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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Saint-Saëns, Symphony No.3 in C minor, Op.78 'Organ'

 

 


 

 

샤를 카미유 생상스 

 

 

Saint-Saëns, Symphony No.3, Op.78 'Organ'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

Camille Saint-Saëns

1835-1921

 

 

 

 

Paavo Järvi/Orchestre de Paris - Saint-Saëns, Symphony No.3 in C minor,

Op.78 'Organ'

 

1913년 파리 살 가보 홀에서 피아노를 연주 중인 생상스

 

 

어린 시절 생상스는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을 능가하는 천재였다.

두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세 살 때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으며, 다섯 살 때 처음 공개무대에 나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의 피아노 파트를 연주했다.

정식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것은 열 살 때였는데, 그 공연에서 그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15번을 비롯해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한 후, 앙코르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 아무 곡이나 암보로 연주하겠다고 제안해서 청중들을경악시켰다.

이후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는 평생 성공한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 그리고 작곡가로 살았다.

다만 작곡 분야에서의 진정한 영예는 마흔 즈음에야 찾아왔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 첼로 협주곡 1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바이올린 협주곡 3번, 그리고 주요 교향시들은 모두 30대 후반 이후에 나온 작품들이다. 그리고 생상스 창작의 절정이자 19세기 프랑스 교향곡 사상 기념비적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교향곡 3번은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인 1886년에 발표되었다.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의 비범한 만남

일명 ‘오르간 교향곡’으로 불리는 이 작품의 등장은 프랑스 교향곡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거론된다.

이 작품 이전까지 프랑스에서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걸작들에 견줄 만한 교향곡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환상 교향곡>으로 유명한 베를리오즈가 있지만, 그의 표제 교향곡들은 고전적 관점에서 보자면 진정한

교향곡으로 보기 어렵다. 통상 ‘프랑스계 교향곡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도

1888년에야 나온 사실을 상기하면 이 작품의 의의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상스는 모두 다섯 개(번호가 붙은 것은 세 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중 마지막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관현악 편성에 오르간을 부가하여 음향적ㆍ극적으로 특별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데, 오르간은 그가 가장 잘 다루었던

악기이기도 하다.

그는 열일곱 살 때 생 메리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이래 파리의 여러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는데, 특히 1857년에는 유명한 마들렌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선임되었다. 파리 중심부에 자리한 마들렌 교회는 파리에서도 최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격조 높은 교회였다. 따라서 그곳의 오르간 주자가 된다는 것은 파리의 모든 오르간 주자들 중에서 으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생상스는 그 자리에 20년 동안 머물렀다.

이 교향곡에는 그러한 생상스의 진가가 최고조로 발휘되어 있다. 무엇보다 ‘악기들의 황제’로 불리는 오케스트라와 ‘악기들의 교황’인 오르간의 만남을 통해서 이 작품은 비범한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야말로 생상스의 최고 걸작이라 할 만하며, 그러한 사실은 작곡가 자신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나는 이 작품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여했다. 내가 여기에서 성취한 것은 나 자신도 결코 다시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협회의 위촉에 따라 작곡한 이 교향곡은 1886년 5월 19일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청중들은 열광했던 반면 비평가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의 파리 음악원 공연에 참석했던 샤를 구노는 “프랑스의 베토벤”이라며 극찬했다.

실제로 이 곡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처럼 어둡고 심각한 c단조로 출발하여 장엄하고 찬란한 C장조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19세기의 많은 작곡가들처럼, 생상스도 베토벤을 자신의 우상으로 여겼다.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로열 앨버트 홀의 ‘그랜드 오르간’. 1871년 첫 연주회 때의 스케치.

하지만 그의 음악성은 베토벤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프랑스의 멘델스존’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그의 음악은 낭만적 사상과 정서를 노래하면서도 언제나 고전적인 절제와 균형의 원리를 견지했다. 다시 구노의 평가를 인용하자면, “생상스는 결코 현학적이지 않다. 그는 너무나 아이 그대로였다. 그리고 현학적이 되기에는 너무 현명했다.

특히 그는 언제나 프랑스인이었다. 때로는 18세기의 프랑스 작가와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명확한 사상, 우아하고 정확한 표현, 그 음악을 훌륭한 종족에게서 생겨난 극히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뛰어난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냉철하고 탁월한 상식, 성품의 고요함, 열정 속에 간직된 고요, 환상 속의 지성을 갖추었으며, 가장 혼란스런 감동 속에서도 자제심을 잃지 않았다.”

