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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Sex Pistols - My way (Sid Vicious)






                                     





                

   


            

    

My way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i've had lived a life that's full
i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and more, much more than i did it my way

regret, i've had a few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i did what i have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i planned each chartered course
each carefull step along byway

yes there were times i'm sure you
knew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but through it all when there was doubt
i ate it up and spit it out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did it my way

i've loved , i've laughed and cried
i've had my fill my share of losing


and now as tears subside
i find it all so amusing to thing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not in a say way

for what is a man , what has he got
of not himself then he has naught
to say the things he true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the record show i took the blows


나의 길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어요

그래서 난 마지막 커튼내려지는 순간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내 친구여, 내가 명확히 말해 두겠소


내가 확신을하는 인생의 방식에 대해 말이요
나는 인생을 충만하게 살아왔소
전세계 모든 나라들을 다 가보았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것일세.

후회, 조금 있었지
그러나 후회에 대해 말 할 것은 거의 없다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했고
힘든 고난의 일들을 편법을 쓰지 않고 다 했다네


나는 내가 세운 인생계획도를 차근차근 열어갔네
차근차근 계속해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것일세.


그래, 당신도 알다시피 자네도 알다시피
삼키지 못할 것을 물어뜯은 적도 있습니다

 (과욕을 부린적이 있다)


그러나 의심스러울 때는
그것을 다 먹고 씨알만 내뱉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직면하고 기꺼이 맞서
내방식대로 했네



사랑도 했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지
난 만족감도 얻었고, 좌절도 겪었지


그러나 이제 눈물을 거두니 모든 것이 우습기만 하군
내가 그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지 않아서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아니요, 난 달라요
난 내방식대로 살았소







 




Sex Pistols_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밴드의 펑크 유토피아

펑크 스피릿 │ '연주 못하기'와 '쓰리 코드 주의'만으로 펑크 밴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펑크의 정신을 배운다.



 섹스 피스톨스만큼 짧은 기간에 엄청난 사회족 파장을 불러온 록 밴드가 또 있을까? 반사회적,반제도권적인 메시지로 무장한 섹스 피스톨스는 1970년대 말 혼란한 영국사회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노래를 불렀다.


 아니, 내 뱉었다. 당시 영국의 실업 증가율은 120%까지 치솟았고, 기회를 박탈당한 젊은이들은 분노했다.

섹스 피스톨스는 이미 온몸에 분노라는 휘발유를 끼얹은 젊은이들에게 던져진 라이터 불이었다.

그들은 노래뿐 아니라 TV나 라디오에서도 기존 사회에 대한 독설과 욕설을 퍼부었다. 제도권은 이 무례한 밴드에 대한 억압을 멈추지 않았지만매장에서 그들의 음악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결국 분노의 록 음악 펑크가 제도권의 탄압을 이겨낸 것이다.

섹스 피스톨스는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활동하며 단 한장의 정규 앨범만을발표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다.


록을 예술로 승화하려던 밴드들은 섹스 피스톨스로 인해 힘을 잃었고, 록은 감상주의 음악에서 실천주의 음악으로

 본연의 색깔을 찾았다. 1970년대 한국 정서로는 쉽게 입에 담기도 힘들었던 밴드 이름과 음악은 자연스레 '국내

발매 금지'라는 훈장을 달았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이 땅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결성계기: 영국 비즈니스 맨, Malcolm McLauren에 의해 결성됨.

그는 1975년에 미국에서 일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그는 미국 밴드인 New York Dolls와 같은 미국 밴드를 관리했다.


이 밴드는 음악에 대해 아는 것 같지 않았지만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것에 훨씬 흥미를 느꼈다.

McLauren의 아이디어는 재능을 가진 밴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잠재적으로 충격을 주고 혐오를 주는 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밴드는 너무나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기 위해서 돈을 지불했다.

곧 그는 Sex Pistols를 관리하게 되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높았고, 많은 젊은이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Pop에서 기성세대들이 정부에 대해 만족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러한 좌절(당시의 젊은이들이 느꼈을 )은 반항적이고,야성적인 가사로 표현됐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는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영국펑크 록 밴드로, 1975년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밴드는 본래 보컬 조니 로튼과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 드러머 폴 쿡, 베이시스트 글렌 맷록(후에 시드 바이셔스

교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록 그들의 초기 활동 기간이 3년에 불과했으며, 넉 장의 싱글 앨범과 한 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냈을 뿐이지만,

섹스 피스톨즈는 "영국 펑크 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밴드"[1]라던지 "영국의 펑크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2]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이들은 락엔롤 역사에서 첫 번째 "세대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God Save the Queen"과 ”Anarchy in the UK" 같은 곡들은 공개적으로 정부군주제를 비난한다.

반사회적,반제도권 메세지로 무장한 섹스 피스톨즈는 1970년대 말 혼란한 영국 사회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노래를

불렀다.


