리를 거둔 해였다.
닉슨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항의하고 단호히 반대 의사를 밝혔던 레논에 대해 강제 추방을 시도했다.
1973년 가을 오노와 헤어진 후 레논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며 술을 마시고 평범하지 않은 음악들을 만들며 1년 이상 허송세월을 보냈다.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했으며 곧 아이를 임신했고, 1975년 레논의 생일에 아들 숀이 태어났다.
레논은 오노에게 자신의 일을 모두 맡긴 후 음악계를 뒤로하고 은둔자적 삶을 살았다.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시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가정생활이 두 사람이 주장했던 것처럼 목가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예술품처럼 두 사람의 결혼은 두 사람이 지닌 정치적 행동주의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레논이 1980년 12월 8일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정신이상자 열혈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피살되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레논의 피살은 그에 대한 전설의 일부가 되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밥 딜런, 밥 말리,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함께 내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해외 대중가요 가수들 중 한 사람인 존 레논은
마치 전설처럼 많은 것이 신비와 혼돈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평범한 모범생처럼 보이는 용모, 동그란 안경 속의 수줍은 듯 보이는 두 눈은, 동시대의 폴 매카트니나 믹 재거의 비범해 보이고 광기어린 천재 같아 보이는 얼굴에 비해 너무나 밋밋하기만 하고, 그런 반면에 'In His Own Life'라는 에세이로 베스트 셀러 톱을 기록했을 정도의 뛰어난 문장력은 그의 막강한 지적 능력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단순한 가수인가, 시인인가, 아니면 '노래 운동가'이거나 혁명가인가?
물론 그는 아직도 국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사랑과 평화'만을 외친 가수, 부르죠아적 휴머니즘만을 주창한 가수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한국에서 그의 대표곡들로 알려져 있는 'Imagine', 'Love', 'Woman' 등의 곡들이 그다지 분명한 정치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그의 실체 자체가 국내에 충분히 소개되어 있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현상인 것 같다.
하지만 중학생 시절 그의 음반인 'Plastic ono Band'를 어렵게 구한 뒤 거기에서 'Working Class Hero'라는 곡을
들었던 나는 아직도 그가 '노동계급의 영웅'인 것 같은 선입견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가정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학교에서는 당신을 매질한다. 당신이 똑똑하면 증오하고 바보일 땐 무시한다.
그래서 당신은 돌아버려 그들의 규율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것이다.
그들은 당신을 종교와 섹스와 TV로 중독시킨다.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현명하고 계급이 없으며 자유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여전히 형편 없는 농부나 다름 없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것이다!"
- Working Class Hero -
'Imagine'이란 노래도 마찬가지로서, 많은 사람들은 그 노래가 그저 순수예술가적인 입장에서 종교도 국가도 소유도... 그 밖에 그 어떤 것도 다 부정하려 하는 회의주의적이기만 한 노래를 부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Imagine'과 같은 앨범에 들어 있는 'Power To The People'(민중에게 권력을)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여기서 존 레논이 무엇을 imagine했던 것인지 우리 모두는 섬뜩할 정도로 분명히 알게 된다.
"민중에게 권력을! 즉각 민중에게 권력을! 우린 혁명을 바란다. 똑바로 두 발을 세워 거리로 나서야 한다.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도 못 받고 노동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소유하도록 해달라. 우리가 전면에 나서 당신들을 끌어내릴 것이다."
이렇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 비틀즈의 리더이자 대표적 정치가수였던 존 레논은 1940년 10월 9일 오후 6시 영국의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리버풀은 영국의 주요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독일 나찌군의 집중 공습대상이었다.
때문에 그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환경에서 성장해야 했고, 의식주조차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 프레디 레논은 아일랜드계에다 뱃사람이고 한량이었다.
존이 태어났을 때도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 있었고, 태어난 후에도 존이 아버지의 얼굴을 본 일은 별로 없었다.
또 존의 어머니 줄리아는 극장 안내원 출신에 소위 "노는 여자"였다. 밤마다 뱃놈들과 함께 술 마시고 춤 추며 노는
게 일이었으며, 존이 다섯살 때와 여섯살 때에는 호텔 웨이터 등과 눈이 맞아 외간남자의 아이를 낳기도 했다.
어느날 모처럼 휴일을 얻은 아버지와 함께 블랙풀이라는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게 된 어린 존은 그날 일생일대의 아픔을 맛보게 된다.
아버지가 존에게 아빠와 엄마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 것이었다. 존은 아빠와 함께 하겠다고 울먹거렸지만,
곧 돌아가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존은 어머니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존은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미미라는 이름의 이모 집에서 보내야 했다.
