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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Beethoven - Piano Concerto No. 5 Emperor Op. 73

 

자크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610x931cm, 1807

 

Beethoven / Piano Concerto No. 5 in E flat majar           

    "Emperor", Op. 73 (I~III)

     

     


     

     

    I. Allegro (20:08)

     

    20분간에 걸친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1악장은 시작부터 특별하다.
    관현악의 힘찬 화음에 이어 피아노가 곧바로 등장하여 화려하고 당당한 카덴차를 연주해 보이며 출발한다.

    협주곡의 고전적인 틀에서 벗어난 이런 개시법은 이후 슈만, 그리그, 차이코프스키 등 수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혁신적인 개시부에 이어 관현악이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제1주제와 스타카토 리듬에 실려 등장한 후

    유려하게 펼쳐지는 제2주제를 제시한다.

    이후 피아노가 다시 등장하고 때로는 충만한 열기와 긴장감 속에서 강력하게, 때로는 섬세하고 유연하면서도 멋스럽게 진행된다.
    이 악장은 두 차례의 장쾌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힘차게 마무리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은 통상 재현부와 종결부 사이에 놓이는 독주자 임의의 카덴차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 베토벤은  "카덴차는 필요 없으며 그대로 계속해서 연주할 것" 이라고 지시하는 대신

    카덴차에 상당하는 독주부를 직접 채워 넣었다.


    즉, 자신이 의도한 흐름이 독주자의 기교과시에 의해서 단절되거나 왜곡될 위험을 차단했던 것이다.
    이 역시 슈만과 브람스를 비롯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부분이다.

    아울러 이 악장에서는 트럼펫과 팀파니의 활약을 통해서 팡파르 풍의 울림과 행진곡풍 리듬이 유난히 부각되며 전편의 치열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흐름은 다분히 전투적이다.


    그래서인지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이 협주곡을  "군대 개념의 변증론"이라고 불렀는데, 혹시 베토벤은 이 곡에서 나폴레옹 군대, 혹은 그로 상징되는 적군에 대한 자기 나름의 투쟁을 전개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했던 시절, 베토벤은 프랑스군 장교와 마주친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대위법만큼 병법에 정통했더라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도처에서 포탄이 터지는 듯한 장면마저 연출하는 이 곡을 들으며, 물론 비유적인 견지에서지만 관현악을 병사들로, 피아노를 그들을 이끄는
    장수로 상정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II. Adagio un poco mosso (08:04)

     

     

    앞선 악장과 사뭇 대조적인 완서악장(緩徐樂章 : 안단테나 아다지오와 같이 느린 박자를 가진 악장)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온화하게 이어지는 흐름, 그리고 그 위에 신중하게 얹히는 독주 피아노의

    선율이 명상적인 악장에는 숭고하고 성스러운 기운마저 서려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체르니에 따르면 찬미가풍의 주제는 오스트리아의 순례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이 빈에서 물러간 얼마 후인 11월 22일 베토벤이 라이프치히의 출판업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격렬한 파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난을 겪은 뒤에 우리는 약간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나는 몇 주 연속해서 작업했지만 불멸성보다는 죽음을 위한 작업으로 여겨집니다.
    이 죽어버린 평화에 대해 당신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이 시대에 더 이상의 안정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확실성은 우연한 기회 뿐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다시 한 번 절망을 딛고 일어섰다.
    이 악장은 그 극복의 통로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그는 반추하고, 기도하고, 음미한다. 그리고 새 희망을 꿈꾼다.


    그의 후기음악에 나타나는 영적인 차원의 환상적인 음률이 이미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 악장은

    베토벤이 남긴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III. Rondo (10:07)

     

     

    앞선 악장의 끝부분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 이 악장에서 음악은 다시첫 악장의 기세와 분위기로 복귀한다.
    이 승리를 향한 행진곡에서, 춤곡풍의 주제는 마치 곡예를 펼치는 듯하며, 피아노와 관현악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술래잡기를 하는 듯하다.


    협주곡 고유의 경쟁의 묘미와 돌파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박진감 만점의 멋진 피날레이다.

