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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Fryderyk Chopin - 4 Impromptus

 

 

 

 

 

 

 

 

  

4,1,2,3......순으로 연속듣기

 

 

1. No.1 in A flat major, Op.29 4'19

2. No.2 in F sharp major, Op.36 6'20

3. No.3 in G flat major, Op.51 5'48

4. No.4 in C sharp minor, Op.66 5'22

 

 

 

 

 

 

op.29

 

 

 

op.36

 

 

 

op.51

 

 

 

op.66

 

 

 

 

즉흥곡이란 오랜 구상 끝에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 스스로에게일어나는 순간적인 흥취에 따라 바로 써내려가는 곡을 말한다.

그렇다고 전혀 형식도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명확하게 정비된 형식을 취한다고 한다.

Chopin이 작곡한 4개의 즉흥곡 중 1번과 4번이 유명하다.

지금 연주되고있는 4번은 Op.66으로  오늘날에도 세상 모든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가장 유명하면서도

아름다운 피아노곡이다.

 

 

 

 

 

 

-감상을 돕기 위한 Chopin의 4대 즉흥곡(Impromptus)-

 

Impromptu No.1 in A-flat major Op.29

Allegro assai, quasi presto

 

Impromptu No.2 in F-sharp major Op.36

Andantino

 

Impromptu No.3 in G-flat major Op.51

Vivace

 

Fantasie-Impromptu (No.4) in c-sharp minor Op.66 

Allegro agitato

 

 

이 4곡중에서  4번에만 특별히 '환상(Fantasie)'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기는하지만 1번에도 흔히들 '환상

(Fantasie)'을  붙이기도 한다.

 

 

 

 

 

- 연주곡 해설 -

 

즉흥 환상곡 c#단조 op.66 세도막 형식

Fantasie-Impromptu (No.4) in c-sharp minor Op.66

 

1834년 Chopin이 파리에서 작곡한 매우 감미롭고 매력적인  곡이며, 생전에 그 자신이 애지중지하기로 유명했던

곡이다.

Chopin은 이 곡을 항상 악보 사이에 끼우고 다녔을 뿐 아니라  출판조차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는 에스테

부인에게  헌정하려고 착수한 곡이라 추측하고 있으며, Chopin의 사후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곡의 흐름이 매우 감미롭고 아름답다.

 

Chopin의 즉흥곡 4곡 중에서 그의 사후 가장 마지막에 출판되고 가장 랑받는 4번(op.66)이 실제로는 맨 먼저

 작곡되었다는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 곡은 Chopin의 나이 24세, 푸르기만 하던 청춘에 작곡하여 그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곡이었을 뿐 아니라 더구나

Chopin은 유언에서 그가 죽은 후 이 아름다운 곡을 파기해 주기를 바랬다고 한다.

 

너무나도 환상적인 음악이라서 "즉흥환상곡"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매혹적인

음악이 되었다.

 

이 곡은 세도막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리듬이 상이한 오른손과 왼손의 음형의 급속도에 의한 교합에서 생기는

일종의 환각적인 주부가 흥미롭다.

 

중간부는 내림D장조의 아름다운 칸타빌레 의 선율이 노래되고, 주부로 복귀한 다음, 코다에 이르러 중간부의 선율이

저음부로 회상되면서 곡을 마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즉흥곡(卽興曲, Impromptu)에 대한 한마디-

 

즉흥곡(卽興曲, Impromptu)은 즉흥적인 악상(樂想)을 소품(小品)형식으로 쓴 악곡을 말한다.

19세기 낭만파음악의 초기에 나타난 캐릭터 피스(character piece)라고 하는 피아노곡 종류의 하나로  즉흥곡이라는 이름처럼 대개 엄격한 구성적 작법을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기는 하지만  즉흥연주(卽興演奏, Improvisation)에

의하여 만들어진 곡과는 달리 정해진 형식을 지닌다고 한다.

캐릭터 피스(Character piece)란 19세기 피아노 음악 중 자유로운 형식의 소품곡을 뜻한다.

 

 

 

 

 

F. Chopin 의 즉흥 환상곡(Op.66)과 애국심

피아노곡으로 유명한 이 "즉흥 환상곡"은 우리 귀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곡으로, 1841년 노르망의 조르드 상드의

집에서 작곡한 환상곡이다.

