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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César Franck, Prélude, Choral et Fugue, Op.21

     
 

 

 

 

 

 

 


오르간을 연주하는 세자르 프랑크

 

César Franck, Prélude, Choral et Fugue, Op.21

세자르 프랑크 ‘전주곡, 코랄과 푸가’

 

 

 

Alfred Cortot - César Franck, Prélude, Choral et Fugue, Op.21

 

 

 

한 거장이 진정으로 위대하다면 제자들은 스승의 위대함을 곁에서 자연스럽게 깨닫기 마련이다.스승에 대한 경건한 태도와 충성심으로 무장한 그들 가운데에서는 무분별한 열정이나 예언가적 기질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뱅상 댕디가 세자르 프랑크를 신성시했던 것을 이에 대한 좋은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시대의 폴리포니 이래로 역사는 세자르 프랑크라는 메시아를 배출하기 위해 흘러왔다.”고 주장한 댕디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남겼다.

“바흐와 모차르트를 거치면서 필연적인 동시에 퇴화하는 과정으로서 음악은 형식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 베토벤이 등장하여 음악은 이상향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프랑크로 인해 음악은 살아남았고 견뎌낼 수 있으며 세계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예언에 굳이 편을 들기보다는 그의 진심어린 충정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쩌면 역사적으로 프랑크의 시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스승 세자르 프랑크를 신성시했던 뱅상 댕디

 

프랑크는 평생토록 무명의 음악가로서 남에게 이용만 당하며 살았지만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내는 동안 가식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순수한 영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교회의 오르간을 가까이 하며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오르간은 그에게 일종의 수호천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 보호받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는 매일같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 자신의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바쳤다.

루카복음을 회상해보면 예수가 방문했을 때 좋은 몫을 택했다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듣고만 있었지만 그의

언니인 마르타는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바로 이 마르타에 비견할 만한 ‘부지런함이라는 축복받은 습관’(마르셀 프루스트)을 통해 프랑크의 삶은 결국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은총을 받을 수 있었다

 

 

 

 

오르간이 본격적으로 전례에 쓰인 것은 아르스 노바 시대

즉 13세기 즈음이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신의 영광을 찬미

어린 시절 프랑크는 음악 신동이었다.

파가니니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유럽의 천계를 밝히고 있을 무렵, 당시의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들은 초절기교에 열광하는 ‘미노타우로스’(당시의 광적인 청중들)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오직 리스트만이 이러한 신동들의 덧없는 쓰러짐 속에서 유일하게 ‘머리 위에 원광을 두른 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초인적인 <초절기교 연습곡집>으로 인해 당시 청중들의 공격적인 칼날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맹목적으로 리스트를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리스트를 구원해 준 것은 이러한 청중들의 열광이 아니라 선천적인 코스모폴리탄 기질과 여행가로서의 호기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황제를 연상케 하는 귀족적인 매너, 고갈될 줄 모르는 성실함과 동료들에 대한 친절함이었다.

벨기에의 리에주로부터 온 소년 프랑크는 리스트의 바로 그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파리에서만 활동했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그 옛날의 바빌론에 비견할 만한 당시의 파리에서 순수하고 겸손한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이 상처입고 경직되었는지에 대해 토로한 바 있다.

 프랑크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점점 건조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조금은 안이한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했다. 그는 다섯 살부터 피아니스트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재능의 소유자였던 생상스 같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하지 못했다.

 결국 피아노보다는 한결 경건하고 부르주아적이되 우아함은 조금 떨어지는 오르간이 프랑크의 전문 분야(그가 결코 선망하지는 않았던)가 되어버렸다 이 매혹적이지 못한 성취감이란!

한때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던 프랑크는 오를레앙 음악원에서 시급을 받는 일천한 반주자로서 활동하게 되었고, 25세에 로레트 노트르담 성당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며 경제적으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생-장 생 프랑수아 뒤 마레 성당의 오르간 주자(1853년)로 활동했던 프랑크는 1858년에는 생트 클로틸드 성당에 강력하고 울림이 큰 오케스트라적인 특성의 파이프 오르간을 비로소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훌륭한 악기로 신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내심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생트 클로틸드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말년에 이르러서야 걸작을 쏟아내다

프랑크는 아주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840년 전후 젊은 나이의 그가 응접실에 앉아서 작곡을 했을 초기 피아노 트리오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오라토리오 <루스>(Ruth, 1843-45)는 그의 첫 번째 오라토리오일까? 이에 대한 증거는 아주 적거나 없는 상태다. 그가 어느 정도는 웅장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것이 많이 드러나는 오라토리오인 <속죄>(Rédemption, 1874)와 사후에 전곡 연주될 수 있었던 <여덟 가지 복>(Les Béatitudes, 1869-79)을 통해 결국 어느 정도의 평판을 얻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50대의 나이에 접어든 노년기의 초입이었다.

