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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David Bowie - Lazarus ,Let's Dance



















Lazarus




Look up here, I’m in heaven
I’ve got scars that can’t be seen
I’ve got drama, can’t be stolen
Everybody knows me now



Look up here, man, I’m in danger
I’ve got nothing left to lose
I’m so high it makes my brain whirl
Dropped my cell phone down below



Ain’t that just like me
By the time I got to New York
I was living like a king

Then I used up all my money
I was looking for your ass



This way or no way
You know, I’ll be free
Just like that bluebird
Now ain’t that just like me



Oh I’ll be free
Just like that bluebird
Oh I’ll be free
Ain’t that just like me







 



Let's Dance




(Let's Dance) Put on your red shoes and dance the blues

(춤추자) 빨간 신발을 신고 블루스를 춰

(Let's Dance) To the song they're playing on the radio

(춤추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Let's Sway) While colour lights up your face

(흔들자) 얼굴을 밝게 색칠하면서

(Let's Sway) Sway through the crowd to an empty space

(흔들자) 빈 공간의 군중 사이에서 흔들어


 

If you say run, I'll run with you, if you say hide, we'll hide

네가 뛰라면 너와 함께 뛸 거고, 숨으라면 우린 숨을 거야

Because my love for you would break my heart in two

너에 대한 내 사랑은 내 맘을 갈라놓을 테니


If you should fall, into my arms and tremble like a flower

네가 내 품에 스러져 꽃같이 떤다면

(Let's Dance)

 

(Let's Dance) For fear your grace should fall

(춤추자) 네 품위가 떨어질 거라는 공포를 위해

(Let's Dance) For fear tonight is all

(춤추자) 오늘밤이 다 일거라는 공포를 위해



(Let's Sway) You could look into my eyes

(흔들자) 넌 내 눈을 들여다 볼 수 있어

(Let's Sway) Under the moonlight, this serious moonlight

(흔들자) 달빛 아래, 이 진지한 달빛 아래에서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영어: David Robert Jones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 또는 가명인 데이비드 보위

(영어:David Bowie 데이비드 보이[*], /ˈbi/,1947년 1월 8일 ~ 2016년 1월 10일)는 영국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이다.


 50년간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한 보위는 - 특히 1970년대 작업물을 통해 - 평론가에게 혁신적인 음악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활동 시기 동안 재창조와 시각 표현을 거듭했으며 음악과 무대 창조는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보위는 자신의 생애 동안 140백만 장의 음반을 전 세계적으로 팔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중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영국에서 아홉 개의 플래티넘, 열한 개의 골드, 여덟 개의 실버 인증를 받았으며 열한 개의 음반을 차트 정상에

올려놓았다.

미국에서는 다섯 개의 플래티넘, 일곱 개의 골드 인증을 받았다.

그는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사우스런던 브릭스톤 태생인 보위인 어릴 적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으며, 결국에는 예술, 음악, 디자인을 배워

전문적인 음악가 경력을 1963년부터 착수했다. 〈Space Oddity〉는 1969년 7월 발표 뒤 영국 음반 차트에서 상위 5위에 오른 그의 첫 싱글이다.


 실험 활동을 거친 그는 1972년 음악을 재개, 자신의 글램록 시기 동안 이색적이고 양성적인 제2의 자아인 지기

 스타더스트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성공을 거둔 싱글 〈Starman〉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끈 음반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으로 캐릭터를 내세운 보위는 1975년 "플라스틱 솔"을 캐릭터화시켜 자신을 철저히 바꾼다.


이 행동은 당초 영국에서 그의 열혈팬의 반발을 샀으나 미국에서는 싱글 〈Fame〉과 음반 《Young Americans》을

통해 처음으로 메이저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76년 보위는 컬트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에 출연하고 음반 《Station to Station》을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일렉트릭 음악을 접목한 음반 《Low》 (1977)을 발표하면서 음악적 예상을 깨뜨렸다.


 이 음반은 브라이언 이노와의 세 번의 협업 중 첫 번째로 이는 이후 "베를린 삼부작"으로 일컬어진다.

뒤를 이어 발표된 《"Heroes"》 (1977)와 《Lodger》 (1979)는 영국 차트 상위 5위에 진입, 지속적인 극찬을 받았다.

1970년대 말의 굴곡진 성공 이후 보위는 1980년 싱글 〈Ashes to Ashes〉로 영국 정상을 차지, 이 노래의 모음반인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과 〈Under Pressure〉은 1981년 퀸과의 합작품이었다.


 1983년에는 《Let's Dance》로 상업적 성공의 점정을 찍었으며 음반의 타이틀 곡은 영국과 미국 차트 둘 다 정상에

 올랐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사이 보위는 인더스트리얼정글을 비롯한 음악 스타일을 계속해서 실험했다.


그는 장편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에서 셀리어스 소령 역을, 《사라의 미로여행》에서 고블린의 왕인

자레스 역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1988)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 역을, 《프레스티지》 (2006)에서 니콜라

 테슬라 역을 비롯하여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주역 및 조연, 카메오를 맡아 연기 활동도 계속했다.


2004년부터는 투어 콘서트를 그만두었고, 2006년 자선 공연이 그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이었다.

2013년에는 10년간의 음반 공백을 깨고 《The Next Day》를 발표했다.

이후로도 음악 활동을 이어나간 보위는 암으로 죽기 2일 전 유작 《Blackstar》 (2016)를 남겼다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는 1947년 1월 8일 잉글랜드 사우스런던 브릭스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가렛 메리 "페기" (Margaret Mary "Peggy", 1913–2001)[2][3]는 켄트 주 태생이며 아일랜드 혈통이다.

그녀는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요크셔 출신[6]인 아버지 헤이우즈 스텐톤 "존" 존스(Haywood Stenton "John" Jones, 1912–1969)는 아동

재단 버나도스의 홍보 관계자였다.

보위 일가는 인근에 사우스런던의 브릭스톤과 스톡웰의 경계가 있는 스탠필드 거리 40번지에서 살았다.


보위는 스톡웰 영아학교에서 6살까지 재학, 외골수와 같은 마음씨로 주변에서 좋은 평판을 쌓았으나 한편으로는

 반항아이기도 했다.

1953년 보위 일가는 브롬리의 외곽으로 이사했으며 2년 뒤 번트 애시 주니어 스쿨에 입학했다.

