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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aurice Ravel-Bolero - / Yvan Guilini

 


 




 

Maurice Ravel-Bolero - / Yvan Guilini

 

 

 



 

 

 

볼레로(Boléro)는 라벨이 전위적인 무용가인 루빈스타인(Ida Rubinstein)으로부터 스페인 풍의 무용에 쓸 음악을

위촉받고, 1928년 10월에 완성했다. 같은 11월 28일,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루빈스타인 발레단에 의해 초연된

이 곡은 스페인 무곡이지만 리듬이나 템포가 본래의 볼레로와는 다르다.

 

3개의 색소폰이 사용되어 진기한 편성을 보이는데, 작은 북, 비올라, 첼로의 피치카토로 독특한 리듬을 새긴 후 C 장조의 밝고 쾌활한 주제가 이 리듬을 타고 들려온다.

이 주제는 두 도막 형식으로 악기를 바꾸면서 반복되고, 이 주제에 응답하는 듯한 형태로 또 하나의 주제가 연주된다.

 

즉 이 곡은 하나의 흐름결꼴과 두 개의 주제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며, 가장 작은 소리에서 가장 큰 소리로

변화하는 '크레센도'(cresendo)만 사용되는 특이한 작품이다.

라벨 볼레로의 특징은 철저한 계산하에 두 개의 주제만이 연속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엔 리듬 주제가 2회 피 아니시모로 매우 여리게연주되고 주제가락 A와 B가 각각 2회씩 악기를 바꾸어 가며 점점 강하게

연주된다.

 

첫 주제가 악기를 바꾸면서 반복 되면 이 주제에 응답하는 형태로 또 하나의 주제가 뒤따르며 그 사이마다 볼레로 리듬이 두 마디씩 끼어들고있다.

이것이 통틀어 4회 반복된 후 마지막으로 A가 한 번 연주된 후 리듬이 나오고 비로소 B가 변형된다.

 

한 조의 주제가 동일한 리듬을 따르면서 조바꿈도 변주도 되지 않고 단 지 악기 편성을 바꾸면서 고조되고 반복되는

악곡은 그대로 진행되고 가장 작은 소리에서 가장 큰 소리로 변화하는 크레센도만 사용 되는데 끝 두 마디에

이르러서야 조바꿈이 일어나 장대한 절정부로 마무리 된다.

 

 

 

 

 

 

 

 

I. 라벨의 생애와 예술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1875년 3월 7일, 프랑스의 서남단인 바스-피레네지역의 생 쟝-드-뤼쯔 근처 씨부르에서 스위스계인 아버지와 바스크계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장남인 모리스가 출생한 지 몇 개월 후에 그의 부모는 파리로 이주했으며, 그 후로 라벨의 성장과 음악교육은 모두 파리에서 이루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파리 못지 않게 외가 쪽인 바스크 지방을 자신의 정신적인 고향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의

음악을 통해서 증명된다.

라벨의 음악은 독보적인 양식으로 인해 사랑받고 있으며, 그의 면밀한 장인의 솜씨는 동시대의 작곡가들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라벨의 천재적인 재능은 피아노 음악에서의 새로운 기법, 관현악법, 재치있는 화성 그리고 형식에 관한 대담하고도 성공적인 시도 등을 통해서 입증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원동력은 그의 어린이와 동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이국적인 상상력과 고풍스런 생활에 대한 사랑에 있다. 특히 라벨의 음악이 이러한 내용을 담고있을 때, 그의

 음악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또한 그는 지휘자로서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도 활약했다.
라벨은 자신의 피아노곡을 직접 연주하는 작곡가로서 외국으로 연주여행을 많이 다녔으며, 1928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1920년에 프랑스의 국민훈장 수훈자 명단에 올랐을 때 그는 이 영예를 거절했는데, 이것은 라벨을

 로마대상의 경연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했던 그 당시의 관료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실제로 라벨은 이미 상당히 존경받는 작곡가였고, 그의 개성있고 성숙한 기법은 프랑스 음악계에서 인정받고 있었지만,
그 당시 음악원의 권위주의는 계속 그에게 아카데믹한 자세를 요구했고, 따라서 그는 로마대상에서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라벨의 예술성은 그가 교류했던 아방가르드 시인, 화가, 음악가 등으로 인해 자극받았고 이를 통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 예술인들은 세상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전부터 이미 그의 재능을 믿고 있었는데, 예술가 동맹의 상징인 이 젊은

집단을 그들 자신은 "아빠슈(Apaches:깡패)"라고 불렀다.

이동맹에는 팔랴, 슈미트, 들라쥬 등의 음악인을 비롯해서 시인인 파르그아 라벨의<세헤라자드>의 가사를 쓴 클링조,
그리고 화가인 소르테 등이 소속돼 있었다.

젊은 작곡가에게는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매우 고무적이었으며, 지적인 경험이 넓혀질수록
그의 음악세계는 성숙해 갔다. 그들은 중국 미술, 말라르메와 베르렌느, 랭보 그리고 세잔느와 고흐, 라모와 쇼팽,
휘슬러와 발레리 그리고 러시아인들과 드뷔시에 대해서도 똑같이 심취할 정도로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 그의 음악은 평론가들에게서 비난을 받았지만, 그의 음악만이 갖는 독특한 개성을 그와 어울리는 예술인들이
인정하게 되고, 그들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그는 유명해지게 되었다.

라벨은 20세기의 뛰어난 피아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음악사에 자리잡았다.

드뷔시가 쇼팽의 정신적 후계자라면 라벨은 리스트의 유산을 계승했다.

 

또한 라벨은 프랑스 예술가곡의 대가였다.

그는 40여개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초창기의 작품은 전통적인 서정적 가곡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과거와 동양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의 독자적인 양식은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 외에도 성악과 관현악을 위한 곡과 성악과 실내악을 위한 곡 등 20세기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다양한 구성에 나타나 있다.

