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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endelssohn: 4. Sinfonie (»Italienische«) ∙ hr-Sinfonieorchester ∙ Paavo Järvi

   

 

 

 

 

 

 

 

 

 

 

 

hr-Sinfonieorchester (Frankfurt Radio Symphony Orchestra) «
Paavo Järvi, Dirigent ∙



I. Allegro vivace
II. Andante con moto
III. Con moto moderato
IV. Saltarello. Presto

Alte Oper Frankfurt, 16. Juni 2012 ∙

 

 

 

 

 

작곡가 멘델스존의 그림, Mende

 

 

 

 

Mendelssohn(1809~1847)

 

 

 

 

 

음악사에 길이 남는 명곡들 중에는 여행을 통해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꽤 있다. 도시나 나라의 이름이 부제로 붙은

작품들은 대부분 작곡가의 여행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은데,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도 작곡가의

 이탈리아 여행으로부터 시작된 작품이다.

 

멘델스존은 여행을 좋아했던 음악가였다.

집안 환경도 부유해서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었기에 그는 일생동안 세계 각지의 많은 곳에 가볼 수 있었다.

멘델스존이 특히 마음에 들어 했던 곳은 이탈리아에서도 로마였다고 하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탈리아 교향곡] 역시 멘델스존이 로마에 머물고 있을 당시에 착수된 작품이다.

 

멘델스존이 이탈리아 여행 중에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멘델스존이 이탈리아에 얼마나 매혹돼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새로운 힘을 얻어 작곡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교향곡]의 많은 부분 작곡이 완성되었는데,

아마 이 작품은 내가 작곡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성숙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밝은 태양을 연상시키는 찬란함

 

멘델스존은 이 곡에 이탈리아의 화사한

 기운을 듬뿍 담았다. <출처: NGD>

 

 

 

영감에 가득 찬 상태에서 작곡된 [이탈리아 교향곡]은 멘델스존의 성숙기 교향곡들 중 네 번째로 출판되어 ‘제4번’이란 번호를 얻게 되었으나 작곡 순서로는 세 번째다. 멘델스존의 성숙기 교향곡 다섯 곡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 교향곡]은 1833년 5월 13일에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런던에서 이탈리아 교향곡이 초연될 당시에도

영국 언론으로부터 “영감이 번뜩이는 찬란한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밝고 찬란하게 시작하는 1악장의 도입부와 13세기 이탈리아 나폴리의 춤 ‘살타렐로’의 리듬이 소용돌이치는 4악장을

 들으면 절로 이탈리아의 밝은 태양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정작 멘델스존 자신은 이탈리아의 음악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음악에 비해 지나치게 밝고 논리성이 부족한 이탈리아 음악이 그의 성향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는이탈리아 음악가들이 하이든이나 베토벤 등 독일 관현악 명곡들을 별로 연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연습하며 독일 음악을 이탈리아에 전파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음악이 너무 어렵다는 단원들의 불평뿐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독일 음악을 어렵게 생각했고 멘델스존은 이탈리아의 음악이 잡다하다 느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델스존이 걸작 [이탈리아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경치와 찬란한 날씨 덕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탈리아의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폐허나 경치, 그리고 자연의 화려함 속에서 음악을 찾아냈다”

 

 

 

 

 

 

 

멘델스존 특유의 화창함과 활기로 가득한 교향곡

 

 

느린 서주 없이 곧바로 빠르고 화려한 음악으로 시작하는 [이탈리아 교향곡]의 1악장은  태양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대개의 교향곡 1악장이 4분의 4박자나 4분의 2박자로 된 것과는 달리 이 곡은 빠른 8분의 6박자로 돼있어서 마치

춤곡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는 베토벤 [교향곡 제7번]의 분위기와 닮았다.