    흔히 이 곡의 제목처럼 통용되는  "황제" 라는 별명은 베토벤 자신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베토벤이 한 때 존경하던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서 격노하여  "영웅

    교향곡" 의 원래 표지를 찢어버렸다는 일화를 떠올리자면, 베토벤의 가장 돋보이는 걸작 중 하나에  "황제" 라는 별명을 붙이는 것은 심히 불경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별명을 누가 붙였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설엔  크라머(Johann Baptist Cramer)라는 영국의 출판업자가 거론된다.
    그는 이 작품이야 말로 모든 피아노 협주곡들 가운데  "황제" 의 자리에 놓일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꽤나 그럴듯한 발상 아닌가?
    더구나 젊은 시절에는 혈기왕성했던 베토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보수적인 성향으로 변해갔으며

     한 때  "황실 악장" 의 직함을 원하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싶다

     

     

    Helene Grimaud piano  

    Vladimir Jurowski cond.  

    Dresden Staatskapelle

     

    Beethoven · Piano Concerto No. 5,   

     

     

     

     

     




    1809초, 베토벤의 생활은 비로소 든든한 반석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일단 3월 1일부터 "평생 연금" 을 받기 시작했는데, 세 명의 젊은 고위 귀족, 로프코비츠 공작,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이 그에게 매년 4천 플로린(florin)이라는 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다만 베토벤이 "빈(Wien) 혹은 오스트리아 황실의 다른 세습영지를 거주지로 하는 대신" 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써 안정적인 재정기반을 확보한 베토벤은 들뜬 기분에 여행이나 결혼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고, 특히 친구인 글라이헨슈타인 남작(Baron Ignoz von Gleichenstein, 1778 - 1828)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신붓감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해 5월,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침공에 대한 대응에 나선 프랑스 군이 에크뮐 전투(Battle of Eckmühl)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한 다음 내친 김에 빈까지 진격해왔고,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왕족, 귀족, 부유층들은 서둘러 빈을 탈출했다.

    뒤에 남은 시민들이 나름대로 도시를 수호하겠다고 나섰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무기가 턱없이 부족해서 극장에 있던 총과 창, 칼 등의 소품들까지 꺼내왔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빈은 포위된 지 일주일 만인 5월 13일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빈에 남게 된 베토벤의 상황은 절박했다.
    적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동안에는 약해진 청력을 보호하기 위해 책상 밑으로 들어가 베개를 머리에 두르고

    있어야 했다.

    프랑스군이 도시를 점령한 뒤에도 한 동안 오스트리아 군의 반격으로 인한 전투가 계속되어, 그는 사방을

    뒤덮은 전쟁의 참화와 진군의 북소리, 군화소리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후원자들이 모두 도시를 떠나면서 경제적 원조가 끊기는 바람에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힘겨웠는데 피난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가까스로 동생의 집에 의탁한 그는 여름에 쓴 한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비참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5월 4일 이후 나는 일관성 있는 작품을 거의 하나도 쓰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단편 이것저것 뿐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내가 쌓아올린 생존의 기반이 불안정해 졌습니다.
    주위에서는 온통 파괴적이고 무질서한 행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북소리, 대포소리, 모든 형태의 비인간적인 처참함 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협주곡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9월에 베토벤은 자선 연주회에서  "영웅 교향곡" 을 지휘했고, 전황이 정리되어 감에 따라 빈의 질서와 생활도 점차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아갔다.

    일련의 상황은 10월 14일 쇤부른 궁전(Schloss Schönbrunn)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 되었고, 베토벤도 다시금 기지개를 켰다.

    그 전란의 와중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 제5번" 은 베토벤 최고의 역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의 장대한 스케일, 왕성한 추진력, 찬란한 색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지어 베토벤 자신조차도 이 정도로 대담하고 격렬한 협주곡은 쓴 적이 없었다.

    그는 이 곡에서 특유의 강력한 피아니즘을 그 어느 때보다 과감히 펼쳐 보였고, 그 결과 이전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에 이어 다시 한 번 피아노 협주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협주곡은 베토벤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훗날 슈만과 브람스가 계승하게 되는  "교향적 협주곡(Symphonic Concerto)" 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이 곡은 분명  "협주곡" 이지만 관현악부가 독주부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며, 두 파트가 긴밀하게 어우러져 더없이 절묘하고 역동적인 음악세계를 펼쳐 보인다.
    발터 리츨러(Walter Riezler, 1878 - 1965)의 말을 빌리자면  "이 작품은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에서

    영웅적인 기개를 과시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경이로운 조성 전개의 극치를 보여준다.

