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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Boccherini - Guitar Quintet No.2 in E major, G.446

 

 

 





Guitar Quintet No.2 in E major, G.446 이어듣기

 

 

 




1 mov. Maestoso assai


2 mov. Adagio - Allegretto


3 mov. Polacca (Tempo di minuetto)

 

 



Guitar Quintet No.2 in E major, G.446
Boccherini, Luigi (1743∼1805 It.)
Pepe Romero :Guitar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Chamber Ensemble

 

 

 


 

Boccherini, Luigi (1743∼1805 It.)
의 기타 5중주 제2번 E 장조 G.446
Guitar Quintet No.2 in E major, G.446



 

 

    

 

 


이탈리아의 첼로의 명수이자 작곡가이며 콘트라바스의 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워 13세 때 첼로의 주자로

 청중 앞에 섰으며, 로마에서 음악 수업을 받은 후 유럽 각처로 연주 여행을 했습니다.
처녀작 실내악을 파리에서 출판했고, 1769년부터 마드리드에서 궁정 작곡가의 자리를 얻어 이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복케리니의 작품으로는 특히 첼로 붕야에 작품이 많아서 125곡의 현악5중주곡을 비롯하여 91곡의 현악4중주곡,

협주교향곡을 포함해서 20곡의 교향곡 등이 있으며, 협주곡도 첼로가 4곡, 그밖에 각 1곡의 플루트, 쳄발로, 바이올린의 협주곡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큰 공적은 현악4중주곡과 특히 첼로 부분에 있으며, 저음악기에 불과했던 첼로에 독주악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한 최초의 한 사람입니다.

 

 

 


Luigi Rodolfo Boccherini

( February 19, 1743 – May 28, 1805) 이탈리아

 

 

 

보케리니 (Boccherini, Luigi) [1743.2.19~1805.5.28] 

이탈리아의 작곡가 ·첼로 연주자.
국적 : 이탈리아
출생지 :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루카

 

 

보케리니 Boccherini, Luigi Rodolfo 1743~1805

 

 

이탈리아의 작곡가. 첼로 연주자.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우고, 로마에 모습을 나타낸 후 14세 때 이미 유명한 연주가가 되었다.

이어서 빈 궁정 악장으로 고용되어 1757년부터 176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빈에 체류했다.

 

이 시기에 최초의 명작인 6개의 현악 3중주곡(1760)과 1761년에는 6개의 현악4중주곡이 작곡되었다.

1764년에 루이지와 그 부친은 루카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칸타타 1곡과 사함받은 요한 및 유태 왕 조아스 등 두 곡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아버지가 작고한 후(1766), 보케리니는 바이올린 주자 필리포 만프레디 Filippo Manfredi와 친해져서 함께 연주여행을 떠났으며 특히 파리에 가게 되었다(1767). 그는 종교음악회에는 출연했으나 베르사이유 궁정에는 초대되지 않았다.

파리의 스페인 대사가 그의 기악 주자로서의 기량과 작곡가로서의 재능에 감탄하여 마드리드에 가자고 제의하자

 보케리니는 이를 승낙하여 스페인의 수도로 갔으나(1769), 궁정의 음악 책임자 브루네티는  환영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대신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돈 루이스 왕자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1785년 왕자가 죽을 때까지 이 왕자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1776년에는 왕자와 함께 마드리드 근교인 라스 아레나스에 거주했다.

그 사이에 보케리니는 다양한 편성을 위하여 막대한 수의 실내악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일련의 현악5중주곡은 종종

스페인풍의 모티브에서 착상을 얻고 있다.

 

마드리드 거리의 밤의 음악 La Musica notturna delle strade di Madrid이라 불리는 뛰어난 5중주곡 op. 306에는 이 상쾌한 느낌을 주는 실험기의 성과가 유감없이 반영되고 있다.

 아마도 그는 파리에 체류할 때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그 자신이 이탈리아인이면서

이탈리아 음악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퍼져 간, 그야말로 그 시대의 다른 쪽의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4중주곡 op. 33을 들은 후 프로이센의 대사는 보케리니를 자신의 황제에게 종속시키려고 끊임없이

애썼다.

1786년 이후 보케리니는 뛰어난 첼로 주자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상당한 수의 작품을 보냈는데 그 중 28곡은 5중주곡, 16곡은 4중주곡이었다.

 

친교가 있던 베나펜테 오수나 BenaventeOsuna의 집에서 보케리니는 요제프 하이든의 수많은 작품을 들을 기회를

얻었으며, 또한, 특히 고야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레안드로 페란데스 데 모라틴 Leandro Fe?andez de Moratin,

영국의 작가 윌리엄 베크포드 William Beckford와 사귀었다.

그는 이 교양있는 사교계의 인사들을 위하여 1960년에 발견된 유일한 오페라 클레멘티나(자비로운 여인)를 작곡했다.

 

1787년부터 1796년에 걸친 보케리니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가 프로이센의 포츠담

궁정에서 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마드리드에 체류했으며 비교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797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 후계자에게 음악을 헌정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집정정부 시대에 파리 음악원의 이사직을 얻었으나 보케리니는 조국처럼 생각해 오던 스페인에 남기로 했다.

1800년 말, 집정정부의 마드리드 대사였던 뤼시앙 보나파르트 Lucien Bonaparte는 그의 호의를 얻어 op. 60과 op. 62의 두 쌍의 6개의 5중주곡을 헌정받았다.