 

그의 음악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관현악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의 관현악법이 보여주는 훌륭함은 19세기의 작곡가들, 특히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리고

베를리오즈와 샤브리에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라벨의 관현악법은 회화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빛의 고조와 음의 고조는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라벨은 1928년에 불행하게 당한 자동차 충돌사고로 두뇌질환의 후유증과 부분적인 기억상실증을 얻게 되었다.
1937년에 상태가 악화되어 뇌수술을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한 그는 그 해 12월 28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듀랑과 에슁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생전에 출판되지 못한 많은 작품들은 1975년에 라벨 탄생

1백 주년을 기념하여 살라베르&A.R.I.M.A에 의해 출판되었다.

 

 

 

 

 

 


 



1. 라벨의 음악: 선율, 화성 그리고 조성

그의 음악에서 선율의 흐름은 인지하기 쉽고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예술가곡에 담겨있는 선율들은 성악적이기보다는 서술적이며, 풍부한 색채의 반주 위에서 말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한다.

라벨의 양식은 그의 일생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1913년에 <말라르메의 세 편의 시>를 작곡한 시기부터는

기악적인 선율의 사용이 시도되기도 했다.

또한 라벨의 선율에서는 특히 프리지안 선법(미 선법)이 자주 사용되었다. 장조는 다른 모드와 동등한 성격을 가질 뿐
더 이상의 특권이 없다.

따라서 장조에서는 이끔음이 으뜸음에 도달해야 하는 의무가 없으며, 또한 단조에서는 이끔음을 화성적으로 만들어줄

의무가 없다.

 

 그는 단순히 중세 단성가의 영향뿐 아니라 솔렘악파의 다성적 기술도 연마한 것으로 보인다.
라벨은 선법적인 선율과 온음계적인 화성 사이의 대조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선율적으로는 프리지안 선법을
사용했더라도 화성적으로는 전통을 따른 예가 많다.

불협화음의 사용에 있어서 드뷔시가 조심스럽게 포장된 불협화음을 사용했더라면, 라벨은 날카롭고 딱딱한 표현의 불협화음을 그대로 선택했다.

 <박물지 Histories naturelles>의 두 번째 곡인 <귀뚜라미 Le Grillon>에서 보이듯이 증5도를 포함하는 화성은
드뷔시의 음악과 라벨의 언어를 구분 짓는 대표적인 화성이다.

 

라벨의 음악에 있어서 이 화성은 거의 대부분 자연적 11화음(솔-시-레-파-라-도#)으로 사용된다.

라벨의 화성어법 중 많은 것들이 반음계적 경과음과 전타음으로 이해되며 라벨의 감성은 상당부분이 전타음을 전제로

분석될 수 있다.


3화음의 사용은 다소 복잡해진 듯하다. 간단한 예로 <다프니스와 클로에> 중 <일반의 춤>의 음계적 패시지나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중 1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처럼 3화음의 강조가 미미하게 나타난다.

 같은 원칙이 발전된주제적 패턴에서도 응용되는데, 개별적 화성은 조성보다는 음색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화성의 방향이 화음의 자리바꿈이나 선법에 있어서 때때로 불규칙성을 띤다.

해결이 없는 화성적 긴장은 <정면 Frontispice>을 마무리하는 음형(다섯 개의 반복되는 화음)

에서 일어난다. <쿠프랭의 무덤 Le tombeau de Couperin>중 제5번<미뉴에트 Menuett>에서 나오는 <뮈제트

Musette>는 병행화음이 선법적인 요소와 온음계적인 요소의 전형적인 대립사이에서 유동적으로 사용되는 예를

보여준다.

라벨의 화성어법의 많은 부분은 사실상 거짓 옥타브나 불협화성으로 해결되는 반음계적 경과음과 전타음의 내용으로

이해된다.

불협화음이나 어울리지 않는 화성의 돌발적인 배치에 관한 처리는 비교적 자유롭다.
조성에 대한 라벨의 감각 또한 드뷔시의 그것보다 확고하고, 따라서 화성의 움직임도 명확한 윤곽을 보인다.

라벨은 분명한 조적 영역 안에서,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따라 그의 환상과 시도를 실천했다.
음악적 기법에 관해서는 5음 음계의 사용, 그리고 중세 선법과 이국적인 리듬 등이 드뷔시와 기호를 같이 나눈다고
볼 수 있으나, 라벨은 5음 음계의 경우에도 이 음계가 지나치게 동적이고 안정적이지 않아 확실한 조성을 확립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라벨의 조성적 내용은 다양하다. 

 단일조성은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의 제7곡인 삼중주 부분의 토대가 되고 있다.
반면에 일반 화성을 통한 삼중조성적 대조는 <세헤라자드>의 서곡과 <물의 장난> 그리고 <왼손을 위한 협주곡>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이중조성을 사용할 경우에는 뚜렷하고 독립적인 각 조성들의 효과가 특징적인데, 예를 들어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 <어린이와 마술사들>과 같은 전쟁 후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내용은 괄목할 만하다.

 


대체로 라벨은 온음계적 어법에 어울리는 전통적인 모델을 유지시켜왔다. 3부분 형식과 소나타형식의 사용은 일반적으로
그가 갖고있던 전통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다만 이러한 것들이 너무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에서는 그 윤곽을 적당히 위장했을 뿐이다. 큰 규모의 작품에서는

그의 극적인 형식을 다루는 솜씨가 확신에 차 있다.

 

 

 



2. 음악어법

현존하는 라벨의 초기 친필악보에는 그가 단일반주음형의 단조로운 반복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하바네라>에서 그가 사용한 소재는 개성적인 오스티나토(지속음형)로 구성된 스페인 리듬의 페달음이며,
이것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도 이전에 보여주었던 모든 것을 능가하는 세련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반복되는 딸림음 C#은 하나의 견고한 개채(대상)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 음의 반음 위보조와 아래보조인 B#과 D의 화음들은결코 조용한 화성을 만들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후에 보여질 클러스터기법이 선보인다.

 

라벨이 이 곡에서프리지안 선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의 화성은 전통적으로 온음계적인 내용을 갖는다.

스페인의 민속음악에서 딸림음이 보여주는 준으뜸음(Quasi-tonic)은 지속적인 페달음 위에 준네아폴리탄 6화음으로

 사용된 라벨의 클러스터를 설명해준다.

