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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Oasis - Let There Be Love , Wonderwall . Stop Crying Your Heart Out
















 

  • Oasis - Let There Be Love





  •  






    Let There Be Love




    Who kicked a hole in the sky
    누가 하늘에 구멍을 냈을까
    so the heavens would cry over me?

    천국이 자꾸만 내게로 눈물을 쏟아내잖아


    Who stole the soul from the sun

    누가 태양의 생기를 잃게 한 걸까
    in a world come undone at the seams?

    흉터가 채 아물지도 않은 이 세상인데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I hope the weather is calm

    네가 찬란한 삶의 항해를 시작 할 때엔
    as you sail up your heavenly stream

    나는 날씨가 잔잔했으면 좋겠어


    Suspended clear in the sky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엔
    are the words that we sing in our dreams

    우리가 함께 불렀던 꿈 속의 노랫말이 떠도네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Come on baby blue

    제발 우울한 친구야
    Shake up your tired eyes

    지친 눈빛은 그만 거두자


    The world is waiting for you

    세상이 너를 기다리고 있잖아
    May all your dreaming fill the empty sky

    너의 꿈으로 텅 빈 하늘을 가득 채울 수도 있잖아

     

     


    But If It makes you happy

    하지만 그걸로 인해 네가 행복하다면

    Keep on clapping

    계속 박수를 보내봐


    Just remember I'll be by your side

    이것만 기억해, 난 언제라도 네 곁에 있을거야
    And If you don't let go,

    포기하지 않는 한


    It's gonna pass you by

    고통은 모두 스쳐 지나갈거야

     Who kicked a hole in the sky
    누가 하늘에 구멍을 냈을까


    so the heavens would cry over me?

    천국이 자꾸만 내게로 눈물을 쏟아내잖아
    Who stole the soul from the sun

    흉터가 채 아물지도 않은 이 세상에


    in a world come undone at the seams?

    태양의 생기를 훔친 게 누굴까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Let there be love
    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Wonderwall





    Today is gonna be the day
    오늘이 바로 그 날이야
    That they're gonna throw it back to you
    그들이 너에게로 다시 거슬러올라가는...


    By now you should've somehow
    지금쯤이면 넌 어떻게든
    Realized what you gotta do
    너가 뭘 했어야 했는지 알아야했어


    I don't believe that anybody
    난 아무도 믿지않아
    Feels the way I do, about you now
    내가 지금 너에게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낀다고 말이야


     

    Back beat, the word was on the street
    등 뒤에선, 거리에는 소문이 떠돌고 있지
    That the fire in your heart is out
    네 심장의 불꽃이 꺼져버렸다고 말이야


    I'm sure you've heard it all before
    난 네가 전에 이 소리를 들어봤을거라 확신해
    But you never really had a doubt
    하지만 넌 결코 의심조차 하지않지


    I don't believe that anybody
    난 아무도 믿지않아
    Feels the way I do about you now
    내가 지금 너에게 느끼는 감정을 누군가는 똑같이 느낀다고....

     

    And all the roads we have to walk are winding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모든 길들은 굽어져있어
    And all the lights that lead us there are blinding
    우리를 그 곳으로 이끌어야 할 모든 빛들은 너무나도 눈이 부시지


    There are many things that

    I would like to say to you but I don't know how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Because maybe,

     you're gonna be the one that saves me
    왜냐면 아마도,

    넌 날 구해줄 사람이 될거거든


    And after all,

    you're my wonderwall
    그리고 결국,

    넌 나의 Wonderwall이지 

     

    Today was gonna be the day
    오늘이 바로 그 날이야
    But they'll never throw it back to you
    하지만 그들은 결코 너에게로 거슬러가지 않겠지


    By now you should've somehow
    지금쯤 넌 어떻게든
    Realized what you're not to do
    너가 하지 말아야할 걸 알아차렸어야 해


    I don't believe that anybody
    난 그 어떤 누구도 믿지않지
    Feels the way I do, about you now
    내가 너에게 지금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낀다고 말이야

     

    And all the roads we have to walk are winding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모든 길들은 굽어져있어
    And all the lights that lead us there are blinding
    우리를 그 곳으로 이끌어야 할 모든 빛들은 너무나도 눈이 부시지


    There are many things that

     I would like to say to you but I don't know how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I said maybe, you're gonna be the one that saves me
    난 말했지 "아마도, 넌 날 구해줄 사람이 될거야"
    And after all, you're my wonderwall
    그리고 결국엔, 넌 나의 Wonderwall이야


    I said maybe, you're gonna be the one that saves me
    난 말했지 "아마도, 넌 날 구해줄 사람이 될거야"
    And after all, you're my wonderwall
    그리고 결국엔, 넌 나의 Wonderwall이야









     




    Stop Crying Your Heart Out


     

     

    Hold up
    Hold on
    Don't be scared
    You'll never change what's been and gone


    견디고
    기다려
    무서워 하지 마
    일어나고 지나간 일은 절대 바꿀 수 없을거야.


    May your smile (may your smile)
    Shine on (shine on)
    Don't be scared (don't be scared)
    Your destiny may keep you warm


    너의 미소가 (너의 미소가)
    계속 빛나길 (계속 빛나길)
    무서워 하지 마
    너의 운명이 널 계속 따뜻하게 해줄거야.


    Cos all of the stars
    Are fading away
    Just try not to worry


    You'll see them some day
    Take what you need
    And be on your way
    And stop crying your heart out


    모든 별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걱정 하지 않도록 노력해봐


    언젠가는 그것들을 볼 수 있을거야
    필요한걸 가져가서
    네가 가야 할 길을 가
    그리고 심장이 빠지도록 울지마


    Get up (get up)
    Come on (come on)
    Why're you scared? (I'm not scared)
    You'll never change
    What's been and gone


    일어나 (일어나)
    가자 (가자)
    왜 무서워 하는거야? (나 안무서워)
    넌 절대 일어나고 지난 일들을
    변하게 할 수 없어


    Cos all of the stars
    Are fading away
    Just try not to worry


    see them some day
    Take what you need
    And be on your way
    And stop crying your heart out


    모든 별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걱정 하지 않도록 노력해봐
    언젠가는 그것들을 볼 수 있을거야


    필요한걸 가져가서
    네가 가야 할 길을 가
    그리고 심장이 빠지도록 울지마



    Cos all of the stars
    Are fading away
    Just try not to worry


    You'll see them some day
    Take what you need
    And be on your way
    And stop crying your heart out


    모든 별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걱정 하지 않도록 노력해봐


    언젠가는 그것들을 볼 수 있을거야
    필요한걸 가져가서
    네가 가야 할 길을 가
    그리고 심장이 빠지도록 울지마



    We're all of us stars
    We're fading away
    Just try not to worry
    You'll see us some day


    Just take what you need
    And be on your way
    And stop crying your heart out
    Stop crying your heart out
    Stop crying your heart out


    우리 모두는 별들이야
    우리는 사라지고 있어
    그냥 걱정하지 않도록 노력해
    우리를 언젠간 볼 수 있을거야


    그저 필요한걸 가져가서

    네가 가야 할 길을 가
    그리고 심장이 빠지도록 울지마
    심장이 빠지도록 울지마
    심장이 빠지도록 울지마




     









    오아시스(영어: Oasis)1991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초창기 멤버는 리엄 갤러거(리드 보컬), 폴 "귁시" 맥귀건(베이스), 폴 "본헤드" 아서스(기타) 그리고 토니 매캐롤(드럼)이었고 그 후 리엄 갤러거의 형인 노엘 갤러거(기타, 보컬)가 곧 가입했다.


     이들은 7,000만 장이 넘는 앨범과 8개의 영국 차트 1위 싱글을 배출하며 1990년대 가장 성공적인 영국의 음악가로

    부상했다.

    갤러거 형제는 1991년 밴드의 결성 이래로 해체할 당시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멤버이다.

    해체 당시의 구성원은 갤러거 형제에 겜 아처(Gem Archer, 1966-, 리듬/리드 기타), 앤디 벨(Andy Bell, 1970-,

    베이스 기타), 크리스 샤록(Chris Sharrock, 1964-, 드럼 - 비공식 멤버)이 더해진 형태다.


    곡과 가사적인 측면에서, 오아시스는 비틀즈, 더 후, 롤링 스톤즈, 킹크스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또한 스톤 로지스, 레드 제플린, 섹스 피스톨즈, 더 잼, 티렉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1994)와 2,000만장을 판매하며 더 큰 성공을 거둔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1995)를 통해 90년대 중반 당시 라이벌이었던 블러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고, 브릿팝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또한 갤러거 형제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연일 장식하며 악동으로서, 국민밴드로서 명성을 동시에 얻게 되었다.

    인기가 절정에 이를 때 내놓은 오아시스의 3집 《Be Here Now》(1997)는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2위에 올랐으며

    발매 첫날에만 거의 5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영국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앨범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Be Here Now》에 대한 평가는 냉혹해졌고, 인기도 함께 떨어졌다.


     2005년 발매된 6집 《Don't Believe the Truth》는 발매 첫 주 미국에서만 65,000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90년대

    중반 이후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6집 《Don't Believe the Truth》의 성공을 통하여 부활의 조짐을 보인 오아시스는 약 3년여 간의 공백을 깨고

     2008년 10월 7집 《Dig Out Your Soul》을 통해서 다시금 세상에 나온다.