당시의 영국의 실업 증가율은 120%까지 치솟았고 기회를 박탈당한 젊은이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Tv,라디오 매체에서도 욕설을 퍼부었다





  




*Sex pistols...사회를 맹렬히 비난하다~



(Never Mind The Bullocks- Here's The Sex pistols)는 Rock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에 하나.

보컬은 노래라기 보다는 되는 대로 말을 쏟아내는 듯하고, 사운드는 거칠고 난폭하면서 단순하다.

 가사는 영국 기성사회에 대해 노골적인 빈정거림과 거친 분노를 담고있다.


이처럼 단순한 악곡으로 ,한 기성체제에 대해 이처럼 불순하고  뻔뻔스럽고 귀에 거슬리게 표현한 로큰롤

(Rock'n'roll)은 거의 없었다. "Anarchy In the UK " , " God save the Queen"은 대표적인 곡이다.

- God save the Queen은 본래 영국의 국가(國歌)로서 여왕을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Sex Pitols는 여왕을 조롱하는 싱글로서 God save the Queen을 통해서 여왕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 싱글은 BBC에서 방송이 금지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 즉위25주년 기념의 날에 템즈강 위에서 공연을 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섹스 피스톨즈 Sex Pistols의 God Save The Queen. Did You No Wrong 앨범 2012.06.28.jpg






브리티쉬 펑크(British Punk)의 1세대인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는 불과 2년여의 기간동안 단 1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것을 끝으로 밴드 활동을 마감했지만 록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품위없는 언행과난폭한 무대 매너, 영국 왕실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 냉소와 허무주의로 가득찬 무정부의적인 음악으로 요약되는 섹스 피스톨즈는 스투지스(The Stoogies), 클래쉬(The Clash), 버즈콕스(The Buzzcocks) 등과 더불어

 70년대펑크 부흥의 구심점이자 록큰롤 혁명의 핵이었다.


단 한 장의 싱글도 발매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들의 노래가 던지는 충격의 여파는 섹스 피스톨즈를 단박에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거의 악명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 쏟아지던 영국 언론과 젊은이들의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70년대 초 런던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던 말콤 맥라렌(Malcom McLaren)-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은 동창생이었던 폴 쿡(Paul Cook, 56년생, 드럼)과 스티브 존스(Steve Jones, 55년생, 기타)를 만나 의기투합한다.


이들은 밴드를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맥라렌의 상점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던 글렌 매틀록(Glen Matlock,

56년생, 베이스)을 비롯해 왈리 나이팅게일(Wally Nightingale), 델 눈(Del Noone) 등을 합류시켜 스완커스

(Swankers)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당시 존스는 보컬을 맡고 있었으나 나이팅게일과 눈이 밴드를 떠나고 팀을 재정비하면서 기타로 전향했다. 섹스

(Sex)로 밴드명을 개명한 이들은 새로운 보컬이 필요했고 오디션을 통해 존 리든(John Lydon, 56년생, 보컬)을

영입한다.


얼마후 밴드는 다시 섹스 피스톨스라는 새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존 리든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썩어빠진

 자니"(Johnny Rotten)로 이름을 바꾼다.


클럽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하던 섹스 피스톨즈는 EMI 레코드를 통해 76년 전영국을 들끓게 한 문제의 싱글

[Anachy In The U.K]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해 12월 TV쇼프로에서 천박한 욕설을 내뱉어 언론의 맹공격을 받게 되고 결국 두달만에 EMI로부터 계약파기를 통고받는다.


얼마 후에는 멤버들과 음악적인 견해가 달랐던 매틀록이 밴드에서 해고-매틀록은 비틀즈의 음악에 경도돼 있었다-

되고 수지 앤 더 밴시스(Siouxsie & The Banshees)와 플라워즈 오브 로맨스(Flowers Of Romance)의 멤버였던

시드 비셔스(Sid Vicious)가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가담한다. A&M 레코드로 이적한 섹스 피스톨즈는 영국 왕실에 대한 비판을 담은 두 번째 싱글 [God Save The Queen]을 발표하였으며 이 음반들은 영국내에서 금지곡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파급력으로 퍼져나갔다.


77년에 이들은 "퀸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보트를 타고 영국 국회의사당이 바라보이는 템즈강 위에서

 "Anachy In The UK"를 부르다가 체포되기도 한다.

얼마지나지 않아 A&M사로부터도 버림받은 섹스 피스톨즈는 미국의 워너 브라더스사를 통해 록역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데뷔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77)는 발매했다.


