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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Handel, Georg Fridrich

 

 

 



GEORGE FREDRIC HANDEL 1685 ~ 1759 할레 헨델 동상

 

 

 

 

 

* 헨델의 고향, 할레

 

 

 

 

 

[ 음악의 어머니,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 ]

 

 

 

 

 

 

헨델은 바흐와 함께 바로크 시대 독일 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웁니다. 그래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사실은 이런 별칭은 모두 일본인들이 붙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685년에 이웃 주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추구했던 방향이나 활동 무대가 매우 대조적입니다.

 

 

바흐가 평생을 교회와 교회를 위한 작품에 전념한 반면, 대식가에 애주가였던 헨델은 교회보다는 광범한 민중을 향해 음악을 썼습니다. 또한 바흐는 고향 근처를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평범한 시민으로서 파란 없이 살았지만, 헨델은 유럽 전역에서 활동하다가 결국은 영국에 귀화하여 그곳에서 뼈를 묻은 국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의 고향인 할레는 바흐가 묻힌 라이프치히에서 서북쪽으로 33km,인구 23만의 도시입니다.1천년 역사의 古都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과학 아카데미 '레오폴디나'가 자랑이고,음악에 있어서는 유명한 가곡 작곡가인 로베르트 프란츠가 이곳 출신이기도 하여 동상까지 있습니다.

 

 

 * 헨델의 생가

 

 

 

할레의 중심가 부근인 니콜라이街 5번지.노란 벽의 기다란 2층 집이 헨델의 생가입니다.

입구에 '헨델 하우스'라고 쓰여 있습니다.

헨델 기념관입니다.

 

헨델의 아버지가 이 집을 사들인 것이 1666년, 그러니까 헨델이 태어나기 20년 전부터 그의 일가가 살던 집인데

외벽이나 내부가 古屋답지 않게 말끔합니다.

 이 집은 1948년 이래 기념관으로 되어 왔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전면적으로 수리를 해서 헨델의 300주년 생일날

신장(新裝)개관을 했다고 합니다.

 

한 대음악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정성이 이렇게 지극합니다.

기념관은 10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헨델의 생애를 그가 머문 도시별로 설명해 줍니다. 할레실,함부르크실,이탈리아실,

하노버실,런던실 등...

그의 일생이 지나간 길 따라 일목 요연합니다. 다만 헨델이 직접 쓰던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서운합니다.

 

음악은 흘러도 흘러도 어제 흐르기 시작한 물처럼 늘 싱싱한데 300년이 넘은 세월은 물 소리같은 음악만 남기고

 다 쓸어가 버렸습니다.

생가 옆으로는 새로 헨델 관계 도서관과 소회의실을 따로 달아냈고, 헨델 협회도 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현재 헨델 협회는 영국,네델란드,오스트리아 등 세계 각국에 7개가 있는데 그 중 할레의 것이 센터격입니다.

 

헨델은 18세 때인 1703년 함부르크로 가면서 이 생가를 떠났습니다.

그 후로도 그는 어머니를 보러 가끔 이 집에 왔고 마지막으로 고향 집을 찾은 것은 65세 되던 해(1750년) 런던에 살 때였습니다.

그 때 조카 등 일가 친척 몇 사람이 감회에 젖은 老음악가를 맞았고, 헨델이 세례를 받은 성모 마리아 교회에는 바흐의 장남인 빌헤름 프리데만 바흐가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 성모 마리아 교회

 

 

 

라이프치히에 있던 아버지 바흐는 4주일 정도 전에 죽고 없었습니다.

같은 땅, 같은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바흐와 헨델 두 대가는 이래서 마지막 상면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헨델의 세례반(洗禮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는 할레의 도심인 마르크트 플라츠(시장 광장) 한쪽 가에 있습니다. 1537년 세워진 것으로 4개의 종루(鐘樓)가 유난히 눈에 뜁니다.