그의 목소리는 학교성가대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평균 이상의 리코더 연주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9세가 되던 해에는 새롭게 개설된 음악 소개 및 운동 수업에서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무용을 선보였으며 선생님은

 그를 "생생하면서도 예술적"이라고 표현, 급우들은 그의 포즈를 "기가 막히다"고 표현했다.

 같은 해 음악에 가진 그의 관심은 아버지가 사오신 미국의 45s 음반(더 틴에이저스, 더 플래터스, 패츠 도미노,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리처드 들의 음악가)으로 더욱 구체화된다


 보위는 자신이 리틀 리처드의 〈Tutti Frutti〉를 처음 들었을 때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을 듣고 있었다."

프래슬리 또한 같은 충격을 전했다.


그는 "전 사촌이 〈Hound Dog〉을 틀며 마인 댄스를 추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전 그녀가 일어나서 그런 춤을 추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그 음악이 내포한 힘에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바로 음반을 구입했어요."

 다음해 말에 그는 우쿠렐레와 차상자 베이스를 가져와 친구들과 스키플 세션을 가졌으며,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한편, 동네 울프 클럽에서 프레슬리와 척 베리에게 바치는 수많은 공연을 펼친 그를 본 사람들은 "넋을 빼놓았다 ...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 같았다."고 표현했다

 일레븐 플러스 시험을 친 뒤 보위는 브롬리 기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전기 작가 크리스토퍼 샌드 포드에 의하면 이 학교는 기술 학교 치고는 이상했다.


그곳의 상황에도 불구, 데이비드가 1958년 입학할 당시 그 어떤 [영국의] 공공 학교보다도 신비로운 의식이 넘쳐났다. 거기엔 하우스가 있었다.


피트와 윌버포스 같은 18세기 정치인의 이름을 따 이름이 붙여졌다.

거기엔 유니폼과 보상과 처벌에 대한 복잡한 규정이 있었다.

언어학, 과학, 특히 디자인도 받아들였으며 오웬 프랩튼 지도 교사의 지시 아래 대학생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데이비드에 대해서 플랜튼은 지성 대신 인격의 힘으로 지도했다. 브롬리 기술 재학 시기 그의 동료들 어느 누구도

 유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는 예술에 재능있는 학생을 배출했다.

프랩튼의 체제는 정말 민주적이었으며, 자신의 아들 피터를 독려하여 데이비드가 음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했다.

피터는 그와 30년지기 파트너가 되었다.


보위는 레이아웃과 조판을 비롯한 예술과 음악, 디자인을 공부했다.

 자신의 이복형 테리 번스에게 모던 재즈를소개받은 이후 찰스 밍거스, 존 콜트렌스를 연주하는데 열성을 보인 그는

 1961년 어머니를 설득하여 플라스틱 알토 색소폰을 샀다.


곧이어 동네 음악가의 수업을 받았다.

 1962년 보위는 한 소녀를 놓고 친구 조지 언더우드와 싸우다 그의 주먹이왼쪽 눈에 가격되어 심한 상처를 입는다.

4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며 몇 차례 수술을 받았고, 의사는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못할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말했다.


보위는 왼쪽 눈은 이후 거리 감각이 떨어지고 영구적으로 동공이 확대되게 되는데, 이 부상으로 홍채 색상이 변하여

독특한 인상을 가져다 줬다.

 이 싸움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와 보위는 좋은 친구로 남았으며 언더우드는 보위의 초기 음반 자켓을 디자인해줬다











경력


1962년 15세의 보위는 처음 자신의 밴드를 결성한다.

기타를 기반으로 로큰롤을 연주한 더 콘라즈는 동네의 청소년 모임이나 결혼식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더 콘라즈의 라인업은 네 명에서 여덟 명까지 다양했는데, 그 중에 언더우드도 속해 있었다.


 이듬해 기술 고등학교를 나간 보위는 부모님에게 팝 스타가 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머니는 즉각 그를 전기 기술자로 일하게 하기 위해 주선을 했다.

 밴드메이트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보위는 더 콘라즈를 떠나 더 킹 비즈에 합류한다.


그는 세탁기 사업으로 성공한 참인 존 블룸에게 편지를 쓴다.

 "비틀즈를 위해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했던 일을 우리에게 해 주세요.

그리고 다시 때돈을 벌자구요." 블룸은 답장을 쓰지 않았으나, 그는 딕 제임스의 동업자 레슬리 콘에게 이첩하여

보위는 처음 전문적인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는다.



콘은 급히 보위의 홍보를 시작했다. 보위의 첫 싱글인 〈Liza Jane〉은 데이비 존스 앤드 더 킹스 비즈 명의로 발표,

뚜렷한 상업적 성공은 없었다.

그들과 하울링 울프윌리 딕슨의 블루스 곡을 녹음하는 레퍼토리에 불만을 느낀 보위는 밴드를 그만두고는 몇 달

 뒤 블루스 그룹이기는 하나 포크와 솔도 부르던 더 매니시 보이스에 합류한다. 보위는 "전 믹 재거가 되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들은 버디 블랜드의 〈I Pity the Fool〉를 커버하여 발표하나 〈Liza Jane〉의 판매량 조차 넘지 못했다.

보위는 또다시 밴드를 옮겨 더 후의 영향을 짙게 받은 블루스 트리오 더 로우 서드에 합류한다.

이후 발표한 You've Got a Habit of Leaving〉도 별 성과를 거두시 못하며 콘과의 계약은 파기되었다.

보위는 "새들러즈 웰즈에서 마임을 배우겠다"며 팝계에서 나가겠다 선언하지만 더 로우 서드를 탈퇴하지는 않았다.


새롭게 매니저가 된 랄프 로튼은 보위가 솔로 활동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버즈라는그룹에 합류하여 다섯 번째 싱글 〈Do Anything You Say〉을 발표하나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더 버즈에 있을 당시 더 라이엇 스쿼드에도 들어와 함께 녹음 작업을 하며 보위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곡도 불렀으나 발표되지 않았다. 호튼을 소개시켜 준 켄 피트는 이후 보위의 매니저직을 넘겨받았다.


1966년 중반 몽키스의 데이비 존스와 혼동을 불러 일으킨 데이비 존스 앤 더 로어 서드라는 무대 이름에 만족하지

 못한 보위는 19세기 미국 국경 지방의 주민인 제임스 보위와 그의 칼 이름을 따서 이름을 바꿨다.