 

베토벤 역시 그의 [교향곡 7번]의 1악장을 8분의 6박자로 설정하고 경쾌한 리듬감을 강조해 마치 영국의 옛 시골

 춤곡인 ‘지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살려냈다. 멘델스존도 [이탈리아 교향곡] 1악장에서 교향곡이 춤곡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멘델스존이 [이탈리아 교향곡]에서 1악장에서 선보인 춤은 베토벤의 음악보다는 좀 더 빠르고 발랄하며

멘델스존 음악 특유의 화창함과 활기로 가득하다.

 

2악장은 영국 초연당시 당시에도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독특한 점이 많다. 이 곡은 베토벤 [교향곡

 7번]의 2악장처럼 느린 행진곡 풍이지만 그 느낌이 마치 찬송가 같아서 엄숙한 종교의식을 연상시킨다.

작곡가 모셀레스에 의하면 이 선율은 집시의 순례의 노래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순례자의 행진곡과도 같은 이 선율은 오보에와 바순, 비올라로 연주하게 되어있는데, 특이한 악기 배합으로 고풍스런 선율에는 이국적인 색채마저 느껴진다.

 

 

 

 

이탈리아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강과 로마 풍경 <출처: NGD>

 

 

 

[이탈리아 교향곡]의 2, 3, 4악장은 후에 개정이 됐기 때문에 두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멘델스존은 1833년에 이탈리아 교향곡을 완성하고 런던에서 초연한 후에, 갑자기 이 작품이 완벽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이듬해인 1834년에 개정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2악장과 3악장, 4악장을 수정했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 교향곡의 2, 3, 4악장은 1833년의  판본뿐 아니라 1834년의 개정판의 악보도 전해지고 있다.

개정판을 들어보면 독일적인 진지함이 더 강하게 느껴져 흥미롭다.

 

멘델스존은 본래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경치와이국적인 매력에 영감을 받아 이탈리아 교향곡을 밝게 작곡했으나 교향곡 초연 후에는 좀 더 독일적인 진지함을 가미해 작곡가 자신의 개성을 더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3악장에서 멘델스존은 스케르초인지 미뉴에트도 아닌 애매모호한 음악을 제시한다.

3악장은 보통 빠르기의 미뉴에트나 빠른 스케르초로 작곡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멘델스존은 [이탈리아 교향곡] 3악장에서 스케르초도 미뉴에트도 아닌 어중간한 템포로 유연한 멜로디를 선보이며 낭만적인 정서를 강조했다. ‘

트리오’라고 불리는 중간부분에서는 호른이 경쾌한 리듬을 선보이면서 목가적인 분위기를 전해준다.

 

4악장은 멘델스존이 작곡한 음악 중에서는 꽤 격하고 긴박감에 넘치는 음악이다. 멘델스존의 작품들은 대개 지나치게 극단으로 흐르는 일이 드문데 [이탈리아 교향곡] 4악장에서만큼은 ‘리듬의 신격화’라고 불리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의 격렬함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멘델스존은 4악장 악보에 ‘살타렐로’라고 적어놓았는데, 이것은 13세기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추던 빠른 춤곡이다.

 살타렐로는 공중으로 빠르게 도약하면서 추는 춤이니만큼, [이탈리아 교향곡] 4악장 앞부분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추는 느낌이 든다.

 

 

 

 

 

 

 

 

 

 

함부르크 태생인 독일의 작곡가.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서 태어나, 어릴 때 베를린으로 이주했는데, 일찍부터 음악적으로 풍부한 교육을 받았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던 집안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이 그의 집에 모였고, 일요일에는  음악회를 열었다.

 

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는데,그가 연주회에 처음으로 나간 것은 9세 때였다.

 이듬해 가창 학교에 입학하고, 그 해 가을에 그 자신의 성경의 시편에 곡을 붙인 노래가 학교에서 연주되었다. 이

 해부터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시인 괴테를 방문한 것은 15세 때였다.

 

 16세 때 부친과 함께 스위스와 파리로 가서 유명한 작곡가와 파리 음악원의 원장 케루비니를 방문하여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곳에서 마이어베어나 롯시니 등과도 알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의 서곡을 작곡한 것은

17세 때이고, 그 이듬해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이나 문학 강의를 듣고 높은 교양을 몸에 익혔다.