생상스는 에마누엘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멘델스존의 음악을 특히 선호했으며 슈만의 음악에도 매혹되었다. 아울러 그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구노와 베를리오즈를 높이 평가했으며, 비제와 바그너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스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옹팔의 물레>, <죽음의 무도> 등 그의 교향시들은 리스트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준다. 나아가 생상스와 리스트는 절친한 사이였다. 무엇보다 리스트가 생상스의 오르간 즉흥연주를 듣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오르가니스트”라고 극찬했던 일은 유명하다. 그런 추억과 우정 때문이었을까? 생상스는 이 '오르간 교향곡'을 1886년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난 리스트의 영전에 바쳤다.

 

 

 

 

 

 

 

오르간이 펼쳐 보이는 광대하고 호화로운 음의 파노라마

작품은 교향곡으로서는 특이하게도 2악장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각 악장이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고전적 교향곡의 4악장 구성과 마찬가지이다.

악기 편성에는 오르간과 두 대의 피아노가 포함되어 사뭇 이채로운 음향을 연출하는데, 특히 각 악장 후반부에서 활약하는 오르간이 펼쳐 보이는 광대하고 호화로운 음의 파노라마가 실로 압도적이다.

 또한 곡의 첫머리에 제시된 테마가 네 가지 모습으로 변형되며 전곡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순환 형식'을 채택하고 있어 강력한 유기성과 통일감을 보여준다.

 

 

1악장 : 아다지오 - 알레그로 모데라토 - 포코 아다지오

애수에 젖은 듯한 느린 서주로 시작되어 빠르고 투쟁적인 주부로 이어지는데, 현악기들과 관악기들이 자잘하게 새기는 음형을 타고 흐르는 주제는 다분히 멘델스존 풍이다. 강렬하고 긴박감 넘치는 흐름이 폭발적인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차츰 잦아들고, 거의 침묵으로 가라앉을 즈음 오르간의 화음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느린 악장에 해당하는 후반부로 접어든다. 오르간과 현악기들이 어우러져 유려한 칸타빌레 선율을 노래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후반부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2악장 : 알레그로 모데라토 - 프레스토 - 마에스토소 - 알레그로

전반부는 스케르초 악장에 해당한다. 바이올린이 주도하는 열정적인 흐름과 피아노까지 가세한 현란한 흐름이 알레그로와 프레스토의 템포를 오가며 눈부신 질주를 감행한다. 역시 멘델스존을 연상시키는 이 흐름이 차분히 마무리되면, 그 정적의 끝에서 장엄한 오르간 소리가 전면에 부각되며 후반부가 시작된다.

두 대의 피아노가 연주하는 영롱한 아르페지오를 타고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테마는 1악장 전반부에 나왔던 주제 선율의 변형이다.

 이후 오르간이 주도하는 찬란하고 박진감 넘치는 흐름과 목관과 현악이 어우러지는 섬세한 흐름이 교차하면서 압도적인 클라이맥스를 구축한 후, 마지막에는 오르간과 전체 관현악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장렬한 울림 속에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샤를르 카뮈 생상은 1835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1921년에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도중 12월 16일 알제리의

한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파리로 옮겨졌으며,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졌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생상은 음악가이었던 그의 큰고모에게서 첫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어릴 때부터 이미 천재적인 면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11세 때인 1846년에 생상은 첫 번째 공개연주회에서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의 협주곡을 협연

하였으며, 1848년에 파리 음악원을 찾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그리고 나중에 오르간 전공으로 정식입학을

하였다.

 

부분적으로 독학을 하기도 하였지만 어릴 때부터의 그의 지칠 줄 모르던 학구열로 인하여 생상은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의 음악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거기에다 그가 전공한 피아노와 오르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생상은 기악음악의 형식과 더불어 성악음악의 형식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1851년에 오르간으로 파리 음악원을 1등으로 졸업한 생상은 파리의 성 마들렌느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하였다(생상은 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1877년까지 일하였다).