 1967년 4월 발표된 싱글 〈The Laughing Gnome〉에서는 고음 보컬을 도입하였으나 차트에서 실패한다.


6주 후 보위는 , 사이키델릭, 뮤직홀을 섞은 자신의 데뷔 음반을 발표하나 거듭 실패한다. 이후 2년간 음반을

발표하는 일은 없었다.









1968–1971: 《Space Oddity》, 《Hunky Dory》

1967년 무용가 린제이 켐프를 만난 보위는 런던 댄스 센터에서 진행되는 그의 댄스 수업에 등록했다.

 그는 1972년에 켐프와의 만남이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감정 속에서 살면서 멋진 영향을 주었어요. 나날이 살아가던 그의 모습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극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건 제가 꿈에 그리던 보헤미아였어요. 서커스에 참여하기로 했죠."

 보위는 켐프 아래에서 극예술을 배웠으며, 아방가르드 극장과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마임을 통해 페르소나를 창조하여 세계에 선보이게 된다.


 영국 죄수의 삶을 풍사하는 한편, 오스카에게 그의 1967년 싱글이 되는 〈Over the Wall We Go〉를 써서 주기도

 했다.

당시 그가 쓴 〈Silly Boy Blue〉는 빌리 퓨리가 이듬해 발표한다

 1968년 1월 켐프는 시어터 625에서 열린 BBC 연극 《더 피스톨 샷》에서 무용을 연출하게 되었으며, 보위를

 헤르미오네 파딩게일이라는 상대역과 함께 무용수로 내보내었다.


 이 둘은 데이트를 시작하고 런던 내의 아파트에서 동거하게 된다. 통기타를 다룰 줄 알던 그녀는 보위, 기타 연주자

 존 허친슨과 함께 그룹을 결성하여 1968년 9월부터 1969년 초까지 포크, 머지비트, 시와 마임을 섞어 여러 공연을

 했다.


 보위와 파딩게일은 그녀가 《송 오브 노르웨이》의 촬영을 위해 떠나면서 1969년 결별했다.

 이 일에 영향을 받은 보위는 그녀를 언급한 〈Letter to Hermione〉와 〈Life on Mars?〉를 썼으며[30][31]

Where Are We Now?〉의 영상에서 "m/s Song of Norway"라는 문구가 그려진 티쳐츠를 입고 나왔다.


 이들은 1969년 1월 차량 홍보용인 30분 영화 《러브 유 팅 튜즈데이》를 위해 다시 만났다.

 이 영화는 1984년까지 미공개 상태였으며 영화 내에서 보위는 〈Space Oddity〉를 비롯한 공연 레퍼토리를 선보였다.[33]

결별 이후 보위는 메리 피니건과 동숙자로서 이사를 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라이온스 메이드사의 아이스크림광고에 출연했는데, 킷캣에서 요청한 광고는 거절했다.

1969년 2월에서 3월까지 마크 보란의 듀오 티라노사우르스 렉스와 함께 짧은 투어를 돌면서 마임 공연을 펼쳤다.

1969년 7월 11일 아폴로 11호 발사 5일 전 〈Space Oddity〉를 발표, 영국 차트에서 상위 5위까지 진입한다


 파딩게일과 함께 작업하면서 로큰롤과 블루스의 차이를 느껴온 보위는 피니건, 크리스티나 오스트롬, 베리 잭슨과 의기투합하여 베케넘 하이 거리의 스리 턴스 펍에서 일요일 밤마다 포크 클럽을 운영한다.

아트 랩 운동의 영향으로 베케넘 아트 랩이 설립, 이후 굉장히 유명해졌다.


아트랩은 동네 공원에서 무료 행사를 열었고, 그는 자신의 노래 〈Memory of a Free Festival〉로 이를 다루었다.

 보위의 두 번째 음반은 11월 영국에서 《David Bowi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 음반은 전작과 같은 명칭 때문에 혼동되기도 하여 초기 영국 판본은 《Man of Words/Man of Music》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72년 RCA 레코드는 《Space Oddity》라는 이름을 붙여 전 세계적으로 재발매했다.

 평화, 사랑, 도덕과 같은 후기히피들의 철학이 담긴 가사와 어쿠스틱 포크 록과 가끔 하드 록이 첨가된 음반은 발매

 당시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69년 4월 알겔라 버넷을 만난 보위는 그해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보위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관여하게 된다.

그녀는 보위가 불만을 가지고 있던 매니저 켄 피트를 해고했다


 〈Space Oddity〉로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굳힌 그는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과 공연과 녹음을 위한

 풀타임 밴드"를 하는 것에 부족함을 느낀다.

 이러한 결핍은 그의 세션 기타리스트 행세를 하던 마크 보란과의 음악적 경쟁으로 심화된다.


 밴드는 적절한 때에 다시 짜였다. 보위와 아트 랩에서 만난 드러머 존 케임브리지는 베이스 주자 토니 비스콘티

 일렉트릭 기타 주자 믹 론슨의 권유로 가입한다.

더 하이프로 알려진 이 밴드의 멤버들은 스파이더스 프롬 마스의 글램 스타일의 시초가 되는 자신들의 캐릭터를

 창조하며 정교한 코스튬을 입었다.


런던 라운드하우스에서의 처참한 첫 공연 이후 이들은 보위를 솔로 아티스트로 되돌려 놓았다.[39][40] 밴드의

 첫 스튜디오 작업은 드럼 스타일을 두고 일어난 보위와 케임브리지의 불꽃튀는 다툼으로 수포가 되었다. 자신을

 방해했다고 판단한 보위가 케임브리지에게 "니가 내 앨범을 망쳐놨어"라고 쏘아붙였을 때 갈등은 정점에 치달았다.


 케임브리지는 즉각 밴드를 탈퇴했고 그의 자리는 믹 우드맨시로 교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니 디프라이스와 교체된 매니저 피트가 자신에게 진 빚을 갚으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스튜디오 세션은 조현병, 편집증, 망상을 다룬 보위의 세 번째 음반 《The Man Who Sold the World》 (1970)을 위해 재개되었다.

 헤비 록 사운드로 특징 지어지는 그의 새 백 밴드는 《Space Oddity》에서의 통기타와 포크 록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줬다.


미국에서의 홍보를 위해, 머큐리 레코드에서 자금을 조달받아 1971년부터 1월부터 2월까지 미대륙을 가로지르는

투어와 동시에 라디오 방송과 매체를 통해 인터뷰를 한다.