     6집이 부활의 전주곡이었다면 7집 《Dig Out Your Soul》은 비틀즈의 행보를 답습이라도 하는 듯 그루브하고 사이키델릭한 모습으로 찬사를 받는다. 《

    Dig Out Your Soul》은 발매와 동시에 영국 음반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또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 90년대 영광의 《Definitely Maybe》,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잇는 앨범으로 평가받고 브릿팝 황제의 귀환과 부활 그리고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2009년 8월 29일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 탈퇴를 선언하였다.[2] 이후 리엄은 오아시스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

    없다고 밝혔고, 현재의 멤버들과 함께 비디 아이라는 밴드로 활동 중이였으나 해체하였다.

    노엘은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라는 밴드로 활동 중이다.



    오아시스는 1966년 비틀즈의 B 사이드 수록곡으로부터 이름을 따온 레인(The Rain)이라는 밴드에서 출발했다.

    레인은 폴 "귁시" 맥기건(Paul "Guigsy" McGuigan, 1971-, 베이스 기타), 폴 "본헤드" 아더스(Paul "Bonehead"

    Arthurs, 1965-, 기타), 토니 맥캐롤(Tony McCarroll, 1972-, 드럼), 크리스 후튼(Chris Hutton, 보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맥기건이 학교 친구였던 리엄 갤러거를 밴드에 끌어들였고 리엄은 합류 즉시 밴드 이름을 오아시스로 바꾸었다.

    왜 리엄이 오아시스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는지는 설이 분분하나, 그와 노엘의 방에 붙어있던 인스파이럴 카펫츠

    (Inspiral Carpets)의 투어 포스터로부터 따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비틀즈가 연주한 적이 있는 오아시스라는 클럽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있다.[3]









     






    오아시스는 1991년 8월 맨체스터의 보드워크라는 클럽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당시 인스파이럴 카펫츠의 로드 매니저로 독일 투어 중이었던 노엘 갤러거는 어머니와 전화통화 중 리엄이 밴드에서

    공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생의 공연을 보러 왔고, 말썽쟁이 동생이 사고치는 것 이외에 다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몇 달 뒤 그는 밴드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비록 그들의 음악이 형편없다고 생각했지만, 노엘은 자신이 리더로서 모든 곡을 쓸 것이며, 밴드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다.

    노엘 갤러거가 이끄는 오아시스는 단순함을 그들의 음악적 방향성으로 잡았다.


    본헤드는 바레코드만을, 귁시는 베이스의 루트음만을, 맥캐롤은 기본리듬만을 연주하도록 했고, 앰프는 사운드가

     찌그러질 때까지 켜두었다.

    이로써 오아시스는 "기교와 복잡함을 배제한 거침없는 사운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1년 이상 라이브 공연과 연습을 하고 괜찮은 데모 테이프(《Live Demonstration》)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93년 5월 31일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사장 앨런 맥기(Alan McGee)를 만나게 되면서 밴드는 큰 기회를 잡게 되었다. 오아시스는 연습실을 같이 쓰던 시스터 러버스(Sister Lovers)라는 밴드의 초대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있는 King

    Tut's Wah Wah Hut이라는 클럽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오아시스는 친구들 주머니까지 털어 승합차 한 대를 빌렸고 6시간이나 걸려 글래스고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날밤 공연 리스트에 올라있지 않았기 때문에 클럽 입장을 거부당했지만 막무가내로 쳐들어갔다.

    (클럽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는 후문이 있음)[6] 오아시스는 가까스로 오프닝 공연을 배정받을 수

    있었고, 그날 밤 자기 회사 소속밴드인 18 휠러(18 Wheeler)의 공연을 보러온 맥기의 눈에 띄게 되었다.


    맥기는 그 자리에서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았고, 4일 후 오아시스는 크리에이션 레코드와 전격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Columbia〉가 담긴 홍보용 데모 앨범에 이은 그들의 첫 싱글 〈Supersonic〉은 1994년 4월에 발매되어 차트 3

    1위까지 올랐다.


    또한 세 번째 싱글 〈Live Forever〉가 처음으로 영국 차트 10위권에 진입하게 됐다. 녹음과 믹싱 과정에서 난항을

    겪은 후 마침내 완성된 그들의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는 1994년 9월에 발매되어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영국 역사상 단기간에 가장 빨리 팔린 데뷔 앨범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기존 음악에서 특이한 기타 리프나 가사를 차용하는 노엘 갤러거의 작곡 성향이 주목을 끌기도 했다.

    Cigarettes & Alcohol〉의 메인 리프를 티렉스의 1972년작 〈Get It on〉에서 따왔다는 사실은 노엘 갤러거도

    인정한 바 있다.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를 연상시키는 〈Supersonic〉의 기타 솔로뿐만 아니라,

    Shakermaker〉도 뉴 씨커즈(New Seekers)의 〈I'd Like to Teach the World to Sing〉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최고의 한 해였지만 쉴틈없는 라이브 공연/녹음 스케줄과 방탕한 생활ㅡ젊은 록 밴드들에게 흔한ㅡ은 밴드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1994년 9월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 필로폰에 취한 리엄이 미국 관중들에게 무례한 발언을

    하고 탬버린으로 노엘을 때리는 등 공연이 난장판으로 바뀌는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이 사건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노엘은 잠시 밴드를 그만두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버렸다. 노엘은 그 해 10월,

     마음을 추스리고 텍사스의 녹음실로 복귀한 후 〈Talk Tonight〉을 녹음했는데, 이 노래는 밴드를 떠나있는 동안

    그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만든 곡이었다.


    오아시스의 크리스마스 싱글로 커트되어 영국 차트 3위까지 오른 〈Whatever〉와 〈Talk Tonight〉은 보다 부드러운 사운드를 들려준 다음 앨범의 변화를 예고해주고 있었다.





     

     





    Columbia〉가 담긴 홍보용 데모 앨범에 이은 그들의 첫 싱글 〈Supersonic〉은 1994년 4월에 발매되어 차트

     31위까지 올랐다.

    또한 세 번째 싱글 〈Live Forever〉가 처음으로 영국 차트 10위권에 진입하게 됐다. 녹음과 믹싱 과정에서 난항을

     겪은 후 마침내 완성된 그들의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는 1994년 9월에 발매되어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영국 역사상 단기간에 가장 빨리 팔린 데뷔 앨범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기존 음악에서 특이한 기타 리프나 가사를 차용하는 노엘 갤러거의 작곡 성향이 주목을 끌기도 했다.

    Cigarettes & Alcohol〉의 메인 리프를 티렉스의 1972년작 〈Get It on〉에서 따왔다는 사실은 노엘 갤러거도

     인정한 바 있다.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를 연상시키는 〈Supersonic〉의 기타 솔로뿐만 아니라,

     〈Shakermaker〉도 뉴 씨커즈(New Seekers)의 〈I'd Like to Teach the World to Sing〉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최고의 한 해였지만 쉴틈없는 라이브 공연/녹음 스케줄과 방탕한 생활ㅡ젊은 록 밴드들에게 흔한ㅡ은 밴드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1994년 9월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 필로폰에 취한 리엄이 미국 관중들에게 무례한 발언을 하고

    탬버린으로 노엘을 때리는 등 공연이 난장판으로 바뀌는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이 사건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노엘은 잠시 밴드를 그만두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버렸다. 노엘은 그 해 10월,

    마음을 추스리고 텍사스의 녹음실로 복귀한 후 〈Talk Tonight〉을 녹음했는데, 이 노래는 밴드를 떠나있는 동안

    그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만든 곡이었다.


    오아시스의 크리스마스 싱글로 커트되어 영국 차트 3위까지 오른 〈Whatever〉와 〈Talk Tonight〉은 보다 부드러운 사운드를 들려준 다음 앨범의 변화를 예고해주고 있었다.














    1996년 2월, 오아시스는 비틀즈더 잼에 이어 영국의 음악 프로그램 《Top of the Pops》에서 하루에 두 곡

    (〈Don't Look Back in Anger〉와 슬레이드(Slade)의 〈Cum on Feel the Noize〉)을 연주한 세 번째 밴드가 되었다. 또한 4월 27, 28일에는 맨체스터의 메인로드 축구장에서 자신들의 첫 번째 대규모 야외 콘서트를 가졌으며, 둘째 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그 해 말 《...There and Then》이라는 이름의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그들의 경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오아시스는 1996년 8월 10, 11일 넵워스에서 연속콘서트를 열었다.

    두 공연의 티켓은 불과 몇 분만에 매진됐는데, 350만 명 이상의 응모자 중 당첨된 25만 명의 관중이 참가했으며,

     이는 당시 영국 야외 공연 관중 신기록이었다.


    다음 달 그룹에게 시련이 닥쳤다. 8월 23일 오아시스는 로열 페스티벌 홀(Royal Festival Hall)에서 유명한 MTV

    Unplugged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리엄이 목상태가 좋지 않다며 공연을 거부한 것이다.