 앞서 발표한 두 곡의 싱글을 비롯해 EMI 레코드사에 대한 신랄한 냉소를 담은 "E.M.I", "No Feelings", "Pretty

Vacant" 등이 수록되어 있는 이 앨범은 UK 차트 정상에 올랐는데 앨범 타이틀의 "Bollock"이란 단어 때문에 한때

경범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섹스 피스톨즈는 논란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유일한 오리지널 앨범이 되고 만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의 발매에 이어 이듬해 초

섹스 피스톨즈는 미국 투어를 벌이지만 투어가 끝나자마자 자니 로튼이 밴드를 탈퇴해 버리고 나머지 세명의 멤버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히트곡 "My Way"의 가사를 개작해 부르는 등 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가십란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시드 비셔스가 78년 10월 맨하탄의 첼시어 호텔에서 여자친구인 낸시 스펀진

(Nancy Spungen)을 사냥칼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체포되면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보석금을 내고 귀가한 시스 비셔스는 바로 다음날인 79년 2월 2일 21세의 나이로 그리니치 빌리지의 자신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약물과용이었다.

 

후에 시드 비셔스와 낸시 스펀진의 약물과 폭력으로 점철된 자유분방하고 광기어린 행각은 86년에 [시드와 낸시(Sid

And Nancy)]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2년의 짧은 기간 동안 음악을 포함해 멤버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끊임없이 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섹스 피스톨즈는 결국 시드 비셔스의 죽음을 맞이하며 해체를 하고 말았다.

매니저인 맥라레은 섹스 피스톨즈를 유지시키고자 했으나 스티브 존스와 폴 쿡은 이를 거부하고 또다른 펑크 그룹을

결성해 활동을 계속했다.


 자니 로튼 또한 뉴욕을 거점으로 퍼블릭 이

미지 리미티드(Public Image Limited)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앨범을

발표하고 있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해체 이후 이후 여러 레이블에서는 이들의 라이브 앨범과 베스트 앨범 등을 발매했다.

상업적인 목적을 뚜렷하게 띄고 있는 이와 같은 일련의 앨범 발매는 음악 산업에 대한 반항심을 품고있었던 섹스

 피스톨즈의 의도에 크게 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밴드 결성 20주년이 되던 지난 96년 초창기 멤버 4인이 다시 뭉쳐 섹스 피스톨즈라는 이름을 되살렸다.

 사망한 시드 비셔스의 자리는 창립 멤버인 글랜 매틀록이 다시 채웠으며 이제 40대가 된 왕년의 펑크 투사들은

라이브 앨범 [Filthy Lucre Live](96), [Alive](96), [[Live at Winterland 1978](97) 등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에

 나섰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는 2년 남짓한 짧은 활동기간 동안, 엉망진창의 연주실력과 온갖 기이한 행동으로 얼룩진 최악의 밴드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유일한 정규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는 펑크가 가야 할 길을

 완벽하게 제시한 명반으로 칭송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들이 보여준 모든 엉망진창의 기행들마저도 펑크 정신의

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이 활동할 즈음 영국의 경제상황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점도 이들의 분노에 찬 사운드에 힘을 싣는 주요

요인이었다.

이 전설적인 밴드의 역사는 1970년대 중반, 런던에서 섹스(Sex)란 이름의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던 말콤 맥라렌

(Malcolm McLaren)의 구상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뉴욕에서 공부하던 시절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성공을 관심 깊게 지켜보았고, 영국에서도 그처럼

 ‘막나가는’ 캐릭터의 록 밴드를 키워보겠노라는 소망을 키웠다.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로 활약하며 그 뜻을이루게 된다.

섹스 피스톨즈의 오리지널 라인업 중 폴 쿡(Paul Cook. 드럼)과 스티브 존스(Steve Jones. 기타)는 의상실의

단골들이었고, 글렌 매틀록(Glenn Matlock, 베이스)은 점원이었으며, 자니 로튼(Johnny Rotten. 보컬) 등은 밴드의

 얼개가 대강 짜여진 이후 오디션을 거쳐 들어온 멤버였다.


 그저 심플한 록큰롤을 연주할 뿐이었던 원래의 밴드에 로튼은 폭력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분노의 에너지를

불어넣었고, 그 첫 소산은 1976년 밴드의 첫 싱글 ‘Anarchy In The U.K.’로 나타났다.

이 싱글로 단박에 영국 내에서 유명인사가 된 섹스 피스톨즈는 그 해 12월 영국 템즈(Thames) TV방송국의 생방송 쇼에 출연해 시청자들이 기절초풍할 욕설을 퍼부으며 더욱 확고한 명성(이라기보다는 악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밴드는 소속사였던 EMI 레코드사에서 해고당했다.

얼마 후 이들은 A&M과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지만, 이 계약도 6일만에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1977년 밴드는 더욱 도발적인 두 번째 싱글 ‘God Save The Queen’을 버진(Virgin) 레코드사에서 발매하게 된다.

이 싱글은 BBC에서 방송금지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전역을 들끓게 만드는 인기(와 논란거리)를 모았으며,

 폴 쿡은 길거리에서 극우파 청년들에게 습격을 받는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한편 이 싱글이 발매되기 직전 글렌 매틀록이 해고되었고, 그의 빈자리에는 베이스를 칠 줄도 모르는 시드 비셔스

(Sid Vicious)가 영입되었다.