그의 양성적인 모습을 최대한 활용한 영국판 오리지널 커버는 두 달 뒤 발표되었다.


 여기서 입고 나온 드레스를 인터뷰하면서도 입었다. 《롤링 스톤》의 존 멘델슨이 그를 "로런 버콜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움"이라 묘사하는 등 평론가들은 그의 행위를 호평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조롱과 함께 엇갈린 반응을 얻었으며, 총기를 생산하는 한 남성은 보위에게 "내 엉덩이에

키스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투어 기간 동안 보위는 자신의 지기 스타더스트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 두 프로토펑크 아티스트를

목격하게 된다.

이기 팝의 페르소나와 루 리드의 음악은 섞어 만든 "궁극의 팝 아이돌"의 탄생이었다.

 여자친구는 그의 "칵테일 냅킨에 휘갈겨 쓴 낙서에는 이기와 지기라는 미치광이 록 스타 이름이 있었다."고 말했으며, 보위는 영국으로 돌아와 "달에 착륙한 듯한" 캐릭터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는다.


 "스타더스트"라는 성은 투어에서 받은 음반 〈Legendary Stardust Cowboy〉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보위는 이후 자신의 2002년 음반 《Heathen》에 〈I Took a Trip on a Gemini Space Ship〉를 커버하여 취입한다.

비스콘티가 지원, 켄 스콧과 트레버 보더가 각각 대체자로서 제작과 베이스 주자를 맡은 《Hunky Dory》 (1971)는

부분적으로 〈Space Oddity〉의 비현실적인 팝 가수의 귀환이 엿보인다.


 가벼운 곡인 〈Kooks〉는 5월 30일 태어난 자신의 아들 덩컨 조이 헤이우드 존스를 위해 쓴 것이다.

 (그의 부모는 그리스어 조이(zoe)에서 따온 "이상한 이름"을 택한다.

 이후 12년간 그는 조위(Zowie)라고 알려지게 된다.)


 이외에도 음반은 진지한 주제를 탐구하면서 〈Song for Bob Dylan〉, 〈Andy Warhol〉, 〈Queen Bitch〉에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그랬듯 자신이 받은 영향들을 거리낌없이 오마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발표 당시 특별한 성공은 없었다.









두드러지는 복장을 착용, 머리카락을 적갈로 염색한 보위는 더 스파이더스 프롬 마스—론슨, 보더, 우드맨시—와 함께

1972년 2월 10일 톨워쓰에 위치한 토비 저그 펍에서 지기 스타더스트 무대를 초연한다.

 쇼는 굉장히 유명해졌으며 이후 영국을 가로지르는 6개월간의 투어를 통해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버클리가"보위 문화"라고 묘사한 이 현상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희귀하다. 이 영향력은 오래도록 지속되어 거의 모든 팝 밴드의 팬덤보다 더한 창조를 만들어내었다."


 세상의 종말을 5년 앞두고 화성에서 날아온 외계인 로커 ‘지기 스타더스트’가 인류를 구원하고 장렬히 죽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콘셉트 음반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는

 《The Man Who Sold the World》의 하드 록과 《Hunky Dory》의 실험 록과 팝을 섞은 것으로 6월 발표되었다.


 4월 싱글컷된 〈Starman〉은 영국에서의 인기를 더욱 가중시키게 된다.

싱글과 음반 모두 7월 탑 오브 더 팝스》 공연 노래 차트에 신속히 진입한다.


음반은 차트에 2년간 머물렀으며 《Hunky Dory》 또한 이 기세를 몰아 함께 진입한다. 모트 더 후플과 쓰고 제작한

 음반 미수록 싱글 〈John, I'm only Dancing〉, 〈All the Young Dudes〉이 같은 때 발표되어 영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지기 스타더스트 투어는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보위는 루 리드의 1972년 솔로 음반 《Transformer》에서 그와 믹 론슨과 공동 제작하면서도 백 보컬을 맡아줬다.

 이어 발표한 《Aladdin Sane》 (1973)은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 그의 첫 번째 차트 1위 음반이 만들어졌다.

 보위가 "미국에 간 지기"라고 묘사한 수록곡들은 미국을 가로지르는 지기 투어 초창기에 쓴 것이었으며 일본에서의

새 음반 홍보도 착실히 진행되었다.


《Aladdin Sane》은 〈The Jean Genie〉, 〈Drive-In Saturday〉 등 영국 차트 정상에 다섯 개의 싱글을 올려놓는다.

보위가 연기에 가진 사랑은 그가 음악을 위해 창조한 캐릭터에 완전히 빠져들게 만들었다.

"무대 밖에서 난 로봇이에요. 무대에 오르면 감정이 복받혀요.


그래서 데이비드보다 지기처럼 옷을 입고 사는 게 좋나봐요." 이러한 만족 뒤에는 개인적인 어려움이 닥쳐왔다.

 같은 배역을 장기간 맡아오면서 그는 지기 스타더스트와 무대 밖에서의 자신을 때어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보위는 지기가 자신을 "결코 홀로 둔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일이 틀어진 겁니다 ... 제 모든 인격이 좀먹혔어요.


굉장히 위험해졌습니다. 제 정신상태를 제대로 분별할 수가 없었죠."[55] 보위는 이후 《Ziggy Stardust》,

《Aladdin Sane》를 포함한 지기 쇼에 대해, 이것이 스모 복장을 벗거나 또는 론슨의 기타로 구강성교를 하는 척하는 등의 충격적인 무대 공연과 더불어 굉장히 극적인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


 보위는 투어를 종결하고 1973년 7월 3일 헌던 해머스미스 오데온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지기가 무대에서 갑작스래

 "은퇴"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마지막 공연이 같은 해 영화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로 제작되어 상영된다.


더 스파이더스 프롬 마스의 해체 이후 보위는 자신의 지기 페르소나를 옮길까 생각했다.

그가 이전에 발표한 음반들은 《The Man Who Sold the World》와 《Space Oddity》의 1972년 재판과 동시에

굉장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Hunky Dory》에 수록된 〈Life on Mars?〉는 1973년 6월 싱글로 발표되어 영국 싱글 차트에 3위까지 오른다.

 9월에는 같은 차트에서 보위의 신보 〈The Laughing Gnome〉가 6위까지 오른다.


