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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Händel, Water Music Suites, HWV 348, 349,

 

 

국왕 조지 1세에게 자신의 음악을 설명하는 헨델


 

 

Hervé Niquet/Le Concert Spirituel - Händel, Water Music Suites, HWV 348, 349, 350

 

 

 

 

 


 

 

 


곡은 3개의 모음곡으로 구성된 규모가 큰 세레나데이다.

 구성을 보면1곡인 F장조 112곡인 D장조 53곡인 G장조 5곡 등 모두 21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연주시간은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곡은 야외에서 뱃놀이 할 때 선상에서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금관악기와 목관악기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여기에 기본적인 현악합주를 비롯하여 당시 바로크 오케스트라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악기들이 배에 실려 당시로서는 꽤 큰 편성인 50명의 연주자가 이 곡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다만바로크 음악에 꼭 있어야 하는 하프시코드는 그 크기 때문에 배에 싣지 못하여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곡은 해밀턴 하티(1879-1941)가 6곡을 골라 근대풍으로 편곡한 이른바 하티판도 즐겨 연주된다.

 

 



Water Music Suite No.1 in F major 




Water Music Suite No.2 in D major 



Water Music Suite No.3 in G major


 

 

편성은 악장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플루트 1, 오보에 2, 바순 1, 호른 2, 트럼펫 2, 현악기, 통주저음으로 구성된다.

또한 수상 음악 가운데 일부 곡은 더 작은 편성으로 편곡한 당대의 악보가 판본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구성은

프랑스풍 서곡으로 시작되어, 미뉴에트, 부레, 파이프가 중심으로 들어 있다.

 

 전체적으로 수상음악은 이태리적인 밝은 화성과 품위 있는 춤곡으로 이루어진 곡으로 축전 음악답게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다.

 

 


Water Music &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헨델은 바하와 같은 해인 1685년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한번도 둘은 만난적이 없습니다.
헨델은 살아가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힌 해외파지만, 바하는 독일에서 한번도 벗어난 일이 없는 순수한 국내파 입니다.
헨델은 25살때 독일 하노버 선거후의 궁정악장이 되었고,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그때 영국의 앤 여왕을 알현하게 되고, 앤 여왕은 헨델에 대해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영국왕실의 총애를 받아 높은

직위와 많은 봉급을 받게되었습니다.

하노버선거후에서 받은 휴가 기간인 3개월을 훌쩍 넘기고도 독일로 복귀하지 않고  아예 영국이란 나라로 귀화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영국의 왕실의 총애속에서 열심히 음악작업을 하던 헨델에게 큰 시련이 밀려옵니다.

바로 그를 아껴주던 영국의 앤 여왕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격이라 하필이면그가 배신을 땡긴~ 독일의 하노버 선거후가 게오르그 조지 1세로 영국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조지1세에게 이미 미운틀이 박혀버린 헨델에게는 날벼락이 아닐수가 없었죠? 조지 1세가 즉위하자 약발이 바로

나타났는데 바로 헨델의 직위를 낮추고 연봉을 삭감해 버렸습니다.

짤라 버릴려고 했지만, 헨델의 재능을 아는 왕이라 차마 짜르지는 못하고 연봉삭감과 강등으로 일단 마무리 시켜죠? 하지만 미운건 어쩔수 없나 봅니다.~

그런 조지 1세 때문에 헨델의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헨델이 밤낮으로 고민하면서 동료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많은 고민을 상담했지만 뚜렷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날로 수축해가는 헨델~~
 
그런 그가 안쓰러웠던지 동료 한명이 얼마 있으면 템즈강에서 국왕이 뱃놀이 잔치를 하니 그에 쓸 음악을 만들어서 국왕에게 바치는 것이 어떨까? 라는 제의를 했고 헨델은 그 제의를듣자 마자 살아야 한다라는 일념으로 바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뱃놀이 당일~ 조지 1세가 배를 타고 잔치를 즐기고 있을때 저 멀리서 배 위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리자 조지

1세는 저기 멀리 배위에서 연주하는 저 사람은 누구냐~라고 물었을때 한 신하가 헨델이라고 대답하자~ 조지1세는 매우 기뻐하며, 헨델의 직위를 다시 높여주고연봉도 2배로 올려주었다고 합니다.

특히, 조지 1세는 그 음악을 무척사랑하여, 그 후 3~4번의 뱃놀이가 있을때 마다 헨델에게뱃놀이를 위한 음악을

만들것을 요구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재목이 수상음악이된것입니다.

