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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Paganini Violin Concerto No.3 MS,50

 

 

 

 

 

 

 

 

 

 I. Introduzione. Andantino – Allegro marziale 18:11         
Cadenza: Salvatore Accardo

 

 

 

II. Adagio. Cantabile spianato 7:07                                                                                                                   

 

 

 

 III. Polacca. Andantino vivace 11:33

 

 

Salvatore Accardo – violin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Charles Dutoit
Recorded in 1975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 1782~1840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 프랑스 니스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난 '파가니니'는 19세기 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파가니니'는 19세기 초엽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하였는데, 신기에 가까운 탁월한 기교에 전유럽이 떠들썩하게 되었다.

상식을 뛰어 넘는 연주기교에 귀신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심지어 그가 쓰고 다니는 모자, 의복,장갑 등을 모방한 의류가 상점마다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한다. 명성과 재물을 쌓았지만, 한때는 그의 방탕과 도박으로 건강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많은 부채로 인해 그가 소중히 여기던 바이올린까지 팔게 되었던 적도 있었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기법을 신비적으로 보이기 위해 단 한명의 제자 밖에는 두지 않았으며, 악보 조차도 공개하기를 꺼려했다 한다. 그래서 '파가니니'의 주법은 유파를 형성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대로 끝나게 되었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연마할 때는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연습을 하였다 하니 그의 기교가 단순히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파가니니는 역사상 드물게 보는 귀재로 불가능을 모르는 뛰어난 기교와 마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바이올린 음악은 슈만, 쇼팽, 베를리오즈,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의 낭만파 음악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파가니니'가 잘 사용하는 기법은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절묘한 대비, 하모닉스의 효과, 왼손의 피치카토, 플레젤레트, 스코르다투라 등으로 당시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뛰어났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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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2세로 부터 받은  훈장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바이올린 연주계의 수퍼스타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칭을 얻었을만큼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 파가니니는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조(대가)였다. 그의 화려하고 다양한 연주 테크닉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겨져 있는데...

2중 트릴(떤 꾸밈음), 화음의 연속적인 연주, 2중 플레절렛(왼손기교의 한가지), 자연음과 플레절렛의 병행, 왼 손 피치카토 등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고난도 테크닉을 구사했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에도 탁월했는데 더블 스토핑(여러 음을 동시에 내는 기법)과 하모닉스, 왼손 피치카토 등은 기타의 연주기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초상화나 스케치에 담긴 그의 모습을 보면 괴기영화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로테스크(?)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에 가까운 파가니니의 연주는 여성 팬들을 까무러치게 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반면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양면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던 파가니니는 여자와 도박에 빠져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잡히는 등 갖은 기행을 일삼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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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부스 서신과 함께 제노바 시청사에 있는 '과르네르 델 제수',,,

'연주가 최선의 보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악기이다.

매년 1회 연주되는데 파가니니 콩클 1회 우승자 살바토레 아카르도가

처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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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화가 앵그르(1780-1867)作
어딜 봐도 악마의 귀기는 없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만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좋지 않아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일생을 마쳤다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바이올린 한 줄로만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모습을 풍자한 삽화(1810년경) 왜 이런 헛소문이 그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리라작곡가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리어 이런 점에 파가니니의 작곡가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이 있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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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년된 설탕공장을 파가니니 음악당으로 개조했다.

 

下,무대 배경으로 뒷 숲을 드러낸 투명 유리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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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제1 항구도시 제노바,,,파가니니,콜롬부스 고향이다.

여성스런 문화도시 피렌체와 비교되는 강건한 뱃사람의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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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묘지에 잠들고 있는 파가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