 1960년대 그가 좋아한 곡들을 모아 커버한 음반 《Pin Ups》은 10월 발표되어 영국 차트 3위에 올랐으며, 그가 커버한 맥코이스의 〈Sorrow〉는 1위를 차지하여 보위가 영국에서 1973년 가장 많이 팔린 음악가로 기록되게 했다.

이들은 영국 차트에서 보위 음반이 여섯 개가 동시에 머무르는 상황을 연출했다.


1974년, 그러한 상황 중에 심기일전해 원점으로 복귀해서 음반을 제작하게 되었다.

작사 중에 윌리엄 버로우즈를 유명하게 한 "컷 업"의 수법을 도입한 콘셉트 음반 《Diamond Dogs》를 발표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전위 작가 윌리엄 S. 버로스의 소설에서 발상을 해서 만들었는데,[19] 오웰의 유족

으로부터 정식 허가는 받지 못하고 "1984년이란 말을 대대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1984년의 무대화도 안 된다.

"는 계약을 했다.


1974년 6월에 시작한 북미 투어에서는 록 사상 공전의 거대 무대 세트를 도입해 큰 호응을 얻었으나, 계속되는

 기자재의 말썽, 보위의 컨디션 불량으로 2개월 정도 투어가 중단됐다.

그 사이에 보위는 필라델피아 소울에 심취하게 되어 6주간 중단후에 재개된 북미 투어는 완전히 무시하게 되었다.


1975년, 카를로스 아로마를 파트너로 받아들여 《Young Americans》를 발표한다.

 미국 차트 1위를 획득한 존 레논과의 합작 싱글 〈Fame〉을 포함한 이 음반은, 필라델피아 소울에서 더욱 파고들어서 "백인은 얼마나 흑인음악인 소울에 근접할 수 있을까"라는 콘셉트로 만들어졌다.

이 음반 직후, 니컬러스 로그가 감독한 첫 주연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의 촬영을 시작한다.


 그는 영화 내에서 물을 찾아서 지구로 온 토마스 제롬 뉴튼(Thomas Jerome Newton)이라는 다소 난해한 외계인 

역할을 소화해냈다


1976년 스스로 주연영화의 내용에 영향을 받아, 또 오랜 기간 동안 약물사용, 중독으로 정신면으로 피로가 극에

달했었던 보위는 스스로 아이덴티티를 재점검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전작에 이어 "백인이며 유럽인인 나는 어떻게 흑인음악을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방향으로 바뀌어 새

콘셉트로 만들어진 음반 《Station to Station》을 내놓게 된다.


이 음반에서 보여 준 새로운 캐릭터인 씬 화이트 듀크(The Thin White Duke)는 시각적 측면에서 그가 주연한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의 캐릭터인 토머스 제롬 뉴튼(Thomas Jerome Newton)의 연장선에 있었으며, 음악적

으로는 전작인 〈Young Americans〉에서 보여준 소울 음악이 이어지는 한편, 이후 베를린 3부작에서 나타날

크라우트록과 신시사이저 음악을 예고하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음반이었다.


보위는 다시 가상 캐릭터 씬 화이트 듀크를 자칭하며 연기했다.

독일에서의 라이브는 나치즘을 강하게 의식한 무대로 구성되었다.


1975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는 히틀러를 옹호하는 듯한 아슬아슬한 발언을 하고 팬들 앞에서는 지크

하일(나치 경례) 같은 손짓을 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미디어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아 지기 스타더스트 이상의 위험

 인물로 간주되었다.










1976년 '마약과의 동거'로 파산한 후에는 독일 서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겨, 베를린 장벽 바로 인근 스튜디오에서

로버트 프립, 브라이언 이노와의 협업 작업으로 음반을 제작했다.

 이들은 나중에 베를린 3부작이라고 불려지는 음반 《Low》, 《Heroes》, 《Lodger》로, 런던 펑크/뉴웨이브

전성기 중에 프로토-펑크/올드 웨이브를 앞세웠다.


1978년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장기 공연을 시작하는데, 이때는 주로 《Station to Station》, 《Low》, 《Heroes》 등의 삽입곡을 주로 불렀다.


공연이 끝나자 그는 두 번째 영화 출연작인 《사랑하는 플레이보이》에 등장했으며 《Low》, 《Heroes》에 이은

 브라이언 에노와의 세 번째 합작 앨범인 《Lodger》를 19곡의 싱글을 담고 79년에 발표했다.

이후 그의 부인이던앤지 보위를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에게 빼앗기자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버렸다.


1980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뉴 웨이브를 앞세운 《Scary Monsters》를 발표했다. 〈Space Oddity〉의 등장인물인 톰 소령을 다시 등장시켜 〈Ashes to ashes〉를 불렀고, 보위는 컬트 스타로서의 그와 결별했다.

 그해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이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연을 맡아, 1981년까지 무려 157회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1983년 나일 로저스를 프로듀서로 기용하고, 스티비 레이 본과 이기 팝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음반 《Let's Dance》는 큰 히트를 쳤다.

그리고 대규모 월드 투어인 《시리어스 문라이트 투어》를 대성공시켰다.

같은 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메가폰을잡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영국 육군 셀리어스 소령을 연기했다.


1985년, 보위는 퓨전재즈 밴드 팻 매스니 밴드와 영화 《숀 펜과 티모시 허튼의 위험한 장난》의 테마곡 〈This Is

 Not America〉를 녹음했고,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함께 〈Dancing In The Street〉를 리메이크해서 차트에서

 맹위를 떨치게 된다.


 1986년 개봉한 판타지 뮤지컬 영화 《라비린스》에서 보위는 고블린들의 왕 자레스(Jareth) 역할을 맡았다

 1987년 《Never Let Me Down》을 통해서 히트 행진을 계속한 보위는 1988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출연했다.













1989–2016

1989년 리브스 가브렐스, 토니 세일즈, 헌트 세일즈의 라인업으로 밴드 틴 머신을 결성해서 정규 음반을 2장, 라이브

음반을 1장을 선보였으나 별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이후 마지막 히트 메들리 콘서트라고 명명한 《사운드 앤 비전》 월드 투어를 실시했다.


 1998년 뮤지션 최초로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BowieNet’을 만들었고, 이 때문에 메이저 레이블로부터 고소당하기도

 했다.

 1991년 《Tin Machine II》를 발표했고, 이후 현재까지 틴 머신의 정규 앨범은 출시되지 않아 사실상 해산 상태가

 되었다.