 제목은 물위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뜻이지 물을 묘사한 음악은 아니고, 모음곡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보통  2~3개의 모음곡을 묶어서 음반으로 발매하고 있습니다.
 
그런 수상음악의 음반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시대악기의 연주로써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오르페우스 챔버와 함께

원전연주로써의 최고봉에 우뚝 솟은 잉글리쉬 콘서트와 트레버 피녹크가 지휘한 녹음입니다.
 
두 음반다 필청해야 할 음반이지만 그중에서 저의 마음을 매료시킨 트레버 피노크의 음반을소개하고자 합니다.

시대악기와는 달리 원전악기의 특징이라고 하면 가늘고 투박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높고 가는 선율이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맛은 단연 최상의 달콤함을 전해줍니다.
 
그런 소리를 피노크와 잉글리쉬 콘서트는 이 음반에서 최상의 기량으로 수상음악의 연주를
들려줍니다. 이에 못지 않게 시원하게 뻣어나가는 관악기의 선율은 가슴까지 시원함을 전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알라혼 파이트에서 호론의 약간 불안정한 소리에 가슴을
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족함이 없이 훌륭한 소리를 발산해 주었습니다.
 
얼마전 2007년 4월 18일 첫 내한을 한 피녹크는 그의 악단인 잉글리쉬가 아닌 유러피안
부란덴부르크 앙상블을  이끌고 내한을 했으며, 그때 작품역시 그의 최고의 작품은 수상음악
을 첫번째로 연주를해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가디너, 호그우드, 멘쯔, 부르헨과 함께 고음악의 독보적인 영역을 지키고 있는 피노크~
그의 최상의 업적이라고 하면 바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전곡과 함께 이 수상음악이 길이
빛날 것입니다.
 
들려드릴 음반은 가장 유명한 알라혼 파이트를 올릴까 했지만 그 것보다 더 시원한 소리로
우리를 즐겁게 해줄 HWV 348번 중에서 3번트랙인 (Allegro-Andante-Allegro da capo)로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 음반은 라이센스 및 수입 모두다 발매되어있습니다.

헨델의 수상음악 중 HWV 348 (Allegro-Andante-Allegro da capo)

 

 

헨델의 고향, 할레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바로크 시대를 수놓았던 세 명의 거장이 동갑내기입니다. 바로 바흐와 헨델, 그리고 이탈리아 태생의 하프시코드 명인이었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입니다. 세 명은 모두 1685년에 태어났습니다.

바흐는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았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헨델은 20대 중반에 런던에 정착해 40대 초반이었던 1727년에 아예 영국인으로 귀화했지요. 나폴리에서 태어난 스카를라티는 로마에서 활약하다가 포르투갈 리스본의 궁정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공주의 음악선생으로 살았습니다.

 훗날 그 공주가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4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자 자신도 스페인 궁정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결국 마드리드에서 타계하지요.

‘내 인생의 클래식 101’에 바흐는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한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아직 얼굴을 비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헨델 이야기를 해볼 참입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흐와 대비되는, 동시대를 살았던 동갑내기 음악가입니다.

 

 

 

무겁고 어두운 독일풍의 바흐, 밝고 환한 이탈리아풍의 헨델

헨델은 독일 작센 지방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존 바비롤리가 지휘했던 할레 오케스트라의 거점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 중부의 공업도시입니다.

 헨델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이자 이발사였다고 하지요.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등장하는 피가로의 직업이 외과의사 겸 이발사였던 것을 보더라도, 당시에는 이 두 가지 직업을 병행하는 일이 흔했던 모양입니다.

‘고향을 떠나다’라는 것은 ‘아버지를 벗어나다’와 거의 동의어입니다. 헨델의 삶을 들여다볼라치면 그런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그는 열여덟 살에 고향인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를 제안 받지만 그 자리를 뿌리치고 북부 독일의 음악 중심지인 함부르크로 갑니다. 법률가가 되기를 학수고대했던 아버지의 그늘에서 그렇게 한 발씩 벗어났던 것이지요. 물론 그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하지만 헨델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지워 나갑니다. 함부르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오페라 <알미라>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번에는 아예 시선을 이탈리아 쪽으로 돌립니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한 마디로 유럽 음악의 종주국이었습니다. 특히 극음악(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본향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발원한 이 두 개의 장르가 영국과 독일 등 곳곳으로 퍼져 가면서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 헨델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많은 것은 보고 배우면서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을 구축했을 겁니다. 같은 독일 태생인 바흐와 확연히 구분되는, 오히려 이탈리아 풍에 가까운 헨델의 음악이 이 시기에 배태됐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많은 음악가들과 국제적 교류를 시작했을 무렵에 헨델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습니다.