프리지안 선법의 억양은 라벨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스페인적인 특성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볼레로>의 음조에서도

나타난다.
반복음의 사용은 라벨의 양식상의 특징이며, 특히 피아노음악<거울>과 <밤의 가스파르>에서 그러한 면이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초기에 라벨의 화성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성은 병행화음을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라벨의 음악에서 비근하게 사용되는 이러한 진행은 모든 금지된 연속음정의 진행과 더불어 로마대상에 출품한 <새벽>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음악어법의 확고한 특징이 된다.

 

이 점에 관해-특히 9도와 11도 화음을 도입했다는 점과 더불어- 단일조성에서는 사티와 샤브리에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종소리 사이에서>는 1890년대의 라벨의 음악을 요약해서 파악할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작품인데,
병행화음은 미묘한 화성진행을 유지시키기 위해 오스티나토 음형으로 사용되면서 이중조성을 선보인다.

라벨이 자유롭게 구사한 이 화음진행은 순수함을 표현하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후에 이러한 순수함은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를 예상시키는 1905년 작 <장난감들의 성탄절>의 병행 화음에서 더욱 세심하게 처리된다.

보다 더 발전된 화음의 진행에 앞서, 라벨이 초기에 사용한 병행8도를 언급하는 것이 당연하다. 쿠퍼가 지적했듯이
비록 푸치니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짝을 이뤄 진행하는 예에 관해서는 샤브리에의
영향을 언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불협화적인 화음의 병행은 명백한 음색적인 효과를 갖는다. 라벨의 음악에서 가장 전형적인 화성은 감8도의 사용으로,

이 음적은 모든 종류의 화성결합에서 나타난다.

 

연속적인 화음진행은 특징적인 화성진행, 특별히 으뜸음-딸림음-내려진 이끔음-버금딸림음으로 요약되는 화성진행

안에서 강조된다.

라벨은 4도와 5도의 꾸밈없는 오르가눔과 연속적인 화음진행의 다양한 사용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종소리 사이에서> 외에도 <영혼의 롱사르>에서는 특별한 표제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오르가눔을 사용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와 마술사들>에서 사용되는 불규칙한 박자로 처리된 4도의 병진행은 정처없이 배회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프랑스 시부르의 한 작은 마을에 위치한 라벨의 생가

 

 



3. 관현악법

편곡은 라벨의 작품활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다.

그는 민요에 화성을 붙이거나 이를 편곡했으며, 그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즐겨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라벨은 그의 창의적인 영감을 끊임없이 축적시켰다.

그는 특히 쇼팽, 슈만, 무소르그스키, 샤브리에, 사티 그리고 드뷔시의 작품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는데, 이들은 주로

발레음악을 위해 사용되었다.
1889년에 라벨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지휘하는 <스페인 카프리치오>의 연주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에 각 악기의 음색을 존중하고 이를 균형있게 결합시키는 러시아적인 기술을 받아들였다.

각각의 악기가 지니고 있는 잠재력에 대한 라벨의 날카로운 식견은 관현악 편곡에 대한 높은 안목을 심어주었으며 독창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라벨은 악기의 테크닉에 흥미를 보였는데, 그러나 그것은 연주가의 입장에서였다기보다는 작곡가의 입장에서였다고 하는 편이 옳다.
라벨은 드뷔시와는 오케스트라의 악장에게서나 필요할 것 같은 연주적인 기교를 각 악기들에게도 서슴없이 요구했다.
1909년에는 드뷔시의 <야상곡>을 네 손을 위한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여 출판했으며,
1910년에는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역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편곡해서 출판했다.

이 작품들은 라벨 자신이 직접 연주했는데, 출발에서부터 음악비평 란에 실리면서 주목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은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13년, 라벨이 스트라빈스키와 함께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삐에로>를 접하던 그 시기에 이들은 무소르그스키의 관현악곡 <코반치나>의 여러 부분을 재편성했는데,

이것이 출판되지는 않았다.

또한 같은 해에 사티의 <별의 아들의 전주곡>이, 그리고 1914년에 슈만의 <사육제>가 니진스키(발레안무가)르르 위해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었으나, 이 곡은 라벨 탄생 1백주년이 되는 197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라벨 자신의 피아노곡들도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었는데, 이러한 곡들은 원곡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라벨의 관현악법에 관해서는 스트라빈스키도 높이 평가하며 이미 "악기 감식 전문가"로 예찬한 바 있으며, 근대 음악사에서는 그를 위대한 관현악 작곡가의한 사람으로 손꼽는다.

 

 

 

 

 


라벨이 생의 말년을 보냈던 프랑스 몽포르-라모리의 저택

 

 



4. 라벨의 양식

라벨의 음악에서 그의 개성을 만들어주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는 스페인의 정서, 춤곡의 성격 그리고 환상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첫째로 스페인의 정서는 사실상 프랑스 음악에서 이미 비제의 카르멘(1875년)과 샤브리에의 스페인(1883년)에 의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라벨의 음악에 있어서 이 요소는 절대적인 근본이 된다. 그의 첫 번째 중요한 작품인 <하바네라>와
마지막 작품 <둘씨네의 돈 키호테>는 모두 스페인의 정서를 담고있는 곡들로, 그의 작품활동에서 시작과 끝을 이루는

작품들이다.

둘째로 라벨의 음악에는 춤곡의 성격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스페인의 영향을 드러내는 작품들 중에서도 이미 부분적

으로는 춤곡의 내용을 보여주는데, 그의 춤곡에 관한 이러한 성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는 <쿠프랭의 무덤>에서처럼 옛 시대의 무곡 특별히 프랑스의 무곡을 통해 17~18세기의 분위기를

재현하고 있다.

또 다른 경우로는, 라벨이 여러 차례에 걸쳐 슈베르트와 빈에 경의를 표하며 보여준 왈츠에 대한 애정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의 영향으로 그 당시의 폭스-트로트(fox-trot)와 블루스 그리고 래그타임(rag-time) 등에 관심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라벨의 음악에서 중요한 요소는 환상에 대한 그의 기호로, 이것은 그의 천진난만한 어릴적 동화의 세계와
그리스 신화 그리고 동양의 전설에 대해 그가 느끼고 표현하고자 한 매력들이다.
라벨의 기법은 좀 특이하여 음악적 대상을 교묘하게 확장시키면서 다루었는데, 라벨은 이점에 있어서 선각자였다.

