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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The Best of Tchaikovsky-Piano Concerto No.1 Op.23, 1st Mov 외

 

 

 

 

 

 

 

 

 

 

 

 

 

 

 

 

 

 

 

 

 


 

 


 

The Best of Tchaikovsky


 


 

01. Piano Concerto No.1 Op.23, 1st Mov. (00:00)

02. String Quartet No.1 Op.11, 2nd Andante Cantabile (01:30)

03. String Serenade Op.48, 1st Mov. (02:48)

04. Violin Concerto Op.35, 1st Mov. (04:05)

05. Marche Slave Op.31 (05:40)


 

 

06. Capriccio Italien, Op.45 (06:50)

07. 1812 Overture, Op.49 (08:04)

08. Romeo and Juliet Overture (09:11)

09. Symphony No. 5 Op.64, 4th Mov. (10:39)

10. Symphony No. 6 Op.74 'Pathique', 1st Mov. (12:14)

 

11. The Nutcracker Op.71, No.8. Valse des Fleurs (13:29)

12. Swan Lake Op. 20, Act II No.10, Scene (14:37)

 



 

 

1840년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립(帝立)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관리가 되었다가,

1860년 안톤 루빈시테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되면서 제1기생이 되었다.

그 뒤 모스크바음악원이 설립되자 교관이 되었으나(1866∼78), 77년 이전부터 러시아 철도왕(鐵道王)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1831∼94)으로부터 연금을 받아왔기 때문에 곧 교직을 떠나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후 교향곡 제4, 5, 6의 3곡을 완성하고 93년 10월에는 제6교향곡을 완성 초연하였는데, 그날로부터 며칠 후인

 11월 콜레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음악은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성립된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나 낭만파의 수법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러시아악파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변박자(變拍子)와 민요의 사용도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고, 비조리성(非條理性)과 논리의 비약이 없어 서유럽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고 속류(俗流)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약 40년간에 걸친 창작활동 중에는 시민세대의 음악의 기점

(基點)과 종말이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법상 피아노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음은 물론,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줌으로써 차이콥스키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는 표제음악적(標題音樂的)인 색채가 짙다.

 

무대음악은 별도로 하더라도, 교향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표제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어 사상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Manfred Symphony)》(1885)은 문학적 사고가 깊은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오페라 가운데서도 푸시킨의 원작을 대본으로 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파의 역사주의와는 반대로 동시대의 증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1854년 14세 때의 《왈츠》에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 《비창》(작품 74)으로

끝났다. 작품 74는 자신이 붙인 번호이고, 그 후의 보주(補註)로 80, 이 밖에 번호 없는 초기의 소품이 약 20곡 현존한다. 즉 교향곡 6곡, 미완성의 교향곡 1곡, 교향시 1곡, 오페라 11곡, 발레곡 3곡 이외에도 다수의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및 협주곡 등이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를 그만 둔 시기(78)를 중심으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교직과 비평에 종사하였던 시기로 작품의 경향도 낭만적인 향취와 피아노협주곡 제1번(75)과 바이올린협주곡

(78) 등에서 볼 수 있는 현란한 색채감을 지니고 있다.

 

  후기는 제4번(77) 이후의 3곡의 교향곡, 그리고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Evgenii onegin》(78)을 포함하여,

모두가 충실한 창조력과 기법의 완결을 상기시킨다.

이 두 시기 사이에는 그의 불행한 결혼문제가 개재되어 있어 그의 작풍변화의 중요 요인이 되고 있다.

 

 

 

 

 

 

 

교향곡 중에서는 전기의 것 중 제2번(1872)이 소러시아민요에서 취재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제4번 이후의 3곡의

 교향곡들은 단일 모티프인 이른바 ‘숙명의 동기’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3곡을 일련의 곡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발레음악에서는 《백조의 호수:Swan Lake》(1876) 《잠자는 숲 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1889) 《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1892)의 3곡 중 특히 《백조의 호수》가 장대한 짜임새와 다채로운 음악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푸시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예브게니 오네긴》과 《스페이드의 여왕:The Queen of Spades》

(1890)이 유명하다. 특히 전자는 러시아문학사에서 등장하는 ‘쓸모없는 사람’의 한 사람인 오네긴을 주인공으로 하여, 러시아적인 인간상의 애환을 깊이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 그의 방대한 작품들 중에서 실내악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곡의 현악4중주곡(1871, 74, 76)은 보로딘,

타네예프의 작품과 더불어 러시아악파의 훌륭한 소산으로 간주되고 있다.