그 후 존은 학교에서 소문난 문제아로 자라났다. 수업을 방해하고, 학생들에게 싸움을 걸길 즐겼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존과 사귀지 말라고 했으며, 선생들은 정기적으로 존을 두들겨팼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것은 그런 악동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존은 대단한 문학소년이었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16살 때 빌 할리의 등장을 계기로 록큰롤에 관심을 가져, 리틀 리챠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록큰롤에 종교 이상의 열정을 바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존은 어머니와 다시 가까와지기 시작한다.
보스기질이 강했던 존이 무슨 세력규합이라도 하듯 '쿼리맨'이란 폭력써클성 그룹을 만들어 음악활동을 하자, 이모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방해했지만, 밴죠를 연주할 줄 알았던 존의 어머니는 존에게 코드를 가르쳐주는 등 약간의
지원을 해준 것이었다.
이때 존은 자기보다 두 살 어리지만 음악에 대단한 재능을 가진 폴 메카트니를, 약간 께림찍해 하면서 그룹에 가입시키고, 기타를 꽤나 잘 쳤던 조지 해리슨도 자기 패거리에 끼워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조지 해리슨이 존을 우상처럼 따라다녀 심지어는 존이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할 때도 꼽사리를 꼈다는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존이 무척 특이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인물임을 알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존의 어머니는 곧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런 슬픔 속에 존은 술집을 전전하며 손님들을 위협해 돈을 뜯는, 폐인생활에 빠져들기도 한다.
사실 그는 학창시절 같잖은 터프가이 흉내를 내며 주위에 항상 강한 모습만을 보여주려 했던 전형적인 깡패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그림공부와 책읽기에 몰두했고, 폴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의 그룹 쿼리맨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했고, 그는 생계유지조차도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그는 결국 스트립쇼 백밴드나 하는 어려운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폴, 조지 등과 함께 바다 건너 함부르크로 가서는
하루 8시간 동안 피땀 나는 연주를 하며, 실력을 갈고 닦았다.
함부르크에서 그는 독일의 부두 노동자들에게 '이 나찌 놈들아, 탱크는 어디다 숨겨 놓았느냐'고 조롱하는 대담한 모습을 보였지만, 독일의 청중들은 이러한 그의 모습을 더욱 좋아했다고 한다.
이러한 혹독한 수련기간을 거치면서, 그는 미국 흑인들의 록커빌리에 의해 변형된 포크와 블루스를 체화하고, 특유의
정력적이며 강력한 리듬 스타일을 확립한다.
이때 익힌 그의 코드감각은 다양한 장르에 기반한 것인 만큼 독특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련기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앞에는 한동안 믿어지지 않는 성공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의 그룹 비틀즈는 1960년대 중반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그룹이었고, 그가 내놓는 모든 곡은 무조건 넘버원
히트곡이었다.
이렇듯 그가 거둔 음악적 성공만으로도 그는 여느 위대한 가수들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이상의 위대한 점이 있었다.
그는 다른 성공한 노동자계급 출신과는 달리 성공 이후로도 그의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반전주의자였고, 음악의 정치적 선동력을 먹어치우는 자본주의 유통회로에 저항감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권위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그의 생각은 이브닝 스탠더드지와의 인터뷰에서 문제의 기독교
발언으로 표출되었다.
"기독교는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쇠퇴해 소멸하고 말 테니까요. ... 내 말이 옳음이 언젠가는 증명될 것입니다.
비틀즈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죠.
록큰롤과 기독교 중, 어느 쪽이 먼저 사라질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현명했지만 제자들은 우둔했습니다.
그들 때문에 기독교가 소멸되어간다면, 우리쪽이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물론 기독교도들은 발끈했다.
곳곳에서 존 레논의 비틀즈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비틀즈의 음반을 태우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대해 그가 종교와 마찬 가지로 음악도 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을 뿐이라고 해명을 하고 나서도 소동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1966년 6월에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쟁 참여 의사를 밝힌 데 대해 즉각 반전 의사를 나타냈다.
당시 그와 비틀즈는 전세계적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그 발언 역시도 큰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계속 권좌에 머무르는 것과 실제 일을 민중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 물론 정치가들이 모두 흉악한 사람은 아니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정부의 시스템입니다.”
이때쯤 존은 오노 요꼬라는 약간 곤란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당시 그녀는 두 번이나 결혼했던 이혼녀였다.
요꼬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유부남이라는 처지와 파탄 직전에 이른 가정, 그리고 기독교 보수세력과의 갈등에 괴로워진
그는 마약에 빠져들기도 한다(물론 당시 LSD는 합법적이었고, 그 부작용이 크게 알려지지도 않았던 때였다).
이후 그는 세상 만사를 다 떨치고 인도의 종교가인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에게 몰두해 1968년 2월, 히말라야에 있는
마하리쉬의 명상 캠프에 들어가기도 한다.