    그는 공연장 2층에서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공연을 지켜봤고, 노엘이 노래를 부르는 중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그룹은 다음 달 미국 공연을 위해 떠났는데 불과 며칠 후 노엘이 혼자 귀국해버렸고 밴드들도 따라 귀국하게 됐다.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그들은 오아시스가 해체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팬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1996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s)에서의 성공은 리엄이 시상자로 나온 인엑세스(INXS)의 마이클 허친스(Michael

    Hutchence)로부터 상을 받은 후 "한물 간 사람들은 지금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을 전달할 자격이 없다"고 발언해

    빛이 바래게 됐다.


    오아시스는 1996년 말부터 1997년 초까지 역사적인 애비 로드 스튜디오(Abbey Road Studios)에서 3집 앨범을

     녹음했다. 《Be Here Now》는 1997년 8월에 발매됐는데 전통적으로 월요일에 발매하던 것을 깨고 목요일에

     발매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차트 1위를 차지한 싱글 〈D'You Know What I Mean?〉 덕분에 이 앨범은 오아시스의 앨범 중 가장

    기대되는 작품이었고 언론의 관심도 그만큼 컸다.

    그러한 기대감은 BBC1이 앨범 발매 전날 《Right Here, Right Now》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한 언론의 관심과 과대포장 덕분에 이 앨범은 발매 첫 날 423,000장이 팔려 영국 역사상 가장 빠른 판매고를

    올린 앨범으로 기록되었으며, 영국 앨범 차트 2위에 올랐다.

    《Be Here Now》의 최종스코어는 전 세계적으로 《Definitely Maybe》보다 많이 팔리긴 했으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에 미치지는 못했다.


    초기 언론들의 리뷰는 긍정적이었지만, 일단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이 앨범이 과대평가 되었다는 비판 및 몇몇 곡들이 지나치게 늘어지는 점과 무거운 사운드, 의욕과잉에 대한 비판이 줄을 이었다.

    노엘은 이 앨범에 대해 "코카인에 취한 놈들이 ... 스튜디오에 모여서 ... 아무렇게나 만든 앨범"이라고 평했다.


    브릿팝 운동은 끝났고 밴드는 《Be Here Now》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재앙과도 같았던 《Be Here Now》 투어를 마친 후 언론의 혹독한 비평 속에 그들은 서로를 멀리하며 1998년을

    별다른 활동없이 보냈다.














     또한 노엘 갤러거는 수많은 곡들을 B 사이드로 잘라버린 점에 대해서도 비판을 들었다.

     다행히 1998년 11월 B 사이드 곡 14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The Masterplan》이 발매되면서 그러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최근 인터뷰에서 노엘은 "한 2~3년간은 내가 쓰기만 하면 뭐든 환상적인 곡들이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물론 《Morning Glory》 때 B 사이드로 잘린 싱글들을 모아 《Be Here Now》 앨범을 만들었다면, 아마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뭐 어쨌든 그렇게는 안 됐다. 그래도 《Be Here Now》를 만들면서 '사상 최대로 과장된, x나 거대한 사운드를

     만들자'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U2 정도는 될 수도 있었다. 그 땐 가사나 편곡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썼다.


     그런데 정작 그 시기에 진짜 괜찮은 것들은 B 사이드 곡들이다.

    정규 앨범인 《Be Here Now》보다 B 사이드 곡들 중에 훨씬 훌륭한 곡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1999년 초 그들은 4번째 정규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

    2월에 마크 "스파이크" 스텐트(Mark "Spike" Stent)가 공동프로듀서로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앨범의 대부분 곡은 1998년 여름 코카인을 끊어 맑은 정신상태였던 노엘 갤러거가 작곡했다. 이 사실은 앨범의 가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녹음 작업은 4월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되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고8월 원년멤버였던 폴 "본헤드" 아더스가 탈퇴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당시에는 그의 탈퇴 이유에 대해 노엘이 "아더스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에 탈퇴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좋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아더스는 "다른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떠난다고 밝혔다.".[21] 그러나 후에 노엘은 다른 이유를 들려주었는데,

    리엄이 제대로 노래할 수 있도록 녹음 기간에는 "음주 및 마약금지" 명령을 내렸는데, 아더스가 이를 위반해 노엘과의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오아시스 팬들은 며칠 후 베이시스트 폴 "귁시" 맥기건의 탈퇴 발표 소식을 접하며 더 큰 충격에 빠지게 됐다.

    후에 맥기건은 친구의 탈퇴가 본인 스스로도 떠나게 만든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셋만 남게된 오아시스는 앨범 녹음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노엘 갤러거가 아더스의 기타 부분과 맥기건의 베이스

    부분을 대부분 재녹음하였다.

    또한 새 멤버 영입을 위한 노력도 계속했는데, Bernard Butler(Suede), Johnny Marr(The Smiths), John Squire

    (The Stone Roses), David Potts(Monaco), Gary "Mani" Mounfield(The Stone Roses), Steve Cradock(Ocean

    Colour Scene) 등이 물망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먼저 헤비 스테레오(Heavy Stereo)의 멤버였던 겜 아처가 리드/리듬 기타리스트로 확정됐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아더스의 탈퇴가 공식 발표된 지 불과 며칠 후 노엘 갤러거로부터 의사타진을 받았다고 한다.

    밴드에 합류한 후 아처가 처음 맡은 역할은 1999년 11월 5일, 새 앨범에서 첫 싱글로 커트된 〈Go Let It Out〉의

    뮤직비디오 촬영이었다.


    그 즈음 밴드에 들어와 잠시 연습을 하던 데이빗 포츠는 어차피 금방 잘릴 것 같고 베이스를 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발을 뺐다.

     그들은 라이드(Ride)와 허리케인 넘버원(Hurricane#1)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였던 앤디 벨을 새 베이시스트로

    영입했고 1주일 후 이를 공식 발표했다.


    벨은 그 전까지 한 번도 베이스를 쳐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1999년 12월로 예정된 미국 투어를 준비하면서 오아시스의 곡들로 베이스 연주법을 배워야 했다.

    크리에이션 레코드가 해산함에 따라 오아시스는 노엘을 의미하는 빅 브라더 레코딩(Big Brother Recordings)이라는

    음반사를 설립하여 오아시스의 모든 음반을 영국과 아일랜드에 직접 출시하게 됐다.


    오아시스의 4집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는 2000년 2월 발매되어 첫 주에 괜찮은 판매실적을

    보여줬다.

    그러나 평단의 반응은 미적지근했고, 전형적인 그들의 사운드를 다소나마 확실히 탈피한, 보다 실험적이고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라는 평을 받았다.


    밴드를 둘러싼 여러 변화와 함께 새 앨범 표지ㅡ그래픽으로 처리된 뉴욕 풍경ㅡ에는 겜 아처가 디자인한 새로운

    로고가 박혀있고, 최초로 리엄 갤러거가 작곡한 〈Little James〉가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비록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가 오아시스 앨범 중 현재까지 전 세계 판매량이 가장 저조한

     앨범이긴 하지만, Go Let It Out〉은 영국 차트 1위에 올랐으며 〈Fuckin' in the Bushes〉는 오아시스의 콘서트

    오프닝 곡으로 자주 쓰이고 있다.


    여전한 형제 간의 불화로 인해 밴드는 두어 달 동안 해체설에 시달렸지만, 노엘은 영국과 아일랜드 공연을 위해 팀에

    복귀했는데, 웸블리 스타디움(Wembley Stadium)에서의 두 차례 대규모 콘서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 중 첫째 날 공연이 2000년 말 《Familiar to Millions》라는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되어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10여개국에서 방송된 둘째 날 공연은 엉망이었다. 분명 술에 취한 상태였던 리엄이 별거 중이었던 부인 팻시

    켄짓(Patsy Kensit)과 그의 형 노엘에 대해서 경멸적인 발언을 하는 등 횡설수설했던 것이다.

    또한 곳곳에서 음정과 가사를 틀리거나, 아예 노래를 부르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리엄의 이혼과 비슷한 시기에 노엘과 앨런도 각각 이혼을 하였다. 리엄은 올 세인츠(All Saints)의 멤버였던 니콜

    애플튼(Nicole Appleton)과 사귀기 시작했고 그녀는 곧 아들 진(Gene)을 임신하게 됐다.

     노엘은 사라 맥도날드(Sara MacDonald)와 만나기 시작하여 2002년 잠깐 헤어졌던 시기를 빼면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2001년 한 해 동안 오아시스는 5집 앨범 작업과 월드 투어에 매진했다.

     1월에는 남미에서 세 개의 축제에 참가한 후 영국으로 돌아와 스튜디오 작업을 했다.

     5월에는 한달 내내 북미 지역에서 The Black Crowes, Spacehog과 함께 Tour of Brotherly Love 투어를 가졌다.


    이 투어에서는 앨런 화이트가 엄지손가락 부상을 당해 그의 형 스티브가 대신 연주를 했다.

    공연의 피날레는 노엘과 겜이 The Black Crowes와 합동으로 록의 명곡들을 연주하며 마무리되었다.

     6월에는 파리에서 닐 영의 콘서트를 도와주었고, 7월에는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 및 태국 방콕의 페스티벌 쇼에

    참가하기도 했다.


    두어 달 동안 녹음 작업을 한 후, 10월에는 런던, 맨체스터, 글래스고에서 6회 공연을 가졌는데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Ten Years of Noise and Confusion"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공연은 밴드의 10년 간의 라이브 활동을 기념하는

     공연이었다.