    강렬한 개시 화음들은 경이로운 조성 전개의 건물 안으로 이끄는 웅장한 입구와도 같다"

     


     


     

     

    베토벤은 생애 다섯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피아노 협주곡 으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셈인데요,

    베토벤이 이 작품을 작곡 했을때 그의 귀는 이미 듣는 기능을 잃어버린 후였다고 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현존하는 모든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인지, 왜 그를

    악성(樂聖)이라고 부르는지를 알기에 충분하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음악 평론가였던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은 그가 집필한 "베토벤의 생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만약 신이 인류에게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에게서 귀를 빼앗아간 일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 “황제”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은 베토벤의 뜻과는 무관한 것으로 이 작품의 웅장하고 호방한 분위기를 들어 피아노협주곡의 황제라는 애칭으로불려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입니다. 또한 이 곡이 나폴레옹과 연관이

     있다는 설 또한  낭설임이 밝혀졌습니다. 




     1악장

     

    제 1악장은 알레그로(Allegro), 소나타 형식으로 오케스트라의 힘찬 연주에 이어 피아노가 현란한 카덴짜

    (Cadenza) 로 서두를 장식하며 웅장하게 시작을 알립니다.

    이어서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이 그 뒤를 이어받아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고 관악기군의 연주 그리고 호른이 주제를 반복하며 이끄는 가운데 다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힘차게  그 뒤를 이어 나갑니다.

     

    이후 목관악기군의 차분하면서도 가라앉은 선율과 이어지는 피아노의 격렬한 연주가 때로는 부드럽고 섬세하게  반복되며 주제를 이끌어갑니다.
    이어서 다시 오케스트라의 선율 위에 피아노가 기교를 발휘하며 연주를 이어갑니다.

    이후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주제를  주고 받으며 연주를 계속해 나가다가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마무리를 합니다.


     

     

     

     

    2악장

    제2악장은 일반적인 협주곡의 제2악장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서정적인 느린 아다지오 (Adagio)로 바이올린의

    우아한 선율을 피아노가 이어받아 연주하다가 목관악기군으로 그 선율을 넘겨 진행시키는 가운데 피아노의 독주가

    꿈꾸듯이 아름답고 섬세한 선율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위에 피아노의 애틋하면서도  

    환상적인 선율이 계속됩니다.  많은 음악 해설가들은 이 제2악장을 베토벤이 그의 실패한 첫사랑의 시련과 상처

    그리고 억을 담은 가장 감동적인 음악 중  하나라고 합니다.

     

     

     

     

    3악장

    제3악장은 경쾌하고 활기찬 론도 알레그로(Rondo Allegro) 형식으로 2악장 끝부분의 선율을 쉬임없이 곧바로

    이어받아  피아노가 강한 타건으로 주제를 이어갑니다.이어서 오케스트라가 똑같은 선율을 반복하고 관악기의

    출현에 이어 현악기군의 연주가 계속됩니다.
    반복되는 주제의 연주가 끝나면 호른이 그 뒤를 이어받는 중에 현악기군의 강한 연주로 마무리 됩니다.
    마지막으로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마무리 한 후 피아노가 힘차게 스케일을 연주하고 오케스트라 는 다시 그것을

    받아 역시 화려하고 장엄하게 힘찬 연주를 전개 함으로써 곡은 마무리 됩니다. 