여기서 8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냈던 존은 이후의 곡에 카르마, 만트라, 구루 등의 산스크리트어를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노 요꼬와 결국 결혼하게 되면서 그는 인도 명상철학으로부터 배운 온화한 모습을 버리기 시작한다.
동성 연애자라 놀린 디스크 자키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모습은 청소년시절의 터프가이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전까지 비록 반항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어도 방송출연시만큼은 말쑥한 차림에 예절바른 태도를 지키던 그가, 토크쇼에 나와 다리 꼬고 앉아 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식의 산만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부터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정치적 행동은 본격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1969년 말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받은 MBE 훈장을 반납했고, 1970년엔 살인죄 누명으로 사형당한 제임스 헨러티를 위해 '영국 정부가 헨러티를 죽였다'라고 쓰인 가방을 들고 행진했다.
강도죄 혐의로 사형당한 흑인 인권 지도자의 게토 설립을 돕기 위해 요꼬와 함께 머리카락을 잘라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썰렁했고 <데일리 미러>지는 존을 '올해의 광대'라고까지 평했지만, 그는 이제 단순한 대중가수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한편 1969년에 존은 에릭 클랩튼 등과 함께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만들어 토론토 페스티벌에 참여한다.
이후 폴의 독선적인 성향과 도전적인 성격의 요꼬 등으로 인해 1970년 초 비틀즈는 해산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활동에 더욱 불을 붙여, 당시 신좌익(New Left)의 입장에서 무장폭력투쟁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던 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 제리 루빈 등과 어울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배경에 대해서는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60년대말부터 불길처럼 퍼져나간 공민권투쟁, 반전운동은 '68년말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사건과 월남전의 격화를 계기로 과격한 양상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대학가의 징병거부시위는 무장투쟁의 단계로까지 진입했고, 평화를 주창한 비폭력노선의 히피들 간에도 과격집단,
이른바 '이피'가 등장했다. 이피들은 흑인무장투쟁 그룹인 '블랙 팬더'와 제휴, 폭력혁명의 기치를 드높였는데, 이 이피들의 리더적 존재가 제리 루빈과 애비 호프만이었다.
존 레논은 이들에 동조하고 실천적으로 연대했으며, '69년 5월 캐나다 몬트리얼에서의 '베드인' 행사, 9월 터론토에서의 '라이브 피스' 공연, '70년 11월 뉴욕 아폴로극장에서의 '애티카 자선 콘서트', 12월 미시건주 앤아버에서의 '존 싱클레어 자선 콘서트' 등에 잇따라 출연하여 평화를 외치고 사회의 억압 및 모순을 규탄했다. 이윽고 그가 발표한 'Imagine'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뉴레프트들에게는 찬송가처럼 여겨졌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고 있던 닉슨 정권은 처음으로 18세 청소년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1972년의 대선에서 레논이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다.
FBI 요원은 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고, '72년 2월로 기한이 끝나게 된 그의 미국 체류 비자 연장 신청은 기각되었다이후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려는 존과 미국 정부 당국과의, 길고도 치열한 법정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어 그는 '72년 6월, 2장 짜리 앨범 'Sometimes in New York City'를 출반하는데, 이 앨범은 그때까지 나온 대중가요 음반을 통틀어서 가장 급진적이라 할 만했다.
여기서 존은 '71년 뉴욕시 애티카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주방위군이 발포해 43명의 사망자를 낸 반민주적 사태를 성토했고, 영국정부에도 핏발을 세워 당시 격화일로를 겪고 있던 북아일랜드 식민정책에 대해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앨범매상의 이익금은 IRA에게 기부되었으며, 특히 'Sunday, Bloody Sunday'는 이후 U2에게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 앨범에 담긴 노래들의 가사를 살펴보자.
"우린 여성더러 가정만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한다.
그리곤 그녀가 친구가 되기엔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한다.
그녀가 하인이 아니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이다!"
-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
"안젤라, 그들이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당신의 배우자도 총살했습니다. 정말, 당신은 세계의 무수한 정치적
죄수 중 한 사람입니다.
안젤라, 세계가 바뀌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세상은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곧 세계의 누이 형제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민중의 교사입니다!"
- Angela -
"죄수를 쏘다니. 43명의 가련한 여인들을. 언론은 죄수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죄수들은 서로 죽이지 않았다.
록펠러가 방아쇠를 당겼지! 그게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
- Attica State -
"앵글로 색슨 돼지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이 북부(아일랜드) 식민지화를 위해 보내졌다. 피에 젖은 유니온잭을 흔들면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찌 너희들이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사람들을 감히 억류한단 말인가.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게 맡기고 영국군은 바다로 돌아가라!" -
Sunday, Bloody Sunday -
이렇게 그가 열심히 뛰어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60.7%라는, 공화당 후보 사상 최대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큰 실패감을 느낀 그는 뉴레프트들과 소원해졌다.
