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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Verdi- Renata Tebaldi / Ah, fors'e lui

 

 

 

 

 

 

 

 

 

 

레나타 테발디 Renata Tebaldi (1922- )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일명 <춘희>로 알려진 오페라의 여주인공 비올레타가 순박한 시골청년인

알프레도가 사랑을 고백하고 떠나자 그 때는 알프레도의 고백을 비웃었지만 그의 진정한 사랑을 뒤 늦게 깨닫고 부르는 아리아,                        

 

"아, 그대였던가, Ah, fors'e lui"를  Renata Tebaldi (1954)가 부릅니다. 

 



 

 

 

 

 

 

"아, 그 사람인가, 그 사람인가                                                       내 마음을 이렇게 뒤흔드는 이                                                    사랑의 고민 속에 사로 잡는 이                                                     내 맘을 산란케 하는 이가                                                            

 

그이였던가, 그이였던가                                                               상냥한 그의 음성이                                                                     사랑을 속삭이고 나를 위로했네                                                  

 

  그대가 내 영혼 모두 빠앗아갔네                                                     내 가슴 깊은 사랑의 궁전에                                                           그이로 가득찼네, 오 그대여!"                                                     

 

 

 

 

 

 

 

"

 

 

 

 

 

 

 

베르디 (Giuseppe Fortunio Francesco Verdi, 1813. 10.10 -1901,. 1. 27)은

    이태리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 입니다.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가면 무도회>, <맥베스>, <오텔로>, <시몬 보카네그라> 등   오페라를 좋아하는 이태리 사람들에게는 거의 영웅같은  그의 오페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이태리의 북부 부세토(Busseto)에서 가까운 작은 농촌마을인  론콜레(Roncole)라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밀라노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다가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가까운 그랜드 호텔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18세에 입학시험에 떨어졌던 "밀라노 음악원"은  지금은 "베르디 음악원"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베르디는 말년에 자신의 재산을 투자해서 은퇴한 음악가들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음악가 휴식의 집

(Casa di riposo per Musicisti)을 밀라노에 마련하고 자신도 죽은 후 이곳에 묻히기를

 원하였다고 합니다.                   

 

베르디는 평소 베르디에게 자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안식처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음악가의 집"은 현재 약 55명의 은퇴한 음악가들이 살고 있고  베르디도 그의 아내와 함께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고 있습니다.

 

 

 

 

 

 

 

밀라노의 음악가의 집왼쪽은 베르디의 묘가 있는 곳이고 오른쪽 사진은 정문에서 찍은 것입니다.

 

이 집은 베네치아의 고딕 양식을 모방한 운치있는 3층으로된 저택이었는데음악가들이 살고 있는 위층의 아파트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노래하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와 음악가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은퇴를 했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는지그들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문 왼쪽으로 사무실이 있었고 정문에서 정면으로 중앙에 있는베르디와 그의 두번째 아내 조세피나가 묻힌

묘실은  입장료도 없이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      

 

 

 

 

 

 

 

 

 

Giusepina Verdi Strepponi의 묘    

 

 

묘실 안에는 아름다운 프레스코畵가 사방을 둘러 싸고 있었는데    

비록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음악의 신 뮤즈들이 베르디를 보호하고 있는듯했습니다

 

 

 

"모두를 위해 울었고 사랑했다"  

 

 

베르디와 그의 두번째 아내 주세피나(Giusepina Verdi Streoini)의 묘는 대리석으로 되어있었고 그의 묘 위에는

 쓰여있는 碑銘은  "모두를 위해 울었고 사랑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가 작곡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1840년 대는 유럽 여러나라에서 왕정에 맞서는 진보적 사상의 물결이 일던 시대로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태리에서도 조국 통일을 열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국심이 유난히 강했던 베르디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오페라를 통해서 이태리의 독립과 통일을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국을 사랑했고 조국을 위해 울었던 베르디의 오페라에 담겨진 애국심은 오페라가 공연될 때마다 온 국민들을 울렸고 베르디에 대해 열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장례식(State Funeral)에는 정부 고위 관리를 비롯한 수만 명의 행렬이 이어졌고 지휘자 토스카니니

(Arturo Toscanini)는 전국에서 온 음악가들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구성하여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일명 "가라, 내 꿈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를 지휘했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장례식 후 밀라노의 Cinitero Monumentale에 안치되었다가 1개월 뒤 베르디보다 4년 전에 죽은 아내 주제피나가 잠든 이곳,  음악가의 집에 이장되어 영원한 안식을 하고 있습니다.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베르디의 생애와 예술