    오아시스가 앤디 벨, 겜 아처와 함께 작업한 첫 앨범인 《Heathen Chemistry》는 2002년 7월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밴드의 예전 앨범들에서부터 시도되던 사운드적 실험을 혼합했으며, 60-70년대 영국 록 분위기의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작곡가로서의 능력이 일취월장한 리엄은 히트곡 〈Songbird〉를 작곡했다. 또한 《Heathen Chemistry》에서는 앨런 화이트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작곡에 참여함으로써 밴드 전체가 녹음 과정에 고른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을 통해 이 앨범은 전작들에 비해 보다 편안한 느낌을 전달해 주고 있다. (물론 녹음실에서 술과

    마약, 싸움을 자제한 것도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Johnny Marr가 몇 곡에서 기타 및 백업보컬로 참여했다.

    《Heathen Chemistry》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은 미온적이었지만, 앨범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5집이 발매된 후 밴드는 성공적인 월드 투어를 펼쳤으나 역시 약간의 사고들이 뒤따랐다. 미국 투어의 시작이었던

    플로리다 주 폼파노 비치 공연에서 세 번째 곡을 부르던 중 목소리가 완전히 가버린 리엄이 무대를 내려가버리고,

     무대에서는 잠시 혼란이 있었지만 노엘이 《The Masterplan》의 곡들을 주로 부르며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의도치 않은 사고였지만 팬들에게는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남게 됐다. 2002년 여름 미국 투어 중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노엘, 벨 그리고 객원 키보디스트 제이 달링튼(Jay Darlington)이 차 사고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모두들 큰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공연이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후쿠오카 공연에서는 리엄이

     별다른 이유없이 무대에서 퇴장해버려서 또다시 노엘이 보컬을 맡아야 했다. 이것은 리엄이 3년 전 후쿠오카에서

    공연 도중 퇴장한 이후로 두 번째였다.


    2002년 12월 리엄 갤러거, 앨런 화이트 및 밴드 스탭 3명이 뮌헨의 나이트클럽에서 폭력사건에 휘말리면서 유럽

     투어 중 독일 공연 일정이 연기된 사건이 있었다.

    오아시스 쪽 전원이 구속되어 소속사에서 17만 파운드의 보석금을 납입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만취한 상태였으며, 검사 결과 리엄은 코카인도 투약한 상태였다고 한다.

    2년 후 이 사건으로 리엄은 3만5천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받았는데, 일부 금액은 리엄으로부터 사타구니를 심하게

    걷어차인 경찰관의 치료비로 지급되었다.

    한편 리엄은 앞니 두 개가 부러졌고 화이트는 머리에 약한 부상을 입어 뇌 스캔을 받았다.


    그들은 영국 축구 아레나들에서의 공연으로 한 해를 마감했다. 2003년은 《Heathen Chemistry》의 네 번째 싱글

    Songbird〉를 발매하면서 시작했다.

     이 곡은 오아시스의 싱글 중 노엘 갤러거가 작곡하지 않은 첫 번째 싱글이었으며, 그 해 2월 영국 차트 3위에 올랐다.


     그들은 3월에 더블린에서 두 번의 공연을 가진 후, 연기되었던 네 차례의 독일 공연을 마무리함으로써 《Heathen

     Chemistry》 투어를 마치게 되었다.











    오아시스는 2003년 12월말 콘월의 쏘밀즈 스튜디오(Sawmills Studios)에서 프로듀싱 그룹인 데쓰 인 베가스

    (Death in Vegas)와 함께 6집 녹음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원래 《Definitely Maybe》 발매 10주년이 되는 2004년 9월에 발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밴드의 거의 모든 곡에서 드럼을 맡았던 앨런 화이트가 2004년 1월 초 탈퇴를 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형 스티브 화이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앨런이 밴드 생활을 더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여자친구와

    함께 지내고 싶어한다고 밝혔다.


    이후 노엘 역시 인터뷰에서 자신은 앨런에게 아무런 나쁜 감정이 없으며, 단지 앨런이 사생활 때문에 오아시스에

     전념하기 힘들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테렌스 커크브라이드(Terence Kirkbride)가 임시로 드럼 세션을 맡아 녹음이 진행됐는데, 그가 녹음한 곡은

    〈Mucky Fingers〉 한 곡 뿐이었고, 더 후(The Who)의 드러머이자 비틀즈 링고 스타의 아들이기도 한 잭 스타키

    녹음에 참가했다.


    또한 그는 이후 밴드의 모든 뮤직비디오에 출연했고 월드 투어에도 다 참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까지 오아시스의 정식 멤버가 아니기 때문에 앨범 표지에도 안나오고, 인터뷰나

    사진촬영 같은 홍보활동에도 참가하지 않고 있다.

    결국 오아시스는 결성 이후 최초로 (공식적으로는) 4인조로 활동하게 되었다. 오아시스는 2006년 4월, 투어를 마친 후 스타키에게 정식 멤버로 들어올 것을 제의했다.


    2004년 6월, 오아시스와 잭 스타키는 1995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참가하게 됐고, 히트곡으로 짜여진 세트 리스트에 겜의 〈A Bell Will Ring〉과 리엄의 〈The Meaning of Soul〉을 추가로 들려주었다. 이 공연은 그들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평과 형제간의 다툼 문제도 있고 성의없는 무대였다는 엇갈린 평을 받았다.


    2004년 9월, 그들은 데뷔 앨범 발매 10주년을 기념하여 《Definitely Maybe: The DVD》를 출시했다. 이 DVD에는

     고음질 버전의 1집 수록곡들과 4시간 분량의 라이브 공연 뒷이야기들, 밴드 멤버 및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여러 가지 난항을 겪은 후 마침내 그 해 10월부터 12월까지 로스앤젤레스의 캐피틀 스튜디오에서 밴드의 6집이

    녹음되었다.

     10년 이상 밴드의 리더로서 프로듀서 역할도 맡고 있던 노엘이 한 발 물러서고, 데이브 사르디(Dave Sardy)가 메인

     프로듀싱을 담당했다.


    3년간 여러 번에 걸친 녹음 끝에 2005년 5월 오아시스는 6번째 정규 음반 《Don't Believe the Truth》를 발표했고,

    이 앨범으로 소니 BMG와의 계약이 만료됐다.

     이번에도 전작인 《Heathen Chemistry》와 마찬가지로 노엘이 작곡을 전담하지 않고 멤버들이 공동작업을 하는

     방식을 따랐다.


    또한 이 앨범은 거의 10년간 드럼을 맡았던 앨런 화이트 대신 잭 스타키가 드럼을 맡은 첫 앨범이기도 했다. 이 음반은 팬들 및 비평가들로부터 공히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이후 가장 뛰어난 작품이란 찬사를 받았다. 〈Lyla〉와 〈The Importance of Being Idle〉이 각각 영국 싱글 차트 1위에(오아시스의 7번째, 8번째 차트 1위곡임), 〈Let There Be Love〉는 2위에 오르며 큰 히트를 쳤다.


    오아시스는 Q Awards에서 특별인기상(a special People's Choice Award) 및 베스트앨범상을 받게 됐다.

    물론 이전 5개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Don't Believe the Truth》 역시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앨범의

    큰 성공으로 오아시스는 자신들의 전성기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팬들을 흡입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2005년 5월, 그들은 엄청난 대규모 월드 투어를 시작했다. 2005년 5월 10일 런던 아스토리아 극장을 시작으로 2006년

    3월 31일 매진을 기록한 멕시코 시티 공연까지 이어진 이 투어는, 1994년-1995년의 《Definitely Maybe》투어 이후로 가장 대규모 투어였는데, 26개국 110회의 공연에서 170만명의 관객이 그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또한 별다른 불상사 없이 끝났으며, 최근 10년간 오아시스의 투어 중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투어 스케줄에는 뉴욕 시 메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과 LA 헐리웃 보울 공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우상인

    존 레논이 그 두 장소를 두고 밴드가 미국 투어를 왔다면 반드시 공연해야할 장소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만큼, 갤러거

    형제에게는 매우 특별한 장소였다.


    2006년 2월 21일 오아시스는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가졌다. 결성 이후 첫 내한공연이었던 만큼

     예매 3주 만에 5500여 석이 매진되어, 기획사 측에서 특별히 100석을 추가 판매하기도 했다.


     (형제들간의 싸움이나 욕설을 이벤트라고 보지 않는다면) 오아시스는 그들의 공연이 늘 그렇듯 특별한 이벤트나

     멘트 없이 19곡을 연주하며 음악 자체에 충실한 공연을 보여주었고, 관객들은 뜨거운 호응으로 화답했다.

    이후 오아시스는 싱가포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공연이 "우리가 가졌던 최고의 공연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함으로써 한국 공연이 만족스러웠음을표시했다.


    한편 2005년에 오아시스는 노엘 갤러거가 작곡하고 직접 부른 〈Who Put the Weight of the World on My

    Shoulders〉라는 곡으로 영화 《골!(Goal!)》의 OST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OST에는 노엘이 부르고 UNKLE이 프로듀스하여 재작업한 〈Cast No Shadow〉와 데이브 사르디가 리믹스한

    Morning Glory〉도 수록되어 있다.


    2006년 오아시스는 《Stop the Clocks》라는 이름의 두 장짜리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다.