저작으로 《화성학 개요》(1875)가 있다.

 

 

 

 

첨부이미지

 

 

 

  표트르 차이콥스키 연보

 

  출생 1840.5.7~ 사망 1893.11.6

 

  1840 5월 7일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출생.

 

1845 파리치코바로부터 음악레슨을 받음.

1852상트페테르부르크 제립 법률학교 입학.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함.

1854《아나스타샤 왈츠》를 작곡함.

1859  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성 관리로 근무함.

 

1862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

1864 오스트로프스키 희곡에 의한 서곡 《폭퐁우》 작곡.

1866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취임.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 완성.

1873교향곡 제2번 초연. 환상서곡 《템페스트》 완성 후 초연.

1876발레 《백조의 호수》 완성.

 

1877  발레 《백조의 호수》 초연.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 후 즉시 파경.

1878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 교향곡 제4번, 바이올린 협주곡 등 완성.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 그만 둠.

1888  교향곡 제5번 완성, 초연.유럽 여행에서 그리그, 말러, 슈트라우스 등과 만남.

1889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완성.

1892 발레 《호두까기 인형》 완성, 초연.

 

1893교향곡 제6번 《비창교향곡》 완성.   11월 2일 콜레라 발병 후, 11월 6일 사망.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 안장.

 

  ㅡ두산백과

 

 

 

  모차르트의 가락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신비가 있다.

거기에 비교하면 차이코프스키 가락의 아름다움에는 마음과 마음이 융합하는 듯한 친근미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우수(憂愁)를 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는 베토벤과

 같은 야성적인 맛은 없다.

그러나 「비창 교향곡」에 나타난 운명관은 베토벤의 「제5 교향곡」에 나타난 그것보다 좀 더 우리들과 가깝다.

유명한 서곡 「1812년」에서 그는 불타는 듯한 애국심을 영원한 기념으로 조국에 남기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에 러시아의 외딴 시골 카마 강변 보트킨스크에서 광산 기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 중에 음악과 인연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음이 민감해서 10세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였다.

그는 처음에 법률학교에 들어가서 19세 때 사법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늘어나는 마음의 괴로움은 그를 음악의 세계로 몰입시켰다.

 

  1863년에 그는 생활이 안정된 관리 생활을 포기하고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였다.

이론을 자렌바에게, 관현악법을 안톤 루빈시타인에게 배웠다.

음악원에서의 성적은 매우 우수하여, 그것이 루빈시타인의 눈에 띄어 지우(知遇)를 얻게 된다.

 

안톤 루빈시타인은 이 천재를 감화와 격려로써 지도하였으며,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최초의 교향곡이 작곡되어 그의 지위를 확립했고, 그리고 얼마 후 이상적인 후원자 메크 부인의 도움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어 오로지 작곡에 매진할 수가 있었다. 그는 유럽을 편력하고, 미국에 가게 됨으로써 크나큰 명성과 영예를 얻었다. 모스크바 근교의 그가 숨어 살던 집은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많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1893년 여름에 그는, 제6번 교향곡인 유명한 「비창 교향곡」이 상연된 뒤 몇 주일이 채 못 되어 콜레라에 걸려서

급사했다.

 

  사람들은 뜻밖의 급사 소식을 듣고 놀라 차이코프스키 자살설을 믿을 정도였다. 그것은, 우선 「비창 교향곡」에 넘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불안을 상상케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이코프스키의 전기(傳記)를

읽으면 그 속에는 메크 부인과의 관계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 메크 부인은 부호의 미망인으로 차이코프스키 예술의 훌륭한 이해자였다. 흥미로운 것은 차이코프스키와 메크 부인은 생전에 전혀 면식이 없었으며, 우연히 만나도 알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였다는 점이다.

 

차이코프스키도 편지 왕래는 하고 있었지만, 부인을 방문한 적도 없고 또 찾아가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부인을 신뢰했고, 부인은 그의 예술을 사랑하여 그 성장과 결과를 즐긴 것이었다.

 

  ㅡ『최신명곡해설』, 삼호뮤직, 2012.

 

 

 

 

                        

                        차이코프스키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