 

주세페 베르디는 1813년 10월 10일,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파르마 공화국의 한 도시, 부세토에서 약 4Km 떨어진

레 론콜레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북이탈리아에서 펼쳐진 비옥한 파다나 평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옆으로 '포 강' 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 곳은 밀라노와 불로냐를 연결하는 간선 도로에서 떨어져 있어 지금도 사회와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데, 베르디는

 이 광활한 대지를 평생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페라계에서 성공하자마자 고향 근처의 산타가타에 토지를 구입하여 작곡 활동과 함께 농원을 경영하였은데, 토지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그의 고독한 창작 활동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주세페 베르디

 


아버지 카를로와 어머니 루이지아 우티니는 식료품과 잡화를 취급하는 작은 가게를 경영했는데, 교육을 받지 못해 거의 문명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난 베르디에게는 어린 나이에 죽은 정신박약아 여동생이 있었다.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나타났다.  7세에 레 론콜레 성당의 오르간에 강한 흥미를 보인 그는 오르간

 연주가 피에트로 바이스트로키에게서 음악의 기초를 배운다. 

 

 그 무렵 부모가 사준 중고 스피네토도 숙달하고 9세 때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미사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게 되었다. 

 10세 되어서는 부세토의 유복한 상인인 안토니오 바레치의 권유로 부모 곁을 떠나 부세토의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집에서 악우협회 모임을 열기도 하고 클라리넷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던 음악애호가 바레치는 베르디의 재능이

 마음에 들어 그의 성장을 후원하려교 했던 것이다. 

 

 그는 베르디를 자기 집에 살게하여 상점 일을 돕게 하면서 친구인 피르디난도 프로베지에게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우게 했다.  부세토 시립 음악학교 교장이었던 프로베지는 성 바르톨리메오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베르디는 18세 때 밀라노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프로베지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스승의 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악우협회와 마을 악단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하거나 편곡하였다.

 

1832년, 베르디는 부세토의 장학금 심사에서 합격하여(이것도 바레치가 힘썼다) 밀라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음악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뛰어난 재능도 없고 연령 제한은 이미 넘었으며, 더구나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말라노에서는 외국인이었떤
까닥에 베르디는 입학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베르디는 스칼라 극장의 챔바로 주자(가창 지도 책임자)였던 빈첸초 라비니아에게 개인적으로 사사하며 작곡을
 공부했다.  약 2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여러 가지를 깨우쳐 실력이 붙은 베르디는 화려한 음악 도시 밀라노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은인인 바레치의 요청도 있고 해서 우선 부세토로 돌아갔고, 1836년에는 시립 음악학교 교사가 되어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였다. 


2. 성공하기까지


일단 시골 마을 부세토에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오페라에 대한 꿈을 버릴 수가 없었던 베르디는 몰래 <로체스텔>

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이 곡은 결국 햇빛를 보지는 못했다. 

이후 <산 보니파초의 백작 오베르토>를 작곡하였고 1839년 2월, 드디어 베르디는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밀라노로 이사했다. 

 

  열심히 뛰어다닌 보람으로 <오베르토>는 새로운 작품을 찾고 있던 스칼라 극장의 지배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의

흥미를 끌게 되어 스칼라 극장에서 당당히 공연하게 되었다. 

 

1839년 11월에 초연된 처녀작 <오베르토>가 그런 대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메렐리는 베르디와 2년 동안, 3편의

 신작 오페라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하자는 계약을 맺었다. 

 이듬해가 되자, 베르디에게 오페라 부파(※)를 작곡해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당시 베르디는 희가극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1838년에 이미 딸을, 그 다음 해인 1839년에는

아들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 희가극을 작곡하고 있었던 1840년에는 끝내 아내마저 병사하고 말았다. 

 

 가정의 붕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베르디는 한동한 모든 일을 포기하고 부세토에 틀여박혀 있었는데, 메렐리의

강한 재촉으로 이 희가극을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두 번째 작품 <하루만의 임금님>은 당연히

 완성도가 떨어져 1840년 9월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청중으로부터 야유를 받아 곧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다.

베르디는 굴욕과 실의에 빠져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다음해 메렐리로부터

구약성서에서 소재를 택한 웅장한 드라마 대본을 받았는데, 그 대본에서 받은 강한 영감이 자극이 되어 작곡 의욕을

되찾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나부코>는 1842년 3월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베르디는 이로 인해 일약 오페라계의 총아가 되었다.

