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avo Järvi/hr-Sinfonieorchester - Mendelssohn,
A Midsummer Night's Dream
Midsummer Night’(한여름 밤)이란 6월 24일(하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전날 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래 고대 켈트족의 드루이드 신앙에서 비롯된 축제였다가 그리스도교 축일로 바뀌었지만 고대의 민간전승은 그대로
살아남아 요정과 마법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서곡’과 ‘결혼 행진곡’으로 유명한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은 음악회에서는 보통 서곡, 스케르초, 간주곡, 녹턴, 결혼 행진곡의 5곡이 연주됩니다.
파보 예르비/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은 Ouvertüre(서곡) - Scherzo(스케르초) - Lied mit Chor(두 사람의
소프라노를 위한 노래와 여성 합창곡) - Allegro appassionato(알레그로 아파시오나토) - Con moto tranquillo
(콘 모토 트란퀼로) - Hochzeitsmarsch(결혼 행진곡) - Ein Tanz von Rüpeln(뤼펠린에서의 무도회) - Finale
(피날레)의 8곡을 연주합니다
“내일부터 나는 ‘한여름 밤의 꿈’을 꾸기 시작할 것입니다.”
1826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깊이 매료된 17세의 멘델스존은 <한여름 밤의 꿈> 서곡으로 그의 꿈을 실현해냈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하는 그 가볍고 경이로운 음향세계는 여태까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신비로운 마법의 소리였다.
목관악기가 연주하는 네 번의 코드가 긴 여운을 남기고 부드러운 현악기가 들려오면 갑자기 바스락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요정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바이올린,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흉내 낸 금관악기 소리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꼭 빼닮았다.
일찍이 이 놀라운 음악에 감격한 슈만도 “마치 요정들이 직접 연주를 하는 듯하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환상과 동심, 요정의 날갯짓까지 그려낸 놀라운 음악
그로부터 17년 후, 꿈같은 사운드로 담아낸 <한여름 밤의 꿈> 서곡 Op.21은 여러 극음악을 거느린 진정한 서곡으로 거듭났다. 1843년에 멘델스존은 이 서곡에 몇 곡의 음악을 덧붙여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 Op.61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한여름 밤의 꿈’을 꾸기 시작한 멘델스존은 서곡을 작곡했을 때보다 두 배나 더 나이를 먹었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환상과 동심으로 가득했다. 새로 작곡해 덧붙인 극음악은 단순히 연주회용이 아니라 연극 공연을 위한 것이었기에 독창자와 합창이 더해져 극적인 표현이 더 강조되었다.
그중 첫 번째 곡 ‘스케르초’는 날아오를 듯 가벼운 목관악기의 리듬으로 시작된다. 발레리나의 가벼운 발놀림 같은 이 경쾌한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마법의 숲속에서 요정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이후 요정의 숲에서 벌어지는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는 ‘요정들의 행진곡’, 아리아 ‘얼룩무늬 뱀, 두 대의 혀로’, ‘멜로드라마’, ‘간주곡’, ‘녹턴’, ‘결혼 행진곡’, ‘팡파르와 장송 행진곡’, ‘베르가마스크’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마지막 ‘피날레’에서 ‘서곡’을 열었던 바로 그 신비로운 목관의 화음이 재현되며 멘델스존의 극음악은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연인들의 추격전
그럼 여기서 멘델스존에게 영감을 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자. 이 이야기는 오베론 왕이 다스리는 요정의 숲에서 헤매는 두 쌍의 커플들의 엇갈린 사랑과,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요정의 왕이 그들의 사랑을 제대로 맺어주며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식으로 진행된다.
요정의 숲 속에서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두 쌍의 커플들이 헤매고 있다. 헤르미아는 드미트리어스와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한 채 사랑하는 라이샌더와 함께 도망 중이고, 드미트리어스는 사랑하는 헤르미아를 찾아
숲 속을 뒤지는 중이며, 드미트리어스를 사랑하는 헬레나는 드미트리어스의 뒤를 쫓아 역시 정처 없이 숲속을 헤맨다.
▶<한여름 밤의 꿈>에 등장하는 라이샌더와 헤르미아
그들 중 가장 불쌍한 이는 아마도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희망 없는 추격을 계속하고 있는 헬레나이리라. 요정의 왕 오베론은 헬레나를 가엾게 여겨 그녀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낸다.