     그들은 베스트 앨범내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아했지만, 소니뮤직과의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후문이다.


    2006년 11월에는 05/06년 월드 투어를 기록한 〈Lord Don't Slow Me Down〉이라는 제목의 록 다큐멘터리가

     발표됐다.

    같은 달 노엘과 겜이 드러머 테렌스 커크브라이드와 함께 《Stop the Clocks》를 홍보하기 위한 짧은 투어를

    시작하여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10여 차례 공연을 펼쳤다.








    2007–2009: 《Dig Out Your Soul

    2007년 2월 14일, 오아시스는 브릿 어워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수상 무대에서 잭 스타키와 함께

    〈Cigarettes & Alcohol〉, 〈The Meaning of Soul〉, 〈Morning Glory〉, 〈Don't Look Back in Anger〉,

    〈Rock 'n' Roll Star〉등의 곡을 연주했다.



    노엘의 인터뷰를 통해 7집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음악 잡지 《NME》 2007년 4월호에서 그는 "7집 앨범의

     작곡은 벌써 끝났다고 보면 된다.

     내가 8곡을 썼는데 꽤나 맘에 든다. 리엄이 쓴 곡 중에 지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곡도 한두 곡 있다.


    겜과 앤디의 곡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모여앉아서 '우리 녹음 언제 하지?' 이것만 결정하면 되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또한 2007년 5월 19일, 영국 스카이 스포츠 채널의 축구쇼인 〈Soccer AM〉에 출연하여 "최근에 정말 뛰어난 곡을

    몇 개 썼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잭 스타키가 2007년 7월까지 더 후 투어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새 앨범 녹음은 아무리 빨라도 2007년 8월

    이전에는 시작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NME》4월호에는 노엘이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며칠 후 밴드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를 정면으로 부인했고, 노엘 역시 〈Soccer AM〉에 출연했을 때, "리엄을 긴장시키기 위해

    (in order to wind up Liam)" 그런 말들을 즐겨한다고 털어놓음으로써 솔로 활동설을 부인했다.


    여름 투어설, 노엘과 겜이 글래스톤베리 페스터벌에 참가한다는 설, 밴드 전체가 라이브 어쓰(Live Earth)에 참가한다는 설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2007년 여름은 새 앨범을 위한 곡을 쓰고 데모 작업을 하며 조용히 보낼

     계획이다.


    또한 2005년에 있었던 시티 오브 맨체스터 공연이 DVD로 발매될 예정이며, 2007년 말 발매예정인 록 다큐멘터리

    Lord Don't Slow Me Down은 정식 발매에 앞서 6월 24일,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서 미리 상영될 계획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8년 5월, 잭 스타키는 밴드의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하고 밴드를 떠났다.

     전(前) 로비 윌리엄스의 드러머인 크리스 샤록이 오아시스의 투어에서 잭을 대신하게 되었다.

     크리스 역시 잭처럼 밴드의 공식적인 멤버가 아니며, 오아시스는 네 명의 멤버로만 구성되어 있다. 2008년 6월,

     밴드는 Sony BMG와 세 장의 앨범을 더 내기로 재계약하였다.


    오아시스는 2007년 7월과 9월 사이의 두어 달 동안 새로운 두 곡을 완성하고 다른 곡들의 데모를 녹음하였다.

     그들은 두 달 간 휴식을 취했는데, 노엘의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밴드는 2007년 11월 5일 스튜디오로 다시 들어가 2008년 3월 즈음에 녹음을 끝냈다.


    새 앨범의 프로듀서는 2005년 전작 《Don't Believe the Truth》와 동일하게 데이브 사르디(Dave Sardy)가 맡았으며 전설적인 에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 후 L.A.에서 믹싱 작업을 거쳤다. 4명의 멤버가 모두 작곡에 참여했다.

     노엘 갤러거가 6곡, 리엄 갤러거가 3곡, 겜 아처가 1곡, 앤디 벨이 1곡씩 작곡했다.


    첫 번째 싱글은 노엘 갤러거가 쓴 〈The Shock of the Lightning〉으로 2008년 9월 29일 싱글컷되었다.

    오아시스의 일곱 번째 정규 앨범인 《Dig Out Your Soul》은 10월 6일 발매되었으며, UK차트 1위, 빌보드 200에서

     5위를 차지했다.


    오아시스는 7집 《Dig Out Your Soul》 발매 2달전인 2008년 8월 26일부터 U.S.A(Seattle)-WaMu Theater를

    시작으로 마지막 공연인 2009년 8월 22일 U.K(Staffordshire) V Festival까지 13개월간 26개국(영국, 미국, 한국,

    일본, 남아공, 독일, 아르헨티나 등) 115회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특히 투어 막바지 영국에서의 Wembley Stadium(3회), Heaton Park(3회), Stadium Of Light, Millennium Stadium,

    Murrayfield, Ricoh Arena, Slane Castle 공연에선 전석 매진과 함께 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역대 영국 밴드 중

    가장 성공적인 투어를 성공시켰다.


     또한, 영국 맨체스터 출신 밴드 오아시스는 1일 오후 8시 30분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약 10,000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시키며 자신들의 두 번째 내한공연을 열었다. 3년 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팬들과 만난 이들은 두 시간 가까이

    최신 앨범 수록곡을 포함한 21곡의 히트곡을 연주하며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다.


     일본 공연 당시 세트리스트와 거의 똑같은 순서와 구성으로 진행된 이번 공연은 오아시스의 일본 최고 인기곡

     '왓에버(Whatever Noel's Acoustic Version)'가 빠진 대신 한국만을 위한 특별한 곡이라며 '리브 포레버

    (LiveForever Noel's Acoustic Version)'가 새롭게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3개월 뒤 오아시스는 3번째 내한공연을

     지산밸리락페스티벌을 통해서 가졌다.

    7월26일 오후 9시 30분 경기도 이천의 지산리조트에서 약 20,000여 락팬들을 브릿락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2009–현재: 해체와 여파



    2009년 8월 29일, 노엘은 오아시스에서 탈퇴를 선언하였고, 이것은 팬들에게 큰 경악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2009년 10월 8일 "리엄 갤러거가 오아시스는 끝났다.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이로써 오아시스가 완전히

     해체되었음을 선언했다.


    2009년 11월 19일, 리엄 갤러거는 새 앨범을 겜 아처, 앤디 벨(현재는 베이시스트가 아닌 기타리스트로서), 크리스

     샤록과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베이시스트와 함께 새로운 곡들을 녹음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2010년 7월 안에 앨범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리엄은 또한 라이브 키보디스트인 제이 달링턴 역시 밴드에 정식으로 가입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2009년 12월 1일, 리엄은 새 앨범이 오아시스라는 이름 아래 발매될 지 아직 모른다고 선언하면서, "만약 우리가

     그 때까지 다른 이름을 생각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앨범을 여전히 오아시스라는 이름으로 낼 수 있다"고

    말하였다.


    리엄은 그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더 멀리 내다보며, "사람들은 여전히 말하겠지 '그건 여전히 오아시스야, 근데

    노엘이 없다면 그건 오아시스가 아니야' - 인생은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는지 일일이 신경쓰기엔 너무 짧아. 우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거야, 우린 그 시점에 음악에만 집중하고 있을거야."


    2009년 12월 3일,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가 밴드의 현재 상태에 대해 물었을 때, 리엄 갤러거는 "지금, (여전히)

    오아시스야."라고 말하였다.


     2010년 5월 26일 리엄 갤러거는 지난 오아시스 멤버인 리엄 갤러거(보컬)와 겜 아처(기타리스트), 앤디 벨(베이시스트), 크리스 샤록(드러머)의 구성을 발표하였으며, 스티븐 릴리화이트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비디 아이"라는 그들만의

     세계를 구성 중이라고 발표했다.

    오아시스 사이트에는 노엘 갤러거를 뺀 4명의 멤버 사진도 실었다.


    최근 칸 국제영화제에서 리엄 갤러거는 자신이 직접 제작하는 전설적인 4인조 그룹 비틀스에 관한 영화의 사운드트랙 전부를 새 밴드가 녹음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앞서 리엄 갤러거는 오는 10월께 새 밴드의 첫 음반을 발매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리엄 갤러거는 "오아시스의

     해체는 잘한 결정이였다.

     자유로워진 것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Birth 영국 맨체스터 롱사이트의 가난한 노동자 집에서 태어난 갤러거 가의 삼형제 폴 갤러거(Paul Gallager)와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 그리고 리엄 갤러거(Liam Gallagher)는 축구를 하거나 비틀즈의 음악을 듣기 위해 학교를 빼먹는 대단한 말썽꾸러기이자 싸움꾼들이었다.