요꼬와도 별거하고, 메이 팡이라는 젊은 중국계 여자와 같이 살았다.
이후 'Mind Games'나 'Walls and Bridges' 같은 앨범에서 그는 완전히 변절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고 스타나 폴 메카트니에 비해 앨범의 인기는 현저하게 뒤졌다.
이후 의기소침해진 그를 요꼬가 또다시 붙잡았다.
마녀 요꼬에 의해 집안에 감금되어 전업주부로 변모한 존의 일상은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진행되었다.
틀에 박힌 하루 일과 때문에 그가 우울증에 시달릴 동안 요꼬는 돈을 투자해 재산을 점점 불려나갔다.
물론 그의 이러한 생활의 원인은, 당시의 미국에 카터의 민주당정부가 들어서 있어, 그의 정치적 타겟이 분명치 않았던 점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은둔만 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B52의 '록 롭스터'를 듣고 재기를 결심한 그는 새로운 앨범 'Double Fantasy'을 만든다고 발표하고, 근 7년 만에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집회 참여를 계획했다.
하지만 1980년 12월 8일 인터뷰를 마친 뒤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집에 돌아가던 그의 집 앞에는 마크 채프먼이라는
암살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 성숙해진 모습으로, 보다 활기찬 사회활동을 펼치려 했다가,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총을 맞고 처참하게 죽은 날, 요꼬가 다코다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200여명의 팬들이 운집해 있었고,
1시간도 못돼 그 수는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모두 울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야로 존의 마지막 날을 기렸다.
다음날엔 팬들의 자살이라는 슬픈 소식이 이어졌다. 이후 센트럴파크에 모인 10만 추도인파
(존 에프 케네디를 능가할 것이다)는 10분간 묵념을 하였다.
거대한 인파 위엔 정적만이 감돌았고 방송 보도진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의 사망과 함께, 미국은 레이건의 보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어쨌거나 존의 사망으로 최고의 그룹 비틀즈가 다시 모여 한 장만 더 앨범을 만들어 달라는 전 세계 팬들의 성화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존이 사망했을 때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인 폴 매카트니가 추모사로 언급했던 것처럼, 존 레논은 예술, 음악 그리고 세계평화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헌으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이었음에 틀림 없다.
. 영국의 위대한 락 밴드 '비틀즈'의 멤버이자 세계적인 팝아티스트, 그리고 반전 평화운동가로 존경 받아 온 '존 레논
(John Lennon'의 사망 3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수많은 팬들이 모였다고 한다.
존 레논(John Lennon)이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센트럴 파크'의 '스트로베리 필즈'에 모인 팬들은 차분한 분위기에서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떠올렸다고 하며 '존 레논(John Lennon)'의 고향 리버풀에서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전세계적인 추모열기가 이어진 가운데 국내에서도 존 레논(John Lennon)이 음악을 처음 시작하고 뮤지션의 꿈을 꾸기 시작하는 10대 시절의 특별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 '존 레논 비긴즈 노웨어보이(Nowhere Boy)'의 공식 홍보대사이며 국내 비틀즈 팬 카페 '비틀즈 메니어'의 열현 회원이기도한 홍대 인기 인디밴드 '멜랑콜리 스튜디오' 도 존 레논의 사망
30주기를 맞아 존 레논(John Lennon) 팬들을 위한 게릴라 추모 공연을 개최하였다고 한다.
'멜랑콜리 스튜디오'는 현장에 모인 팬들을 위해 '존 레논(John Lennon)'의 사진을 모은 판넬을 직접 준비해오는
열성을 보였고, '존 레논(John Lennon)'의 불후의 명곡 '이메진(Imagine)’과 ‘러브(Love)’ 뿐만 아니라 그가 최초로 작사 작곡했다는 ‘헬로 리틀 걸(Hello Little Girl)’을 한국말로 개사해 부르는 등 많은 눈이 내린 추운 날씨에도 뜨거운
열정으로 팬들을 감동시켰고 한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 사망 30주기를 맞은 '존 레논(John Lennon)'의 소식을 잇달아 전했는데 특히 MBC에서는
김태훈 칼럼리스트와 함께 ‘A Day in The Life with John Lennon’라는 타이틀로 '존 레논(John Lennon)'을
추모하기 위해 DMB 라디오 24시간 특집 방송을 진행했으며, MBC Life의'인사이드 라이프'에서도 '존 레논
(John Lennon)' 특별 기획을 준비에 눈길을 끌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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