훗날 펑크의 화신이자 순교자로 추앙된 시드 비셔스는, 약 3주간의 피나는(?) 연습 끝에 무대에 설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밴드의 첫 정규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가 버진에서 발매되었고, 예상대로 영국차트 1위에 올랐다.

그러나 미국 음반업자들의 집단적 보이콧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1978년 1월, 밴드는 대망의 미국투어에 나서며 직접 미국시장을 개척해보겠노라는 꿈을 키웠다.

 하지만 이 투어는 14일만에, 미국진출은 커녕 자니 로튼의 탈퇴라는 심각한 위기상황만을 초래한 가운데 중단되고

말았다.

3인조로 축소된 섹스 피스톨즈는, 이후 시드 비셔스를 싱어로 내세워 얼마간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쿡과 존스가 맥라렌에게 반기를 들었다.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 섹스 피스톨즈란 이름 하에 제대로 된 활동은 완전히 기약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후 자니 로튼은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Public Image Ltd.)라는 새 밴드를 만들었고, 폴 쿡과 스티브 존스는

자니 썬더스(Johnny Thunders)의 솔로앨범 제작에 참여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시드 비셔스의 운명은 그들에 비해 훨씬 가혹했다.

그는 1978년 10월 여자친구 낸시 스펀진(Nancy Spungen)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다음날인 1979년 2월 21일에 헤로인 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당시 21세).

그들의 거친 삶은 1988년 ‘Sid & Nancy’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후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전설’로 군림하던 섹스 피스톨즈는, 1996년 쿡-존스-매틀록-로튼의 라인업으로 재결성

투어를 벌이며 팝 계에 재등장하게 된다.

이 투어는 발표단계부터 엄청난 화제를 모았지만, 정작 이들은 투어로 돈을 버는 데만 열중할 뿐 신보제작과 같은

 ‘귀찮은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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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빠진 록에 난도질을 가한 성난 펑크의 포효

그것은 통쾌하고 후련한 카운터 펀치였다.

 당시 팝계를 제패하고 있던 '제도권'의 아늑한 음악은 그 일격에 고목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혁명의 도래였고 그 주체는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라는 이름의 '요물'이었다. IMF체제로 들어간 76년과

77년 영국은 갑자기 그들과 그들의 사운드트랙인 펑크의 세상이 되었다.

펑크(punk)는 베이비붐 세대가 듣고 있었던 세련되고 기업화하고 있던 록 음악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전위대인 섹스 피스톨스는 “제도권의 록은 죽은 음악이며 그렇다면 그것은 록일 수 없다”고 고함을 질렀다.

록은 절대로 고급에 길들여지거나 차분해서는 안되며 기업적 형태에 물들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차라리 소음이었다.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는 자신의 기타 사운드를 필 스펙터에 빗대어 '소음의 벽'(wall of noise)이라 했다.

그것은 고삐 풀린 광기의 에너지였고 신랄한 공격과 오만불손한 언어들의 잔치였다.

그들의 모든 것이 이 한 장의 음반에 담겨 있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이 유일한 앨범으로 록이 생리적으로 보유한

청춘의 폭발성과 기성 가치에 대한 저항을 재생했다는 섹스 피스톨스의 독보적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섹스 피스톨스의 혜성 같은 출현은 다름 아닌 영국의 시대상황이 요청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영국의 경제는 노동당 정부의 정책실패로 실업률이 20%까지 치솟는 등 파탄지경에 달했다.

당시 노동당 캘러헌 정부는 급기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39억 달러를 지원 받기에 이른다.

고용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젊은이들은 좌절했고 허탈해 했으며 급기야 그 정서는 분노로 급변했다.

 펑크는 바로 그 저항의 에너지를 토해내는 출구였고 섹스 피스톨스는 그 기수가 되어 단숨에 '반역집단'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일자리가 없는 젊은이들에게 아름다운 사랑노래와 고급스런 록은 의미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룹의 리더 자니 로튼은 “실업자들에게 러브송은 필요가 없다”고 외쳤다.

섹스 피스톨스는 기껏 사랑 또는 자신들의 문제만을 노래하는 롤링 스톤스나 후 같은 '부자그룹'과 그들에 의해

움직이는 음악계의 스타 시스템에 출사표를 던졌다.

자니 로튼이 섹스 피스톨스의 오디션을 보게 되었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핑크 플로이드의 마크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 있었던 그는 거기에 'I Hate'란 말을 휘갈겨 써 '난 플로이드를 증오한다'는 메시지를 드러냈다. 매니저 말콤 맥라렌은 셔츠에 담긴 펑크의 정신과 자세를 즉각 확인했다.

핑크 플로이드는 딱히 비난을 받을 그룹은 아니었다.