 

  <나부코>는 강한 리듬, 단순하지만 거침없이 흐르는 멜로디,

 

그리고 근저에 흐르는 조국애(조국을 잃은 히브리인의 합창 등)가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북이탈리아에서 일고 있던 독립과 통일의 기운과 합치되면서 민중의 마음에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베르디는 다시 한번 솔레리와 작업하여 같은 애국 노선의 <제1차 십자군의 룸바르디아인>을 작곡하였고, 이 곡 역시

 화려하게 성공을 거두었다(1843년 2월, 스칼라 극장 초연).


3. 고역의 시절


<나부코>로 성공을 거둔 후 일이 쇄도하여 베르디는 맹렬한 기세로 작곡에 몰두했다.  당시 오페라 작곡가는 계약한

 극장에 나가 성악가나 오케스트라의 연습에 참가, 연출도 하고 3회 공연까지는 일을 봐주는 관습이 있었다. 

 반드시 마감날을 맞추어야 하는 작곡, 연습, 그리고 다른 작품들의 재공연 지도 등으로 베르디는 쉬지도 못하고 일에만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어린 시절 가난했기에 금전에 대한 집착도 강했고, 늘 오페라계의 일인자이기를 원하는 욕망도 있었으며

(자신을 소외시킨 아카데미즘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다),

개성적인 오페라를 쓰려고 하는 예술적 욕구도 강했기 때문에 베르디의 분주한 창작기는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나부코> 이후 지금까지 저에게는 잠시도 휴식이 없었습니다.

 16년 동안 고역이었습니다!라고 베르디가 쓴 것은<가면무도회>를 작곡하고 있었던 1858년 5월이었다.  

이 16년 동안 작곡한 오페라는 유명한 <리콜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등 20여편에 달한다.


현재 '고역의 시절' 이라는 용어는 '베르디의 상상력이 피폐된 시기' 라는 의미로 사용되며, 일반적으로 그 기간을

 '<에르나니>(1844.3월) 이후 <리골레토>(1851.3월)까지의 약 7년 간' 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 시대의 여려 작품에서도 많은 혁신성이 지적되고 있으며 '고역의 시절' 이라는 의미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4. 최초의 완성

 '고역의 시절' 동안 계속 발표된 베르디의 오페라는 대부분이 청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각지에서 경쟁하듯이

 재공연되었다.  이 시기 베르디에게는 오페라를 흥행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는 청중이 식상하지 않도록 의미를 함축시켜 알기 쉽고 간결하게, 효과적인 장면 배합과 드라마 전개를 추구하였다. 

 

이런 일에는 대본 작가의 협력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대본 작가와의 사전 협의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였는데, 대체적으로 드라마 구성과 전개는 베르디 자신이 직접 쓰고, 대본 작가는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운문으로 된 대본을

쓰도록 하였다.

 특히 <에르나니>에서 시작된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1810~1876)와의 공동 작업은 아주 중요하다. 

 

차분한 성격의 피아베는 베르디가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라도 대본을 다시 써 주었다.

피아베와의 공동 작업으로 베르디는 <맥베스>,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군도> 등 뛰어난 오페라를

만들어냈다.

 


 

 

 

 

 

 

베르디는 1846년 <군도>를 초연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다.  도중에 들른 파리에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1815~1897)와 재회한다.  스트레포니는 1842년 <나부코> 초연 때 아비가일레 역을 맡은 소프라노로서, 그 후 베르디의 좋은 상담자가 되었다.  그녀는 1846년 모데나에서의 <나부코> 공연을 마지막으로 은퇴,  당시 파리에서 성악 선생으로 제2의 인생을

 막 시작한 때였다.  런던에서 일을 마친 베르디는 파리오 돌아와 <엘루살렘>을 작곡, 초연하는데, 그 무렵부터 스트레포니와의 동거를 시작하여 2년 정도 파리에서 생활한다.

  헌신적인 스트레포니와의 평온한 생활은 '고역의 시절' 의 베르디에게 안락함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이 무럽부터 베르디의 작풍에 많은 변화가 보인다.  <나부코>, <제1차 십자군의 룸바르디아인>, <아틸라> 등에서 보이는 애국적 요소는 <레냐노 전투>를 끝으로 사라지고, 점점 등장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그리게 된다. 


 

1848년 혁명 때, 잠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베르디는 고향 부세토 근교의 산타가타에 집과 농원을 구입하였다. 