 

쇼팽은 4개의 즉흥곡을 작곡하였으며 그 중 3곡은 생전에 출판되었고, 4번째 곡은 출판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아꼈기 때문에 사후에야 발표되었다.

1855년 친구 폰다나에 의하여 제명 "즉흥환상곡"으로 붙여졌다.

곡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날 사랑하는 상드와 다투고 쇼팽이 우울한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데, 상드와 화해시키려고 리스트와 플레이엘 부인이 찾아와 그들에게 불평을 호소하는 쇼팽 앞에서 상드는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쇼팽은 용서하여 준 뒤, 당시의 모든 환상을 작곡하였다도 하고, 테스테 부인에게 헌정하기

위하여 작곡하였다고도 한다.

즉흥곡이란 오랜 구상을 통하여 깊이 생각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즉석에서 그때의 기분을 일시적으로 써 내려가는

곡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잘 정돈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쇼팽의 즉흥곡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잘 정리된 형식을 취하여 그의 천재성을 나타낸다.

 

19세기 낭만파 음악의 초기에 나타난 캐릭터 피스라고 하는 곡종(曲種)의 하나로 엄격한 구성적 작법을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즉흥 연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곡과는 달리 정해진 형식을 지니고 있다.

<즉흥 환상곡>은 세도막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A-B-A' 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세도막 형식이란 처음과 끝부분은 거의 비슷하고 중간 부분에 새로운 느낌의 신선함이나 장중함을 부여하는 형식을 말한다.

 <즉흥 환상곡>에서 나오는 세도막 형식의 중간부분은 학창시절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불렀을 만큼 매우 감미롭고

매력적이다. 곡이 끝날 무렵에는 쓸러져가는 바람처럼 아득히 멀어진다.

쇼팽을 우리는 ‘피아노의 시인’ 이라고 불르지만, 쇼팽은 39년의 짧은 인생 동안 그는 작곡과 연주회에 전념한 정열의 음악가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러시아가 쇼팽의 조국인 폴란드를 침공한 후에,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가서, 연주회로 번 돈을 모두 조국을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가들의 지하자금으로 송금한 위대한 애국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폴란드를 사랑했던 쇼팽은 파리로 떠나올 때(1830년 20세), 조국의 흙 한 줌을 소중히 싸가지고 왔다.

쇼팽이 숨을 거두자 조국의 한줌 흙은 그의 시신 위아래에 뿌려졌고, 그의 묘비에는 “여기 파리 하늘 아래 그대가

잠들고 있으나, 그대는 영원히 조국 폴란드의 땅 위에서 잠들어 있노라.“라는 비문이 새겨졌다.

이 비문을 읽다보면 쇼팽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는 현재 프랑스 파리의 애국지사나 공이 큰 예술가들이 묻히는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페르라셰즈 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 중 하나로 파리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쇼팽이 즉흥환상곡을 그렇게 아껴서 유작으로 남게 하듯이, 조국의 흙 한줌을 20년간 간직하였다가, 그가 죽은 후에

자신의 무덤에 뿌려졌다.즉흥환상곡은 자신을사랑한 것이라면, 흙 한줌은 조국을 사랑했다는 것에 우리는 예술가

이전에, 그의 인간됨에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청각을 통해 가슴 속에 촬영되어 영원한 잔상을 남기는 예술이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과 <흙 한줌>은 이처럼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심금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북쪽 나라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연초 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그는 공장이 폐쇄된 후 스카르벡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 교사로 머물렀다.

 

그리고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둘째가 쇼팽이었다.

4세 때 피아노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 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았다.

 

 엘스너는 쇼팽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5세 때 그는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출판했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다음해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독주회를 열었다.

이때 슈만으로부터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는 극찬을 받음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쇼팽의 마음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여학생인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를 남몰래 사모하면서도 도저히 사랑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차라리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리라 마음먹고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살아있는 동안

두 번 다시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파리에 정착, 음악가로서 지휘를 굳혀 갔다. 26세 때 리스트의 소개로 쇼팽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진취적인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다. 그때 이미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쇼팽은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우는 6세 연상의 상드의 극진한 병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전념했다.