하나의 음악적 대상은 그 자체로도 충분하게 음악적 요소를 보여주기 때문에 주제와 관련된 기능적 역할과는 무관하다.
라벨이 애태운 예술적인 관심은 '대상 그 자체'에 대한 탐구, 조용하게 마음에 떠오르는 음악적인 상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종종 보들레르의 감각과 통하는 시적이고 극적인 개념과도 충분히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열정보다는 상상력에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라벨의 모든 음악적 대상은 아름답고 견고하게 조각된 느낌을 준다.

라벨이 작은 스케일 구조를 사용했거나 혹은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것은, 관찰자로 하여금 그를 작고 세밀한 것에 집착하는 섬세한 화가가 되게 한다.

기계적인 라벨의 경향, 예를 들면 작은 입상이나 태엽장치된 장난감에 대한 맹목적인 선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향으로, 라벨을 표현한 스트라빈스키의 유명한 묘사 "스위스 시계공"은 이러한 점을 잘 대변해준다. 라벨의 양식은
고풍스럽거나 혹은 이국적인 음계를 암시하는 선법을 사용하고, 바로크 양식 혹은 민족적인 양식의 특징들을 응용하며,
또는 특정한 양식을 모방하거나 발전시키는 등 다양한 내용을 갖고 있다.

동시대의 중요한 작곡가들은 조성과 장단음계를 벗어나는 데 동의했다. 조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던 시기에 라벨은
전통적인 온음계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가 화서에 있어서 개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화성에 대해 인정하거나
배척하는 그의 기호는 스트라빈스키와 비교해볼 때, 융통성이 없고 독단적이었다.

라벨의 예술작품은 그 어떤 작은 부분이라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없는 성숙한 생각을 통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장켈레비치는 "즉흥적인 양식에서조차도 스타일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고 설명했다.

인상주의는 그 당시의 화가와 시인 그리고 음악가를 지배한 미학으로, 모네의 두 번째 시리즈 <수련>과 드뷔시의

 <영상> 그리고 라벨의 <거울>은 때를 같이한다. 마치 시간을 정지시키는 듯, 순간을 포착하는 모네의 그림은 순간의

감흥을 표현하려는 드뷔시를 만족시켰다.

 

그러나 이 인상주의에 관한 한, 드뷔시는 모네와 의견을 같이했다는 점에서 라벨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라벨이 표현했던 자연은, 그것이 인간의 감성에 미친 영향의 측면에서 고려해볼 때, 결코 충분하게 그려지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도 표현력의 결여는 없으며, 단지 감수성을 어린 아이의 순박함으로부터 차용했다.
라벨이 갖고 있는 매력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의 하나는 그가 음악적인 미세함을 표현하는 대가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감정범위는 제한적이어서, <소나티네>에서처럼 세밀한 것을 표현하거나
<엄마거위>에서처럼 유년기를 재창조하는 천진난만한 즐거움 등에 국한되어 있따.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곡들에서,
<왼손을 위한 협주곡>에서처럼 큰 스케일의 형식과 라벨의 성숙한 의식을 발견하기도 한다.

라벨의 피아노 작품에서는 세 가지의 뚜렷한 영향이 발견된다.

샤브리에는 특별히 스페인적인 음악에서 그의 탁월함을 보여주었는데, 라벨의 <하바네라>는 샤브리에의 동일한 제목의 피아노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광대의 기상나팔>은 샤브리에의 <스페인>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감상적이고 우아한 왈츠>를 작곡할 당시에는 <세 편의 낭만적인 왈츠>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박물지>의 피아노 반주에서 역시 샤브리에의 유사한 음악의 피아노 반주로부터 받은 영햐이 한층 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라벨의 <고풍스런 미뉴에트>는 1918년에 라벨이 편곡한 샤브리에의 <장중한 미뉴에트>와 쌍둥이라고

평가되며, 라벨이 <난장이>를 작곡할 때에도 그의 <환상적인 부레>를 마음 속의 모델로 설정해 놓았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또 다른 모델로서, 그리고 항상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리스트였다. 라벨은 바그너를 싫어했던 반면 리스트에게는
찬사를 보냈다.

이들 작곡가들이 모두 명연주가의 열정을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벨은 리스트적인 관점을 선택했다.
라벨은 마지막으로 바로크 건반음악 작곡가들에게서 고풍스런 모델을 배웠다. 그는 <쿠프랭의 무덤>의 준비작업으로
쿠프랭의 <포를란느>를 옮겨 적었다.

 

 

 

 

 

 

 

 

 

 


 

 

 

 

 

 

 

 

 

 

 

 

 

 

 

 

5. 라벨과 드뷔시

라벨과 드뷔시의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격조있고 우아하고 섬세한 세계를 추구했으며,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세계를
동경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벨이 사용했던 중세 선법음계와 이국적 음악은 드뷔시와 동질성을 보인다.

 


두 사람은 모두 이국적인 리듬, 특히 스페인의 무곡리듬에 매료되어 있었고, 또한 환상적인 것, 고풍스러운 것
그리고 옛 프랑스의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의 음악을 작곡했던 음악가들을 사랑했다.

 

 

라벨은 드뷔시가 라모에게 했던 것처럼 쿠프랭을 존경했으며, 빠른 연주의 생기발랄함과 유창함이 가득한 그의 피아노

음악의 스타일은 18세기 프랑스 하프시코드 연주자들의 스타일과 흡사하다는 평을 받는다.

프랑스적인 감수성을 구현한 이들 모두는 정교하고 색채를 띤 시구를 쓰는 상징주의 시인들을 좋아했고 그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또한 프랑스어에 음악을 붙이는 재능이 뛰어났으며, 19세기를 대표했던 음악의 열정보다는 심미적인 즐거움을 예찬했다. 문학적인 요소는 프랑스 음악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라벨의 상상력은-드뷔시도 그렇지만-항상 회화적인 시적 주제에 응답한다. 회화적인 주제 이외에도 라벨의 음악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주제는 유머로, 그에게 있어서 유머는 그 자신도

인정한 정교하고 우아하고 시적인 양식이다.