     

     

     


     

     

    참고 : 음악용어

    Largo(라르고) : 천천히,느리게
    Lento(렌토) : (악곡 전체를)느리게 연주
    Adagio(아다지오) : 침착하고 느리게

    Andante(안단테) : (천천히 걷는 정도로) 느리게
    Andantino(안단티노) : 안단테 보다 조금 빠르게
    Moderato(모데라토) : (알레그로와 안단테의 중간정도)보통 빠르게

    Allegreto(알레그레토) : 조금 빠르게
    Allegro(알레그로) : 빠르게
    Vivace(비바체) : 발랄하게 빠르게
    Presto(프레스토) : 아주 빠르게

 

 

 

 

 

Beethoven, Ludwig van (1770-1827 G)
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b 장조 '황제'작품 73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5 in Eb major, Op.73 'Emperor'
(Cadenzas by Kreisler)

악성 베토벤은 고전 음악의 최대의 완성자인 동시에 그 완전한 형식적인 예술에 보다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내용을 담은 위대한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백절불굴의 투지로서 모든 난관을 극복한 승리자였으며 철학자이며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애를 실천한 인도주의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고전의 형식미에서 벗어나 낭만주의 음악에 문을 연 교량적인 역할을 한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제2의 모짜르트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는 모짜르트처럼 신동은 아니였으나 음악적인 천분을 마침내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7세 때에 그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비인으로 갔습니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 교육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792년 22세 때에 그가 비인에 나타났을 때는 작곡가라기보다는 먼저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역경과 고난이 겹쳐 들었습니다. 생활은 곤란했고 사랑은 실패했으며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귓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1

814년 이래 그는 완전한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고통 속에서도 비할 바 없는 위대한 예술이 나타났습니다.

1815년 이후의 작품은 그의 모든 창작 중의 일대 전환인데 웅대한 구상과 자유로운 형식, 진지한 표현 등은 거성이

아니고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작품은 낭만적인 영향도 받았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고 냉정했으며 안정된 형식미를 갖추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체험을 합리적인 형식을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보통 3기로 나누는데,
제1기((1786-1803) 초기의 작품으로서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영향을 받은 때입니다. 교향곡 제1,2번이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제2기(1804-1816)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독창적인 시기입니다.

교향곡 제3번에서 제8번까지의 작품입니다.
제3기(1817-1827) 초인간적인 최고의 예술인데 영감의 창작기입니다.

 

청각을 거의 잃어버린 이후의 감각을 초월한 시대의 작품을 보였습니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9번 등이 있는데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음악사상 최고에 속합니다.
베에토벤이야말로 많은 유산을 우리 인류에게 남겼다고 하겠습니다.

 

고뇌에 빠진 베토벤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5 in Eb major, Op.73 'Emperor'

18 세기부터 19 세기초에 걸쳐 유럽은 끊임없이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청소년기를 보낸 본

(Bonn)도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그가 22세의 가을부터 5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고 있었던 빈(Wien)도 두 번에 걸쳐 나폴레옹군에 의해 점령되었지요.

베토벤은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줄 영웅으로 존경하고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자 그 생각을 버리고 나폴레옹과 프랑스인을 마음으로부터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그 적개심이 정점에 달했던 것이 나폴레옹군의 두번 째의 빈 점령 때였습니다.

 

1809년 5월 초 빈이 하루만에 나폴레옹군에 의해 함락되자 베토벤과 가깝게 지내던 귀족들은 모두 빈을 탈출했으나

당찬 성격의 베토벤은 빈을 한걸음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황제"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이 작곡된 것은 나폴레옹군의 공격을 받아 포성이 빈을

뒤흔들었던 무렵으로 1809년 2월부터 10월에 걸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곡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유달리 남성적이고 스케일이 크고 호탕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와 같은 사회 정세도 일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곡의 "황제"라는 호칭은 나폴레옹과 결부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나폴레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황제"란 이름은 이 곡의 곡상(曲想)이 장대하고 숭고하며 그 구성이 호화롭고 위풍당당하여 마치 황제의 품격을 연상케 한다는 것과 이 곡의 규모와 내용 모두가 고금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최고라는 뜻으로 후세 사람들이 "황제"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곡의 제1악장의 당당한 시작과 웅혼(雄渾)한 곡의 전개를 들어 보면 "황제"라는 호칭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곡은 모두 3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고 호탕한 제1악장에 이어 명상적인 제2악장과 활기찬 제3악장이 모두 음악적인 맛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피아니스트로서도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잇었으므로 "피아노 협주곡 제4번"까지는 모두 자신의 연주로 첫 공연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제5번은 그의 제자인 체르니(Carl Czerny)가 피아노를 맡았습니다. 베토벤은 이 무렵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어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지요.

 

 

 

베토벤의 장례식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