1992년, 동명의 미국 드라마에 바탕을 둔 《트윈 픽스》에서 FBI 요원 필립 제프리를 연기했다.[63] 1993년 모델

이만 압둘마지드와 재혼했고, 나일 로저스와 다시 팀을 짜고 6년만에 솔로 음반 《Black Tie White Noise》를

 발표했다.


이 음반으로 보위는 9년만에 영국 차트 1위에 오른다. 1995년에는 브라이언 이노와 팀을 짜고 《Outside》를 발표했다. 1997년 1월 그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마련한 《매디슨 스퀘어 가든 콘서트》 실황은 《Earthling》 앨범으로 

제작되었으며, 1999년 이후 보위는 시간과 인생, 늙어가는 인간의 삶을 주제로 한 《Hours》와 《Heathen》을 

차례로 내놓았다.


2000년에 들어서며 보위는 대영 제국 훈장 3등급 수훈자와 기사 작위 명단에 올랐으나 모두 거절했다. 

보위는 작위 거절의 이유에 대해서 “나는 결코 용을 때려잡은 적이 없다. 그냥 음악을 만든 것 뿐이다”라는 대답을 

남겼다.


2003년 《Reality》 음반 발표 이후 순회공연을 하던 중 2004년 심장마비로 쓰러져 음악활동을 중단했고,

 2006년부터는 공연도 삼가 왔다.


 오랜 휴지기를 갖던 그는 2013년 1월 8일, 새 음반을 낸다고 발표하면서 신곡 〈Where Are We Now?〉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고, 3월 8일 정규 음반 《The Next Day》를 발표했다.

 이 음반으로 2014년 3월 브릿 어워드 2014에서 영국 남성 솔로상을 가져갔다.


 같은 시상식 최고령 수상 기록도 세웠다.

보위의 69번째 생일인 2016년 1월 8일에 25번째 정규 음반이 발매되었다. 1월 10일, 데이비드 보위는 18개월 동안의

암투병 끝에 70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작 음반이 된 《Blackstar》는 비평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영미를 포함한 전 세계 각국의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성공을 거뒀으며, 제59회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얼터너티브 뮤직앨범상, 최우수록 퍼포먼스상,

최우수 록 뮤직상, 최우수 엔지니어 앨범상 등 4개 부문에 올랐다


두 번 결혼을 했는데 두 번 모두 여성과 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앤지 바넷과 결혼 생활을 하며 아들 던컨 존스를 낳았다.

그녀는 후에 보위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동성 연인 관계였다고 폭로했다.


 두 번째 결혼은 1992년 소말리아 출신 슈모델 1세대인 이만 모하메드 압둘마지드과 재혼한 것으로 둘 사이에 딸을

 하나 낳았으며, 단란한 가정을 유지해왔다.







성적 취향

1972년 1월, 영국 음악지 《멜로디 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말해 충격을 줬다.

이로 인해 그는 롤링 스톤스 멤버인 믹 재거와 염문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후 《Station to Station》 음반을 발표할 땐 양성애자로 수정했으나, 1983년에는 이성애자라고 고백했다














 

reality 2003

 

거부할수 없는 카리스마 미노년 David Bowie의 Reality를 듣고


최근 EBS에서 방영된 David Bowie의 매디슨스퀘어 가든의 공연을 보신 분들은 아마도 David Bowie라는 아티스트에

대해서 장르를 떠나서 약간이라도 호기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 리뷰를 올립니다.


 인터넷의 보편화로 어느 정도 팝 음악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거의 실시간으로 해외 아티스트들의 신보 발매나

최근 활동에 대해서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인터넷에 오르는 수많은 리뷰는 앨범을 듣지 않고서도

 어느 정도 사운드의 윤곽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그 양과 질이 엄청나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 리뷰는

결론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 도달하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아닌 타인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는 한

 인격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올리는 리뷰도 한계적 범주에서 많이 벗어 날수는 없겠지만 David Bowie의 오래된 팬으로서 리뷰를 올립니다.

 

여담으로 아주 예전에 한 팝 매거진에서 가장 옷 잘입는 아티스트라는 설문에 대한 결과가 실렸던 기사가 있었는데

Roxy Music의 리드보컬 이었던 Bryan Ferry와 함께 David Bowie가 뽑힌 것이 기억이 난다. 옷을 못 입는 아티스트로는 Queen의 Freddie Mercury와 Elton John이 뽑혔는데 그 결과에 퀸과 엘튼 존의 팬 이기도한 내 자신이 저항 없이

수긍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트렌드를 선도해나가는 데이빗 보위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음악적인 변화를 보더라도 데뷔 당시의 포크적인 면을 가미한 음악 세계에서 지기 스타더스트의 글램록,

디스코와 소울을 수용했던 플라스틱 소울 시기, 브라이언 이노와의 베를린 삼부작 시대를 거쳐서 80년대의 팝 뉴웨이브 그리고 90년대의 일렉트로니카와의 조우 또한 전작 Heathen과 신보 Reality에 이르기까지 글램록, 뉴 로맨티시즘,


포스트 펑크, 브릿 팝을 아우르는 사실 현기증이날 정도의 그의 음악적 변화에 이 사람 외계인임이 틀림없어 라고 할

정도로 그의 음악에 솔직히 정확하게 접근하기란 용이한 것 같지 않다.

 

본 앨범은 보너스 트랙까지 포함해서 14곡을 담고 있는데 첫곡인 new killer star는 사실 평범한 락 넘버로서 4/4박자의, 템포까지 어쩌면 지극히 촌스런 사운드로 전락할수 있는 곡인데 데이빗은 그의 오래된 파트너인 토니 비스콘티와 함께 원숙하고 세련된 느낌의 곡으로 탄생시켰다.


발음 그대로 이곡을 nuclear star로 장난치는 미국의 FM디스크 쟈키들이 앨범을 대표하는 싱글로서 방송을 하기

시작했고 다음곡은 펑크적인 취향과 outside와 earthling앨범의 인더스트리얼적인 면을 가미시켜 리메이크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보위의 리메이크곡인 조너던 리치맨의 pablo picasso이다.