    이들 중 실독증이란 장애를 타고난 둘째 노엘 갤러거는 11살 때, 생일 선물로 받은 기타를 만지작 거리며 미래의

      자니 마(Johnny Marr : The Smith의 기타리스트)를 꿈꾸게 되었고 막내 리엄 갤러거 역시 1989년에 관람한

    스톤로지즈 공연을 계기로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노엘 갤러거는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부재와 그로부터 비롯된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남의집 털이에 나섰다가 발각되어 평소 친분이 있었던 밴드 인스파이럴 카페츠(Inspiral Carpets)의 기타 테크니션으로 고용되어 4년동안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는 레인(The Rain)이란 이름으로 연주활동을 하고 있던 폴 '본헤드' 아더스(Paul 'Bonehead'

    Athurs / guitar), 폴 '귀그스' 맥귀건(Paul 'Guisy' McGuigan / bass) 그리고 토니 맥캐롤(Tony McCarroll / drums)은 보컬의 필요성을 느껴 자기 주장이 강한 리엄을 끌어들이게 되고, 밴드의 자작곡 하나 없이 Copy곡으로 일관하던

    처지에 고향으로 돌아온 훌륭한 작곡가이자 뛰어난 기타리스트인 노엘을 맞아 들여 오아시스(Oasi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2) Debut 자신들의 음악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레코드 회사에 demo tape을 보내 앨범 계약을 하기 위해 무단한 노력을 하는 여타 밴드와는 달리, 라이브 무대를 통하여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점점 비범함을 인정받고 있었다.

     

    1993년 5월 글래스고우의 'Wah Wah'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오아시스는 우연히 이 곳 클럽에 들렀던 Creation사의

    사장 앨런 맥기(Alan McGee)는 이들의 음악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매니져도 대변인도 돈도 없던 오아시스에게

     Creation의 앨범 계약 요청은 즉시 받아들여져 무명의 야인 생활을 끝내고 비로소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3) Go on ... 94년 11월 이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첫 싱글인 'Supersonic'을 발매하였고, 영국 차트 30위권에 드는

     썩 괜찮은 시간을 맞이 한다.

      이어 내놓은 싱글 'Shakermaker'와 'Live Forever'가 챠트 19위권을 맴돌기 시작하며, 조심스럽게 감돌던 오아시스의 인기 몰이는 정식 데뷔앨범 Definitely Maybe의 발표와 함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신인으는 어림도 없을 줄 알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영국 팝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데뷔 앨범임과 동시에 발매 첫주에 앨범 차트 1위로 랭크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성질 급한 평론가는 30여년 만에 비틀즈의 영광이 재현될 것이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이어 'Cigarettes & Alcohol'이 챠트에 오를 무렵 오아시스의 미국시장 감행이 이루지기 시작했다. 


      Grunge의 본산지인 시애틀을 시작으로 뉴욕, 시카고, LA 등을 돌며 쉴 새 없는 공연이 이어졌고 있다른 싱글의

     히트로 그야말로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는가 싶었으나 밴드 내에는 남모를 진통이 꼬리를 물고 생겨나고 있었다.


    밴드 멤버들간의 끊임없는 불화, 그 중 특히 음악적 열쇠를 쥐고 있는 노엘과 동생 리엄의 극도로 날카로와진 신경전

    때문에 해산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소근거려지고, 리엄이 슈퍼에서 면도날을 훔치다 잡히는 불미스러운

     사건, 거기에 선후배 뮤지션들을 욕하는 기시돋힌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Gallagher 형제간의 대립은 너무 심각하여 예를 들면 Suede의 기타리스트가 좋으니 나쁘니와 같이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로 말미암아 점심식사 중 밥상을 뒤엎는 사태까지 이르렀으며, 노엘이 공식석상에서 '우리는 보컬이 필요없는 연주 음악을 할 것이다.' 라고 발언하여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새 앨범을 위한 계획 작업 중 많이 누그러졌고, 이 즈음에 싱글 'Whatever'를 발표한다.

    오로지 싱글에서만 접할 수 있는 이 곡은 London Session Ochestra가 스트링을 맡아 주었으며, 노엘의 편곡의

     묘미가 빛나는 역작이다.


    그 이후 오아시스는 싱글 'Some Might Say'로 처음 싱글 챠트 정상을 차지한다.

    창단 멤버였던 드러머 토니를 탈퇴시킨 후 세션 드러머로 활동해 온 앨런 화이트(Alan White)를 새로 영입하여,

     첫 싱글 'Roll With It'을, 95년 8월에 그리고 2집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발표하며 항간에

    떠도는 모든 루머를 일축해 버렸다.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챠트 5위권 진입은 물론 미국에서만도 4백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성공을 거무며

    명실공히 오아시스를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시키며 밴드 멤버들간의 불화도 얼마간 잠잠한 듯했다. 하지만 또다시

    불거진 Gallagher형제의 불화는 밴드의 구체적인 해산설로 이어지며 오아시스의 3집 앨범 발매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는 예측이 조심스레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 오아시스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새앨범 소식이었다.

    피튀기는 냉전기를 가진 갤러거 형제는 다시 규합했고 그들의 3집 앨범인 'Be Here Now' 를 제작했다.

    싱글 'Do You Know What I Mean?' 'Stand By Me' 'All Aroud The World'를 발매하였으며, 그 이후 B-Side 모음집인 'The Masterplan'을 발표했고 2000년 2월경에 드디어 그들의 4번째 앨범이 예정되어 있다.


      ☞ 위의 글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Be Here Now'의 앨범 속지와 기타 기사에서 발췌

    , 편집하였습니다 (4) Long Live Rock'n'Roll, Oasis 오아시스는 철두철미하다.


    본업인 음악보다 항상 기행, 독설, 해프닝 등으로 점철되지만 사실 음악에 있어서는 철옹성이며 어른스럽고 신중하며, 무엇보다 보수적이다. 오아시스식 보수는 우선 촌스럽게도 로큰롤을 고수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싱어송

    (singer song) 즉 '노래'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갤러거 형제의 최고 이상은 역시 '좋은 노래'이다. 그러나 그 진부한 노래 제일 주의'가 팝적으로 만만히 도태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로큰롤을 수용하고 있가 때문이다.

      로큰롤 동력과 갤러거 형제의 극히 인간적인 음성 텍스춰가 빚어내는 진부함은 사치스러운 브릿팝(Britpop) 씬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는 메리트를 유지한다.


    오아시스는 끈질기게 로큰롤적이다. 그러한 집요한 로큰롤 전략 덕분에 야릇한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오아시스를 브릿팝에서 제명시키는 관점이 심심치 않게 노출되고 있다. 그것은 브릿팝의 '팝'이라는 단어에 억압되어 팝의 고정관념 으로 브릿팝을 재단하려는 무모함에서 비롯된 억측이다. 브릿팝을 팝으로 간주하는 오류속에서 비교적 록 같은 오아시스 (+Radiohead, Manic Street Preachers...)는 무난히 브릿팝과 희석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브릿팝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영국의 팝이 아니라 록에 융통성이 가미된 영국 록의 '90 버전, 엄연히 '록으로

    인정한다면 굳이 오아시스가 순수한 록이라고 해서 굳이 브릿팝에서 제명시킬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오아시스는 그 구태의연한 로큰롤 옹고집 덕택에 비로소 'all around the world'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로큰롤은 세계적으로 정서의 번안이 필요없는 글로벌한 아이템이다.












    반면, 브릿팝의 문제는 특히 브릿팝 표준인 블러(Blur)의 문제는 로큰롤이 배제되어 있어 그 록의 곁핍으로 팝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애초부터 농후한 것이며 각 대륙으로 접선함에 있어 정서적으로 통역이 필요한. 보다 간접적이며,

    때로는 흡수되지 않고 충돌하는 것이다.


    어쨌건 브릿팝의 대표 '블러'와 로큰롤의 대표 '오아시스'는 'Britpop is Dead'(Blur),

    'Good song.Only Rock'n'Roll'(Oasis)을 선언하며 브릿팝에서 탈퇴하려 해도 결국 브릿팝의 총대 자격을 상실하기는 어렵다.


    비틀즈(Beatles) 관련설에 관하여는, 오아시스는 가장 비틀즈적인 선율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의외로 사실 비틀즈와 가장 다른 사운드 운영체계를 채택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비틀즈는 조합형의 음악이다.


      보컬이나 기타가 주도하는 원탑, 투탑 전술의 음악이 아니고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등의 각 유니트가 평준화 되어 '전체'가 신진대사 되는 토탈 시스템이다. 이에 반해 오아시스는 사실 각 채널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고 노래가

    독재를 유지하고 있으며 보컬을 구동축으로 그 외의 악기는 정말 '그 외'가 되어 전체의 멜로디 라인을 에스코트하며

     반주의 개념으로 보좌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사실 오아시스의 노래 '이외의' 채널은 정체성이 총명하지 않고 잔뜩 뭉뚱그려져 있다.

    각 채널이 노래 못지 않은 개성과 기능을 발휘하는 비틀즈, 블러의 토탈 시스템, 조합형하고는 확연히 다르며 개성없는 연주 덕분에 오아시스는 적지 않은 지루함이 수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명백히 노래에만 치중하는 것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결국 Post-Beatles 논쟁은 로큰롤 음감은 오아시스,

     문법은 블러로 사이좋게 양분된다는 것이다.



    퍼온글에서 편집












    Oasis라는 밴드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밴드를 이끌어가는 연탄눈썹 Gallagher 형제간의 피튀기는 싸움소식과 그에

    못지않은 오만방자한 태도와 과도한 Beatles적 성향.... 때문에 Anti-Oasis파들이 꽤 존재하는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구사하는 음악만큼은 1990년대의 모던락씬에서 절대 무시하고 지나갈수 없다.