헨델이 소년 시절 음악을 처음 배운 것은 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이던 차하우한테서였습니다.

 

 

 * 헨델의 동상

 

 

 

 

 

 

이 교회를 마주 쳐다보며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동상이 헨델입니다.

광장에는 인파 사이로 전차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동상 아래에는 산보객들이 줄지어 앉아 쉬고 있습니다.

 

 

 * 헨델의 동상

 

 

헨델의 동상은 할레의 도심인 마르크트 플라츠 광장 한복판에 있습니다. 이 동상은 1859년 그의 100주기를 맞아 독일과 영국에서 애호가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아 세운 것입니다. 헨델은 영국의 궁정의상을 하고 있습니다.

 

헨델은 같은 해에 태어난 바흐가 고향 땅 부근을 일생 벗어나지 못한 데 비해 그의 생애는 파란 많고 활동 범위와 명성은 전 유럽적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정착하게 되는 영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25세 때인 1710년, 그 2년후 다시 와서부터 주저앉아 74세로 죽을 때까지 그는 런던에서 지냈습니다.

런던에서 헨델이 38세 때부터 살기 시작하여 운명을 한 집이 브루크 스트리트 25번지. 지금은 헨델 박물관이

 되어있습니다.

 

 

 * 런던의 헨델이 살았던 거처

 

 

 

다갈색 벽돌의 4층 집이 다른 키 큰 건물들 사이에 끼여 낮고 좁다랗습니다.

아래층은 가구점이 되었고 위층은 아파트입니다. 입구에 '음악가 조지 프레데릭 한델(헨델의 영국명)이 이 집에서

살다 죽었다'는 명판(名板)을 단 채 이름 모를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집은 19세기 말에 맨 위층을 한층 더 올리고 1906년에 아래층이 가게로 변했을 뿐 헨델이 죽을 당시 거의

그대로입니다.

 

 2차 대전 전에 이 집을 헨델 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해 모금을 했으나 250파운드밖에 걷히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일생의 태반을 바쳐 명작의 대부분을 낳음으로써 오늘날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런던에 그를 기념하는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헨델은 이 집에 살 때 음식과 포도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실내 장식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수수했다고 합니다. 이 집의 2층이 그의 음악실이었고 바로 이 방에서 다른 많은 대작과 함께 헨델의 대명사처럼 된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작곡되었습니다.

 

 

 * 헨델이 살았던 런던의 거처

 

 

헨델은 이 집에서 일체의 문 밖 출입을 않은 채 음식도 하인을 시켜 방에 갖다 먹으며 이 곡을 24일 만에 써 냈습니다. 작곡 중에는 스스로 감동에 빠져 가끔 망아(忘我)의 경지가 되다가 제2부의 '할렐루야 코러스'를 쓰고 났을 때는 눈에 눈물이 괴었던 헨델. 그 헨델이 유리창 너머로 보이기라도 할 것 같아 발돋음하고 싶어집니다.

 

이 곡이 1743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가극장에서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공연되었을 때 임석한 국왕 조지 2세가

이 합창이 시작되자 감동한 나머지 기립을 했고, 그 이후로 어느 공연에서나 이 대목에서는 청중 전원이 일어서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공연은 더블린에서의 초연 때나 런던에서의 초연 때나 모두 자선(慈善) 음악회였습니다. 1750년 이후는 헨델이 원장으로 있던 고아 양육원을 위해 매년 헨델 자신의 지휘로 연주되었습니다. '이 곡은 얼마나 굶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고아들을 길러냈던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헨델이 그의 생애 마지막 지휘 연주를 한 것도 <메시아>였습니다.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 가극장에서 종곡

(終曲)의 아멘 코러스가 끝나자 그는 기진해 쓰러졌고 그 1주 후인 성(聖) 금요일 밤 그는 승천했습니다.