명반 <달의 어두운 저편>에 수록된 곡 '돈'이 웅변하듯 사회에비판적 시각을 투영한 음악을 했다.

 그러나 IMF 체제로 실업자가 된 젊은이들에게 그들은 제도권에서 유유자적하는 부자그룹일 뿐이었다.

예전에는 그들이 영국이 자랑하는 존재들이었을지라도 지금은 경제 현실로 볼 때는 사치스러운 그룹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스, 후만이 아니라 폴 매카트니, 로트 스튜어트, 엘튼 존, 에릭 클랩튼도 그러했고 레드 제플린과 퀸도 펑크 밴드의 눈에 '록 엘리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섹스 피스톨스는 이들 부자와 엘리트에 의해 영국의 음악계가 신인들에게 빗장을 걸어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음악 판 자체를 바꿔야 했다.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이 '무정부'인 것은 필연적이었다.

76년 발표되어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대영제국의 무정부상태'(Anarchy in the UK)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반

(反)그리스도이며 무정부주의자라고 천명했다.

이 싱글을 발표한 EMI 레코드사는 이 같은 도발적 이념을 문제삼아 그들과의 계약을 해제했다.

그들은 곧바로 A&M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으나 역시 깨졌고 결국 신생 레코드사인 버진에 의해 구제되어 이 음반을

 출반하게 된다.

앨범의 마지막 곡이 '이엠아이'(EMI)인 이유가 그래서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을 버린 음악 기업을 마음껏 조롱하고

질타한다.

역시 문제작인 '신은 여왕을 구해준다'(God save the Queen)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영국 왕실과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노골적인 비아냥이다.


'태양의 휴일'(Holidays in the sun)과 '멋지고 한가하고'(Pretty and vacant)는 이런 분노를 가져오게 한 원인

이를테면 IMF로 인한 실업을 소재로 다뤘다.

 '대영제국의 무정부상태'와 함께 이 3곡은 싱글로 발표되어 게릴라가 진지를 격파하듯 영국 차트를 강타했다.

나머지 곡들도 대부분 기존체계와 제도권에 대한 공격 일색이다.

제도권은 '거짓말쟁이'(Liar)에서 믿을 수 없는 거짓말쟁이로 비하되고 '문제들'(Problems)에선 '문제는 우리가

아니고 우리에게 일자리도 주지 못하는 썩어빠진 너희들'로 욕먹는다. '뉴욕'(New York)은 미국에 대한 적의를 담은

곡이다.


노랫말엔 점잖은 체면으로는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난무한다.

 이 곡들에서 자니 로튼은 뇌를 쭈뼛거리게 할 정도의 감전(感電)성 보컬을 들려준다.

이 앨범의 곡들을 고전적인 틀로 음악성을 재단하는 것은 펑크의 정신적 측면을 도외시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곡들의 구조가 너무 단순하다는 것, 일방적인 소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연주력이 형편없다는 것 등의 평가들이다. 이러한 점들보다는 그들이 뛰어난 실력을 구비한 엘리트가 아니라 평민이고 더구나 분노한 하층민 젊은이들임을

전제해야 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3코드 음악을 했고 발라드를 배격했으며 '평민답게' 기타 솔로를 없애고 '배킹'을 내세운 연주에

 충실했다. 섹스 피스톨스는 이를 통해 '누구나 할 수 있다'(anyone can do it!)는 평등과 '스스로 그것을 하라'(

do it yourself!)는 독립의 정신을 확립했다.


 이제 록 음악은 스타들의 제도권 록 그리고 비주류와 반주류의 언더그라운드 록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 앨범은 이처럼 언더그라운드 록의 시작이라는 점에서도 전설의 위상에 위치한다.

80년대 말 미국 시애틀의 언더그라운드를 전전하던 커트 코베인은 이 앨범의 우수성을 일찍이 간파했다.

이 앨범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프로듀스가 잘 된 음반이라고 여겼다.

 이 앨범의 타이틀을 빌어 그는 91년 <네버마인드> 앨범을 발표했다.


이 작품으로 세상은 섹스 피스톨스가 그랬듯 또 한차례 하층민 청춘들의 언더그라운드 록의 세상으로 재편되었다.

언론에서는 그의 음악을 얼터너티브 록이라고 일컬었다. 90년대의 록이라는 얼터너티브가 실은 펑크의 후예라는

얘기다.

얼터너티브 록 이전으로 돌아가도 70년대 말 이래 출현한 모든 강성의 록이나 언더그라운드 록은 섹스 피스톨스의 대해 일정량의 빚을 진다.

하드 코어는 물론이요 영국의 새로운 헤비 메탈(NWOBHM)이나 스래시 메탈도 그렇다.

<네버 마인드 더 볼록스>가 록 역사의 명반으로 우뚝 서는 이유가 이 같은 시공을 초월한 영향력과 확산력에 있다.