그리고 1861년 6월부터 3년간 그는 니더마이어(Niedermeyer)의 후임으로 음악학교의 피아노교수로 있으며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1924)와 같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1852년 이후 생상은 두 번에 걸친 로마콩쿠르 도전의 실패와 안 좋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교향곡 내림마장조

(op. 2, 1853), 바장조, 라장조(1856/1859), 가단조(op. 55, 1859), 미사곡(Messe solennelle, 1856),

오라토리오(Oratorio de Noel, 1860)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op. 17, 1858) 등을 작곡하였다.

 

 1864년 이후 생상은 "삼손과 데릴라"(Samson et Dalila, 1868) 등과 같은 10여 개의 오페라와 극음악 등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가지고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많은 음악회를 가졌다. 생상의

음악을 접한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이나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1830-1894),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 프란쯔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그리고 바그너

(Richard Wagner, 1813-1883) 등은 그의 음악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쿠프랭(Francois Couperin, 1668-1733)이나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 이후 19세기의 중엽

까지 프랑스에서는 이웃나라인 독일의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나 멘델스죤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 혹은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등과 같은

뛰어난 음악가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프랑스의 음악은 거의 외국의 음악가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생상은

낭만주의시대의 프랑스음악을 부흥하는데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한 작곡가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1871년에 생상은 프랑스의 음악계에 '국민음악회'(Societe Nationale de Musique)를 창립하였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새로운 음악 진흥에 노력하였으며, 젊은 작곡가들을 육성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까지 음악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던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신하려는 교향악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생상 자신도 이 시기부터 20여년 동안 리스트의 영향을 받은 교향시 "옹팔르의 물레"(Le Rouet d'Omphale, 1872),

"파에통"(Phaeton, op. 39, 1873) "죽음에 무도"(Dance macabre, op. 40, 1875), "헤르쿨레스의 청년시대"

(La Jeunesse d'Hercule, 1877) 등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교향곡 다단조(op. 78, 1886)를 작곡

하였다. 제3번 교향곡으로 알려진 이 다단조 교향곡은 생상의 작품 가운데 최대의 관현악곡으로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넣은 화려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스트에게 헌정된 이 교향곡은 그의 제4번 피아노 협주곡이나 바이올린 소나타처럼 두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각

악장을 다시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일반적인 교향곡의 형식처럼 네 개의 악장을 가진 곡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생상은 피아노 협주곡으로는 사단조(op. 22, 1868), 내림마장조(op. 29, 1869), 다단조(op. 44, 1875)와

 바장조(op. 103, 1896) 등의 작품과 두 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동물의 사육제"(Le Carnaval des

 

 animaux, 1886) 그리고 환상곡 아프리카 (Africa, op. 89, 1891)를 남기고 있다.


이밖에도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1880), 첼로 협주곡 제1번(1873), 피아노 삼중주곡 그리고 피아노 사중주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동물의 사육제"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Introduction et Rondo Capriccioso)

 

그리고 "하바네라"(Havanaise) 등은 아직도 음악회장에서 지속적으로 연주되며 사랑 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와 같은작품들을 통하여 생상의 이름은 전 유럽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가지고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여행을 하였다.
생상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음악가이었다.

 

그는 또한 뛰어난 기교를 가진 피아니스트겸 오르가니스트였다. 생상은 당시에 음악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독일의 고전파와 낭만파의 음악에 이해가 깊었으며, 이러한 이해와 관심은 자신의 뛰어난 음악성이 잘 다듬어진 구성미

를 갖추고 배어나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음악성과 낭만주의적인 자유스러운 기법은 그의 오페라나 교향시 등과 같은 작품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생상은 자신의 음악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하도 아니고 베토벤도 아니며 바그너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예술 그 자체이다."


이와 같이 생상은 자신의 음악에서 어떤 특정한 주의나 작곡가의 경향을 추종하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음악적 사상을

표출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기법적인 면에 있어서 고전적인 경향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음악적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낭만적이었다.

이러한 면을 통하여 그의 음악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 생상은 낭만주의 음악가들 가운데 특히

프란쯔 리스트의 음악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리스트의 음악 가운데 특히 교향시에 대하여서 생상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생상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고전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예술적 사고를 드라마틱하게 처리하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많이

절충하고 있다.

 

이렇듯 생상은 모든 기법이나 양식적인 면을 떠나서 순수하게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작곡가이었다.

자료출처: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