 이듬해인 1849년, 베르디는 스트레포니는 데리고 부세토로 돌아왔지만,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이들을 냉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두 사람은 종종 파리에 갔으며, 나중에는 산타가타의 저택에 있으면서도 두문불출하게

된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가 통일을 바라보던 1859년에 비로소 사보아의 외딴 마을 콜론주에서 비밀리에 결혼하였다). 

 

이렇게 베르디의 생활이 변화했던 시기에 <루이자 밀러>, <스티펠리오>와 같은 심리 오페가 작곡되기 시작한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다.  이 두 작품 모두 흥행적으로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심리 오페라는 그때까지 베르디가 추구해 온 간결하고 극적인 드라마 전개와 완전히 결부되면서, 바로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라는 세 편으 걸작을 탄생시켰다. 

 

 밀러가 「국민적 3부작」이라고 이름 붙인 이 오페라들은 오늘날 까지 전세계 오페라 극장에서의 중요한

레퍼토리로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5. 그랜드 오페라

 

오페라 극장과의 신작 계약을 맺기 위해 베르디는 1853년 10월부터 한동한 파리에 머무른다. 베르디는 로시니처럼

 오케스트라, 합창, 무대 기구가 뛰어난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대규모의 오페라를 발표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855년 6월에 이루어진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의 초연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대본은 마이어베어와 함께 '그랜드 오페라' 양식을 만든 외젠 스크리브가 담당 했는데, 스크리브는 베르디에게 전혀

협조하지 않았고, 오페라 극장측과 베르디와의 의사 소통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이탈리아오 돌아온 베르디는 피아베의 대본으로 <시몬 보카네그라>를 작곡한다.  이 작품은 1857년 3월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어서 이전에 실패로 끝났던 <스티페릴오>을 <아롤드>로 개작하여 그 해 8월 리미니의 누오보 극장에서

초연시켰다.  그러나 당시의 청중들은 이 작품 중 어느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1859년 2월, 로마의 아폴로 극장에서 초연된 <가면 무도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베르디는 안토니오 솜마에게 스크리브 원작의 대본을 자신의 요구대로 다시 쓰게 하였는데, 그 결과 프랑스풍

그랜드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장단점을 골고루 갖춘 걸작이 탄생하였다. 

 

 이 오페라는 처음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국왕 암살을 다룬 주제 때문에 나폴리

왕국의 검열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해서 결국 로마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베르디는 과거에도 <스티펠리오>, <리골레토> 등에 대한 검열 때문에 몇 번이나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경한 검열에 걸린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면 무도회>가 초연되었을 때 로마의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 「베르디 만세!」을 외쳤다고 한다.  

「베르디 만세!」는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만세!」의 생략형이기도 했다. 즉, 베르디 찬미에는

 사루덴냐 왕을 통일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민중의 정치적 희망이 담겨 있었다.


1861년 3월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베르디가 존경하는 카불의 요청으로 베르디는 국회의원이 된다. (1865년에

 사직). 이 무렵부터 베르디는 산타가타의 농원 경영에 열중하며 정신적 균형을 잡아가면서, 새 시대에 어울리는

 그랜드 오페라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에게 계속해서 외국으로부터 청탁이 들어왔다. 

 

러시아, 파리, 이집트로부터 작곡 의뢰에 따라 <운영의 힘>(1862년 11월, 페테르부르크 황제 극장), <돈 카를로>

(1867.3월, 파리 오페라 극장), <아이다>(1871.12월, 카이로 오페라 극장)가 각각 작곡되었다.

 

  <운명의 힘>과 <돈 카를로>는 두 작품 모두 많은 요소를 내포한 웅장한 작품으로서, 베르디는 후에 몇 차레나

수정을 가하였다.  <아디다>는 베르디의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집대성한 완성도가 높은 걸작으로, 주문에 의해 쓰여진 마지막 오페라이기도 하다. 1874년 5월에는 밀라노의 성 마르코 성당에서 <레퀴엠>을 초연했는데, 이 작품은

 1873년 사망한 문호 알렉산드로 만초니를 추도하여 작곡된 것이었다. 

 

이 무렵 베르디는 이탈리아에서 아디다 역 초연을 맡았던 보헤미아의 소프라노 테레사 스톨츠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  때문에 아내 스트레포니아와 일시적으로 감정이 틀어지기도 하였다. 


6. 위대한 노인


<아이다><레퀴엠>으로 베르디에 대한 평가는 확립되었다. 

 그는 60세를 넘어서야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오페라 왕' 이라는 지위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베르디는 침묵을 지켰다. 