 

이들은 마요르카 섬에서 사랑의 공동 생활을 즐겼는데, 이곳에서 쇼팽의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주옥같은 명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쇼팽이 언제까지나 이러한 생활을 견딜 수는

없었나 보다.

그들의 공동 생활은 1846년 그의 나이 36세 때 끝이 났다.

 

 

그후 그는 생계를 위해 한때 그의 문하생이었던 스털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에 갔다가 기후가 몹시 나쁜 그곳에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병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결국 3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의 유해는 피에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유언에 따라 심장은 모국 폴란드의 바르샤바 성십자 교회에 안치되었다.

 쇼팽은 일생을 거의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나 예외로 만든 6개의 관현악곡, 3개의 소나타 역시 빛을 발하고 있고, 즉흥곡, 녹턴, 마주르카, 왈츠, 폴로네이즈 등은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다. 새로움이 가득한 그의 곡들을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정교함과 치밀한 악상을 독창적으로 사용한 쇼팽은 선배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자의 세계를 열고 음악의 세계에 군림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영원한 낭만파 피아니스트 조르쥬 상드의 무덤.

쇼팽에게 있어 가장 밝은 태양이었던 상드도 1876년 열정의 불꽃을 모두 다 사르고 여기에 묻힌다.

프랑스 중부 노앙 지방에 눈부시던 태양도 그녀의 주검 위에서는 슬며시 그 빛을 감추고 만다. 쇼팽은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작곡가입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낭만파 피아니스트이며 또 주로 피아노만을 위해 작곡했기 때문이죠.

더욱 이 매력적인 일은 쇼팽의 선율이 언제나 쉽게 이어지면서도 매우 풍부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연주자들한테는

그의 피아노 곡이 아주 사랑받는 곡입니다.

 

마치 바이얼 인이나 첼로같은 악기를 다루거나 또는 노래를 부르듯이 연주할 수 있습니다.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많은 곡을 썼습니다.

그러나 연주를 하는 데에는 많은 기교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24개의 연습곡은 각각 기술적 난점이 있죠. 물론 모두 아름답지만요.

 

결국 훌륭한 연주자라면 기교의 어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그 외에도 쇼팽의 녹턴이라든가 또 세계적으로 이름난 왈츠곡들을 남긴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모두가 연주하기에는 어려운 작품들입니다.

 

한 마디로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서 쇼팽을 말하자면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사랑하고 선호하면서도 연주하기에는

가장 어려운 음악가 중에 한 사람입니다.

임종, "불쌍한 나의 어머니!" 스카르 도를레아.

 

안뜰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두 개의 건물이 바로 노앙을 떠나 파리로 온 쇼팽과 상드가 별거 아닌 별거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

쇼팽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 졌고, 새벽녘에 시작한 기침은 반나절 이상이나 계속됐다가 그칠 정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상드는 그의 병간호로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두 건물에서 마주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뜰에서는가끔씩 쇼팽의 즉흥 연주회가 열리곤 했다. 발자크, 하이네같은 문인들이 이 연주회의 초대 손님으로 자리를 빛냈다. 상드와의 사랑도 마침내 파국을 맞이한다.

상드의 딸을 둘러싸고 생긴 미묘한 감정대립으로 끝내 아픈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상드 곁을 떠난 뒤 사랑에의 목마름과 심각한 폐결핵으로 햇빛을 그리워한 쇼팽은 이곳 프라스 방동으로 거처를 옮긴지 다섯 달만에 햇살 잘드는 2층 방에서 서른아홉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 쇼팽이 불러본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 "였을 뿐이다 .

마들레느 성당. 쇼팽의 장래식이 거행된 곳이다.

 

성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아래로 멀리 보이는 길 저 끝까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행렬로 가득 메워져 있다.

자신의 <장송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프레드릭 쇼팽은 영원한 안식 속에 잠들었다.

그의 죽음은 음악을 이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크나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고이 잠드소서.

 

눈물처럼 순수했던 영혼이여! 우리는 지금 그대를 위해 울지만 그대는 우리를 위해 위안의 선율을 남기고 떠났는가?

그대의 슬픈 생각이 끝난 뒤에 고귀한 예술은 더욱 그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