반면, 이들의 음악은 대조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

라벨의 음악을 한낮의 광채로 표현한다면 드뷔시의 음악은 황혼의 부드러움으로 표현된다.

라벨의 음악은 형식에 관해서는 전통적인 관습을 따르며, 선율은 보다 폭이 넓고 직접적이다.

드뷔시가 주제발전에 소극적이었다면 라벨은 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었다.

짜임새에 있어서 드뷔시가 수직적인 음향에 이끌렸다면, 라벨은 수평적인 흐름의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었다.
라벨도 회화적인 음향과 물의 소리 그리고 예민한 관현악법을 추구하는 인상주의자들과 열정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라벨이 비록 드뷔시의 인상주의의 한 부분에 동참했다고 하더라도, 미학과 기법에서의 차이 또한 동질성만큼이나
현저하다.

라벨의 음악은 드뷔시의 그것보다 리듬이 더 날카로우며, 활기와 추진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드뷔시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분위기보다는 박진감이 넘치는 음악을 만든다. 어렵풋하면서 몽롱한 드뷔시의

세계는 정확하고 분명한 라벨의 세계와 대조를 보인다.

 

 드뷔시가 감각적이라면 라벨은 보다 지적이다.

드뷔시의 감정이 외향적으로 드러났다면 라벨의 감정은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에서처럼 라벨의 감정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평온한 가운데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감정의 노출이 강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다만 이를 위해서도 감정의 표현은 점잖고 조심성 많은 작곡가 특유의 개성에 의해 절제되어 나타난다.
라벨의 몇 안되는 제자들 중에서 창작활동을 주목할 만한 사람은 들라쥬(Delage), 윌리엄스(Vaughan Williams),
롤랑-마뉘엘(Claude Roland-Manuel)이다.

 

그들은 스승을 모방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라벨 자신이 이미 대단한 모방자였고, 그러면서도 그의

 음악은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곡가로서의 그의 전적은 20세기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음악적인 객관성의 선창자로서 라벨은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번창했던 반낭만주의와 스트라빈스키가 나아가야 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한 때>의 시작부분에서처럼 그의 기계적인 정확성과 완벽함에 대한 열정은 리게티(Gyorgy Ligeti),
릴레이(Rileye)등 후대의 작곡가들을 예고한다. 

 

 

 

 




라벨의 음악공부와 초기작품

철도 기술자였던 라벨의 아버지는 한 때 음악가가 될 뜻을 품을 정도로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으며,
라벨은 그런 아버지의 음악적 소질과 예술적 감성을 물려받았다. 일찍이 아들의 음악성을 발견한 아버지의 영향
아래에서 라벨은 이미 1882년, 6세 때부터 귀(Henri Guys)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1887년 르네의 문하에서 화성학과 대위법 그리고 작곡을 공부했으며,
2년 후인 1889년, 그의 나이 14세때 파리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화성학을 각각 베리오와 쁘사르에게서

배웠다.

입학한 해에 라벨은 드콩브의 제자들과 가진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으로 첫 공개연주를 했는데,
이때 이미 유능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학기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화성학 강의에서
제적당하고 피아노 시험도 통과하지 못해서 1895년에 음악원을 떠났다가, 2년 후인 23세에 재등록했다.

결국 파리국립음악원에서 라벨이 보낸 기간은 총 16년이나 되며, 그것은 다른 작곡가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긴 견습기간이었다.
음악원에 입학한 해인 1889년에는 라벨에게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파리만국박람회로, 여기서 라벨은 자바의 가믈란음악을 접하게 된다.

이 음악의 이국적인 음계와 음색은라벨뿐 아니라 드뷔시를 비롯한 다른 프랑스 작곡가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또한 드뷔시, 샤브리에, 사티 그리고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같은 당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들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 시절의 라벨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음악가로는 스페인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비녜스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작곡가로서의 라벨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했던 사람들이다.

라벨은 비녜스를 통해 탐구정신을 경험했고, 샤브리에에게서는 프랑스의 전통에 추가되는 스페인의 정서를

전수받았으며, 사티에게서는 새로운 화성법의 가능성을 배웠고, 림스키-코르사코프를 통해서는 관현악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드뷔시에게서는 철저한 애국주의를 본받았다.
1893년, 라벨이 샤브리에 그리고 사티와 가진 개인적인 만남은 그의 초기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며,
이는 1895년 이전의 작품 즉, 라벨이 파리국립음악원을 떠나기 전까지의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샤브리에로부터 영감을 받은 피아노곡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1893년)와 사티의 영향 아래서
마레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죽은 사랑스런 여왕의 발라드>(1894년)가 있다.

1895년,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이미 작곡가의 스타일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 해에 작곡한 작품으로는 뒤파르끄의

<애가>를 연상시키는 베를렌느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어둡고 거대한 잠>과 피아노곡 <고풍스런 미뉴에트>,
그리고 라벨의 양식과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인 <하바네라>가 있다.

 

이들 중 마지막 곡인 <하바네라>는 드뷔시보다 앞서서 독특한 스페인 춤곡의 리듬을 사용한 작품으로, 후에 그의

관현악곡 <스페인 광시곡>(1907~08)의 3악장으로 편곡되어 1930년에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기도 했다.

특히 음악적인 내용으로 볼 때에, 이 작품의 여러 요소들은 그가 1918년에 러시아의 발레를 위해 관현악으로
편곡(1937년 출판)한 샤브리에의 <화려한 미뉴에트>를 본받은 것이며, 화성적으로는 라벨 고유의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해인 1896년에 라벨은 두 개의 가곡-말라르메의 시에 곡을 붙인 <성녀>와 미로의 시에 곡을 붙인
<에스피넷뜨를 연주하는 안느>-을 계속해서 작곡했다.

 이들 중 <에스피넷뜨를 연주하는 안느>는 작곡가들이 16세기 후반 르네상스의 7인의 시인들의 작품을 음악으로

 사용한 출발점이 된 곡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상징주의에 심취된 심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인 <마로의 두 편의 경구>(1899년)의 두 번째 곡에 속하게 된다.
1897년, 다시 음악원으로 돌아간 라벨은 포레에게서 작곡을, 그리고 제달쥬에게서는 대위법과 푸가 그리고 관현악법을 배웠다.