섹스 피스톨스는 이 앨범의 수록곡 '17'(Seventeen)에서 '우린 소음을 좋아하고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들은 펑크를 선택하여 원기(元氣)를 바란 록 음악계와 젊은 세대의 선택을 받았다.

 또한 이 앨범은 최고의 록 음반이라는 불변의 그리고 아낌없는 '역사의 선택'을 받았다.






 

 


 

'또 다른 펑크의 걸작들'

패티 스미스 <말>(Horses)

75년 발표되어 당시 막 태동된 미국 뉴욕 펑크의 청사진을 제시한 역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와 함께 여성 록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뜻깊은 앨범이기도 하다.

여자라는 선입관으로 이 앨범에 접근했다간 게릴라 뒤통수 맞는 사운드의 충격을 당한다.

펑크 록 남성도 견주지못할 소음을 앨범 도처에 깔아놓아 당시 록의 피곤한 요소는 찾아볼 수가 없다.

수록곡 가운데 소울의 명곡을 리메이크한 '수천 춤의 땅'(Land of a thousand dances)과 함께 이 앨범의 백미인

'글로리아'(Gloria)는 패티가 존경하는 아일랜드 록의 대부 밴 모리슨의 60년대 클래식이다.

 그녀는 “60년대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이해해야 할 때가 됐으며 난 그 노선을 걸어간다”고 말했다.


 펑크가 결코 돌출된 장르가 아니라 록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한 음악임에 대한 증거. 후대에 위대한 펑크 록의 딸들을 낳게 한 앨범으로 프리텐더스의 크리시 하인드와 홀의 코트니 러브가 바로 그 딸들이다.








텔레비전 <마키 문>(Marquee Moon)

70년대 뉴욕 펑크 서클의 빼놓을 수 없는 그룹 텔레비전(Television)의 데뷔 앨범으로 펑크 음반으로는 드물게 예술성을 평가받는다.

77년 발표 당시『타임』지는 여기 수록곡 '비너스'(Venus)를 두고 “펑크 음악 가운데 이렇게 우수한 곡도 있다”고

 논평했다.

도발적인 영국 펑크와는 달리 60년대에 확립된 블루스 기타 록이나 포크 록에 가까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실제로 기타리스트이자 그룹의 프론트 맨인 탐 벌레인(Tom Verlaine)은 영국의 포크 록 그룹 페어포트 컨벤션의

영향을 토로한 바 있다. 타이틀 트랙 '마키 문'에 서 사실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패티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뉴욕 펑크의 메카 CBGB에서 단련된 사운드는 아주 예리하다.

헤비 메탈의 기타 연주 패턴과는 뚜렷한 선을 긋는다.

더욱이 스튜디오 기술에 의존함이 없이 거의 라이브로 녹음해 펑크의 '원시성'을 시범하고 있다.


 후대의 REM은 공연할 때 자주 이 앨범의 곡 '시 노 이블'(See no evil)을 연주한다고 한다. 텔레비전은 이듬해 한 장의 앨범을 더 낸 뒤 바로 해산했다.









클래시 <클래시>(The Clash)

76년의 섹스 피스톨스는 싱글 게릴라 작전을 폈지만 77년 클래시는 이미 첫 풀 앨범을 발표했다.

스트레이트한 펑크에서 탈피, 벌써부터 펑크를 '개량'하기 시작하고 있었음을 레게를 수용한 곡'경찰과 도둑'

(Police and thieves)이 웅변한다. 포문을 여는 '재니스 존스'(Janis Jones)도 친화력 있는 로큰롤이다.

그러나 펑크의 에너지와 파워를 놓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의 시그니처 송격인 '백인 폭동'(White riot)과 '난 미국이

지긋지긋해'(I'm so bored with the USA)는 명실상부한 펑크 찬가.

조 스트러머의 웅얼거리는 보컬과 믹 존스의 칼 같은 배킹 기타는 상대적 박탈감에 찌든 영국 청춘의 분노를 강렬하게 담아냈다.


주제는 실업, 제도권의 폭력과 인종주의에 대한 저항 등 참여적 테마를 다뤄 섹스 피스톨스보다 훨씬 실제적이다.

피스톨스가 쳐놓은 허무의 덫에서 완전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일방적이면서도 상당히 음악적이다.

뮤지컬 펑크와 소셜(Social) 펑크의 동거.

라몬스 <라몬스>(The Ramones)

역시 뉴욕의 술집 CBGB 출신 그룹의 데뷔작으로 제도권의 디스코와 팝화된 록에 반발해 3코드의 빠르고 짧은 곡들을 실험했다. 14곡 가운데 발라드는 하나도 없고 러닝 타임 3분이 넘는 곡 또한 하나도 없다.

후배 펑커들이 추종하는 사운드 패턴을 구축해놓은 셈이다.