이후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동안 실력을 성숙시킨 그는 의심할 바 없는 초인적인 모습을 갖춘 시인이자 창조자로서 마지막 걸작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고된 명상과 격정적인 인내의 시간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은 축복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말년의 걸작들은 곧 침묵의 언어에 진배 아니다.

리스트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하머클라비어’를 연주하여 얻은 엄청난 명성은 곧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을 듣고 공감하여 이에 박수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크는 바흐를 자주 연주했다. 그러나 그의 바흐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만이 자신의 연주를 들었을 뿐이다. 바흐가 그에게 숙련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연습곡집>(Clavierübung) 연습에 매진하라고 조언을 한 듯했다

혹독함과 숙고를 감내하며 프랑크는 자신의 신념을 연습하듯이 바흐를 연습했다. 이러한 부지런함은 결국 그의 후기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예술적 원천이 되었다.

그가 진보의 세기인 19세기에 어울리는 새롭고 대범하며 승리에 찬 음향을 위한 형식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바흐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던 천재성 덕분이다.

바그너는 새로운 오케스트라 음향과 최신식의 기능적 전리품들로 고전주의의 왕국을 무너뜨렸지만, 프랑크는 바로크 시대의 정신과 현대적이고도 교향적인 관점 사이에 숭고하면서도 생명력이 숨을 쉬는 다리를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오르간적인 울림과 옛 양식의 현대적인 사용, 주제들의 순환기법을 통한 구조적 통일성 등등으로 장식된 피아노 5중주, 교향적 변주곡과 교향곡 D단조,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4중주와 같은 그의 마지막 걸작들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바흐를 비롯한 옛 양식의 재해석

프랑크는 피아노 작품에서도 위대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전주곡, 코랄, 푸가>에서 그는 바흐의 대위법적인 방법을 통해 베토벤, 더 나아가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음향을 탄생시켰다. 특히 생트 클로틸드 성당의 오르간을 오랜 시간 연주한 결과 습득할 수 있었던 격정적인 우아함과 고귀함은 코랄 파트에 중세적 침묵을 흩뿌려 놓았다.

작곡가로서 그에게 빛나는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은 1884년, 그의 나이 6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탄생했고, 1885년 1월 24일 국민음악협회에서 초연되었다. 초연 이후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에 의해 “무인도에 가지고 가고 싶은 10곡의 피아노 곡 가운데 하나”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옛 양식의 엄격한 형식을 재정립하고자 한 의도를 담고 있는 3악장 형식의 이 작품은 코랄의 강력한 힘을 중심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곡이 전개되면서 점차 신앙적인 믿음과 부활에의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는 듯한 모습은 어느 정도는 리스트적인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프랑크만의 독특한 양식과 매력이 포함되어 있다.

첫 전주곡에서는 16분 음표의 리듬의 주제로 시작되면서 바흐에 대한 찬미와 풍부한 조바꿈, 순환동기를 갖춘 제2주제와 현저한 대조를 통해 탐미적인 고통스러움을 극적으로 표현해낸다.

가운데 악장에 해당하는 코랄은 서정적이되 아직은 불안한 선율이 제시된 뒤 아르페지오에 의한 넓은 분산화음으로 변형되며 저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한 정화적 차원에서의 준비를 한다.

마지막 푸가는 지금까지의 모든 주제와 정신적 고행들을 통합하여 구축적이면서도 응축적인 에너지를 숨 막히게 집약한 뒤 피날레에서는 승천하는 듯한 넘치는 기쁨을 터뜨리며 장대한 끝을 맺는다.

 

 

 

 

César (Auguste) Franck

1822. 12. 10 네덜란드 리에주~1890. 11. 8 프랑스 파리.

벨기에 태생 프랑스의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

교향곡 D단조,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 Variations symphoniques〉 같은 낭만적 대작으로 유명하다. 발롱 지방 출신인 아버지와 독일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에  재능을 보여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했다.

피아노의 연주 솜씨가 뛰어나 그의 아버지는 1834년 프랑크를 데리고 엑스와 브뤼셀 등 여러 도시로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1년 뒤 파리로 보내 파리 음악원 교수로 있던 보헤미아의 작곡가 안톤 라이하에게 배우게 했다.