이들 스승은 라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와 예술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은-라벨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그의 음악세계를 완성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작곡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도전의 시기로 평가되는데, 특히 대담성과 불확실성이 혼합된 양상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이러한 성격의 그의 학구적인 작품들의 특징으로 남아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1897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종소리 사이에서>(1897년), 르꽁뜨 드 릴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곡 <물레의 노래>(1897년)와 베르아에렁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곡 <서글픔이여!>(1898년), 그리고 관현악곡 <세헤라자드,

환상적 서곡>(1898)이 있다.

이들 중 <세헤라자드, 환상적 서곡>은 23세의 라벨이 갖고 있던 관현악법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으로,
젊은 작곡가가 신봉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리고 <종소리 사이에서>는
이미 1895년에 작곡된 <하바네라>와 함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 <귀로 듣는 풍경>으로 완성된다.

또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는 작곡가가 이듬해에 작곡할 첫번째 관현악곡인 < 세헤라자드,환상적 서곡>을 예견하고 있으며, 특히 라벨이 1914년 그의 스승 제달쥬에게 헌정한 피아노 삼중주를 예시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1899년에 이르자 라벨의 음악에서는 종종 고풍스런 소재의 처리가 자신감 있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 마로의 시에 곡을 붙인 <나를 눈 속에 던진 안느>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등이 세상에 소개되었다.

나중 곡은 그 당시 라벨이 드나들던 살롱의 여주인 폴리냑 대공부인을 위해 만든 작품으로, 작곡가는 젊은 공주가
한 때 스페인의 궁전에서 추었을 파반느를 회상하면서 이를 작곡했다.
또한 이 작품은 1910년에 작은 관현악곡(플루트2, 클라리넷2, 파곳2, 호른2, 오보에1,하프1,현악기)으로 편곡되어,
1911년에 카젤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라벨 자신은 이 작품을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샤브리에로부터 지나친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1897년 이후는 그가 작곡가로서 경력을 쌓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로, 그의 음악들은 이때부터 연주회장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작곡가로서 청중과 처음 만난 것은 1898년 3월 5일에 연주된 <귀로 듣는 풍경>을 통해서였으며,
이 곡은 청중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같은 해 4월에 <고풍스런 미뉴에트>가 비녜스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1899년 5월에는 라벨 자신의 지휘로

<세헤라자드, 환상적 서곡>이 초연되었다.
이들 연주회는 비평가와 대중으로부터 좋은 평을 얻지 못했으며, 마지막 곡인 관현악곡에는 '어설픈 표절'이라는 평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드뷔시는 <하바네라>에 대해 흥미를 보였고, 라벨 역시 자신의 음악에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특히 작곡가로서의 경력이 출판 목록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고풍스런 미뉴에트>는 1898년 에노흐에 의해서,
그리고 <마로의 두 편의 경구>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1900년 드메에 의해서 각각 출판되었다.

그가 음악원에서 보낸 16년은 그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으며,  영향은 그의 작품에 폭넓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스승 포레의 가르침과 독려가 그에게 준 영향은 그가 이어서 작곡한 피아노곡 <물의 장난>(1901년)과
<현악4중주 F장조>(1902~03년)가 헌정된 스승의 이름을 통해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1901년에 라벨은-비록 1900년에는 예선에서도 실패를 했지만-로마 대상에서 칸타타로 2위에 입상했다.
이 칸타타는 오페라적인 감성이 담겨있는 작품으로, 그 드라마틱한 요소가 이런 종류의 음악의 대가였던 마스네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게 했다. 또한 이 해에 작곡한 피아노 곡 <물의 장난>은 이듬해에 비녜스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20세기의 피아노 연주법에 새로운 장을 연 이 작품은 "피아노의 고음에서 독창적인 음향을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랑하는 선생님 가브리엘 포레에게' 헌정된 이 곡에 대해 작곡가 자신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작품 안에는 내 미래의 작품에서 발견될 피아노곡을 위한 작곡법의 모든 아이디어가 담겨있다."

특히 코르토는 "라벨은 피아니스트의 환희와 다채롭게 반짝이는 피아노연주법의 비밀 그리고 인상주의의 투영과
리스트가 표현하고자 했던 광채 등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라고 평한 바 있다.

라벨은 이 곡의 영감을 온갖 물소리(폭포, 분수 그리고 시냇물 등)에서 얻었다고 고백했는데, 실제로 물소리를 묘사한

 피아노 음악에서 라벨의 경지를 넘어서는 작곡가는 별로 없다.

계속해서 라벨은 1902년과 1903년에 각각 칸타타 <알씨온>과 <알리싸>를 가지고 로마대상에 도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1905년의 콩쿠르에서는 지정곡인 합창곡과 푸가 부문에서 학구적인 자세를 무시하고 규칙을
이탈하는 작곡으로 예선에도 통과되지 못했다.

 

이미 진보적인 음악계에서는 그의 작품이 높이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 이 사건은 상당기간 많은 화제를 낳았고, 이로 인해 결국 음악원장이 사퇴하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라벨의 스승인 포레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런 불명예가 오히려 라벨에게는 30세의 명성을 몇 년 앞당겨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05년 이후의 작품

1905년은 라벨의 작곡가로서의 입지가 이미 확고해진 시기로, <물의 장난>에 이어서 <현악 4중주 F장조>(1902~03)와 클링조르의 세 편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과 관현악을 위한 연가곡 <세헤라자드>(1903년)를 작곡한 다음이었다.
실내악곡인 <현악4중주>는, 라벨의 작품목록 중 현악4중주로는 유일한 곡으로, 라벨이 음악원 재학시절에 작곡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재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장르에서는 이미 많은 고전적 명곡들이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작곡되긴 했지만, 라벨의 곡은 현대적인 현악 4중주로는
드뷔시의 그것과 겨룰 만한 작품이다.

 

또한 드뷔시의 작품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유사성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4악장 구성이라든가, 이국적인 색채가 짙은

스케르초가 느린 악장의 앞에 놓여있는 진행, 혹은 두 작품 모두 제1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점 등은 두 작품을 연관지어 볼만한 내용들이다.