1706년부터 1709년까지였지요. 애초에 법학을 공부했던 헨델은 바로 그 시기에, 화려하게 약동하는 리듬과 화성을 자신의 음악 스타일로 구축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리듬’과 ‘화성’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들은 선율(멜로디)을 그다지 비중 있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선율은 여러 음들이 하나씩 차례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음악적 흐름이지요. 바로크가 끝나고 고전의 시대로 접어들어야 비로소 선율이 제대로 대접받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를테면 모차르트의 ‘아련한 선율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여러 음이 동시에 울리면서 만들어지는 화성이 더 주목받고 있었지요. 그래서 바로크 음악은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많이 듣는 바흐의 음악을 휘파람으로 흉내 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마 잘 안 될 겁니다.

심지어 첼로 한 대로 연주되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나 바이올린 한 대로 연주되는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같은 곡에서도, 바흐는 여러 개의 현을 동시에 연주하는 주법으로 화성을 구축하지요.

바흐의 화성은 무겁고 어두운 편입니다. 독일적이지요. 반면에 헨델의 화성은 밝고 환합니다. 게다가 이탈리아풍의 출렁거리는 리듬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화려하게 약동하는 분위기를 풍깁니다. 특히 현악 파트가 간결하면서도 힘찬 화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헨델 음악의 특징으로 손꼽힙니다.

왕과 귀족들의 흥취를 고조시키기에 이만한 음악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헨델은 그렇게, 자신의 뿌리(아버지)인 독일풍의 음악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헨델은 기본적으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에 주력했던 음악가였지요. ‘극음악’이라는 범주로 묶이는 그 두 개의 장르가 당대 음악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헨델이 작곡한 오페라는 모두 46곡, 오라토리오는 32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장르에서 헨델이 써낸 아리아들의 서정성과 성악적인 기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의 오페라는 오늘날 국내에서 전막으로 공연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지요. 하지만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라는 아리아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라토리오로는 그 유명한 <메시아>가 대표적입니다.

 

 

헨델의 동상

 

영국의 왕 조지 1세(1660 ~ 1727

 

 

영국 국왕 조지 1세의 템스 강 뱃놀이에서 초연

오늘 듣는 <수상음악>(Water Music, HWV 348-350)은 <왕궁의 불꽃놀이>와 더불어 헨델의 관현악 모음곡을 대표합니다.

이탈리아에 머물던 헨델은 1710년 6월부터 독일 하노버 궁정의 악장으로 일하게 되는데, 같은 해에 1년간의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이때 영국에서 공연했던 오페라 <리날도>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지요.

물론 헨델은 휴가 기간을 어기지 않고 자신의 고용주였던 하노버의 게오르크 선제후 곁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성공과 환대가 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나 봅니다. 자신이 예속돼 있는 하노버 궁정은 영국에 비한다면 오페라에 대한 인기가 시들했습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헨델은 1712년에 다시 한 번 선제후에게 허락을 받아 영국으로 건너가지요.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앤 여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음악가로 승승장구합니다.

그런데 앤 여왕이 1714년에 사망합니다. 그 자리를 이은 사람이 하필이면 헨델의 고용주였던 하노버의 게오르크 선제후였지요. 영국 왕 조지 1세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부터 <수상음악>을 둘러싼 하나의 ‘설’이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똥줄이 탄 헨델이 1717년 여름에 템스 강에서 국왕이 뱃놀이 연회를 벌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둘러 작곡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국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상음악>을 작곡해 템스 강에서 초연했다는 ‘설’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그저 ‘떠도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어쨌든 <수상음악>은 1717년 여름, 조지 1세의 템스 강 연회에서 초연됐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야외음악회였습니다. 헨델과 악사들(50명)이 배에 오른 채, 왕과 귀족들이 탄 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연주했다고 전해집니다.

강에서 연주했던 까닭에 호른이나 트럼펫 같은 관악기들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집니다. 그래야 음악 소리가 들렸겠지요. 기록에 따르자면, 그날 국왕은 음악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면서 모두 세 차례나 연주를 지시했다고 합니다.

 

 

 

 * 런던의 헨델이 살았던 거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