 1836년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요제프를 비롯한 가족이 파리로 이사했으며 1837년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1년이 못 되어서 그는 독보력(악보 읽는 능력)시험에서 명예대상(Grand Prix d'Honneur)을 받았으며, 1840년에는 푸가 부문에서 1위, 1841년에는 오르간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어 로마 유학이 상으로 주어지는 로마 대상의 준비를 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의 동생과 프랑크에게 대가로서의 경력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고 연주회를 열었다. 그리하여 음악원을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다.

아버지를 만족시키고 돈을 벌기 위하여 연주회를 열었는데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주로 그당시에 유행했던 오페라 접속곡과 직접 작곡한 대중적 환상곡이었다. 1840년 이후 관심이 오르간 쪽으로 기울자 작품은 진지해졌으며 그때 작곡한 3개의 트리오(삼중주곡)는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에게 감동을 주었다.

1846년 1월 4일 파리 음악원 무대에서 처음 연주되었던 칸타타 〈루트 Ruth〉는 그의 야심작이었다. 내키지 않는 연주회 공연, 수많은 언론의 악평, 수입을 위해 강행해야 하는 교습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자신의 재능을 착취하는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된 다음에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크는 본명이 펠리시테 사일로트인 여배우 데스무소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가 극장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자 프랑크는 1848년 결혼을 앞두고 잠시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서 그의 생활 방식은 그뒤 42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르간 연주자와 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생활은 소박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했다. 여름과 겨울에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2시간 뒤부터 하루 종일 계속되는 교습을 시작했다.

작곡은 주로 이른 아침 시간과 여름휴가 동안에 했다.

1851년 생장생프랑수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으며, 1858년에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생트클로틸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생트클로틸드의 오르간실에서는 다른 오르간과 합창곡의 역작과 더불어 그를 유명하게 한 즉흥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즉흥음악은 연주하는 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공식적인 직분을 맡기 전에 작곡된 음악으로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달콤하고 서정적이다. 그러나 프랑크와 그의 친구인 샤를 구노가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되면서 그들의 교회음악은 어려워지고 엄격해지게 되었다.

1872년에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로 임명됨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중요한 경력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과 관심밖의 일이어서 무척 놀라워했다.

대인관계에서 솔직하고 직선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호감과 반감을 동시에 얻었다. 그에 대한 적대감은 그가 오르간 수업시간을 작곡 수업시간으로 만들어버리고, 보수적인 그의 작곡 기법에 반감을 품은 학생들이 늘어나자 더해졌다.

1860년대 후반에 이미 프랑크에게서 개인교습을 받았던 앙리 뒤파르크와 알렉시스 드 카스티용이 그의 제자들 중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71년 2월 25일 국립음악협회가 설립되어 진지함, 정서적 안정, 기술적 기초가 마련될 준비가 갖추어지고 난 후 비로소 그는 저술과 학생들과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2년 프랑크의 제자가 된 프랑스의 작곡가 뱅상 댕디의 열정적인 선전은 피아노 연주와 작곡의 대가가 되는 데 실패해서 의기소침해 있는 프랑크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880년대 초반 에른스트 쇼송, 피에르 드 브레빌, 샤를 보르드, 기 로파르츠를 포함한 프랑크파(派)가 형성되었다.

그뒤 뱅상 댕디가 〈세자르 프랑크 전기〉(1906)에서 보인 열렬한 찬사는 한때 프랑크가 '제자들이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880년부터 1990년 그가 죽기까지 작곡한 음악을 보면 위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화려한 연주와 기교적 성향의 작곡의 대가였던 그는 초기에도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그러한 예가 나타나고 있는 작품으로

피아노를 위한 〈Prélude, aria et final〉(1887 완성, 마지막 악장)과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1885)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랑크의 음악적 쇠퇴기의 몇 작품은 페렌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더욱 멀게는 베토벤의 예를 들면서 피상성과 강렬한 정서의 배양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1890년 프랑크는 길가에서 마차채에 옆구리를 찔려 늑막염에 걸려서 죽었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진지함은 프랑크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유래한다. 프랑크의 천사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와 고결함, 세상사에 대한 순박함은 작품의 경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 활기 없다는 평도 있어서 자신의 음악적 특성과 상반되는 경향을 가진 작품 창작요구에 직면했을 때 그의 특성이 결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가 되는 작품은 1870년대에 작곡되어서 사후에 연주되었던 오라토리오 〈Les Béatitudes〉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Le Chasseur maudit〉(1882)·〈귀신 Les Djinns〉(1884)이 있다. 한편 1886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와 〈교향적 변주곡〉은 그가 기호와 정서의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수했던 철저한 장인정신과 따뜻하고 고귀한 음악성의 완벽한 기념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