 

 특히 주제가 순환되고 같은 동기가 여러 악장에서 재현되는 순환형식의 사용은 드뷔시의 예를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4악장의 형식들은 고전적이지만 거기에 담긴 화성은 매우 새롭고 충격적이어서, 이 곡은 음악원 콩쿠르 당시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심사위원들로부터는 혹독한 비평을 듣기도 했으나, 이 작품을 좋아한 드뷔시는 이를 '그 자체로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는 완전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아직 젊은 음악가에세는 세심한 주의를 배려하는 음악보다는 고동치고 충동적인 음악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향은 이후 그의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예를 들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연가곡 <세헤라자드>는 라벨이 작곡가로서 완숙한 경지에 이른 27세에 쓴 작품으로, 신비하고 환상적인 세계에 관한
라벨의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클링조르의 시가 담고 있는 동양적 정취를 잘 살려낸 관현악의 음색은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라벨은 가사의 각 단어들을 음악에 종속시키는 대신 자신의 악곡을 항상 시구에 부수적으로 머물도록 처리했다.

 

음악의 흐름은 말하는 듯한 언어의 굴곡을 그대로 따르는 듯해서, 곡의 분위기는 소프라노의 가사가 뚜렷하게 두드러지는 동안에 음악이 그 배경을 풍요로운 음색으로 채색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방법들은 미래의 관현악곡 <다프니스와 클로에>(1909~12)에서 보여줄 내용들이다.

또한 같은 해에 두 개의 중요한 피아노 작품이 발표되는데, 이들은 고전적인 기법으로 된 3악장의 <소나티네>와 다섯

개의 소품으로 구성된 <거울>이다. 이제 라벨은 그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창적인 감성으로 프랑스 음악을 이끌어

가는 작곡가로서, 이 작품들을 통해서 음향의 추구가 기존의 음악에 한발 앞서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소나티네>는 작곡가가 이제까지 의도해왔던 섬세한 음향을 추구하기보다는 작품의 구성과 선법적 화성진행의 묘미 등을 오히려 과거로 되돌림으로써 옛것들을 상기시켜준다.

원래 라벨은 이 작품을 한 일간신문이 주최하는 국제경연대회에 출품하기 위해 한 악장만 작곡했다가,
2년 후에 두 개의 악장을 덧붙여서 걸작품으로 완성했다.

<소나티네>와 같은 시기에 쓴 <거울>은 1906년에 역시 비녜스에 의해서 초연되었는데, 라벨 자신도 이 작품의 화성이 그가 쌓아왔던 관례적인 방법으로부터 이탈하기 위해 일어나는 음악적 변화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기술한 바 있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다섯 편의 소품들은, 1907년에 관현악곡으로 편곡되는 네 번째 곡을 제외한다면 인상주의적인 색채를 갖고 있으나, 드뷔시적인 상징주의로부터는 조금씩 멀어지는 듯하다.

1906년에 작곡된 <박물지>는 또 다른 화제를 낳았다. 르나르의 시에 곡을 붙인 이 성악곡은 전혀 서정성 없이 낭송하는 듯한 기법으로 처리된 가사 때문에 매우 큰 파문을 일으켰다. '가장 라벨답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 새로운 기법의 음악은
예리하게 풍자적인 시와 걸맞게 결합하는데, 사실 작곡가는 시인이 그의 시 속에 숨기고 있는 신랄한 빈정거림을 정확히
이해했고, 시인은 이를 음악에 추가하도록 요청했다.

 

이 곡은 1907년에 라벨 자신의 피아노 반주로 초연되었는데, 날카롭고 절제된 피아노가 시적인 연상을 불러온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악곡인데, 이 시기까지의 성악곡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작품 이외에도
<꽃 외투>(1903년, Paul Gravollet의 시), <다섯 편의 그리스 민속 선율>(1904~06년), <장난감의 성탄절>

(1905년, 자작시), <하바네라식 성악연습곡>(1907), <바다 저편에서 불어온 폭풍>(1907년, Henri de Regnier의 시), <풀밭 위에서>(1907년, Paul Verlaine의 시)등이 있다.

<다섯 편의 그리스 민속선율>에서 작곡가는 그리스의 치오섬에서 불리던 민속 선율 위에 자신의 독창적인 화성을
구사하고 있으나, 그 나라의 지역적인 색채 또한 마음 깊이 고려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라벨은 칼보코렛시의 요청에 따라 민요에 피아노 반주를 붙였는데, 그 반주는 기존선율인 성악부분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다섯편의 선율 모두는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었으며, 1909년에 여섯 번째 선율 추가되었다.

라벨 자신이 직접 쓴 가사 위에 선율을 붙인 <장난감의 성탄절>은 그가 간직하고 있는 장난감에 대한 비밀을 밝혀주는 듯하다.

 

음악은 가사와 엄격하게 결합하면서 매우 단순하게 씌어졌으나, 이미 다음절적인 처리는
매우 독창적이다. 1909년에 초연된 <하바네라식 성악 연습곡>은 라벨과 친숙한 하바네라 리듬으로 되어 있으며
피아노 반주 위에 가사가 없는 목소리를 위한 연습곡이다.

이들 성악곡 외에도 그의 명성을 높여준 작품들로는 하프와 현악4중주, 플루트, 클라리넷으로 구성된 <서주와 알레그로
Introduction et allegro>(1905sus), <스페인 광시곡>(1907~08), 그리고 그의 첫 오페라인 <스페인의 한때>

(1907~09)가 있다.

스승인 베리오에게 헌정된 교향곡 <스페인 광시곡>에는 전혀 민속적이지 않으면서도 신비한 옛 것들을 상기시키는 힘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뛰어난 관현악법을 통해서 아낌없이 표현된다. 이 곡은 라벨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음색이 풍부하고
인상주의적인 곡으로 손꼽힌다.

라벨은 일생 동안 스페인 리듬을 즐겨 사용했는데, 이 곡 역시 그 범주에 속한다. 첫 악장은 황혼의 나른한 권태를

일으키고, 두 번째 악장을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세 번째 악장은 <귀로 듣는 풍경>의 <하바네라>를 옮겨 놓았으며,
마지막 악장은 <다프니스와 클로에>에서 등장할 찬란한 관현악법을 선포한다.