 

헨델은 영국 위인의 예우를 받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詩人) 코너에 묻혔습니다. 무덤에는 헨델이 <메시아>의

제3부 제45곡의 악보를 손에 쥐고 있는 기념상이 서 있습니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델 기념상

 

 

 

[ 모음곡 '수상음악' 이야기 ]

 

유려하고 상쾌한 표정의 헨델다운 박력! 예민한 감각과 청결한 리듬! 타워브리지로 유명한 템즈 강을 보게 되고 그 순간 바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수상음악(Water Music) >입니다. 이 곡은 뱃놀이 음악다운 낭랑한 울림이 돋보입니다.

 

물소리가 찰싹찰싹 들리는 것 같은 효과음을 느낄 수 있고, 이탈리아풍의 밝고 산뜻한 느낌을 받습니다.

현악합주에 호른이나 트럼펫 같은 금관악기와 플루트나 오보에 같은 목관악기가 각각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어

남성적인 강인함과 여성적인 차분한 정서가 조화를 이룹니다.

 

헨델은 젊었을 때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후 오페라 분야에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는 25세 때인 1710년

6월부터 독일 하노버에서 게오르그 선제후의 궁정 악장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노버에서는 그의 특기인 오페라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할 수가 없었기에 취임하고 얼마 안 되어 1년의 휴가를 얻어 오페라가 성행하던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 헨델 당시의 런던 템즈 강 풍경

 

 

 

그러나 휴가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일단 하노버로 귀국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1712년, 미련이 남은 그는 다시 휴가를 얻어 다시 영국으로 갔습니다. 자작 오페라의 상연 등으로 역시 호평을 받았고, 앤 여왕을 위한 생일 축하의 송가를 작곡해 여왕의 총애를 받음은 물론, 영국 상류사회의 인기를 한몸에 받기에 이릅니다.

 

앤 여왕으로부터는 200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는 특전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임지인 하노버보다 런던이 훨씬 좋아진 헨델은 하노버 선제후의 귀국 명령에 불복하고 휴가 기간이 끝난 후에도 영국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공교롭게도 헨델을 아껴주던 앤 여왕이 1714년에 갑자기 죽게 됩니다. 얄궂게도 다음의 영국 왕으로 책봉된 사람은 영국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던 하노버의 게오르그 선제후였습니다. 헨델에게는 참으로 난처한 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영국의 왕위를 물려받은 선제후는 조지 1세가 되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헨델은 새로운 국왕의 노여움이 두려워 조용히 근신하고 있었습니다.

1715년 8월 22일 런던의 템즈 강에서 국왕의 뱃놀이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실의에 잠겨있는 헨델을 보다 못한 킬만세기 남작(조지 왕이 하노버에서 데리고 온 가신)이 "새 곡을 만들어 국왕이

 탄 배를 따라가며 연주하면 어떨까?"하고 제의를 해 왔습니다.

 

헨델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새 곡을 만든 후, 아무도 모르게 50명의 연주자들을 태운 특별선을 마련했고, 국왕의 유람선을 따라나섰습니다. 템즈 강의 람베드에서 첼시까지 왕복하는 동안 약 한 시간이 걸리는 전곡 연주를 갈 때 2회, 돌아올 때 1회, 총 3차례 반복해서 연주했습니다.

 

 

 * 조지 왕과 헨델, 수상음악을 연주하면서 알랑방귀(?)를 뀌는 헨델

 

 

그러자 음악에 이끌린 국왕은 "대체 악장이 누구냐?"라고 곁에 있던 킬만세기 남작에게 물었고, 남작은 헨델이라고

 추켜올려주었습니다. 왕은 매우 흡족하여 만찬 때도 초대해 연주를 시켰다고 합니다.

국왕은 헨델의 배임 행위 자체는 괘씸하게 생각했으나 이를 계기로 죄를 용서한 것은 물론, 앤 여왕 때 받은 금액의

 2배나 되는 연금을 지급하게 했다고 합니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