 

세 번째 트랙은 마치 영원히 늙지 않는듯한 본인을 얘기한 듯 never get old가 미드 템포로 기타위에 뿌려지는 약간의 펑크 취향과 세련된 브릿 팝을 그의 트레이드 마크격인 불안정한 느낌의 조성위에 마치 1-3트랙이 유기적인 형태로

 계속 지나치며 네 번째 트랙에 와서야 일렉 키보드와 신서사이져의 사운드로 색소폰과 함께 칙칙 늘어지는듯한

보위의 보컬만이 가능한 관조적인 느낌의 느린곡이 지나가면 독특한 리듬섹션의 곡으로 글램록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she'll drive the big car가 유일한 국내 취향의 상큼한 팝인 days로 연결된다.

 

다시 무겁고 그로테스크한 기타음으로 심플하지만 고급스럽고 연륜이 느껴지는 fall dog bombs the moon이 흐르고 본 앨범의 또다른 리메이크곡인 트리뷰트형식의 조지 해리슨의 try some, buy some이 시작되는데 특이한 점은

 wall-of-sound로 불리우는 공간을 꽉 채우는 듯한 느낌의 편곡일 것이다.


그리곤 본 작의 타이틀 트랙인 reality가 기다리는데 빠른 템포의 강한 느낌의 락 넘버이고 본 작품에서가장 대곡이자

 처음 시도하는 스타일의  bring me the disco king이 마치 피아노 라운지의 사운드를 묘사한 듯 독특한 느낌으로

 관조적인 발라드로 끝을 내린다.


솔직히 데이빗 보위의 작품 세계는 전체적으로 뭉뚱그려서 표현하기엔 아예 처음부터 한계를 느끼게 하는데 그의

음악을 구분하는 것 역시 락, 불루 아이드 소울, 펑크, 팝락, 글램락, 하드락, 프로그레시브 아트락 그 외에도 뉴

로맨티시즘, 포스트 펑크, 브릿 팝, 고쓰락, 뉴 웨이브, 일렉트로니카, 인더스트리얼, 트랜스, 테크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고 있는데 하지만 일관되게 흐르는 데이빗 보위의 음악 세계는 그의 음악이 전혀 취향에

 맞지 않아서 내 팽겨치더라도 그의 패션 만큼이나 트렌드를 제시하고 또한 자기화하는 결코 안주하지 않는 진보성과 항상 텐션을 유지하고 있어서 불안하며 그래서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해 가는 현실적인 변화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요소마다 잘 정련된 그의 드라마틱한 음악 세계는 기본이고.



사실 많은 아티스트중 David Bowie의 리뷰를 쓰는 것은 컴필레이션 앨범의 리뷰를 쓰는 것처럼 짜증나는 일은 개인적으로는 없답니다.

그의 거의 모든 앨범을 들어보았지만 항상 무언가 다른 각도로 접근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 앨범이 국내의 팬들에게 얼마나 접근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취향이라는 문제 때문에 앨범의 완성도나 아티스트의 능력은 전혀 고려대상에서 제외시킨다면 음악을

 사랑하는 팬으로서 너무 커다란 손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60년대 후반부터 항상 팝 음악의 트렌드를 제시하며 또한 수용하며 영원히 늙지 않는팝 문화의 살아있는 아이콘인

미노년 David Bowie에 대한 관심이 있기를 바라며 리뷰를 마칩니다.

 

P.S) 누군가 말했지요.

David Bowie의 음악은 감성적 음악이 아니라 감각적 음악이라고...

                                               











영원한 현역 뮤지션 David Bowie가 10일(현지시간) 18개월 간의 암투병 끝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숨을 거뒀다고 BBC 등이 보도했다. 생일을 자축해 8일에 맞춰 발매된 앨범 [Blackstar]가 나온 지 2일 만이다.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글램 록의 역사 그 자체인 David Bowie를 잃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1996년 록큰롤 명예의 전당, 1997년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0년 영국 음악잡지 NME에서 한

 앙케트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에 뽑히기도 했다.


이런 타이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정말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어색한 '블루 아이드 소울' >


1960 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영국 아티스트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흑인음악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는 말할 것도 없고 비틀스(The Beatles)와 롤링 스톤스

(Rolling Stones), 무디 블루스(The Moody Blues)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에 이르기까지 그 목록은 끝이 없다.


그러나 유독 데이빗 보위(David Bowie) 만은 한 번도 흑인음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도 청소년 시절 모드족의 일원으로서 로컬 R&B 밴드들을 전전했던 전력을 가지고는 있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인 직업 아티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그의 작품에서 흑인 음악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고상과 우아에 목숨을 건 그에게 흑인음악은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촌티 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흑인음악에는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다름 아닌 필라델피아 사운드의 등장이었다. 이후 필리 소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 흑인음악의 분파는 부드럽고 화려한 현을 대거 기용하고 보다 섬세하고 정교한 리듬을 채택함으로써 가스펠과 블루스에서 비롯된 원초성에서

벗어나 쿨하고 세련된 도회적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당시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모색하고 있던 그에게 이 음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데이빗 보위는 전작 [Diamond Dogs]에 수록된 "1984"를 통해서도 이미 흑인음악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을 살짝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의 관심이 이렇게까지 증폭된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됐든 그는 여기에서 글램 로커로서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화이트 소울스터로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는 음악적 관심도 관심이었지만 그동안 과히 성공적이지 못했던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서기 위함이기도 했다.


당연히 필라델피아에 작업캠프가 차려졌고,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음악과 사운드를 만들기 위한 세심한 계산이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서 그는 이 계열에서 잔뼈가 굵은 현지의 일급 세션맨들을 기용했는데, 그 중 알토 색소폰 연주자 데이빗

 샌본(David Sanborn)의 이름이 특히 눈에 띈다.


 데이빗 샌본의 기용은 그가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데이빗 보위 자신도 색서폰에 관한한 절대로 남에게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보다 '정통'적인

느낌을 싣기 위해서 색서폰을 과감히 포기한다.


데이빗 보위의 최대 강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은 그의 모든 앨범이 다 데뷔 앨범이라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가 남긴 앨범들은 데이빗 보위의 4집, 5집, 6집이 아니라, 헝키 도리(Hunky Dory),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 알라딘 세인(Aladdin Sane)의 데뷔 앨범들이다. 이런 면에서 그에게는 그 흔한 서포모어 신드롬이라는

것이 없다.