1829년에는 스승인 쩰터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하 사망 후 처음으로 《마태 수난곡》을 지휘 상연해서.

잊혀져 있던 바하의 진가를 인정시키는 주도자로서 활약하여, 당시의 예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공적은 크다.

1829년에 모셸레스의 초대로 런던으로 가서, 처음으로 연주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 때 자작의 제1교향곡을 지휘했는데, 그 당시의 습관에 따라 피아노를 치면서 지휘했다.

이 교향곡은 필하모니 협회에 증정되었는데,그것은 그가 명예 회원으로 추대된 답례였다.

그는 훌륭한 인품과 넓은 교양으로 영국에서 대단한 호평을 말았으며, 그 뒤 베토벤의 제 5 피아노 협주곡을

처음으로 연주하여, 그의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독일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음악회가 끝난 뒤,스코틀랜드에 여행하여 그 당시의 인상을 《스코틀랜드 교향곡》과 《핑갈의 동굴》로 표현했다.

 

1830-31년에 이탈리아, 1832년에는 파리로 여행하여 베를리오즈, 리스트, 쇼팽과 만났다.

독일로 돌아와서는 관현악단 설립 기금 모집을 위한 연주회를 열거나, 극장에서 교회 음악을 시범 연주하거나,

라인 지방의 음악제를 지휘하기도 했다.

1835년에는 게반트하우스 음악회의 지휘자가 되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해서 라이프찌히가 유럽 음악의 중심이 되도록 진력했다.

 

그는 또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비트를 초대해서 현악기의 연주 방법을 개량했고,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의 반은 다비트의 조력을 입은 것이다.
1837년에는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고, 1841년에는 빌헬름 4세의 부탁을 받아, 베를린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지휘하여, 예배당 합창단의 이름을 세계에 떨치게 했다.

 

1843년에는 라이프찌히 음악학교를 창설하여, 그 후로 지휘자와 작곡가로서 다망한 활약을 계속 했다.

그는 열 번이나 런던을 방문했으며, 의가 좋았던 누이의 죽음에 낙심한 것과, 과로 때문에 누이가 죽은 지 반 년만에

 라이프찌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현악곡은 주제나 성부의 진행에 있어서, 또 그 형식에 있어서 고전주의의 이념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러나 신선한 낭만주의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 작품들은 색채 풍부한 풍경화라고도 할 수 있다.

실내악은 형식과 성부 내용과의 균형이 잡혀 있고, 이런 종류의 많은 걸작을 작곡했다. 피아노곡은 재치에 넘치고,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 그는 음악사적으로 보아서 개척자나 모방자도 아니다.

 

그의 개성은 낭만적인 풍부한 이념이 고전적 형식미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 고귀한 형식에 대한 섬세한 감정,

무리가 없는 화성과 선율과의 처리에 대한 세밀성 등이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아하고 유려한 악상도 특색의 하나로, 초기 낭만파의 대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주요 작품]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1822), 5곡의 교향곡 중 《스코틀랜드 교향곡》(1842), 《이탈리아 교향곡》

(1833), 서곡 《핑갈의 동굴》(1830),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1842), 오라토리오 《엘리아》(1846), 피아노곡집 《무언가》(1834), 기타 실내악곡, 합창곡, 《노래의 날개 위에》를 포함한 가곡 등.

 

 

 

 

 

 

 


 

멘델스존 하우스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  골드슈미트 거리Goldschmidtstraße)

멘델스존은 이곳의 작업실에서 19세기 최고의 오라토리오로 꼽히는
'엘리아스'(Elias)를 작곡했다.


건물 3층에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음악학 연구소가 있다.
1층에는 라이프치히대학 부속 음악도서관의 일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정원과 실내악 연주홀이 있다.

 

 

 



멘델스존 하우스에 전시된 피아노



멘델스존의 데드마스크와 그의 머릿카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