누구든 에로스의 화살을 맞은 사랑의 꽃의 즙을 사람의 눈꺼풀에 붙이면 눈을 뜨는 즉시로 보이는 것에 정신없이 반해버리게 되니, 젊은이들이 잠든 사이에 꽃즙을 발라 드미트리어스와 헬레나를 맺어주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사실 오베론은 꽃즙의 마법을 자기 아내 티타니아에게 쓰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티타니아가 인간세계의 아름다운 소년을 빼앗아 간 후 되돌려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베론은 우선 퍼크를 시켜 헬레나의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러나 퍼크는 일을 서두르다가 그만 라이샌더의 눈에 꽃즙을 바르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라이샌더가 헬레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퍼크는 그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다시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꽃즙을 발라서 이번에는 드미트리어스가 헬레나에게 반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남자가 헬레나한테 반하는 바람에 일이 더 복잡하게 돼버렸다. 헬레나는 모두가 자기를 놀리는 것이라고 화를 냈고, 헤르미아는 라이샌더가 그렇게 금방 마음이 변할 리가 없다고 하며 이상해한다.
잠자는 티타니아의 눈꺼풀에 꽃물을 바르는 요정 퍼크
결혼식장에서 항상 연주되는 ‘결혼 행진곡’
한편 퍼크는 왕비 티타니아를 혼내주려는 오베론의 명을 받아 잠자는 티타니아의 눈꺼풀에 꽃즙을 바르고는 티타니아 곁으로 당나귀로 분장한 보텀을 보낸다.
티타니아는 눈 뜨고 나서 제일 처음 본 보텀에게 반해버리게 되고 오베론은 기뻐한다. 그러나 퍼크의 실수로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어스는 서로 헬레나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까지 벌이게 되어 사태가 더 혼란스러워진 것을 본 오베론은 퍼크에게 화를 내며 빨리 원래대로 사태를 되돌리라 명령한다.
이에 퍼크는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어스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하고 어둠의 밤이 빨리 깔리게 한 후 라이샌더가 잠에 들자 즉시 눈꺼풀에 달린 꽃즙을 없애 두 쌍의 연인들의 관계를 정상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티타니아도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게 해 오베론과 화해한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던 연인들의 추격전이 끝나고 두 쌍의 커플이 맺어지자 헤르미아의 아버지 에게우스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신랑감으로 점찍은 드미트리어스가 헬레나에게로 마음을 돌렸으니 어찌하랴. 이번 일이 잘 해결되자 무척 기뻐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자기의 혼례식 날에 모두를 초청한다. 새로 맺어진 커플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퍼레이드와 무도회가 벌어진다.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결혼 행진곡’은 바로 이 화려한 결혼식을 위한 음악이다. 예식을 마치고 이 세상을 향해 행진하는 신랑과 신부를 위한 축복의 음악은 아마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의 발췌곡이 연주될 때도 ‘결혼 행진곡’은 결코 빠지지 않는다. <한여름 밤의 꿈>의 극음악이 음악회에서 연주될 때는 대개 서곡, 스케르초, 간주곡, 녹턴, 결혼 행진곡의 순으로 연주된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유대인 부모인 아브라함과 레아 잘로몬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에게서 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멘델스존의 가문은 혈통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지만, 19세기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유대인 집단의 울타리에서 벗어났음을 나타내려 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남동생과 2명의 누이와 함께 어린 나이에 루터교 세례를 받았다.
바르톨디라는 이름은 원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부유한 삼촌이 스프레 강가에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이름이자 그의
이름이었는데, 삼촌의 재산이 멘델스존 가족으로 넘어오자 가족의 이름으로 포함해서 부르게 되었다.
1811년 프랑스가 함부르크를 점령하는 동안 멘델스존 가족은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멘델스존은
루트비히 베르거에게 피아노를, 작곡가이자 선생으로 그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K.F. 첼터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밖의 선생들도 어린 멘델스존에게 문학·풍경화 등을 가르쳤으며, 그결과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예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아 교양을 살찌웠으며 학습과 연구로 자극을 받기도 했다.
누이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면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모차르트 음악에 익숙해졌다.
소년시절 동안 5개의 오페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11곡의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푸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이중 대부분은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에 오랫동안 필사본으로 보관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분실되었다.