 

 과거 작품으 재공연에 참가하는 것 외에는 산타가타에서 농원 경영에 열중하다가, 추운 겨울이 되면 <돈 카를로>를

작곡할 무렵에 사들인 제노바의 별장으로 옮겼는데 가끔은 파리에서 음악계 정보를 모으기도 하였다. 침묵의 이유 중 하나는 바그너에게 있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계에 바그너의 우월성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바람에 이탈리아 전통을 한몸에

짊어지고 오페라계를 개척해 온 베르디는 아주 초조해져 있었다. 

 

 

1879년 출판사 리코르디가 넌지시 세익스피어의 <오텔로>를 오페라화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온다. 

 대본의 골자는 이미 아리고 보이토가 써두었다. 

세익스피어는 베르디가 편애했던 작가였다. 

 

 33세에 <맥베스>라는 걸작을 쓴 이후 세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은 오페라의 소재로, 또한 숭고한 극의 이상으로서

항상 베르디의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텔로>의 작곡은 <시몬 보카네그라>의 수정(보이토와 공동 작업, 1881년)과 스칼라 극장을 위한 <돈 카를로스>의

 수정(1882~1884)을 끝낸 후 겨우 결단을 내렸는데, 이 일은 매우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오페라는 1887년 1월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그 화려한 성공은 역사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전통에 기초하면서 극과 음악의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 <오텔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바그너의

 악극에 뒤지지 않을 만큼 높은 예술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또 '헨리 4세'를 소재로 한 <팔스타프>를 '자신을 즐거움를 위하여'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도 1893년 스칼라 극장에서 성공리에 초연되었다.

 


1897년, 스트레포니를 잃은 베르디는 종교음악에 흥미를 갖게되어 성가 4편을 완성한다.   1901년 1월 21일 베르디는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져 1월 27일 세상을 떠났는데, 밀라노 전체가 이 위대한 노인을 위하여 상복을 입었다.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유언대로 그가 세운 「음악가 휴식의 집의 예배당에 스트레포니와 함께 묻혔다.

 


오페라 부파(opera buffa) : 18세기에 발생한 희극적 오페라.

 

오페라 세리아의 반대어. 희가극 경가극이라고도 하며, 오페레타, 오페라 코미크와는 다르다. 18세기 초, 나폴리파

오페라에서 성립. 종래의 오페라에 포함되어 있던 코믹한 파로디풍의 에피소우드가 분리, 독립한 것.

 

서술적인 레치타티보 세코와 선율성 풍부한 아리아의 대조, 화려한 피날레의 앙상블 등이 특색이다. 페르골 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1733)는 획기적 작품. 일상적인 소재와 예리한 풍자성 때문에 시민계급의 지지를 얻어 성장했다. 그 후의 피카로의 결혼, 돈지오반니, 세빌랴의 이발사등은 해학적인 맛에 비극성과 감상성이 첨가된

명작이다.

      

곧 오페라세리아(正歌劇)의 상대적 호칭으로서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가벼운 내용의 희극적인 오페라를 가리킨다.

 초기의 베네치아 오페라에서는 막간에 익살스러운 내용의 짧은 연극을 넣고 인테르메초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인기를 얻어 그뒤 나폴리시대에는 독립된 오페라가 되어 오페라부파로 불렸다. 제재(題材)는 서민적인 일상생활의

유머를 다루고, 음악은 현악합주의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독창 ·중창을 중심으로 한 명랑한 내용으로 되었다.

 

서창(?)부분에서는 쳄발로 등의 건반악기가 반주를 맡는 것이 특징이다.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1733)

 본래 그의 오페라세리아의 막간극으로 작곡, 상연한 것인데 오히려 이것이 더 유명해져 오페라부파의 가장 오래 된

 

 걸작으로 꼽히며, 이후 로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1812)에 의해 오페라부파의 마지막 대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나 돈 조반니는 내용적으로 반드시 가벼운 것은 아니나 양식상으로는

오페라부파에 속한다.\

 

 

 



 

 

 

 

 

베르디의 두 아내 첫번째 아내 마르게리타(1814~1840) 1869년에 결혼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산아가타의 저택 : 유유자적한 생황을 했던 곳이다>

 

 

 

 

 

베르디의 생가는 이 집안의 당시의 가난을 말하듯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가 사망한 밀라노의 으리으리한 집과 견주어 이 위인의 생애의 크나큰 비약에 감명이 깊다.

 레론콜레는 오늘날에도 교통이 불편한 빈촌으로, 이 집은 찾는 이도 없는 박물관이 되어 있다.

 

 

 

 

 

 

 

 

 

 

 

 

 

베르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