섹스 피스톨스도 여기에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거기에 '공격성'을 얹어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멤버들이 본명을 없애고 성(姓)을 모조리 라몬으로 통일한 것이나 노랫말에서 재미를 중시한 것도 그들이 제시한 규범이다.

'전격 연주'(Blitzkrieg bop) '이제 난 조금 풀 냄새를 맡고싶어'(Now I wanna sniff some glue) '난 너랑 거닐고싶지

 않아'(I don't wanna walk around with you) 등은 펑크가 순수한 로큰롤임을 다시금 뇌리에 심어준다.

당시 국내에서는 워낙 펑크가 소개되지 않은 터에 그나마 전혀 그룹의 지명도가 낮아 실제로 이 그룹의 음악을 접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펑크가 많이 확산된 지금도 우리나라에 관한 한 무명 밴드다. 이 앨범은 96년 국내에서도 발매되었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세일되었고 그나마 찾는 사람도 없었다.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My Aim Is True>

엘비스 코스텔로는 딴 펑크 밴드들처럼 정치적이거나 폭발적인 배킹 사운드를 구사하지 않지만 펑크 최소주의 미학을 견지하는 괴짜 아티스트다. '개성적' 펑크랄까, 아니면 펑크의 '이단적 예술성'이랄까.

『롤링 스톤』의 표현에 따르면 '77년 영국 펑크 폭풍에서 나온 가장 신선한 레코드'다.

앨범의 베스트 레퍼토리인 'Less than zero' 'Watching the detective'는 당시 록 거물들의 낙관주의와 제도권 독점의 문화풍토를 통렬하게 꼬집는다.


무엇보다 그의 파격은 당시 펑크 웨이브에서 보기 드문 발라드 'Alison'이나 우아한 'Red shoes'에서 절정을 이룬다. 린다 론스태드가 새 트렌드를 쫓느라 펑크를 도입하던 당시 'Alison'(이 곡의 가사 중에 앨범 타이틀이 묘사된다)을

선택한 것도 이 곡이 발라드였기 때문이다.

워낙 출중한 독자성으로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 다수를 명반 대열에 올려놓는다.

국내에선 99년 영화 『노팅 힐』에 삽입된 그의 노래 'she'가 반향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오랜 찬밥신세에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이 데뷔앨범을 위시한 엘비스 코스텔로의 수작들에 대한 관심은 일지 않았다.

 팬들은 그저 'She' 하나로 만족해했다(1977).

토킹 헤즈(Talking Heads) <Remain In Light>

CBGB에서 활동했으나 포스트 펑크의 흐름에서 펑크나 뉴 웨이브 길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이른바 노 웨이브

(no-wave)를 택한 그룹의 80년 걸작이다.

흑인 펑크(funk), 디스코 심지어 'Crosseyed and painless' 같은 곡에선 랩이 들린다.


하지만 천재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이 지휘하는 이 그룹의 아이덴티티와 이 앨범의 코드는 제3세계 음악을 뜻하는 '월드 뮤직'에 있다.

 'Born under punches(The heat goes on)'나 수작 'once in the lifetime' 등에 아프리카 원시적 리듬이 매끄러지듯 펼쳐진다. 이 부분에서 80년대 중반 월드 뮤직 붐을 일으킨 피터 가브리엘이나 폴 사이먼이 번에게 빚을 진다.

당시 80년 당시 음악풍토에서 너무 앞서간 탓에 당연히 상업적으로는 참패했다.

경향으로 볼 때 최소한 5년은 빨랐다. 드러머 크리스 프랜츠의 자랑. “잘 팔리지는 못했어도 비평적으로는 성공했다.

우리는 이 앨범이 대중음악을 다음 단계로 끌어올렸다고 믿는다.


그게 또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다.” 앨범의 프로듀서는 브라이언 이노(Brian Eno). 번은 이 앨범 직후 이노와 함께 월드 뮤직의 또 다른 걸작인 <My Life In The Bush Of Ghosts>를 합작해낸다. 펑크(punk) 출신 그룹의 발전적 비

(非)펑크 앨범(1980).  


 










지금 하드록(Hard Rock)또는 헤미메탈(Heavy Metal)이라고 명명한 가장 오래된, 또한 가장 사랑받고 있는 Rock의

 한 장르의 초석을 깔았음은 물론,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락에 대한 애정으로 하드록의 대중화라는 명제를 풀어내었다. 이들은 모두 Beatles와 Rolling stones 처럼 영국 Deep Purple, Led Zeppelin 하드록 초기의 이 양대산맥은 70년대로 넘어 오면서 새로운 조류를 제시한다.


딥퍼플은 뒤틀린 디스토션(Distortion)의 기타와 파워 코드(Power Cord)의 노이즈한 기타리프(Riff)를 바탕으로

스리밍(Screaming)에 가까운 샤우트 창법(Shout)의 보컬과 때로는 솔로연주로 까지 이어지는 현란하고 다이나믹한

드럼과 베이스의 리듬파트의 독립을 선언한 증폭된 락사운드에 주력했다.