    영국 Manchester의 Longsight에 있는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Paul Gallager와 Noel Gallagher, 그리고

    막내인 Liam Gallagher... 나중에 Oasis의 주축이 되는 것은 이들 중 Noel Gallagher와 Liam Gallagher이다.

    이둘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부터도 자주 싸웠다고한다.
    그리고 실독증(독서장애)이란 장애를 타고난 둘째 Noel Gallagher는 11살 때, 생일선물로 받은 기타를 만지작 거리며 미래의 Johnny Marr(The Smith의 기타리스트)를 꿈꾸게 되었고 막내 Liam Gallagher 역시 1989년에 관람한 Stone

     Roses공연을 계기로 음악인으로서의 꿈을 꾸게 된다.

    원래 넉넉지 않던 집안사정에 Noel이 13살 때 결별한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그들은 별로 풍족하지않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그들은 커가고 Noel은 Inspiral Carpets라는 밴드에 기타 테크니션으로 고용되어 오랫동안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는 처지였지만 남는 시간에 작곡등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한편 그집 막내 Liam Gallagher는 보컬이 없던 Paul Arthurs, Paul McGuigan과Tony McCarroll을 주축으로한 The

     Rain이라는 밴드에 보컬로 들어가 자신들의 자작곡 하나 없이 카피밴드로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을 기억하는 몇몇 뮤지션들은 그들이 정말 별로였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Noel은 Liam이 자신의 밴드를 봐달라고 하여 밴드의 몇몇개의 Sample을 듣게 되는데, 결과는

     한마디로 끔찍했다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작사, 작곡을 하고 그룹의 모든것을 통솔한다는 명목아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밴드에 합류한다.


    하지만 그들은 Noel에게 그 정도로까지의 가치가 있을까 의심스러웠고 그런 그들에게 Noel은 'Live forever(그가 2년전 British Gas에 근무하고 있는 동안 쓴것)'를 연주하여주었다.

    그리고 Noel에 대한 갖가지 의심들은 일제히 사라졌다.  이렇게 천재적인 작곡실력을 지닌 Noel이 들어옴으로써

     Oasis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푸푸...Noel에 관하여 한마디.....

    역시 자꾸 말하기 지겹지만 Noel이 없는 Oasis는 팥없는 팥빵일수 밖에 없다.


    팀의 독재자이기도 하고, 모든 그들의 노래는 모조리Noel 혼자 쓴다.작곡에다가, 리드 기타역할에 간간이 삼삼한

    보컬까지....팀내의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오만한 말들을 내뱉지만서도 그 말들이 모두 헛소리가 아니라는거다.








     

    후 밴드이름도 Oasis로 개명하고 그들은 1991년 10월 19일에  Manchester Boardwalk에 그들의 첫번째 공연을

    연주한다.
    처음에 그들은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결의아래 연주를 했으며 평범하고
    흐릿한 소리에는 정착하지 않기로 했고 가진건 없었어도 자신들에 대한 자신감 하나만은 빵빵했다.

    그렇게 1991년이 지나고 1992년이 다가왔다.

    Noel은 밴드가 성공하려면 자신만의 노래를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호전될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몇몇 중요한 그룹들의 서포트 밴드로 연주를 하고 있을시기에 음악세계에서, 중요한 많은 공연매니저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밴드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Noel이 아는 한사람은 그에게 어떻게 녹음하며, 어떻게 노래를 연주하는지, 노래의 구조를 어떻게 아는지, 강약법 등과 같은것들을 가르쳐주었다.

    그 해 이내에, 그룹의 운은 바뀌기 시작한다.

    1993년 5월에 Glasgo의 'Wah-Wah'라는 클럽의 무대에 세워달라고 했으나 자꾸 퇴짜를 맞자 "만약 우리를 여기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면 당신 가게를 부숴버리고불질러버릴꺼야..."라고 클럽주인을 협박하여 그들은 강제로 클럽

    무대에 서게된다.

    거기서 그들은, Creation레코드사 사장 Alan Mcgee와 만나게된다.
    그때 Alan Mcgee는 마침 기차시간을 놓쳐 주변을 배회하다가 그 클럽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Alan Mcgee는 그들의 음악에 완전히 반했으며 그가 본것에 대해 믿을수가 없었다.
    Oasis는 그 당시 매니저도, 에이전트도, 돈도 없는 상태였다.

    Creation과의 계약은 받아들여졌고 Noel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밴드로 성장할수 있게끔 뒷받침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성공하게 된다면 초콜렛밤색의 롤스로이스를 받겠다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Oasis는 연주를 계속하였고 Liverpool에서 녹음을 시작한다.
    그 결과에 희열에 넘쳐, Alan McGuee는 미국의 Sony에게 그가 찾아낸 신인에 대해 말하였고 7월에 그들의 데모테잎의 카피본을 Sony에 보냈다. 몇주후에 그들은 Creation에서 노래하기 시작하였고 11월에 그들은 미국의 Sony에서 노래한다.
    Dave Massey는 나중에 "모든 노래가 히트였기 때문에 나는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내 인생에서 알았던것중 최고의 눈썹을 가졌다!!"라고 말했다.
    회사는 ‘Columbia’의 데모를 몇몇 라디오 방송에 보냈다.
    그리고 라디오방송들은 그 곡을 곧바로 플레이 리스트에 올렸다.

    1994년의 공연은 유명한 보도진 중심의 London show에서 시작한다.
    그해 그들은 2월 8일에 암스테르담에서 그들의 유럽의 첫 데뷔를 하게된다.
    10일 이내에, 앨범을 위한 backing track의 95 퍼센트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점점 눈에 띄는 간격이 그룹과 드러머 Tony McCarroll 사이에 있었고 나날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Oasis는 1994년 4월 11일에 데뷔싱글 'Supersonic'을 발매하였고 꽤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Shakermaker''Live Forever'등의 싱글은 Oasis의 인기곡선을 가파르게 상승시켰고 더욱더 늘어나는 팬들은 그들이 여지껏 무엇을 했었던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데뷔앨범 Definitely Maybe를 8월 30일에 발표하였고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 결과를 몰고 왔다.

    그것은 곧장 영국차트 1위에 올랐고 이전의 모든 기록을 깨고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팔려나간 데뷔앨범이 되었다

    평론가들은 그들에 열광했으며 그들은 미국을 돌며 투어를 하면서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러머 Tony McCarroll과의 불화와, 하루가 멀다하고 싸우는 Gallagher형제간의 노골적인대립,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는 뻔뻔스러운 그들의 태도와 독설은 이제 겨우 1집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해산설에 시달리게 하는 원흉이 되었다.

    그들은 데뷔 앨범내에서 5개의 싱글을 만들어내었고 크리스마스에 메가싱글 'Whatever'를 발표하여 팬들과 음악잡지등의 모든표를 휩쓸며 Brit Award의 주역이 되었다.

     1995년 1월 23일에 미국의 투어를 떠나기전  Oasis는 NME시상식에 출석한다. NME에서 그들은 최고의 그룹, 최고의 신인, Live Forever로 최고의 싱글상을 흽쓴다.

    미국투어가 잡히고 나서 Sheffield 경기장에서의 그들 공연의 12,000장의 티켓은 일주일이내에 몽땅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Liam은 드러머 Tony와의 최종적인 국면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날 둘은 심하게 다투고 Tony는 그룹을 떠나게 된다. 


     (거의 쫓겨난것이다....1집에서의 활동비 명목으로 계속 소송을 했는데
    얼마간 합의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후에 미디어는 Tony의 탈퇴에 대해 발표하였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새로운 싱글 Some Might Say를 발표하였고 이 곡은 사상처음으로 Oasis에게 영국차트 1위에 오르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드러머가 없는 상태에서 다음날 Top Of The Pops에 출연하는것에 대해서 Noel은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Noel은 세션 드러머로 활동해오던 Alan white와 접촉하여 Oasis의 드러머가 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Some Might Say의 싱글을 넘겨주면서 다음날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해서 연주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Alan

    white는 밤새도록 연습하여 다음날의 Top Of The Pops에서의 연주를 무사히 끝마치게 되었다라는 일화가 있다. 

    Some Might Say는 300,000장이상이 팔려나갔고 또 다른싱글 'Roll With It'도 400,000장에 육박했으며 'Wonderwall'은 600,000이상으로 팔려나가면서 장장 12주 이상 Top Ten에 머물러 있게된다.

    1995.5.8일에 Rockfield 스튜디오에서 그들은 (What s The Story) Morning Glory라는 그들의 두 번째 앨범 녹음에

    들어간다.


    1995년 8월에 그들의 두 번째 앨범(What s The Story) Morning Glory가 발표되었으며 이는 곧바로 영국앨범차트

     1위로 올랐으며 1987년의 Michael Jackson의 'Bad' 앨범 이래로 가장 빨리 팔려나간 앨범이자 그해의 가장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또한 빌보드 앨범차트 4위에 오르며 미국에서만도 4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고 이것은 단지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프랑스, 스웨덴, 아일랜드, 뉴질랜드등의 거의 모든지역에서 골드에 이르는 성과를 거둔다.


    이제 그들은 명실상부하게 영국의 국민밴드이자 세계적인 밴드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내에서 그 유명한 Oasis-Blur 전쟁이 발발한 것도 이때였다.
    (결국엔 Oasis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자세한 내용은 블러바이오를 읽어보시길..)