 

보나파르트가 프랑스로 돌아간 후, 보케리니는 이제 작품을 팔아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1796년 이래 작품을 넘겨주고 있던 출판업자 이그나츠 플레이엘은 극히 작은 작품료밖에는 지불하지 않았다.

 양친의 죽음이 잇달았던 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그는 마드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1927년 이탈리아로 옮겨져 루카의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보케리니는 현악기를 위한, 가장 위대한 실내악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고 18세기 후반에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기악 작곡가였다.

 

그 후 많은 4중주곡과 5중주곡에서 볼 수 있는 숙달된 서법과 활달한 형식은, 후고 리만이 보케리니는 파리에서

만하임 악파*의 성과를 도입했다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계승자로서는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져 왔었다.

 

이러한 리만의 주장으로 하이든과 함께 현악4중주곡을 창시한 인물로서, 그리고 뒤의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2대의

 첼로를 사용하는 형식을 좋아한 5중주곡의 선구자로서 이탈리아의 로코코 양식과 빈의 고전주의 대가들 사이에

위치하는 이 음악가의 중요성은 입증되었던 것이다.

 

빈에 있어서의 고전주의 대가들의 비교적 추상적인 순수성에 비해서, 모짜르트처럼 천성이 우울하고 극적이기도 했던 보케리니는 색채에 대한 배려, 악기에 대한 교묘한 처리(콜 레뇨 주법 등), 그리고 그를 비발디의 가장 두드러진 몇

가지 특징의 후계자로서 갖고 있는 분위기에 대한 뛰어난 감성에 대치(對置)시키고 있다. 5중주곡 판당고 무곡

Del Fandango은 분명히 민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마드리드 거리의 밤의 음악은 예외적으로 시대에 앞선 기법을 집약하고 있다.

이 곡은 조현(調絃) 중인 악기의 들쭉날쭉한 음에서 만들어졌으며 대중적인 전음이나 종교음악에의 회상으로 발전하여 궁중 무곡의 가장 순수한 전통에 속하는 강렬한 종결부로 이르는 것이다.

 

4중주곡 op. 13-5(1771)의 매혹적인 미뉴에트는 오랫동안 보케리니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여겨져 왔으며, 이것은 그에게 우아하고 연약한 이미지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가 대담하고 사회참여적인 작가이며, 이후 낭만주의 시대의 국민음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구자였음이 알려지고 있다.

 

 

 

 

 

 

보케리니는 이태리의 Lucca에서 성악가와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던 아버지 레오폴드 보케리니(Leopold Boccherini)의 일곱 자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나 아버지 밑에서 기초적인 작곡과 첼로를 배웠다. 1757년 공부를 위해 로마에 가 코렐리와 팔레스티나 음악을 접하고 감동을 받는다.

 

1761년 다시 루카로 돌아와 시 관현악단의 첼로주자로 일하며 당시 바이올린 주자였던 만프레디(Filippino Manfredi)와 같이 빈, 파리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다. 그들의 연주는 노래하듯한 아름다운 소리라는 반응을

얻으며,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얻는다.

 

두 음악가는 1769년 스페인의 Madrid로 갔고, 보케리니는 스페인 왕자의 후원을 받게되어 그를 위해 실내악 곡을

남긴다.

왕자의 죽음(1785년) 이후 그는 몇 년간 스페인 왕의 오르간 주자로 일하나 1787년부터 첼로를 연주했던 독일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밑에서 궁정작곡가란 칭호를 받으며 1797년까지

봉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궁핍한 환경에서 작곡생활을 하며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친다. 그의 유골은 1927년 출생지인

루카로 옮겨졌고 성 프란체스코(Francesco) 교회에 영예롭게 안치되었다.

  그의 작품양식은 전형적인 이태리 기악음악과 당대의 표현 양식을 보여준다.

 

그는 갈랑 양식의 선율과 비르투오스한 기법을 잘 융합하고 섬세한 다이내믹 기법을 살렸다. 그의 선율은 단순하고

 우아하면서도, 힘있고 격정적인 표현도 지니고있다.

그는 하이든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현악4중주 기법을이루었으며, 첼로 부분이 자주 테너 음역에서 부각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후기 현악 4중주는 오케스트라 적으로 확장되고 형식과 조성에서 비관습적인 어법을 보여준다.

 

그의 현악5중주는 특히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6개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Op.5(1768)는

주제적 소재가 두 악기의 성부에 균형 있게 분포되어 서로 대화하듯 진행한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널리 애호되었으나, 빈의 기악음악 양식의 발전과 이태리에서의 오페라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의 그늘에 가려져 잊혀지다 20세기에 들어와 올바른 평가를 받게되며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지고있다.

  그가 남긴 대략 400개에 이르는 작품은 소수의 오라토리오, 칸타타, 미사와 드라마 등의 성악곡을 제외하고 대부분

기악곡을 위해 썼다.

 

기악곡 중에서도 실내악을 위한 작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대략 30개의 심포니, 2개의

8중주, 16개의 6중주, 약 125개의 현악5중주, 18개의 풀룻 혹은 오보에 5중주, 6개의 피아노 5중주, 약 100개의 현악4중주, 약 50개의 현악3중주, 12개의 현악2중주, 6개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