리프진행의 반복, 헤비 메탈의 피킹 테크닉에 크게 기여한 그들의 기교적이고 환상적인 기타 핑거링. 수 없이 많은

천재들을 배출해낸 그 진한 분홍빛 괴물의 확장. 물론 이 딥퍼플과 항상 대조적인 음악적 견지에서 비교가 되는

레드제플린이란 신화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역시 엄밀하게 따지자면 하드 락의 헤비 메탈화에 가장 기여한 것은 결국

그들이라 말할수 있다. 80년대 초 각자의 길을 가던 밴드는 다시 뭉쳐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그룹, 가장 많은 히트곡을 가진 하드 락 밴드, 키보드를 하드 락에 가장 완벽하게 도입시킨 팀. 80년대 중엽, 온세상을 불태웠던 바로크 메탈의 기원. 그들의 찬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미 락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멤버들...시들어버린 열정과 테크닉 그러나 여전히 멋있는 그룹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의 영원한 우상...전설적인 그들의 분투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지금도 딥퍼플 멤버각자도 다방면에서 활발한 솔로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70년대 혜성같이 등장한 하드록/헤비메탈 그룹인 레드 제플린은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음악에 영국 민속음악을 비롯한 다른 여러장르의 음악과 신화, 신비주의를 그들의 사운드에 융화시켰다.


밴드에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계와 거의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이들은 팬들과의 교감을 오직 공연과 앨범을 통해서만

이루어갔다.

 또한 인기곡을 싱글로 출반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앨범위주의 활동을 펴 또 하나의 헤비메틀 전형을 세웠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70년대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펑크/뉴웨이브적인 음악성향은 레드 제플린의 아성을 조금씩 허물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밴드 해산설까지 나돌았던 1979년, 약간의 미국적 사운드를 띠며 발표한 새 앨범 [In The Through The Out

 Door]는 골수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발매와 동시에 앨범차트 정상에 오르는 등 레드 제플린의 건재함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성공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그룹앞에 닥친 건 바로 멤버의 죽음이었다

1980년 9월 25일 유럽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미국 투어를 준비하던 중 지미 페이지의 자택에서 드러머 존 본햄이

 약물 과용(급성 알콜 중독)으로 인한 심장발작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였고, 기자회견장에서 지미페이지는

 '존경하는 친구를 잃은 지금 그룹활동을 지속시키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을 남기며 결국 그들은 10여년의 그 화려하고 전설적인 아성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해체후 1982년에 출반된 마지막 앨범[Coda]가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커다란 반응을 얻기도 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1995년에 [Encomiun], 1997년에 [Stairway To Heaven]등의 트리뷰트 음반이 출반되었고, 지금에 와서도 이밴드를 추종하는 아티스트들의 트리뷰트 앨범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브리티쉬 펑크(British Punk)의 1세대인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는 불과 2년여의 기간동안 단 1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것을 끝으로 밴드 활동을 마감했지만 록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품위없는 언행과 난폭한 무대 매너, 영국 왕실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 냉소와 허무주의로 가득찬 무정부의적인

음악으로 요약되는 섹스 피스톨즈는 70년대 펑크 부흥의 구심점이자 록큰롤 혁명의 핵이었다


. 단 한 장의 싱글도 발매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들의 노래가 던지는 충격의 여파는 섹스 피스톨즈를 단박에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거의 악명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 쏟아지던 영국 언론과 젊은이들의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1976년, 런던을 중심으로 이들은 부정기적으로 연주활동을 갖는데 Malcolm McLauren의 교묘하게 상업적으로 포장한 헤어스타일, 찢어진 옷, 안전핀 등의 패션은 금새 10대 팬들을 끌어모은다. 그룹의 공연은 항상 폭동이 끊이질 않았는데 100 Club Punk Rock Festival에서 한 소녀가 공연중 깨진 병으로 인해 눈이 머는 사고가 발생하며 폭동은 극에 달한다. (이 사건에는 당시 Sex Pistols의 극성 팬이었던 Sid Vicious가 연루돼 있기도 하다.)

그 젊음의 에너지를 너무나 과도하게 분출할 수 밖에 없었기에 26개월 만에 밴드는 해체되고 시드 비셔스는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었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Rock은 자유로워지지 않았을까?

슈퍼밴드가 아닌 인디밴드들의 문턱을 낮추었으니까 말이다.


밴드 결성 20주년이 되던 지난 96년 초창기 멤버 4인이 다시 뭉쳐 섹스 피스톨즈라는 이름을 되살렸다.

사망한 시드 비셔스의 자리는 창립 멤버인 글랜 매틀록이 다시 채웠으며 이제 40대가 된 왕년의 펑크 투사들은 두장의 라이브 앨범 발표를 시작으로 활동재개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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