    Wonderwall을 발표하여 영국차트3위에 진입하면서 그들은 미국진출에 착수하였고 Wonderwall은 빌보드차트 8위까지 오르게되며 모던 록 차트부분에서는1위를 오랫동안 고수하였다.

     그들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그들로 인하였던 떠들썩했던 한해를 인정받고, Creation 레코드사는  Holland Park의 Halcyon호텔에서 그들을 위해 파티를 연다.

    그들의 앨범이 빌보드차트 4위에 올랐다고 영국뉴스에서 떠들어대면서 시작한 Oasis의 1996년...독일의 4개의 공연을 성황리에 끝내고 그들은 그 해의 영국에서의 첫 번째 공연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다.

     4월에 그들의 공연티켓이 발매되는데 놀랍게도 두시간만에 38,000장이 팔려나가면서 엄청난 반향을 몰고오며 이전의 모든기록을 다시한번 깨버린다

    또한 NMF시상식에서 최고의 밴드, 최고의 앨범, 최고의 싱글. 최고의 라이브밴드등의 4개부분을 석권하고 Brit

    Awards에서는 최고의 밴드, 최고의 뮤직디오 (Wonderwall),최고의 앨범부분의 3개부분을 수상한다.

    이해동안 그들은 미국과, 영국, 유럽을 돌며 공연을 가졌고 11월에 유럽 MTV시상식에서 Wonderwall로 최고의 노래상을 받았고 최고그룹상도 받았으며 Grammy상 후보에도 두군데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4번째 싱글 Don t Look Back In Anger는 세계적으로 메가히트하였다.
    하지만 이런 세계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Noel과 Liam형제는 여름내내 끊이지 않는 싸움판을 벌렸다.


    당연히 그에 따르는 해산설은 분분했지만 팬들을 위하여(?) Oasis는 갈라지지 않았고 얼마뒤 그들은 다시금 결합하여

    3집 앨범의 준비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번 3집에서는 2집에서 많이 완화되었던 락앤롤 파워가 보강되어 2집보다 좀더 하드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1997년 8월 21일에 그들의 3집 "Be Here Now"가 발매되었고 해외에서는
    8월 26일날 발매되었다.

    싱글로 'Do You Know What I Mean?' 'Stand By Me''All Aroud The World'를 내놓았으며 이 역시 예외없이

     히트하였고  이후 B-Side 모음집이지만 정규앨범 못지않은 'The Masterplan'을 발표했다.

    2000년 2월경에 드디어 오랜침묵을 깨고 그들의 4집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가 발매된다 . 
    "If I have seen farther than others, it is because I was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 Isaac Newton. 1676년 2월 그의 친구 Robert Hooke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1999년 중반... Noel Gallagher는 런던 한 Pub에서 최신 앨범 마무리작업을 끝남을 축하하고 있었다.

    새벽 4시정도에 술이 좀 취한 상태에서 그는 동전에 써있는 인용문을 보았고 거기엔 위대한 영국의 물리학자

     Newton의 말이 쓰여져 있었다.


    Noel은 담배껍질에 그것을 아무렇게나 휘갈겨 썼고 다음날 그것을 읽게되었다.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라고 써져있었고 원래의 "shoulders"대신 "shoulder"라고 써져있었고 또한

     "album title"대신 "a bum title"이라고 

    쓰여있었다.. Noel은 그말을 그들의 4번째 앨범의 이름으로 정했다.

    "사람들은 제목이 너무 길데요"라고 Noel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What s The Story)...Morning Glory"때도 그랬어요..."

    Oasis는 역시 과거를 부정함으로서 오는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하다.
    그들의 음악이 현대에 들려지고 있지만 그들은 지난 영국록의 30년간의
    Beatles, Sex Pistols, Stone Roses를 찬양하였고 Oasis는 그들의 동기들보다 자신들이 뛰어나게 되었던 이유를

     거인들의 어깨에 서있었다는 것으로 근거했던것이다.
    (정말 철이 많이든듯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는 현재까지의 그들의 앨범중 가장 사이키델릭한

    녹음이다. 지난 3집까지 집요하게 정통 락앤롤을 구사하던 그들로서는 획기적인 변신이 아닐수 없다.

     여기서 Oasis는 그동안 쭉 작업을 같이 해왔던 프로듀서 Owen Moriss와 결별하고 U2, Madonna, Bjork, Massive

     Attack등을 담당했던 Mark Spike Stent와 같이 작업을 하게된 것이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였다.

    Noel은 처음으로 클럽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과 일을하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다.
    그는 댄스 레코드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오아시스의 앨범에 적용시켰다.

    역시 언제나 기타만으로도 너무너무 충분했던 그들에게 그것은 음악적 과잉이었을수도 있었지만  Oasis는 참을수

     있었다.

    Noel이 처음 사람들에게 "Who Feels Love"를 연주했을 때 듣던 사람들은 “정말로 약을 끊은 것이 확실합니까?'라고

    물어왔다고 Noel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2년전에 이미 약을 끊었다고 한다..)

    Liam에 의해 쓰여진 부드럽고 감동스러운 노래에서 Noel은 그들이 아버지가 됨으로써전의 흉폭했던 관계가 더

    좋아졌다든가(더나빠졌다든가)하는것에 대해서는 부정하였다.

    앨범은 프랑스에서 녹음되었고 Paul (Guigsy) McGuigan, Paul(Bonehead) Arthurs의탈퇴후에 영국에서 다시

    수정하였다.
    (하지만 4집앨범에서의 연주는 전의 멤버들의 연주이다.)
    "음악적으로 이것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라고 Noel은 선언했고 역시 녹음의 변화를 인정했다.

    오래된 멤버가 떠났고 새로운 멤버로 교체되어 새로은 기타리스트로는 전의 Heavy Stereo의 구성원이었던 Gem이

     들어왔고 베이스는 Ride와 Hurricane#1의 멤버였던 Andy Bell이 들어왔다.

    Noel, Liam과 드러머 Alan White와 나란히 새로운 멤버들은 1999년 12월에 Philadelphia에서 공식적인 데뷔를 하였다.
    세계투어는 2000 2월에 일본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Noel은 "처음에 Bonehead 와 Guigs없는 무대를 볼때는 기분이 좀 별났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Gem과 Andy가 은 뮤지션이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는 더 좋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2002년 여름 그들은 5집 앨범 "Heathen Chemistry"를 발표한다.









     

    영국 Manchester의 Longsight에 있는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Paul Gallager와 Noel Gallagher,

    그리고 막내인 Liam Gallagher... 나중에 Oasis의 주축이 되는 것은 이들 중 Noel Gallagher와 Liam Gallagher이다. 이둘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부터도 자주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실독증(독서장애)이란 장애를 타고난 둘째 Noel Gallagher는 11살 때, 생일선물로 받은 기타를 만지작

    거리며 미래의 Johnny Marr(The Smith의 기타리스트)를 꿈꾸게 되었고 막내 Liam Gallagher 역시 1989년에

    관람한 Stone Roses공연을 계기로 음악인으로서의 꿈을 꾸게 된다.


    원래 넉넉지 않던 집안사정에 Noel이 13살 때 결별한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그들은 별로 풍족하지않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그들은 커가고 Noel은 Inspiral Carpets라는 밴드에 기타 테크니션으로 고용되어 오랫동안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는 처지였지만 남는 시간에 작곡등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후에 리암이 있는 밴드에 작곡가, 기타리스트로써 노엘이 합류하고 OASIS가 됩니다.)


    그리고 Oasis는 연주를 계속하였고 Liverpool에서 녹음을 시작한다. 그 결과에 희열에 넘쳐, Alan McGuee는 미국의 Sony에게 그가 찾아낸 신인에 대해 말하였고 7월에 그들의 데모테잎의 카피본을 Sony에 보냈다.

    몇주후에 그들은 Creation에서 노래하기 시작하였고 11월에 그들은 미국의 Sony에서 노래한다. Dave Massey는

     나중에 "모든 노래가 히트였기 때문에 나는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내 인생에서 알았던것중 최고의 눈썹을 가졌다!!"라고 말했다.

    회사는 ‘Columbia’의 데모를 몇몇 라디오 방송에 보냈다.

    그리고 라디오방송들은 그 곡을 곧바로 플레이 리스트에올렸다.


    1994년의 공연은 유명한 보도진 중심의 London show에서 시작한다.

     그해 그들은 2월 8일에 암스테르담에서 그들의 유럽의 첫 데뷔를 하게된다.

    10일 이내에, 앨범을 위한 backing track의 95 퍼센트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점점 눈에 띄는 간격이 그룹과 드러머 Tony McCarroll 사이에 있었고 나날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Oasis는 1994년 4월 11일에 데뷔싱글 'Supersonic'을 발매하였고 꽤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Shakermaker

    ''Live Forever'등의 싱글은 Oasis의 인기곡선을 가파르게 상승시켰고 더욱더 늘어나는 팬들은 그들이 여지껏 무엇을 했었던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데뷔앨범 Definitely Maybe를 8월 30일에 발표하였고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 결과를 몰고 왔다.

    그것은 곧장 영국차트 1위에 올랐고 이전의 모든 기록을 깨고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팔려나간 데뷔앨범이 되었다.














    Oas