1818년 9세 때 베를린에서 첫 공개 연주를 했다.
헌정하면서 노년의 괴테와 12세의 음악가 멘델스존 사이에 우정이 싹텄다.
1825년 파리에서 루이지 케루비니가 그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샀고, 다음해 〈한여름밤의 꿈〉 서곡으로 작곡가로서
관현악 편성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법을 예견하고 있었다.
지휘자로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한 그는 1829년 3월 11일 베를린 징아카데미(Singakademie)에서 바흐가 죽은 뒤
Freischütz〉에 자극을 받아 민족적 성향의 작곡에 고무되었다.
이 시기의 최고 작품은 현악 8중주(1825)로, 완벽한 기교와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가벼운 터치가 돋보일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서 발전시킨 경쾌한 스케르초 악장은 〈한여름밤의 꿈〉 부수음악에서도 나타났다.
1829년 봄 런던필하모닉 소사이어티와 교향곡 C단조를 지휘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국 여행을 떠났고, 여름에는
스코틀랜드로 갔다.
향기로운 시골길로, 마음은 원주민의 맨종아리로 향해 있다"고 적었다.
애보츠퍼드에서 월터 스콧 경과의 만남은 그에게 귀중한 체험이었고, 문학적·회화적·음악적 요소들은
상상 속에서 종종 뒤섞여 나타났다.
헤브리디스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연안에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을 묘사하는 글귀를 적었고, 여기에 더해
1830~32년 사이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스위스 등을 여행했고, 1832년 런던으로 돌아와 〈헤브리디스 서곡〉을
지휘했으며 그곳에서 1830년 베네치아에서 완성한 〈무언가 Lieder ohne Worte〉의 첫 권을 출판했다. 매력적이고
우아한 작품들로 그는 점차 19세기의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가 되어갔다.
되었다.
1843년 버킹엄 궁전에서 영국 여왕과 여왕의 부군을 만났다.
그가 이 만남에 대해 다소 냉소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들에게 충분히 매력을 느꼈으면서도 한편으로
영국 여왕의 권위가 주는 장려함과 허위의식의 이중적 측면을 동시에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스코틀랜드 교향곡
Scottish Symphony〉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정한 곡이다.
멘델스존이 영국 청중들의 사랑을 받은 데에는 또다른 요인이 있었다.
이 곡은 멘델스존이 죽은 뒤인 1858년 영국 공주의 결혼식 때 〈한여름밤의 꿈〉에 포함된 〈결혼행진곡
Wedding March〉이 연주된 것을 계기로 이 곡은 결혼식장에서 즐겨 연주되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 Emperor〉와 G장조 협주곡을 런던에서 초연했는데, 암보로 연주한 최초의 연주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기억력은 천재적이었다. 그는 또한 오르간 작품들로도 유명했다.
되었다.
그러나 죽은 뒤 반발 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후대의 영국 작곡가들은 바그너·드뷔시·스트라빈스키 등에 심취하면서멘델스존의 인기에 반기를 들었으며,
그의 일부 작품들의 감상적 성격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멘델스존이 처음에는 연주를 통해, 나중에는 작곡을 통해 영국의 음악을 동면상태에서
일깨워주었다는 사실이다.
첫 영국 방문 뒤에 이어진 긴 여행에서 그는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고, 이 여행의 생생한 경험들은 그의 긴
편지들에 담겨 있다.
그는 괴테의 권유로 읽게 된 로렌스 스턴의 〈감상적 여행 Sentimental Journey〉에 감동을 받아 생동감있게 자신의
감상을 기록했다.
베네치아에서는 티치아노와 조르조네의 회화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청 가수들에 대해서는 이들의
'음악성이 아주 떨어진다'고 생각했고, 그레고리오 성가는 '알아들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베를리오즈에게 가죽으로 살짝 덮은 날렵한 고래뼈 지휘봉을 선사했다.