 반면 그는 영원한 키치라는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 앨범의 약점은 그의 이러한 근원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전작 [Diamond Dogs]가 과도한 야심의 희생물이었다면 이 앨범에서 문제로 드러나는 것은 프로페셔널리즘의

 결여이다. 그는 여기에서 흑인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그 스타일을 채용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물론 필리 소울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의심할 바 없고 이는 타이틀 곡과 같은 훌륭한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플라스틱 소울'이라고 이름 붙인 데이빗 보위표 소울은 소울풀하지도 개성적이지도 않으며, 그의 보컬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특히 비틀즈의 명곡 "Across The Universe"에 대한 그의 리메이크는 용서하기 힘들 정도로 변태적이다.


데이빗 보위 개인의 당시 음악적 취향이 어떠했든 간에 이 필리 소울, 보다 넓게 흑인 음악이라는 분야가 그에게는

그다지 몸에 맞는 옷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제아무리 세련되고 도회적이라고 해도 흑인음악이 요구하는 관능적 멜로드라마는 그에게 너무나 현세적이고 너무나

 서민적이었다. 게다가 그가 새롭게 채택한 화이트 소울스터의 페르소나는 그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했다.


 이 점은 그의 첫 번째 미국시장 No.1 히트 싱글이자 이 앨범에서 가장 뛰어난 곡인 "Fame"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그에 못지 않은 귀족주의자 존 레넌(John Lennon)과 협연한 이 곡은 앨범의 다른 곡들과 달리 뉴욕의 일렉트릭

 레이디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모던함의 선두를 달리는 도시이며 런던, 베를린과 함께 데이빗 보위의 삼대 정신적 고향 중 하나인 그곳에서 그는

아트 훵크 또는 '식자들을 위한 댄스뮤직'이라고 불릴만한 매우 지적이고 고급스러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이런 곡이야말로 데이빗 보위에게 어울리는 음악이고 그가 마음껏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다.

 이 곡의 성공은 결국 후속작 [Station To Station]의 음악적 방향을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 참고: "Young Americans" 후반부 코러스를 들어보면, 비틀즈의 "A Day In The Life"의 첫 소절

("I heard the news today oh boy")이 나온다.



앨범리뷰:이기웅









Let's Dance데이빗 보위(David Bowie)1983년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 트랙으로 데이빗이 발표한 곡들 중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한 곡이다.

영국과 미국, 아일랜드 등에서 1위에 올랐다.


2007크레이그 데이빗(Craig David)Hot Stuff에서 이 곡을 샘플링 했고 날스 바클리(Gnarls Barkley)는 이 곡의 뮤직비디오를 2006년 발표작 Smiley Faces 뮤직비디오에 삽입했다.


데이빗벤 스틸러(Ben Stiller) 감독의 2001영화 <쥬랜더(Zoolander)>에 이 곡을 배경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이 곡에는 기타리스트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이 참여했다.

 데이빗은 몬트레이 재즈 페스티벌에서 스티비의 공연을 보고 감명 받아 자신의 앨범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고

스티비는 자신의 앨범 <Texas Flood> 세션 중에 달려왔다.

 

또한 프로듀서에는 디스코 음악의 황제 나일 로저스(Nile Rodgers)가 함께 했다.

나일2013데이빗에 관한 다큐멘터리 <Davie Bowie: 5 Years in the Making of an Icon>에서 "Let's Dance

전통적인 방식의 댄스 음악이라고 말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누구나 춤을 추게 만드는 음악이죠"라고 말했고 2012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는 "데이빗과 함께 이 곡을

 작업할 때 2주간 음악과 스타일을 조사했어요.


 그 때 데이빗은 갑자기 '알았어요라고 말한 뒤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을 하고 빨간 옷을 입고 빨간 캐딜락에 오르는

 리틀 리처드(Lttle Richard)의 앨범 재킷을 보여주며 이게 록큰롤이예요라고 말했죠.

 데이빗 리틀을 연구해 보니 데이빗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즉각적으로 데이빗이 무얼 원하는 걸 알게 되었어요.


우린 빨간 옷을 빨간 신발로 바꾸었어요라고 말했다.

2013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는 데이빗은 이 곡을 처음 제게 들려줄 때 이 곡은 히트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내가 듣기에는 12줄 기타로 치는 민속 음악 같은 걸 들려주었어요.


하지만 데이빗에게 이 곡에 춤을 출 수는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계약을 한 뒤에 저는 휭키한 분위기로 방향을 정하고 강력하게 진행했죠.

터미네이터 같았어요. 멈출 수가 없었거든요.

정말 데이빗과 히트곡을 만들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뮤직비디오는 데이빗 말레(David Mallet)가 감독했다.

호주에서 찍었고 후에 와쇼스키(Wachowski) 형제의 영화<매트릭스(Matrix)>의 장소 헌팅 담당을 하게 되는 피터

러리스(Peter Lawless)가 장소를 캐스팅 했다.

 뮤직비디오의 스토리 의도는 서양의 제국주의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호주 원주민의 삶을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그리려고 했다.


 하지만 제작사측에서는 데이빗의 패셔너블한 차림새와 원주민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고 원주민들의 춤사위도

어색하다고 느껴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빨간 구두는 원주민의 삶을 구식으로 만들고 서구사회를 동경하게 만드는, 한마디로 세련된 삶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의 활동 모습

 
 
화려하던 글램락 시절 이후로도 다양한 음악세계를 펼쳐보이며 유행을 주도하던 그는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는 뛰어난 보컬리스트라고 부르기에는 힘들만큼 노래를 "잘 하는" 가수는 아닙니다.

음역도 좁고 성량도 작아서 엔지니어들이 고생한다고들 할 정도인데 단순히 가창력으로 그의 음악을 설명할 수는 없고 예술성과 진보적인 부분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그런건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데다 그의 음색 자체가 음악과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부분이 많죠.




 
Vampire Lestat를 떠올리게 하는 컨셉



Stevie Ray Vaughn과의 협연



 Gackt와의 겹치는 부분은 그의 마력적인 중성적인 매력과 본인만의 창조적인 세계관 그리고 섹시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악한 매력"과 함께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신비한 이미지.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이 어릴적부터 데이빗 보위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러모로 그의 이미지를 차용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죠. 팝 역사에 있어 가장 독특한 이미지이기도 하지요. 환갑이 된 지금도 그는 엄청난 매력을 발산하는데 신기할 따름입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그의 미모는 연륜과 함께 빛나며 미중년을 넘어 미노년으로 이어지는 독보적인 케이스입니다. 그의 스타일리쉬함은 세기를 뛰어넘어 전세계 팬들을 아직도 흥분의 도가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