 

오페라 부파를 연상시키는 <스페인의 한때>는 섬세한 시적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1막의 풍자적 코믹 오페라이다.

 라벨은 노앵의 희극 <스페인의 한때>가 갖고 있는 풍부한 위트가 자신의 기질과 음악적인 기교에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이 희극을 오페라로\ 개작했는데, 작품 전체를 통해 라벨이 즐기는 스페인적인 어법을 만날 수 있다.


20세기 오페라사에 위대한 단막 오페라 작품으로 남게 된 이 작품은 늙은 시계공과 그의 부정한 아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가곡<박물지>에서처럼 말하는 듯한 억양의 선율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이 곡은 1911년의 초연에서는 부적절한 내용으로 크게 비판을 받았지만, 1938년 오페라 극장에서는 성공리에
공연됨으로써 오페라 부파의 전통을 잇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라벨이 구상했던 오페라에 관한 많은 계획들은 끝까지 실행되지 못했는데, 특히 1906년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나
1914년에 포기한 오페라 <가라앉은 종>(G.Hauptmann의 대본)은 거의 완성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가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된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한 소재들은 1920년에 작곡된 <어린이와 마술사들>에서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1908년에 작곡된 <엄마 거위>와 <밤의 가스파르>에서는 라벨이 지닌 스페인의 정서 대신,
그가 갖고 있는 동화의 세계와 낭만의 세계를 각각 엿볼 수 있다.

<엄마 거위>는 네 손으로 연주하는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으로, 그의 친구인 고뎁스키의 자녀들에게 헌정되었다.

이 작품은 신비로운 세계에 관한 라벨의 동경이 무한히 꽃필 수 있는 동화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다섯 개의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그의 기록대로 단순하고 간결하게 만든 피아노 곡으로, 1911년에 2관 편성의 관현악 모음곡으로 편곡되었고, 발레 곡으로도 편곡되었다.

<밤의 가스파르>는 전설적인 낭만주의 시인 베르뜨랑의 생동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시구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며,
이것은 라벨의 회화적인 상상력을 통해 정밀한 어법의 피아노곡으로 완성되었다.
그의 세 편의 산문시가 각각 세 개의 소품 -<물의 요정Ondine>,<교수대 Le Gibet>그리고 <난쟁이>-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언어의 마술사인 시인이 음의 마술사인 작곡가를 유혹했고,  설득당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제1곡인 <물의요정>에서 보여주는 청명함은 <물의 장난>의 그것보다 훨씬 강하고, 음계도 마치 시를 읊조리듯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 곡 서두의 물결치는 듯한 악절의 패턴은 곡 전체를 이끌며 통일감을 주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제2곡인 <교수대>에서는 풍부한 선율 아래 움직이지 않는 베이스가 음산한 것이, 죽음의 환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물의 요정>의 흐르는 선율이 표현하는 동적인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교수대>는 획일적인 리듬의 음향이 정적인 느낌을 주는 환상곡이다.

마지막으로 3곡인 <난쟁이>는 지나치게 열정적이며 광란적이다.

 

각각의 곡이 형식적인 면에서는
보수적인데, 작곡가가 환상적인 암시를 갖고도 고전적인 형식을 다시 만난 것이 비단 이 곡에서 뿐만은 아니다.
1910년에 작곡한 일곱 편의 노래로 이루어진 <대중의 노래 Chants populaires>는 콩쿠르를 위해 작곡되었으나,
그 중에서 처음 네 곡-스페인 노래, 프랑스 노래, 이탈리아 노래 그리고 이스라엘 노래-만이 출판되었으며,
이 중에서 네 번째 곡은 관현악으로 편곡되었다.

 

다섯 번째 곡인 <스코틀랜드의 노래>는 작곡가의 스케치에 준해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나, 여섯 번째 곡과 마지막 곡인 <플랑드르의 노래>와 <러시아 노래>는 현재로서는 흔적이 없는 상태이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1911년)는 리듬과 분위기 면에서 슈베르트를 본보기로 하는 왈츠로, <밤의 가스파르>에서
보여주었던 명인의 솜씨가 다시 한번 이 작품에서 정화되어 나타난다.

여덟 편의 왈츠로 구성된 이 곡은 선율이나 화성에 있어서는 모두 라벨의 스타일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섬세한 소리"라고 드뷔시가 말한 대로, 이 곡들은 완전히  화성의 정교함을 갖고 있다.
특히 여덟 번째 곡은 앞서 지나온 왈츠들의 중요한 모티브를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마지막 곡에서
앞의 곡들의 단편들이 막연한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듯하다.

 

이 피아노 곡은 1912년에 무용가 트루하노바의 위촉을 받고서 발레를 위한 관현악곡 <아델라이드 또는 꽃의 언어>로

 편곡되었다.

1909년에 파리를 방문한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무용단은 당대의 여러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라벨의 음악에서 그 결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라벨이 자신의 대표적인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
(1909~12년)를 작곡한 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의욕적인 작품활동 시기였다.

3년에 걸쳐 작곡한 이 작품은 1912년에 니진스키와 카르사비나의 러시아 무용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진 3장의

무용교향곡으로, 디아길레프의 요청에 의해 씌어졌다.
라벨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고풍스런 전통에 충실하기보다는 그 나름대로의 광범위한 음악적인 회화를 꿈꾸었던

것 같다.

원래 오페라극장의 주요 프로그램이기도 했으나, 음악회장에서 자주 모음곡이라는 이름 아래 피아노 독주곡(1910년)
혹은 관현악곡(1911~13년)으로 연주되기도 했다. 이 음악에서 사용되는 주제들은 모두 라벨 특유의 동화적인 환상을
담고 있는데, 예를 들어 관현악 모음곡 중 네 번째인 <동이 트고>는 신비스런 라벨 음악의 성향을 대표하고 있다.

비현실적이라고 할 만큼 이색적인 음향들, 특히 플루트와 클라리넷과 첼레스타가 만드는 분위기는 표현할 수 없는
새벽의 상쾌함을 적절히 묘사한다. <동이 트고>는 낭만적인 고백이 드문 라벨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서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20세기 작곡가 연구I(음악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