이들이 교환한 지휘봉의 차이는 이 두 인물의 대조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1833년에 멘델스존은 런던을 또다시 방문하여 〈이탈리아 교향곡〉을 지휘했고, 같은 해에 뒤셀도르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뒤셀도르프에서 그는 교회 예배 음악에 베토벤·케루비니의 미사곡과 바흐의 칸타타를 도입했고, 마찬가지로
같은 곳에서 첫 오라토리오 〈성 바울로 St. Paul〉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835년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이 악단의 연주 수준을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라이프치히를 독일 최고의 음악 도시로 만들어놓았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쇼팽·슈만과도 친교를 맺었고,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첫 연주에서 서곡 〈바다의 고요함과
행복한 항해 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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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성숙기]
1835년 멘델스존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었다.
만났다.
그녀는 16세로 멘델스존보다 10세나 어렸지만, 이 둘은 약혼에 이어 1837년 3월 28일 결혼식을 올렸다.
영리하고 좋은 성격을 가졌다.
멘델스존은 아주 행운아인 것 같다.
그녀는 그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며, 그가 변덕을 피워도 동요하지 않고 변함없이 그를 돌봄으로써 어느새
그의 성마름을 치유해준다"라고 최상의 칭찬을 했다.
멘델스존은 누이에게 감성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끌렸다.
그녀는 상당한 작곡 실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무언가〉 중 일부는 그녀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그녀는 누이의 역할을 다하여 멘델스존의 음악 세계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뒤 몇 년 동안 작곡된 곡에는 피아노를 위한 〈진지한 변주곡 Variations sérieuses〈찬미가 Lobgesang〉
·
〈시편 104 Psalm CXIV〉, 피아노 협주곡 2번, 수편의 실내악 곡들이 있다. 1
그는 평소에는 작품을 빨리 써서 편지쓰듯이 쉽게 곡을 끝마쳤지만,곡만큼은 최고의 천재적인 서정적 표현성을
이루기 위해 6년간이나 전력을 기울였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후 20세기에 와서는 선율의 따스함과 활달함으로 사랑을 받았으며, 19세기의 향수에 젖은
감상자에게는 19세기의 우아한 음악 언어를 간직한 곡으로도 사랑을 받아왔다.
과장되고 극적인 브람스, 벨라 바르토크, 알반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이 작곡된 다음에도 곡의 인기는 여전하다.
멘델스존의 작품 중 많은 곡들은 아기자기한 세공과 같이 작고 깔끔하며, 즐거운 초상화처럼 묘사적이기는 하지만
낭만주의 본래의 깊이를 결여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그밖의 여러 실내 악곡들에서 볼 수 있듯이, 매력적이고 순진무구하며 신선하면서도
그 자체로 심오한 낭만적 경이감을 전달하고 있는 곡들도 많이 있다.
1843년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에 음악원을 세웠고, 슈만과 함께 작곡을 가르쳤다.
이어서 런던과 버밍엄을 방문했고, 점차 많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당시 아주 열성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이 정도의 일로 건강을 해칠 그가 아니었지만 1847년 5월
누이 파니 죽음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처럼 열심히 살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멘델스존에게 있어서 가깝게 지내던 혈육의 죽음은 그의 삶 자체를 망가뜨릴
정도였다.
그는 기력을 잃었고 6개월 후 혈관 파열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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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오늘날 우아하고 세련된 멘델스존의 음악이 빅토리아 시대에서의 그의 위치처럼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의 음악은 다재다능한 19세기 작곡가인 멘델스존을 그 시대의 중요한 예술가들과 하나로 묶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는 〈한여름밤의 꿈〉에서 당나귀의 유쾌한 중얼거림을 바순으로 표현했고 오베론의 호른으로 환기시키는 효과를
내서 셰익스피어 '요정의 왕국'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가 〈핑갈의 동굴 Fingalshöhle〉에서 보여준 인상주의적 기법의 싹은 후대의 화가인 J.M.W. 터너의 기법을
암시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강점이 관현악을 위한 독특한 음을 만드는 데 있다고 이해했으며 자신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Fligender Holländer〉에서 그 기법을 보여주었다.
20세기 프랑스의 작곡가들 역시 형식의 완성미를 보여주는 우아한 멘델스존의 음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멘델스존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엘리아〉가 그만큼 자주 공연되지는 않고 가벼운 피아노곡 중 일부는 베토벤과 슈만의 진지한 작품에 압도되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림같이 생생하고 위대한 교향곡 〈스코틀랜드〉·〈이탈리아〉는 계속해서
신선한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멘델스존은 19세기 최초의 위대한 자연주의 작곡가이며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까지도그 가치가 재발견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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